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태종(太宗) 15년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영을 부(府)에 두었다 절제사로서 부윤(府尹)을 겸했다. 17년에 영(營)을 울산(蔚山)으로 옮겼고, 세조(世祖) 12년에 진(鎭)을 두었다 열 읍내(邑內)를 관장하였으며, 동래(東萊)는 지금 독진(獨鎭)이 되었다. 선조(宣祖) 25년에 좌도관찰사영(左道觀察使營)을 두었다가 이듬해 성주(星州)로 옮겼다 대구조에 상세하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면(東面) 30리, 서면 30리, 남면 40리, 천북(川北) 동북쪽으로 20리. 강동(江東) 북쪽으로 40리. 강서면 북쪽으로 30리. 북안곡(北安谷) 본래 북안곡의 부곡(部曲)이었는데, 영천(永川) 동남쪽 경계에 넘어 들어가 있다. 서쪽으로 50리. 기계(杞溪) 북쪽으로 60리. 신광(神光) 북쪽으로 70리. 죽장(竹長) 북쪽으로 1백 리. 동해(東海) 동쪽으로 50리. 외방(外方) 동남쪽으로 40리. 현곡(見谷) 서쪽으로 20리. 산내(山內) 서쪽으로 60리. 남로동(南路東) 남쪽으로 40리. 남로서 남쪽으로 50리. 남도(南道)ㆍ금오(金鰲).
○ 성법이(省法伊) 부곡 북쪽으로 50리. 팔조(八助)는 동쪽 45리, 대포(大庖)ㆍ대창(大昌)ㆍ남안곡(南安谷)은 서쪽으로 45리, 근곡(根谷)은 안강(安康) 서남쪽으로 5리, 도계(桃界)ㆍ호명(虎鳴)의 부곡은 안강현의 동남쪽 7리, 호촌(虎村)은 신광현(神光縣)의 동남쪽으로 5리에 있다. 이 이상은 모두 부곡이다.

【영아】
후영(後營) 효종(孝宗) 8년에 세웠다.
○ 후영장 겸 포토사(捕討使) 1인.
○ 경주ㆍ울산ㆍ흥해(興海)ㆍ영일(迎日)ㆍ장기(長鬐)ㆍ언양(彦陽) 등 읍(邑)이 소속되었다.

○ 좌병영(左兵營)
 태종 15년에 영(營)을 부(府)의 동남쪽 20여 리에 있는 토을마리(吐乙磨里)에 설치하였다. 병사(兵使)로써 부윤을 겸하였다가 17년에 영을 울상부로 옮겼다.

【진보】 혁폐
감포진(甘浦鎭)
동남쪽 75리의 바닷가이다. 지금 울상부 동진(東津)의 고현(古縣)땅에 소속되었다. 중종(中宗) 7년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36척이고 우물 네 개가 있다. 수군(水軍) 만호(萬戶)를 두었다. 선조 25년에 동래로 옮겼다.
하서지목책(下西知木柵)
동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우물 한 개와 못[池]이 두 군데가 있다.

【창고】 창(倉)은 넷 읍내에 있다. 신광창(神光倉) ㆍ기계창(杞溪倉) ㆍ죽장창(竹長倉) ㆍ안강창(安康倉) 각각 고현(古縣)에 있다. 의곡창(義谷倉) ㆍ잉보창(仍甫倉) 각각 그 역(驛)에 있다. 동창(東倉)ㆍ 형창(兄倉) ㆍ달창(達倉).

【교량】 광제원교(廣濟院橋) 굴연천(掘淵川)에 있다.

【토산】 수정(水精)ㆍ화반석(花班石)ㆍ닥[楮]ㆍ감[枾].

【묘전】
집경전(集慶殿)
 본조 세종조(世宗朝)에 세웠다. 태조(太祖)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참봉(參奉) 2명을 두었다. 후에 강릉부에 옮겨 봉안하였는데 불타버렸다.
숭덕전(崇德殿)
부(府)의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신라 남해왕(南解王) 3년에 시조묘(始祖廟)로 세웠다가 고려 때 없어졌다. 본조 세종 11년에 신라 시조묘로 세워, 해마다 봄ㆍ 가을에 향(香)을 피우고 제사로써 빌었다. 경종(景宗) 3년에 ‘숭덕전’이라고 사액하였다. 영종(英宗) 28년에 비석을 세우고 대제학(大提學) 조관빈(趙觀彬)이 비문을 지었다. 신라 시조 성(姓)은 박씨(朴氏)이며 한(漢) 나라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나라를 세웠다.
○ 참봉이 1명인데, 박씨 가운데서 뽑았었다.

【사원】
서악서원(西岳書院)
명종(明宗) 신유년에 세웠으며, 인조(仁祖) 계해년에 사액하였다. 설총(薛聰) 문묘조(文廟條)에 보라. 김유신(金庾信) 김해(金海) 사람인데, 벼슬은 태대서발한 평양군 개국공 추봉 흥무왕(太大舒發翰平壤郡開國公追封興武王)이다. 최치원(崔致遠) 문묘조에 보라.
옥산서원(玉山書院)
선조 계유년에 세웠으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이언적(李彦迪) 문묘조에 보라.
숭렬사(崇烈祠)
숙종 경진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최진립(崔震立) 자(字)는 사건(士建)이요, 호(號)는 잠와(潛窩)이며 경주인이다. 인조 병자년에 공주 영장(公州營長)으로써 전사하였으며, 벼슬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이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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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영】
견수모동대(犬首侔東岱)
이규보(李奎報)의 삼백운(三百韻) 시에, “견수산(犬首山)은 동대(東垈)와 같고, 문천(蚊川)은 좌이(左伊)를 모방하였다.” 하였다.

계림진골고무다(鷄林眞骨固無多)
고려 김군수(金君綏)의 시에,
                    “나는 무열왕의 후손인 문렬(文烈)의 가문으로
                     계림의 진골(眞骨)은 본시 많지 않네.
                     옛 고장은 아직도 하늘 남쪽 한 모퉁이에 있는데,
                     이제 다행히 사신으로 와서 노니네.” 하였다.


사백년전장상가(四百年前將相家)
고려 장일(張鎰)의 시에,
                    “4백 년 동안 전 장상의 집,
                     다투어 누대(樓臺)를 지어 몇 번이나 웅장함을 자랑하였던고?
                     지금은 그 화려하던 것 누구에게 물으리. 
                     들 살구 산 복숭아가 꽃이슬에 우네.” 하였다.


최설출현재(崔薛出賢材)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계림에 옛적 나라를 일으켰을 때 최씨와 설씨에 어진 인재 나왔네.
                      예악(禮樂)은 중국을 배워 성대하게 문채가 났네.
                      그 임금 고려에 국토를 바친 뒤로는, 분사(分司)로 막부(幕府) 열었네.
                      백성들은 다 어진 이의 후손이라, 큰 갓에 위의(威儀)가 의젓하구나.” 하였다.


고운사업속수가(孤雲事業屬誰家)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고운의 사업은 누구 집에 붙였는고?
                        영재(英材)를 손꼽아 보니 그다지 많지 않네.
                        익재(益齋)와 졸옹(拙翁)도 이미 다 가셨으니,
                        산천은 응당 다시 정화(精華)를 쌓고 있으리.하였다.


의관일천년(衣冠一千年)
정추(鄭樞)의 시에,
                       “궁성(宮省)이 50대에 걸쳐 있었고 의관(衣冠)은 1천 년이었네.
                        이제 영웅은 물이 바다로 흐르듯 문물(文物)은 풀만 하늘에 연했네.” 하였다.


연성탑묘조(連城塔廟稠)
이원굉(李元紘)의 시에,
                        “계림은 가장 큰 웅번(雄藩)으로 형승(形勝)이 남방에 으뜸일세.
                         땅에 가득히 집들이 번성하고, 성에 연달아 절들이 빽빽하네.” 하였다.


천년고국다유적(千年故國多遺跡)
김구용(金九容)이 권부윤(權府尹)을 전송하는 시에,
                       “계림의 나무빛이 바라보는 가운데 푸르렀는데, 
                        한 점 문성(文星)이 익성(翼星)으로 내렸네.
                        깃발의 그림자는 비꼈는데 봄날 따스하고 
                        노래 소리 은은한데 상서로운 구름 이네. 
                        천년 고국에 유적(遺跡)이 많고,
                        10년 전 놀던 벗 이별의 정이 슬프네. 
                        멀리 상상컨대, 의풍루(倚風樓) 위 달밤에,
                        한가로이 부는 옥피리에 맑은 여운(餘韻) 있으리.” 하였다.


개방오봉년(開邦五鳳年)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그 옛날 혁거세(赫居世)는 한 나라 오봉(五鳳) 연간에 나라 창설했네.
                         천년의 긴 세월을 서로 전하다가, 치우쳐 있는 한 모퉁이 겨우 보전했네.
                         계림의 국토를 문득 바치고 송악(松嶽)의 하늘에 와서 조회했네.
                         면면히 이어오던 삼성(三姓)의 종사(宗祀)가 영원히 끊어지니 정말 가엾어라.” 하였다.


처처유허탑묘다(處處遺墟塔廟多)
김조(金銚)의 시에,
                         “고개 숙인 기장과 벼가 축축 늘어진 모두 농가(農家)인데,
                          유적지마다 절들이 많네.
                          오래된 나라 천년에 조시(朝市)가 변하였건만,
                          산 꽃은 여전히 봄을 차지했네.” 하였다.


