며칠 전 발생한 용산참사는 있는 사람들의 과도한 욕심 때문에 상실감, 좌절감을 느끼는 가난한 서민들의 반발과 이에 대한 공권력의 무리한 진압으로 일어났다.
아무리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라 할지라도 지나친 부의 집중과 양극화의 심화는 사회 갈등과 혼란의 심화를 가져왔고 종국에는 그 사회 전체의 파멸을 가져왔다. 이것은 역사의 경험이 증명해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15세기 후반부터 지주제가 확산되면서 뜻있는 사람들과 사관(실록 기록자)의 우려의 소리가 계속 나온다.    

장령(掌令) 유옥(柳沃)이 아뢰기를, 
“백성을 구휼(救恤)하라는 교시가 아침저녁으로 내렸으나 백성의 가난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이 생각해 보니, 무릇 백성의 생활은 토지에 의존하는 것인데, 부호들이 토지를 겸병하므로 궁한 자는 비록 조상이 물려준 토지라도 모두 팔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호한 자는 토지가 천맥(阡陌)을 연하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 땅도 없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짐이 이때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중종실록 중종 13년 2월 21일

사신은 논한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권요(權要)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 수령을 모두 >공(龔) · 황(黃) 2357) 과 같은 사람을 가려 차임한다면, 검(劎)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찌 이토록 심하게 기탄없이 살생을 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 포착하기만 하려 한다면 아마 포착하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 다 포착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명종실록  명종 14년 3월 27일
  주:   임꺽정의 난을 진압하는 사료에 덧붙여 쓴 사관의 말임

양반 부호들의 지주제 확대는 서민들의 경제적 몰락과 불만을 가져왔고 그것은 임꺽정의 난이나 왜란, 호란의 국난을 초래한 배경이 되었다. 조선후기에도 지주제의 강화는 계속되었다.

부수찬 이석하(李錫夏) 상소하기를,
……아, 지금 재상들의 집은 전토를 널리 점령하지 않은 집이 없습니다. 여주 · 양주 의 기름진 땅과 충청도 연해의 큰 제방은 여러 고을을 포함하고 있어 한 번 바라봄에 끝이 없습니다. 곡식이 1천 석에 차지 않으면 스스로 가난한 집이라 하고 1년에 한 전장에서 나오는 곡식을 환자곡으로 주어 그 이자로 토지를 쉽게 살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을 하니, 백성들이 어찌 빈곤하지 않으며 나라의 살림이 어찌 깎여지지 않겠습니까.……
                          정조실록  정조 18년 7월 24일

이에 뜻있는 실학자들이 정전제, 균전제, 한전제, 여전제 등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조선사회는 19세기 농민항쟁을 겪다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910년대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역시 일반인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일제의 토지 약탈 과정만은 아니었다.  토지 소유 제도의 근대화란 미명으로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하고, 농민들의 노력과 항쟁으로 인정받고 있던 농민들의 경작권은 일체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식민지 지주제를 더욱 강화시키며 다수의 농민을 몰락시키는 정책이었다.
일제의 비호아래 지주들은 소작료를 계속 높여갔고 이에 맞서 소작 농민들이 소작권의 안정과 소작료 인하를 주장하며 소작쟁의를 일으켰으나 어김없이 일제 경찰이 개입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뿌리깊은 지주제의 모순은 해방이후 비로소 남북에서 농지개혁, 토지개혁이 추진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필리핀은 한 때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였다. 미국이 성공한 케이스로 추켜세웠고 많은 아시아의 국가들이 부러워했던 필리핀은 고질적인 지주제(양극화)와 사회 부패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다른 나라들이 급성장할 때 오히려 후진국으로 전락하였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1/10도 채 안되는 나라이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확립된 이후 팽배해진 시장 만능주의는 1920년대 말 세계적인 경제공황을 불러왔고,  이에 대처하여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였다. 
뉴딜정책하면 많은 사람들이 테네시강 유역 개발정책 등의 토목공사를 통한 정부의 유효수요 창출만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뉴딜정책의 아주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부유세 신설,  노동자(노동조합), 농민 지원 강화, 사회보장 제도 확충 등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더 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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