동도성곽변촌가(東都城郭變村家)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동도(東都)의 성곽(城郭)이 인가로 변했는데,
                          옥피리 한가로이 부노라니 봄 생각이 많구나.
                          옹기종기 오릉(五陵)에 거친 풀만 우거졌으니, 
                          천년의 지나간 일 모두가 아침 꽃이네.” 하였다.


기처제릉금완출(幾處諸陵金盌出)
성간(成侃)의 시에,
                         “민가의 절반이 절이로구나.
                          한 조각 석양에 옛뜻이 많다.
                          몇 곳의 여러 능에서 금그릇 나왔는고? 
                          들꽃과 우는 새는 그대로 봄이로구나.” 하였다.


유여초인관물화(留與樵人管物華)
성간의 시에,
                         “당일에는 성중에 몇 집이었던고?
                          연못과 누대 곳곳에 석양이 짙구나.
                          지금도 초목은 옛날 같은데,
                          나무꾼에 맡겨 경치를 관리하네.” 하였다.


오릉추초석양다(五陵秋草夕陽多)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신라가 남긴 터에 백성들 집이로다.
                           오릉(五陵)의 가을 풀에 석양이 짙구나.
                           아득한 지난 일 물을 곳 없어라.
                           울타리 아래 국화가 이슬에 젖었네.” 하였다.


적막천년왕사사(寂寞千年王謝事)

정효상의 시에,
                          “전생(前生)의 이 몸은 어느 곳이 내 집이었던고.
                           홀로 서 있노라니 아득하게 감회가 많구나.
                           천년 동안 왕씨(王氏)ㆍ사씨(謝氏) 일이 적막한데,
                           한가로이 옥피리 부노라니 여전히 호화롭네.” 하였다.


요학귀래구롱다(遼鶴歸來丘壟多)

노문(盧昐)의 시에,
                          “옛날의 봄 제비 누구 집에 들어가나? 
                           요동의 학이 돌아오매 무덤만 많구나.
                           다만 지금 사람들 일을 알아 
                           옥피리 한가로이 불어 운치를 희롱하네.” 하였다.


대올첨성석조홍(臺兀瞻星夕照紅)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계림의 누런 잎에 가을바람 일어나던 그때,
                            옥피리 소리 그치자 왕운(王運)이 끝났네. 
                            50대 전하던 성곽은 남았건만,
                            1천 년이 지난 뒤 조시(朝市)는 비었구나. 
                            포석정 허물어진 곳에 가을풀 우거지고,
                            첨성대 우뚝한데 석양이 붉네.
                            묵은 자취 완연하나 사람은 모두 갔는데, 
                            난간을 의지해 말없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내노라.” 하였다.


일대유민현자후(一代遺民賢者後)
권진(權軫)의 시에,
                          “한 시대의 유민(遺民)들 어진 이의 후손이요,
                           천년 묵은 성첩(城堞)은 제왕(帝王)의 궁전 터일세.” 하였다.


전당십만기증하(錢塘十萬氣蒸霞)
김담(金淡)의 시에,
                        “상마(桑麻)에 봄은 짙고 땅에 가득 민가인데,
                         전당의 십만 집들은 기운이 노을 지네. 
                         6년 동안 하는 일 없이 앉아 휘파람 부는 것 부끄러움 없으랴?
                         건 위의 푸른 하늘이 다만 얇은 비단 한 겹 차이나네.” 하였다.


첨성대상성초락(瞻星臺上星初落)
배환(裵桓)의 시에,
                          “첨성대 위에는 별이 처음 떨어지고,
                           반월성(半月城) 끝에는 달이 이미 기울었네.” 하였다.


성시인비초색한(城是人非草色閑)
이천년(李天年)의 시에,
                          “구름은 가고 새는 아득하고 여울 소리 오래 되니
                           성곽은 그대로나 백성은 아닌데, 풀빛만 한가롭네.” 하였다.


격계수죽오(隔溪脩竹塢)
박문우(朴文祐)의 자인현(慈仁縣) 시에,
                           “잎이 떨어지니 산 모습이 야위었고, 햇살이 비껴드니 난간이 밝네.
                            시내 건너 길다란 대숲둑에 개 짖는 소리 나니 인가(人家) 있나 보다.” 하였다.

십이영(十二詠)
계림령이(鷄林靈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금계(金鷄)는 울고 나무는 푸르더니 
             9백 년 이래 잎이 모두 누렇네.
             박씨(朴氏)가 나라 열어 석씨(昔氏)에게 전하더니, 
             김씨 왕이 국토 바치니, 전왕(錢王) 같았네.
             삼성(三姓)이 다 쓰러진 일 마음에 슬프구나.
             눈앞의 여러 왕릉 이미 황폐해졌네.
             천고 영웅의 끝없는 한이
             엷은 연기 쇠잔한 풀에 다시 석양일세.” 하였다.
○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지나간 일 일찍이 늙은이에게 들었더니 웃으며 붓을 들고 술을 마시네. 
              닭이 울던 나무 아래 새 임금 나타났고, 까치가 울던 강가에 옛 임금 바뀌었네.
              백성들이 점점 많아지자 개 짖는 소리 서로 들렸는데 산천은 겨우 낭황(狼荒)을 기록하네.
              한번 송악의 솔이 푸르른 뒤부터 머리 돌리니 전조(前朝)가 또 석양이네.” 하였다.


오산기승(鼇山奇勝)
서거정의 시에,
              “동해 가의 금오산 조망이 좋건만, 풍류와 문물이 전날과는 다르네.
               깨어진 비석에 간혹 김생(金生)의 글씨 보이고, 옛절엔 일찍이 최치원의 시가 남아 있네.
               크고 넓던 저택들 터에 냉이만 우거졌고, 이름 난 동산들 주인 없어 끊어진 다리가 위태롭구나.
               봄 시름이 바다보다도 깊은데, 철적(鐵笛)은 그 누가 흥겹게 불고 있나?”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푸른 산과 바다가 서로 어울리니, 누가 금오(金鼇)를 보내어 한 시대를 상서롭게 하였던고?
              교목(喬木)은 연기를 띄고 옛 나라에 남았는데, 문인들은 망국을 탄식하는 모든 새 시를 짓세.
              부용(芙蓉)으로 쪼개 내었으니 종래에 명승인데, 원숭이들 기어올라 부르짖으니 바라보는 곳 위태롭네.
              산기슭에는 밤이나 낮이나 푸른 노을 덮였는데, 저녁 바람이 귀밑털에 부네.” 하였다.


포정감회(鮑亭感懷)
서거정의 시에,
         “포석정 앞에 말 세울 때 생각에 잠겨 옛일을 그리워하네.
          유상곡수(流觴曲水)하던 터는 여전히 남았건만, 정신없이 춤 추고 노래 부르던 일 이미 잘못되었네.
          주색에 빠지고서 망하지 않은 나라 없네. 강개(慷慨)한 마음 어찌 견딜고?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오릉(五陵)의 길 지나며 시를 읊노라니, 금성(金城)과 석보(石堡)에 모두 석양이네.”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포석정 가에 해가 지는데, 들 해당화 주인 없이 절로 서로 의지했네.
           당년에 삼풍계(三風戒)를 살피지 않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만사가 틀어진 것 슬프구나.
           꽃이 물에 떨어지는 것 어쩔 수 없었으며, 하인의 푸른 옷 갈아 입고 술잔 치는 것 어찌 차마 하였나.
           이곳의 무궁한 한(恨) 곰곰이 생각하니, 우는 새 지는 석양을 원망하는 데 부치노라.” 하였다.


문천빙망(蚊川聘望)
서거정의 시에,
         “가다가 문천을 건너 딴 마을 지나가노라니, 옛 도읍 그리운 생각 이길 수 없구나.
          꾀꼬리 깊은 나무에서 우니 황금 갑옷 생각나고, 개구리 차가운 못에서 우니 옥문지(玉門池) 그립네.
          흰 젖이 솟았다는 말 황당한데 불교를 숭상했고, 황창 동자(黃昌童子)는 강개히 임금 원수 갚았다네.
          물이 흘러도 전조(前朝) 한을 씻지 못하니, 모름지기 북해의 술항아리시원히 씻어야겠네.”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게으른 종과 파리한 말로 외로운 마을에 다달으니, 들풀과 숲 속의 꽃들은 제각기 번성하네.
적막하여 지난 일 물어볼 사람 없으니, 황량한 어느 곳이 궁궐이던고?
금오산에 달이 밝으니 새로운 한을 보태고, 문천에 비가 내리니 옛 원통함을 씻는구나.
눈에 가득한 강산 고금(古今)의 뜻, 말세 풍속을 누가 다시 태고(太古)로 돌릴꼬?” 하였다.


반월고성(半月古城)
서거정의 시에,
“반월성 머리에 날이 저물어 가는데, 먼 객의 생각이 더욱 처량하다.
푸른 빛 떠오르는 양산(楊山) 기슭에는 구름과 연기 흐릿하며,
누런 잎 떨어지는 시림(始林)에는 세월이 아득하다.
명활촌(明活村) 남쪽에는 구름이 아득하고,
흥륜사(興輪寺) 북쪽에는 풀이 우거졌다.
평생 동안 불우하니 어디에 쓰랴?
술동이 앞에서 곤드레 만드레 취하기나 할까.”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반월성 동쪽 일본(日本) 서쪽에, 광한전(廣寒殿) 바람과 이슬 더욱 차가우리.
예처(羿妻)의 영약(靈藥)은 지금 어디 있을꼬?
당명황(唐明皇)의 은교(銀橋), 자취도 아득하다.
빈 동산의 그윽한 새는 제멋대로 지저귀고,
옛 언덕의 꽃다운 풀은 한껏 우거졌네.
슬프다, 그때 피리 불고 노래하던 땅이
지금은 농가(農家) 벽 위의 흙이 되었구나.” 하였다.


첨성노대(瞻星老臺)
서거정의 시에,
“옛 대 덩그레 첨성이라는 유적이 의연히 반월성 가까이 있네.
땅도 야위고 하늘도 거칠어져 세월이 이미 오래인데,
바람에 꺾이고 비에 깎여서 형세가 기울어졌네.
외로운 산에 지는 해 금선(金仙)의 부처 그림자요,
옛 성에는 가을을 슬퍼하는 옥피리 소리로다.
삼성(三姓)의 천년도 일찍이 한 순간이런가.
올라가 바라보노라니 더욱 마음 슬프네.”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태사(太史)가 천문(天文)을 보아 뭇별을 살피던 곳,
높은 대 백 척(百尺)이나 되는 대 층성(層城)보다 높이 솟았네.
하늘 한 번 바라보니 재앙ㆍ상서 나타나,
마침내 황도(黃道)에 일월(日月) 기울어진 것이 슬프구나.
여전히 금오산 있어 아침마다 그림자 보내는데,
다시는 밤에 소리 전하던 옥루(玉漏)는 없어졌구나.
부디 올라가서 천문을 보지 말라.
옛 나라가 마음을 슬프게 하네.” 하였다.


분황폐사(芬皇廢寺)
서거정의 시에,
“분황사(芬皇寺)가 황룡사(黃龍寺)와 마주 있으니 천년 옛터에 풀만 저대로 새롭구나.
흰 탑은 우뚝하여 손을 부르는 듯한데, 푸른 산은 말이 없어 사람을 시름하게 하네.
전삼(前三)의 말 아는 중 없는데, 속절없이 장륙상(丈六像)만 남았네.
비로소 민가의 반은 절이던 것 알겠구나. 법흥왕(法興王) 어느 대(代)가 요진(姚秦)과 같았던고?”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옛절에 놀러 오니 중이 예스럽지 않고,
신라 천년의 지난 일이 도리어 새롭구나.
궁전터는 남았는데 농부들이 차지했고,
산하는 주인 없이 진인(眞人)에게 귀속되었네.
외로운 탑은 이미 앞ㆍ뒷면이 허물어졌는데,
늙은 소나무는 여전히 반쪽이 남았구나.
1천 함의 불경은 법사(法師)들만 괴롭혔으니,
백 가지 계책이 어찌 한 요진(姚秦)을 보호하랴?” 하였다.


영묘구찰(靈妙舊刹)
서거정의 시에,
“옛 절이 높다랗게 하늘에 닿았는데,
천년의 지나간 일 너무 처량하다.
돌 감실(龕室)은 퇴락하여 그윽한 길에 묻혔는데,
구리쇠 방울 뎅그랑 하고 석양에 운다.
옛 노인들은 지금까지도 여왕을 이야기하고,
옛 종은 여전히 당 나라 황실 기억하네.
자그마한 비석 어루만지며 잠깐 섰노라니,
벗겨지고 이끼 끼어 글자가 반은 거칠어졌네.”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뜰에 가득한 소나무ㆍ전나무가 새벽에 푸른데,
단풍잎은 사람을 맞이하여 서늘함을 보내주네.
당대의 예쁜 꽃은 진정 복지(福地)러니,
백년 동안 가을 풀은 석양이네.
귀신이 함께 보호하여 높은 전각(殿閣) 남았고,
용상(龍象)이 다투어 나아가 부처님을 받드네.
남아 있는 감실로 여왕을 자랑하지 말라,
옛 도읍의 종묘ㆍ사직에 이미 잡초가 우거졌다.” 하였다.


오릉비조(五陵悲弔)
서거정의 시에,
“서라벌 천년에 왕기(王氣)가 사라지니,
오릉(五陵) 깊은 곳에서 전조(前朝)를 조상한다.
말이 울고 용이 낳았다는 일찍이 황당하고 괴이한 작포(鵲浦)의 계림(鷄林)이 모두 적막하네.
옥대(玉帶)라는 보물은 금궤와 함께 없어졌고,
동타(銅駝)의 그림자는 돌양[石羊]과 함께 흔들리네.
다시는 치병(齒餠)으로 왕위를 전할 수 없고,
해마다 봄 나무에 백로(伯勞)만 우는구나.”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날 저무니 길가던 사람 혼(魂)이 녹아나는데,
슬픈 바람 급히 일어나니 아침 서리 차구나.
왕후(王侯)가 종자 있어 묘(墓)가 많건만,
혼백이 갈 곳 없어 허공으로 사라졌네.
누워 있는 돌기린은 속절없이 비참하구나.
내 마음 달아 놓은 깃발처럼 흔들리네.
슬프다, 삼성(三姓)이 모두 함께 진토(塵土)되었는데,
홍애(洪厓)의 어깨 치고 이로(二勞)를 지났으면.” 하였다.


남정청상(南亭淸賞)
서거정의 시에,
 “성곽과 백성들이 맞는가 아닌가. 난간에 기대어 호탕하게 휘파람 불며 돌아가기 잊었네.
알영전(閼英殿) 속에는 용(龍)이 응당 떠났으리. 탈해(脫解)가 나온 바닷가에는 까치도 안 보이네.
나정(蘿井)의 나무 그늘은 예전대로 어두컴컴하고, 죽장릉(竹長陵)의 죽순은 지금도 통통하구나.
슬프다, 당시 번화하던 땅에, 천지가 무정하여 몇 번이나 석양이런고.”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옛 나라의 번화한 일 이미 다 글렀구나. 다만 시인(詩人)들이 나귀 타고 지나가네.
세월 오래되니 동해(東海)도 도리어 얕아진 듯, 남정(南亭)에 바람 부드러워 오히려 기댈 만하구나.
양지바른 언덕에 풀이 우거지니 누런 송아지 건장하고, 꽃이 떠 있는 봄물에는 백어(白魚)가 통통하네.
산천이 이러하니 모름지기 즐길지어다. 어찌 이 정자에 올라서 지는 해를 한탄하랴?” 하였다.


문옥적성(聞玉笛聲)
서거정의 시에,
“고국(故國)의 흥망을 생각하노라니 웃음 새롭구나. 그때의 세 가지 보물이 이제는 다 티끌 되었네.
금수레 타고 스스로 항복한 임금 누구던가? 옥피리 그대로 전하니 또 몇 해의 봄을 지났는고.
 옛 보물 아까우니 보존할 뿐이요, 풍류(風流)는 반드시 옛 사람 따를 것 없네.
무너진 성ㆍ지는 해에 붙지 말아라.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수건을 적시게 하네.”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금오산에 달이 밝아 천기(天氣)가 새로운데,
옥피리 한 곡조에 들보의 티끌이 움직이네.
기름덩이 자른 듯한 윤택한 결은 멀리 곤강(崑崗 옥의 산지)을 떠난던 날이 상상되고,
음률을 고르니 때로 절류춘곡(折柳春曲) 들린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사라지니 귀모(鬼母)가 놀라고,
창해(滄海)에 구슬이 튀니 교인(鮫人)이 운다.
신라 왕도(王都)에 옛 물건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 물건 남겨 두어 빈왕(豳王)으로 하여금 건(巾)을 비스듬히 쓰고 듣게 하라.” 하였다.


과유신묘(過庾信墓)
서거정의 시에,
“유신의 무덤 앞에 석수(石獸)가 높직하니, 천년의 칼 기운이 아직도 기이하다.
윤건(綸巾)과 백우선(白羽扇)의 차림은 예전의 제갈량이 생각나고,
붉은 여지와 누런 파초후인(後人)의 생각 일으킨다.
시를 지어 장렬(壯烈)함을 노래하는 객은 있으나, 무덤 뚫고 요리(要離)에게 가까이 갈 사람없구나.
천관사(天官寺) 오래되니 지금 어디런고. 만고에 아름다운 여인, 이름이 전하네.” 하였다.
○ 어세겸의 시에,
“장군은 나라와 안위(安危)를 함께 하였으니, 일백 번 전장에서 매양 기이한 계책 냈네.
일어나 강한 인국(隣國) 멸하기를 엎드려 물건 줍는 듯이 하여, 길이 장사(壯士)로 하여금 추모하게 하네.
별이 머리 위에 이르게 한 것은 충렬(忠烈)로 인함이요, 칼이 허리에서 튀어오른 것은 난리(亂離) 때문이다.
석자(三尺)의 황량한 무덤에 술 한 잔 드리노니, 구원(九原)에서 이와 같이 반드시 서로 따르리라.하였다.

『신증』
칠영(七詠) 김종직(金宗直)의 시.
회소곡(會蘇曲)
“회소곡 회소곡 서풍이 넓은 뜰에 부니, 밝은 달이 화려한 집에 가득하네.
왕후가 윗자리에 앉아 물레를 돌리니, 육부(六部)의 여자들 대 떨기처럼 많네.
너의 광주리는 이미 찼는데, 내 광주리는 비었구나. 술 빚어 놓고 야유(揶揄)하고 웃으며 서로 농담한다.
한 지어미가 탄식하매 일천 집이 권장되니, 앉아서 사방으로 하여금 길쌈을 부지런히 하게 하네.
길쌈놀이가 비록 규중(閨中)의 예의는 잃었으나, 그래도 발하수(跋河水)에서 다투며 놀이하는 것 보다는 났네.” 하였다.


우식곡(憂息曲)
상체꽃 바람 따라 부상(扶桑)에 떨어지니,
부상 만리에 고래 물결 사납구나.
비록 서신이 있은들 누가 가져올 수 있으랴?
상체꽃 바람 따라 계림에 돌아오니,
계림의 봄빛이 쌍궐(雙闕)에 둘렀네.
우애의 즐거운 정 이렇게도 깊구나.” 하였다.


치술령(鵄述嶺)
“치술령 꼭대기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고래 바다 끝이 없네.
낭군이 가실 때에 다만 손만 흔들더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끊어졌네.
길이 이별함이여, 죽은들 산들 어찌 서로 만날 때 있으랴?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다가 문득 무창(武昌)의 돌로 되니,
열녀의 기운이 천추에 푸른 하늘을 찌르는구나.” 하였다.

 달도가(怛忉歌)
“놀라고 놀라고, 슬프고 슬프다. 임금이 하마터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네. 유소장막(流蘇帳幕) 속에 현학금(玄鶴琴) 거꾸러지니, 어여쁜 왕비 이에 해로(偕老)하기 어렵구나. 슬프고 놀랍도다. 슬프고 놀랍도다. 신물(神物)이 알리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꼬? 신물이 알림이여. 나라 운수가 길도다.” 하였다.

양산가(陽山歌)
적국(敵國)이 큰 돼지가 되어 우리나라의 변경을 거듭 먹어 들어오니, 용맹스런 화랑도들 보국(報國)하느라 마음에 겨를 없었네. 창을 메고 처자와 하직하고, 샘물로 입 가시고 말린 밥을 씹었네. 적병이 밤에 성책(城柵)을 무찌르니, 씩씩한 혼백(魂魄)이 칼날 앞에 날아 흩어졌다네. 머리를 돌려 양산(陽山)의 구름을 바라보니, 무지개 빛 높이 뻗쳤구나. 슬프다. 네 명의 장부는 마침내 북방의 강한 사람이었네. 천추(千秋)에 귀웅(鬼雄)이 되어 서로 더불어 초장(椒漿)을 음미하리.” 하였다.

대악(碓樂)
“동쪽 집에서는 기장과 벼를 방아 찧고, 서쪽 집에서는 겨울 옷을 다듬이질하네. 동쪽 집 서쪽 집의 방아 소리ㆍ다듬이 소리들은 설 지낼 거리 풍부한데, 우리 집 움 속에는 곡식도 없고, 우리 집 상자에는 한 자의 명주도 없구나. 해져서 너덜너덜 늘어진 옷과 비름나물 국사발로도 영계기(榮啓期)의 즐거움 배 부르고 따뜻하였네. 조강지처(糟糠之妻)여 조강지처여, 부질없이 근심하지 말라. 부귀는 하늘에 달렸으니, 구한다고 될 것인가? 팔 베고 잠을 자도 지극한 맛 있는 것이니, 옛날 양홍(梁鴻)과 맹광(孟光)은 진정 좋은 배필이었네.하였다.

황창랑(黃昌郞)
“이러한 사람이여, 어려서 나라를 떠났도다. 키가 석 자도 안 되는 어린 사람이 어찌 그리도 씩씩하고 날랜고? 평생에 왕기(汪錡)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나라 위해 치욕 씻었으니 마음에 후회 없네. 칼날을 목에 겨누어도 다리도 떨지 않고, 칼날이 심장을 가리켜도 눈도 깜박이지 않았네. 공을 이루고는 태연히 춤을 그치고 가 버리니,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北海)를 뛰어 건너는 듯.” 하였다.

잡영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외로운 신하 한 번 죽어 임금의 은혜 보답하니,
만리 부상(扶桑)에 한 나라의 절(節) 높았네.
치술봉 꼭대기의 세 길 되는 돌에는
수심 어린 구름이 여전히 망부(望夫)의 혼을 띠고 있네.” 하였다.
○ “8월 금성(金城)에 달이 정말 둥근데, 가늘고 가는 삼과 모시, 고움을 다투네. 회소곡(會蘇曲)이 슬프게 끊어졌지만 가배절(嘉俳節) 저녁에 양편의 모습이 아직도 보이는 듯하구나.” 하였다.
○ “남완(南阮) 누대에는 비단옷이 고운데, 봄바람에 너울너울 길이 걷는구나. 달 밝은 만호(萬戶)에는 다듬이 소리 싸늘하여 백결선생(百結先生)의 노래를 두드려 다하였네.” 하였다.
○ “하늘 흔들고 땅을 진동시키며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쓰러뜨렸고, 강산 정기 타서 만방에 우뚝 뛰어났었네. 부질없는 세상의 석양(石羊) 흥무왕(興武王)의 무덤이요, 가을바람 누런 잎 상서장(上書莊)이네.” 하였다.
동타(銅駝)가 가시밭에 있으니 서울도 틀렸구나. 번화한 홍진(紅塵) 이제는 파멸되었네. 천지가 백번 변하여 남은 것이 없는데, 금오산이 남아 있어 사면으로 푸르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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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신라
손순(孫順) 흥덕왕 때 사람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린아이가 있어서 매양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데,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찾을 수 없다.” 하고는, 아이를 등에 지고 취산(醉山)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 하는데, 홀연 매우 기이하게 생긴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아내가 말하기를, “이 보물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아이의 복일 것이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손순도 그렇게 여기고, 곧 아이와 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집 들보에 달아 놓고 치니, 소리가 왕궁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알아 보니,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으려 하매, 하늘이 황금 가마솥을 내려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전후의 일이 서로 부합된다.” 하고, 마침내 집 한 채와 쌀 50석을 하사하였다.

지은(知恩) 한기부(韓岐部)의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여 나이 32세가 되어서도 시집가지 않았다. 어머니 봉양할 재산이 없어서 남의 고용살이와 구걸로 봉양하였다. 날이 갈수록 궁핍해져서 부잣집에 몸을 팔아 쌀 10석을 받고는, 온종일 힘든 일을 하고 저물면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 봉양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날의 음식은 비록 소찬이지만 달더니, 지금은 비록 좋은 음식이나 가슴이 찌르듯이 아프니, 무슨 까닭이냐?” 하였다. 딸이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를 남의 종이 되게 하느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 하고 통곡하니 딸도 울었다. 화랑도 효종랑(孝宗郞)이 나갔다가, 그 광경을 보고 돌아가 부모에게 청하여 쌀 백 석과 의복 등을 실어보냈다. 그리고 몇 천 명이나 되는 화랑도들이 다투어 곡식을 내주었다.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 또한 벼 5백 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였으며,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곡식을 지키게 하고, 그 마을에 방(牓)을 붙여 효양리(孝養里)라 하였다. 이어 당 나라 황제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당 나라 황실에 아름다움을 돌렸다.

본조
허조원(許調元)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 정문(程文)이 미친 병에 걸렸는데, 조원이 스스로 자기 손가락을 찍어서 피를 내어 약에 타서 마시게 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남득온(南(得溫)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 하였다. 태종조에 정문을 세웠다.
김윤손(金允孫)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자, 윤손이 범을 쫓아가서 왼손으로는 범의 턱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서 쳐 죽이니, 아버지가 살게 되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신증』
박희남(朴希楠)ㆍ희장(希樟)ㆍ희정(希楨)
삼형제가 모두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하였으며, 상복을 벗은 뒤에도 여전히 흰 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곡하며 전(奠)을 올리기를 또 3년을 하고서야 그쳤다.
최영린(崔永嶙)
아버지 섬기기를 지극한 효로 하더니,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을 시묘살이하면서 소금이나 장도 먹지 않았고,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도 삭망제(朔望祭)를 그치지 않았다.

【열녀】 신라
설씨(薛氏) 율리(栗里)의 민간 여자이다. 아버지가 늙었는데도 북적(北狄)의 침략에 대비하는 군사로 소집되자 딸이 자신이 대신 가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이에 소년 가실(嘉實)이 대신 가기를 원하였다. 설씨가 들어가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하니, 아버지가 가실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그대가 나대신 가려 한다니, 내 딸을 그대에게 시집보내겠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혼인할 기일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기를, “첩이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혼례를 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거울을 반쪽씩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았다. 가실은 말 한 필을 남겨 두고 드디어 떠났다. 6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한을 정했으니 이제 다른 집으로 시집가는 것이 어떠냐?” 하였다. 설씨가 말하기를, “전날 아버지 때문에 가실과 약혼하였는데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정리(情理)라 하겠습니까? 그것만은 끝까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늙었으므로 같은 동네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도, 설씨는 완강히 거부하고 외양간에 가서 말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가실이 돌아왔는데, 몸이 마르고 의복이 남루하여 설씨가 알아볼 수 없었다. 가실이 깨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가 그것을 보고 소리내어 울었다. 드디어 날을 가려서 혼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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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환】 고려
위영(魏英) 고려 태조 8년 12월에 신라 경순왕이 와서 항복하니, 그의 국도(國都)를 경주(慶州)로 만들고 그대로 식읍(食邑)으로 주고, 위영을 주장(州長)으로 삼았다.

정극영(鄭克永) 인종 때의 유수(留守)이다.

최호(崔顥) 정종(靖宗) 때에 부유수(副留守)로 있으면서 판관 나지열(羅旨說), 사록(司錄) 윤렴(尹廉), 장서기(掌書記) 정공한(鄭公翰) 등과 함께 《전후한서(前後漢書)》와 《당서(唐書)》를 판각(板刻)하여 바쳤더니, 각각 벼슬과 상을 하사하였다. 채정(蔡靖) 장서기(掌書記)로 있으면서 깨끗한 덕행이 있었다. 그 뒤에 동경(東京) 사람들이 영주(永州) 사람들과 난을 일으켰을 때에, 조정에서는 안무사(按撫使)를 보내기로 하였으나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동경 사람들이 채정을 사모하여 마지않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채정을 유수부사(留守副使)로 임명하였다. 단기(單騎)로 부임(赴任)하니, 동경 사람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배반한 자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엄수안(嚴守安) 판관으로 있을 때에, 원종이 원 나라로부터 군사를 청하여 와서 고도(古都)를 수복하려 하니, 임유무(林惟茂)가 항거하고자 야별초(夜別抄)로 하여금 백성들을 깨우쳐 해도(海島)와 산성(山城)에 들어가 보전하게 하였다. 별초(別抄) 9명이 금주(金州)에 이르니, 수안(守安)이 안렴(按廉) 최유(崔儒)에게 고하기를, “권신(權臣)의 말만을 듣고 경솔히 백성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별초들을 체포하여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최유가 그의 말대로 별초들을 가두었다. 얼마 안 안되어 유무가 죽임을 당하니, 온 지방이 잠잠해졌다. 삼별초(三別抄)의 군사들이 배반하여 진도(珍島)에 웅거하고서 주현(州縣)에 격문(檄文)을 전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진도로 들어오라 하고, 또 별초를 가둔 자는 죄를 주겠다고 성명을 내니, 금주수(金州守) 이주(李柱)가 두려워하여 도망갔다. 수안이 임시로 지주사(知州事)가 되어 민심을 위무하였다. 밀성(密城) 사람이 수령을 죽이고 반기를 들자, 안렴 이숙진(李淑眞)이 변란을 듣고 금주로 달아나니, 적들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수안이 금주수 김훤(金暄)과 함께 군사를 정비하여 숙진을 도와 적을 칠 계획을 하니, 적이 그 말을 듣고 그 괴수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권단(權㫜) 유수로 있었다. 예전에 한 창고가 있어서 백성에게 비단과 명주를 부과하여 저장해 놓고 이름을 갑방(甲坊)이라 하였다. 공헌(貢獻)에 충당하고도 나머지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유수가 차지하였다. 권단은 갑방을 철폐하고, 1년의 수입으로 3년의 진공(進貢)을 지출하였다. 백성의 세금을 도적질한 사호(司戶)가 있자 그의 머리를 관청 뜰에서 부숴 죽이니 보는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충렬왕 초기에 불러들여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임명하였다.

최성지(崔誠之) 경주의 관기(管記)로 왔었다.

안유(安裕) 유수로 있었다.

안보(安輔)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니, 스스로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 하여 아는 것을 다 말하니, 임금은 그가 사정(事情)에 어둡다고 하였다. 안석이 드디어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수령되기를 청하여 계림윤(鷄林尹)으로 나왔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윤선좌(尹宣佐) 처음 한양윤(漢陽尹)으로 있을 때에, 임금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한양윤 윤선좌는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목민관(牧民官)을 시킨 것이다.” 하였다. 뒤에 임금이 친히 수령들을 선임(選任)하는 명단을 기초하다가, 계림윤을 정하는 데에 이르러 붓을 멈추고 생각하기를,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 중에 윤선좌만한 사람이 없구나.’ 하고, 즉시 그를 계림윤으로 선정하였다.

전록생(田祿生) 경주 판관(判官)으로 있었다.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전랑(田郞)이 우리 계림의 판관이 되었더니,
                 부로(父老)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깨끗한 덕행을 그리워하네.” 하였다.

이무방(李茂芳)  공민왕 때에 부윤으로 있었다. 처음에는 큰 흉년이 들었는데 무방이 부임한 뒤부터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무방이 백성의 편의에 따라 어염(魚鹽)을 팔아서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진대(賑貸)에 대비하였다.

이성공(李成功) 유수로 있었다.
우인렬(禹仁烈) 부윤으로 있었다.
정세운(鄭世雲) 유수로 있었다.
유숙(柳淑) 유수로 있었다.
최영(崔瑩)ㆍ배천경(裵天慶)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나익희(羅益禧) 부윤으로 있었다. 청렴하고 부지런하고 자혜(慈惠)스러워 남방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안보(安輔)ㆍ조운흘(趙云仡)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본조
고거정(高居正)ㆍ함부림(咸傅霖)ㆍ권극화(權克和)ㆍ유관(柳觀)ㆍ이호성(李好誠)ㆍ김담(金淡)ㆍ최선복(崔善復)ㆍ유규(柳規)ㆍ이약동(李約東)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조달생(趙達生) 판관으로 있었다.
『신증』
양순석(梁順石)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세필(李世弼)ㆍ최응현(崔應賢) 힘써 학교를 일으켰다.
허계(許誡) 정사를 하는 데에 맑고 간단하였다.
황맹헌(黃孟獻)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인물】
신라
온군해(溫君解) 진덕왕 6년 무열왕이 이찬(伊飡)으로 있을 때에 당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나게 되었다. 무열왕을 수행하던 온군해가 높은 갓을 쓰고 큰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순라병들이 그를 무열왕으로 알고 살해하였다. 무열왕은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진덕왕은 군해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증직하고, 자손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눌최(訥催) 대내마(大奈麻) 도수(都水)의 아들이다. 백제군이 쳐들어 와서 봉잠(烽岑)ㆍ기현(旗懸)ㆍ혈책(穴柵) 등 세 성(城)을 공격하였다. 눌최는 성을 굳게 지키고 구원병을 기다렸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자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병이 없어 날로 더욱 위험하니, 지금이야말로 진실로 뜻 있는 무사가 충절을 다 바쳐야 하는 때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성이 함락되자 눌최가 죽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고, 급찬(級飡)의 관등(官等)을 추증하였다.

설계두(薛罽頭) 무덕(武德) 4년에 바다 배를 따라 당 나라로 들어갔는데, 마침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므로 계두가 스스로를 천거하여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가 되었다.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고구려인과 주필산(駐蹕山) 아래에서 전쟁하였는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당 나라 황제가 어의(御衣)를 벗어 그의 시신을 덮어 주고, 대장군(大將軍)의 관직을 주고 예로써 장사지냈다.

김흠운(金歆運) 내물왕[奈密王]의 8대손이다. 옥천군(沃川郡)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필부(匹夫) 아찬(阿飡) 존대(尊臺)의 아들이다. 적성현(積城縣)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검군(劍君)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었다. 그때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자기 자식을 팔아 끼니를 때우기까지 하였다.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만이 받지 않았다. 사인들은 훔친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음식에 독을 타서 죽였다.

거칠부(居柒夫) 내물왕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사소한 일에는 거리끼지 않고 원대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염탐하기 위해서 고구려 경내로 들어가 혜량(惠亮) 법사를 만나니, 혜량이 손을 잡고 은밀히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 턱과 호랑이 눈을 가졌으니, 장차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이 고구려는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대가 붙잡힐까 염려되니 빨리 돌아감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칠부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진흥왕(眞興王) 때에 임금이 칠부 등 여덟 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도록 하여 죽령(竹嶺) 밖의 열 개의 군(郡)을 빼앗았다. 혜량이 길에 나와서 칠부를 만나니, 수레에 함께 타고서 돌아왔다. 관직이 상대등(上大等)에 이르렀다.

이사부(異斯夫) 내물왕의 4대손이다. 강릉부(江陵府)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양(金陽) 태종왕(太宗王)의 9대손이다.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었다. 왕의 4촌 동생 균정(均貞)과 4촌 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었다. 김양이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으로 들어가니, 제륭의 무리 김명(金明) 등이 그들을 포위하고 균정을 죽였다. 김양이 하늘에 대고 균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맹세하였다. 김명이 제륭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자, 김양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서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을 만났다. 우징이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도모하여 김명을 토벌하여 죽였다. 그리고서 우징을 맞아 즉위하게 하였으니, 이 사람이 신무왕(神武王)이다. 김양은 관직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서발한(舒發翰)의 관등을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장사(葬事)를 한결같이 김유신의 구례(舊例)에 따라 행하게 하고, 태종왕릉에 배장(陪葬)하였다.

사다함(斯多含) 내물왕의 7대손이다.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곧고 발랐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花郞)으로 추대하였는데, 그의 낭도(郞徒)가 몇 천 명이나 되었다.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가야국(伽倻國)을 정벌하도록 명할 때에, 사다함이 종군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이 그의 공을 책록(策錄)하고, 가야국 사람들을 노비로 하사하니 받고서 모두 풀어주었다. 또 전지를 하사하니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받기를 청하였다.

석우로(昔于老)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고, 흘해왕(訖解王)의 아버지이다. 조분왕(助賁王) 때에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고, 그 땅을 군(郡)ㆍ현(縣)으로 만들었다. 첨해왕(沾解王) 때에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반하고 백제에 투항하자, 우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뒤에 왜국(倭國) 사신과 마주 앉아 모욕을 주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만들겠다.”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군대를 보내와서 우로를 잡아 불태워 죽였다. 미추왕(味鄒王) 때에 왜국 사신이 빙문(聘問)을 오니, 우로의 아내가 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려 불태워 죽여 지난날 남편의 원한을 갚았다.

실혜(實兮) 대사(大舍) 순덕(純德)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정도를 지키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하사인(下舍人) 진제(珍提)가 여러 번 왕에게 참소하자, 그를 영림(泠林)의 관리로 좌천시켰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할아버지 때부터 충성으로 세상에 소문이 났는데, 지금 아첨하는 신하의 훼방으로 죽령 밖 먼 곳으로 좌천되는데도 어찌 직언(直言)으로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는가?” 하니, 실혜가 대답하기를, “옛날에 굴원(屈原)은 외롭고 곧았으나 배척되었으니 예로부터 이러한 것이다. 슬퍼할 것이 무엇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당 나라로 들어가서 학문을 하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아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이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이 되어 그를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서계(書啓)ㆍ징병(徵兵)ㆍ고격(告檄) 등의 문장이 모두 그에게서 제작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 내사령 문창후(內史令文昌侯)를 추증하고, 공자의 묘정에 종사하였다.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실려 있고, 또 《최씨문집(崔氏文集)》 30권이 실려 있다. 치원이 나이 28세에 귀국할 뜻을 가지자, 당 나라 희종(僖宗)이 이것을 알고 조서를 주어 사신으로 왔는데, 신라의 왕이 그를 붙들어 두려고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치원이 중국으로 가서 당 나라에 벼슬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난세를 만나 불운하여 걸핏하면 재앙을 만나니,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스스로 상심하여 다시는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방랑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산림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으며, 서적을 베개로 삼고 자연을 읊는 시를 지었으니, 이를테면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氷産),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 및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의 별장 등이 모두 그가 유람하던 곳이다. 뒤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숨어 살면서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과 정현(定玄) 법사와 함께 도우(道友)를 맺고 한가로이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해론(奚論) 모량부(牟梁部)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찬덕(讚德)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가 있어서 당시에 명망이 높았다. 진평대왕이 그를 가잠성령(椵岑城令)으로 선발하였다. 이듬해에 백제에서 대군을 출동시켜 가잠성을 공격하자, 찬덕이 한편으로는 용감히 싸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키기도 하였는데, 양식과 물이 다 떨어지자 적에게 패하여 죽었다. 이리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해론은 나이 20여 세 때에 아버지의 공으로 대내마가 되었다. 건복(建福) 35년에 왕이 해론에게 금산당주(金山幢主)로 임명하여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 변품(邊品)과 함께 군대를 출동하여 가잠성을 습격해서 빼앗게 하였다. 백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곳으로 출동시켰다. 해론 등이 그들을 맞아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해론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셨는데, 내가 지금 또한 이곳에서 백제인과 전쟁을 하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하고, 드디어 짧은 칼을 가지고 적진에 뛰어들어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고, 당시 사람들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장가(長歌)를 지어 애도하였다.

김대문(金大問) 일찍이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으로 있었다. 일찍이 《고승전(高僧傳)》ㆍ《화랑세기(花郞世記)》ㆍ《악본(樂本)》ㆍ《한산기(漢山記)》 등 약간 권을 저술하였다.

설총(薛聰) 자는 총지(聰智)로 원효(元曉)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하더니, 장성해서는 박학(博學)하고 글을 잘 지으며 글씨도 잘 썼다.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의 뜻를 풀이하여 후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또 민간에서 쓰는 말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의 문서에 사용하게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일찍이 한가로이 있을 때에 설총을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오늘 오랜 비가 처음 개이고 훈풍(薰風)이 약간 서늘하니, 고상한 이야기와 좋은 해학(諧謔)으로 답답한 회포를 풀 만하다. 그대는 필시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터이니 나에게 들려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설총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화왕(花王 모란(牧丹))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 향원(香園)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더니, 삼춘(三春)이 되어 곱게 피었습니다. 온갖 꽃을 능가해서 홀로 빼어나니, 이에 온갖 곱고 아름다운 꽃들이 분주히 와서 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홀연히 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니, 이름이 장미(薔薇)였습니다. 붉으레한 얼굴과 새하얀 이빨에 고운 단장과 고운 옷으로 사뿐사뿐 걸어와서 애교 있게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첩이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들었아오니, 향기로운 장막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합니다.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때 또 한 장부(丈夫)가 있었으니, 이름이 백두옹(白頭翁)이었습니다. 베옷과 가죽띠로 흰머리를 흩날리며 지팡이를 짚고서 늙고 병든 걸음걸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와서 아뢰기를, ‘저는 서울 밖 큰 길가에 살고 있아온데, 그윽히 생각하기를, 왕의 좌우(左右)에서 공급하는 고량진미(膏梁珍味)가 비록 풍족하더라도 상자 속에 저장하는 것에는 모름지기 좋은 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과 삼이 있더라도 왕골과 기름사초도 버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모르겠지만, 왕께서도 뜻이 있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장부의 말에도 일리(一理)가 있다. 그러나 가인(佳人)은 얻기 어려우니, 어찌하면 좋을꼬?’ 하였습니다. 장부가 아뢰기를, ‘모든 임금된 자가 노성(老成)한 사람을 친근히 하여 흥하고, 곱고 어여쁜 여색(女色)을 가까이하다가 망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쁘고 고운 이는 합치기가 쉽고, 노성한 이는 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희(夏姬)는 진(陳) 나라를 망쳤고,서시(西施)는 오(吳)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맹가(孟軻 맹자)는 훌륭한 임금을 만나지 못한 채로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馮唐)은 낭관(郎官)인 채로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예전부터 이러하니 제가 어찌하리까?’ 하였습니다. 왕이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소.’ 하였다.” 하니, 이에 왕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며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풍자(諷刺)함이 깊고 간절하니, 이것을 써서 나의 경계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고려 현종 때에 홍유후(弘儒侯)에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김인문(金仁問) 자는 인수(仁壽)로,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유학(儒學)의 글을 많이 읽었으며, 《노자(老子)》ㆍ《장자(莊子)》와 불교의 경전까지도 섭렵하였다. 또 예서(隸書)도 잘 쓰고 말타기ㆍ활 쏘기도 잘하였다. 나이 23세에 당 나라로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에 이르렀다. 측천왕후(則天皇后) 때에 당 나라에서 죽으니 대의서령(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 등에게 영구(靈柩)를 호송하도록 하였다. 효소대왕(孝昭大王)은 그에게 대각간(大角干)을 추증(追贈)하였다.

김후직(金侯稷) 진평왕 때 사람이다. 진평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후직이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후직이 죽을 때에,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모름지기 임금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으라.” 하였다. 그의 아들이 그대로 하였다. 훗날 임금이 사냥을 나가는데, 길 한가운데에 마치 “임금님, 가지 마소서.”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임금이 돌아다보며 물으니, 시종(侍從)들이 아뢰기를, “김후직의 무덤입니다.” 하고, 드디어 후직이 죽으면서 한 말을 자세히 아뢰니, 임금이 줄줄 눈물을 흘렸다.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을 묘간(墓諫)이라 하였다.

백결선생(百結先生)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이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해어진 옷을 기워 많은 매듭이 있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항상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기쁜 일이나 성나는 일, 슬픈 일이나 즐거운 일을 반드시 거문고로 표현하였다. 세말(歲末)이 되어 이웃집들이 곡식을 찧으니, 그의 아내가 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남들은 다 곡식을 찧는데 우리만은 찧을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해를 넘긴다 말인가?” 하였다. 선생이 듣고 탄식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린 것이고, 부와 귀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당신은 어찌 상심하는가?” 하고는 곧 거문고를 타서 방아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다. 세상에서 전하여 대악(碓樂 방아 음악)이라 하였다.

물계자(勿稽子) 내해왕(奈解王) 때 사람이다. 골포(骨浦)ㆍ칠포(漆浦)ㆍ고포(古浦) 세 나라가 신라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해 오자,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때 물계자가 수십여 급(級)의 적의 머리를 베었는데, 논공(論功)할 때에는 물계자의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드디어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남의 신하된 도리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자기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 전일 포상(浦上)ㆍ갈화(竭火)의 전쟁은 위태롭고도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능히 목숨을 바치고 몸을 잊어서 남에게 알려질 만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미 충성스럽지 못한 몸으로 임금에게 벼슬하는 것은 누(累)가 선조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니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충효의 도리를 상실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조정에 서겠는가?” 하고, 드디어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박제상(朴堤上) 파사왕(婆娑王)의 5대손이다. 벼슬하여 삽량주간(歃良州干)이 되었다. 처음에 눌지왕(訥祗王)이 아우 미사흔(味斯欣)이 왜국(倭國)의 볼모가 되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임금이 제상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 제상이 배반한 자처럼 꾸미고서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들어가서 몰래 미사흔을 빼내어 환국(還國)시켰다. 왜왕이 성내어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왜왕이 온갖 참혹하고 혹독한 형벌로 협박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으니, 드디어 목도(木島) 안에서 불태워 죽였다. 눌지왕이 슬퍼하여 대아찬(大阿飡)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제상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관창(官昌)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로 어려서 화랑(花郞)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태종왕(太宗王) 때에 군사를 출동시켜 당 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 관창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황산(黃山) 들녘에 이르자 품일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비록 어리나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야말로 공명(功名)을 세울 때이다.” 하였다. 관창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곧장 적진에 돌격하여 몇 명을 죽이다가, 백제 사람에게 포로가 되어 산 채로 백제의 원수 계백(階伯)에 보내지니,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다. 그의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무사가 많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놓아주었다. 관창이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기(旗)를 꺾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 하고, 우물물을 움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돌격하니 계백이 사로잡아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머리를 말안장에 달아서 보내니, 품일이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우리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능히 국사를 위해서 죽었도다.” 하였다. 삼군(三軍)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면서 나아가 백제 군사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임금이 급찬(級飡)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다.
○ 이첨(李詹)이 고증(考證)하기를, “을축년 겨울에 내가 계림(鷄林)에 손이 되었더니,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鄕樂)을 연주하여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쓰고 뜰에서 칼춤을 추는 동자가 있었다.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신라 때에 황창(黃昌)이라는 자가 있어서 나이 15ㆍ6세 때쯤 되어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임금을 위하여 백제 왕을 쳐서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자 곧 백제로 가서 시가(市街)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이 담처럼 빙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황창이 임금을 그 자리에서 찔러 죽이고,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눈이 다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 말하기를, ‘황창이 와서 춤춘다. 황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이다.’ 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즉시 눈이 다시 밝아졌다 한다. 황창이 어려서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鄕樂)에 실어서 전해 내려온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三國史)》를 보니, 모든 관직을 임명하거나 이웃 나라를 침벌(侵伐)한 것은 거의 모두 씌어져 있으며, 해와 별과 우레와 비의 이변(異變)과 초목ㆍ금수의 요괴(妖怪)까지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나라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모두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스럽다. 다만 열전(列傳)에 관창의 일의 전말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의 충의(忠毅)가 장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하게 한다. 이 아이는 필시 관창일 것이다. 전해지는 것이 잘못된 것일 것이다. 모든 적국에 대하여 변란을 음모하는 자는 혹은 행상(行商)으로 가장하거나, 혹은 본국에 죄를 지은 것처럼 꾸미고서 감언이설(甘言利說)과 아첨하는 말로 속여도 더러는 정상이 드러나고 일이 탄로되어 성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백제가 이미 신라와는 적국이 되었으니, 황창이 응당 공공연하게 무기를 가지고 백제의 번화한 시가의 큰길 가운데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과연 그렇게 하였다면 백제 사람들이 황창을 잡아다가 형구를 갖추어 고문하였을 것이다. 어찌 내버려 두어 임금의 뜰에서 사투한 짓을 하게 하였겠는가? 이것은 인정(人情)으로나 사리(事理)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옛 사람으로 관창과 견주어 나란히 논할 만한 자를 찾아보니, 《춘추(春秋)》에, 애공(哀公) 11년에 노 나라의 소년 왕기(汪錡)가 공을 위하여 수레에 같이 탔다가 함께 국서(國書)의 난에 죽으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능히 창과 방패를 잡고서 사직(社稷)을 수호하였으니, 상(殤)으로 대우하지 않음이 옳다.’ 하였다. 의(義)에 죽고 인(仁)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동자로서 용감히 이런 일을 한 자를 유독 왕기와 관창에게서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잘못되어 있기에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황창의 춤을 보는 자를 위하여 고증하고, 또 따로 역사를 읽는 사람을 위하여 이상함을 고증한다.” 하였다.


녹진(祿眞) 길찬(吉飡) 수봉(秀奉)의 아들이다. 소성왕(昭聖王) 12년에 상대등(上大等) 충공(忠恭)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 관직(官職)을 주의(注擬)하는데, 청탁(請托)이 모여들어 충공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서 병을 얻어 물러가자 의원을 불러 진찰하니, 의원이 말하기를, “병이 심장에 있으니 마땅히 용치탕(龍齒湯)을 복용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충공이 드디어 문을 닫고 손을 만나지 않았다. 집사시랑(執事侍郞) 녹진이 뵙기를 청하니, 문지기가 거절하였다. 녹진이 말하기를, “하관(下官)인 내가 상공(相公)께서 손을 사절하고 계시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마디 말을 올려서 상공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드리고자 하는 것이니, 뵙지 않고는 물러가지 않겠다.” 하였다. 문지기가 세 번 왔다 갔다 한 뒤에야 비로소 뵙게 되었다. 녹진이 말하기를, “듣자오니, 기체(氣體)가 편치 않으시다 하는데,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하고 저녁 늦게 파하여 안개와 이슬을 무릎써서 혈기의 조화를 깨뜨려 사지(四肢)의 평안함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녹진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공의 병은 침이나 약을 쓸 필요도 없이 한마디 말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니, 충공이, “들려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녹진이, “저 목공이 집을 지을 때에, 재목의 큰 것은 들보와 기둥을 삼고, 작은 것은 서까래를 삼으며 굽은 것과 곧은 것을 각각 그 쓰일 곳에 배치한 뒤에야 큰 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재상이 정사를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재능이 큰 자는 높은 지위에 두고, 작은 자는 낮은 벼슬을 주어서, 중앙에는 육관(六官)ㆍ백집사(百執事)와 지방에는 방백(方伯)ㆍ군수(郡守)가 있어서 조정에 결원(缺員)이 없이 모두 그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얻은 뒤에야 임금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사(私)를 따라 공(公)을 해치며,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재주가 없더라도 반드시 등용하고, 미워하는 자는 비록 유능한 인재일지라도 반드시 배척합니다. 그 취하고 버리는 것이 마음을 괴롭히고 옳고 그른 것이 뜻을 현란하게 하니, 나랏일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정사를 하는 자도 병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여 일을 맡아 삼가고 공손하여 뇌물의 문호를 닫고 청탁의 길을 끊어버린다면 올리고 내치는 것은 반드시 밝은 자와 어두운 자에 따라서 하고, 주고 뺏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하지 않아 저울과 같아서 가볍고 무거움을 굽힐 수 없으며, 먹줄과 같아서 굽고 바른 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형벌과 정치가 정당하여 국가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비록 날마다 공손홍(公孫弘)처럼 손을 맞아들이고,조참처럼 술을 내어 벗들과 담소(談笑)하며 스스로 즐기더라도 가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복약(服藥)과 식이(食餌)에 구구하게 마음을 쓰면서 한갓 시일을 허비하고 사무를 폐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충공이 기뻐하여 의원을 사절하고 임금께 알현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날짜를 정하여 복약(服藥)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갑자기 조정에 나왔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을 먹는 효과뿐이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왕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이, “과인(寡人)이 임금이고 경이 정승이면서 이런 훌륭한 인재를 태자에게 모르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태자가 들어와 축하하기를, “신은 들으니,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곧다 하였으니, 이 또한 국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고려
배현경(裵玄慶) 처음의 이름은 백옥(白玉)이다. 담력(膽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고려 태조가 사방을 정벌할 때에 현경의 공이 많았다.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병이 위독할 때에 태조가 그의 집에 거둥하여 손을 잡고 문병하고 문 밖에 나오자, 그가 죽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최언위(崔彦撝) 신라 말기 사람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글을 잘 지었다. 18세에 당 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42세에 본국으로 돌아오니,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그를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임명하여 문장에 관계되는 일을 맡겼다. 당시의 귀인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벼슬이 대상(大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동경노인(東京老人) 역사에 그의 이름이 빠졌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숨어 살면서 고려로 따라가지 않더니, 성종이 동경에 거둥하여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초야에 숨어 사는 어진 이를 찾게 하고, 또 충신ㆍ효자의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니, 노인이 시 두 편을 지어 내상(內相) 왕융(王融)에게 바쳤다. “구천(九天)에 빛이 움직여 별들이 구르는데, 일패(日旆)ㆍ용기(龍旗)가 모두 바다를 따라 순행(巡行)하네. 계림(鷄林)의 누런 잎은 일찍부터 쓸쓸하기도 하더니, 흐릿한 꽃은 이제 다시 상원(上園)의 봄이로다.” 하고, 또, “충신ㆍ효자의 정문(旌門)으로 거리는 광채가 나고, 언덕과 구렁에는 숨은 선비 찾는다고 떠들썩하네. 내 비록 전날 주 나라 늙은이를 따라가지는 못했으나, 지금 다행이 중국의 위의(威儀)가 새로움을 친히 보노라.” 하였다.

최승로(崔承老)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나이 열두 살 때에 태조가 불러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겨 원봉성(元鳳省) 학생(學生)에 소속시키고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였으며, 정례(定例)로 녹봉 20석을 주었다. 이로부터 문병(文柄)을 맡겼다. 성종 때에 정광(正匡)이 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 되었으며,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량(崔亮)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글을 잘 지었다. 성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불러 사우(師友)로 삼았더니, 왕위에 오르자 드디어 발탁하여 썼더니, 매우 사람들의 여망(輿望)에 맞았다. 벼슬이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빈(匡彬)이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항(崔沆) 언위의 손자이다. 장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목종이 그를 중히 여겨 정사의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반드시 그와 의논하였다. 김치양(金致陽)이 반역을 꾀하자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현종(顯宗)을 맞이하여 세웠다. 정당문학 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를 거쳐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를 내리고, 청하현개국자(淸河縣開國子)로서 식읍(食邑) 5백 호를 봉하였으며, 또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를 더 주었다. 시호는 절의(節義)이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주좌(李周佐) 목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상서 판어사대사(刑曹尙書判御史臺事)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40여 년 동안 벼슬하였는데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최제안(崔齊顔) 승로의 손자이다. 현종ㆍ덕종ㆍ정종ㆍ문종 등 4대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에 이르렀다. 시호는 순공(順恭)이다. 문종의 묘에 배향하였다.

김부일(金富佾) 그의 조상은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때에 벼슬이 검교 태보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사 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部事上柱國)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문장이 화려하고 풍부하였다. 모든 외교 문서에는 반드시 그에게 윤색(潤色)하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아우 부의(富儀)ㆍ부식(富軾)과 함께 모두 문한시종(文翰侍從)이 되었으므로 그의 어머니를 태부인(太夫人)에 봉하고, 해마다 관에서 곡식을 내려주었다.

김부의(金富儀) 숙종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체직되어 직한림원이 되었고, 인종 때에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판상서예부사 감수국사 주국(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監修國史柱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김부식(金富軾) 숙종 때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되었으며 우사간(右司諫)을 지냈다.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은 국구(國舅 인종의 외조부)이므로 그에 대한 예수(禮數)는 다른 신하들과는 같게 할 수 없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거기에 따랐으나, 부식만이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예를 바르게 해야 하며, 사사로이 대할 때에는 아비와 자식의 친함을 온전히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묘청(妙淸)이 조광(趙匡)ㆍ유참(柳旵) 등과 함께 서경(西京)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부식이 원수(元帥)가 되어 서도(西都)를 평정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검교 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에 임명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여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侯)를 봉하고 식읍 1천 호를 주었다. 7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사람됨이 체격이 아주 장대하며 낯은 검고 눈은 불거졌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송 나라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부식이 그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그 부사(副使) 서긍(徐兢)이 부식이 글 잘 짓고 고금의 일에 통달함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으면서 부식의 가계(家系)를 실었으며, 또 그의 초상화를 그려 가지고 가서 황제에게 아뢰니, 마침내 사국(司局)에 명하여 판(板)에 새겨서 그것을 널리 전파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뒤에 사신으로 송 나라에 갔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예로 대우하였다. 세 번 예부(禮部)의 일을 맡았는데, 선비를 잘 뽑았다고 칭찬하였다. 문집 20권이 있다.

김한충(金漢忠) 신라 대보(大輔) 알지(閼智)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뛰어나며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종 때 윤관(尹瓘)에게 여진(女眞)을 치도록 명했을 때에, 한충이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힘껏 싸워서 전공(戰功)이 있었다.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김인위(金因渭) 김부(金溥)의 후손이다.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경용(金景庸) 용모가 걸출하면서도 잘생겨 고귀하고 깨끗한 풍채가 있었다. 각문지후(閣門祗侯)로 광주 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정사하는 것이 까다롭지 않았다. 숙종ㆍ예종 두 대에 벼슬하여 병부ㆍ호부ㆍ공부의 상서(尙書)와 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문하시중 상주국에 승진하였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 판상서이형부사 낙랑군 개국백(協謀衛社致理功臣判尙書吏刑部事樂浪郡開國伯)에 가자(加資)되고, 식읍 수백 호를 받았다.

김인규(金仁揆) 과거에 급제하여 좌승선(左承宣)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고, 예종조에 지주사(知奏事)로 승진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수태위 평장사(守太尉平章事)에 이르렀다.
노영순(盧永淳)
기계(杞溪) 사람으로, 의종조에 춘주도(春州道)에 왜구가 횡행하니, 임금이 영순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의정(懿貞)이다.

김군수(金君綏) 부식의 손자이다. 명종조에 장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고, 좌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조충(趙冲) 대신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역적 한순(韓恂)과 다지(多智)를 베어 그들의 머리를 함에 넣어서 서울로 보냈다. 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자기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드디어 군수(君綏)를 한남(漢南)으로 귀양보내니, 당시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김인경(金仁鏡) 처음 이름은 양경(良鏡)이었다. 재주와 식견이 정밀하고 명민하여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충을 따라 글안(契丹) 군사를 강동성(江東城)에서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인경은 문(文)ㆍ무(武) 재주가 모두 넉넉하였으며, 천품이 맑고 아름다워서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낭서(郞署)에서부터 상부(相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요한 문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왕공이나 부녀로부터 소 치는 아이와 말 모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최여해(崔汝諧) 천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울주 통판(蔚州通判)에 보임되었다. 처음 명종이 익양공(翼陽公)으로 있을 때에, 여해가 그 부(府)의 전첨(典籤)으로 있었다. 하루는 꿈에 태조가 명종에게 홀(笏)을 주니 명종이 그것을 받고 어좌(御座)에 앉으니, 여해가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하례하였다. 잠이 깬 뒤에 기이하게 여겨 명종에게 고하였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여해가 축하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서울에 이르러 환관(宦官)을 통하여 아뢰니, 임금이 비로소 놀라며, “최전첨이 왔구나.” 하고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곧 좌정언(左正言)에 임명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하여 추밀원사 산기상시(樞密院使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사직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추밀원에 자리가 찼으니 진실로 오늘의 은혜와 영광을 알겠으며, 북궐(北闕)에서 임금께 알현하였으니 비로소 당년(當年)의 꿈의 맞음을 믿습니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고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은 그에게 특별히 정당문학을 제수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연성(金鍊成) 인경의 아들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김승무(金承茂) 연성의 아들이다. 재주와 식견이 있었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한림(翰林)을 거쳐 여러 번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김경손(金慶孫) 고종 때 사람이다. 성품이 장중(莊重)하고 온화하며 너그럽고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며 담략(膽略)이 있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민간이나 조정에서 그를 의지하였는데, 갑자기 최항(崔沆)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김혼(金琿) 경손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대장군 중찬(大將軍中贊)이 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간 뒤에는 임시로 행성사(行省事)를 서리(署理)하였다. 뒤에 낙랑군(樂浪郡)으로 봉하고,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이전(李瑱) 널리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며, 시를 잘 짓는다고 명성이 났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와 정승(政丞)을 지냈으며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이제현(李齊賢) 진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선왕이 연저(燕邸)에 있을 때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말하기를, “중국 서울에 있는 문학하는 선비들은 모두 천하의 일류(一流)들이다. 나의 부중(府中)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 하고, 제현을 불러들여 북경으로 오게 하였다. 그때는,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충선왕과 교류하였는데, 요수 등이 제현을 칭찬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읊은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충선왕이 강남에 강향사(降香使)로 갔을 때에 제현도 따라갔다. 왕이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흥(興)을 붙이고 회포를 풀 때마다, “이런 곳에 이생(李生)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연경(燕京)과 강남에 시종(侍從)한 공으로 왕이 황제께 아뢰어 고려 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뒤에 다시 원 나라에 갔을 때에, 원 나라가 우리나라를 한 성(省)으로 만들려 하였다. 제현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자, 그 논의가 드디어 중지되었다. 충선왕이 토번(吐藩)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에 제현이 원 나라 낭중(郞中)과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렸더니, 얼마 뒤에 황제가 타사마(朶思麻) 지방으로 양이(量移)하게 하였으니, 이는 배주의 주청(奏請)에 따른 것이다.
제현이 환국(還國)한 뒤에 뭇소인들이 더욱 어지럽게 선동하고 있으므로 제현이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지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현을 섭정승(攝政丞)으로 명하여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권단(權斷)하게 하였다. 그때 임금이 아직 원 나라에 있어서 나라가 비었는데도 제현의 일처리가 타당하여 사람들이 안정될 수 있었다. 벼슬이 문하시중 계림부원군(門下侍中鷄林府院君)에 이르렀다. 국사(國史)를 자기 집에서 찬수(撰修)하였는데, 사관(史官)과 삼관(三館)이 모두 모였다. 젊을 때부터 동료들이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益齋)라는 그의 호로 불렀다. 뒤에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윤신걸(尹莘傑) 기계(杞溪) 사람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평리 기성군(僉議評理杞城君)에 이르렀다.

이인기(李仁琪)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풍채가 아름답고, 예법(禮法)에 익숙했으며, 무용(武勇)으로 이름이 났다. 호군(護軍)이 되어서 중방(重房)의 여러 장군들이 권세를 믿고 기를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그들에게 대항하고 질책하여 충선왕에게 호소하였다. 충선왕은 비록 인기가 곧다고 생각하였으나 여러 장군들은 모두 중국의 부인(婦人)과 환관(宦官)의 당(黨)이므로 마지못하여 인기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순서를 뛰어 넘어 지언부사(知讞部事)를 제수하였으며, 곧 판문하사(判門下事)로 승진시켰다.

최해(崔瀣) 치원(致遠)의 후손이다.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충숙왕 8년에 원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 예문관(藝文館)ㆍ성균관(成均館)ㆍ전교시(典校寺)의 삼관(三館)이 영빈관(迎賓館)에 나가서 그를 영접하였다. 벼슬이 검교(檢校)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최해는 재주가 기이하고 뜻이 고상하여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고 습속에 빠지지 않고 옛 사람과 합치되기를 힘썼다. 원 나라 연우(延祐) 연간에 처음 과거가 시행되자 조서를 듣고 말하기를, “배운 것을 시험해볼 만하다.” 하더니, 이윽고 과연 제과에 합격하였다. 같은 해에 장원 급제한 송본(宋本)이 그의 재주를 칭찬하여 여러 번 시(詩)에 썼다. 최해가 일찍이 동래현(東萊縣)을 지나다가 해운대(海雲臺)에 올라서 합포 만호(合浦萬戶) 장선(張瑄)이 소나무에 시를 써 놓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 이 나무가 무슨 액운이 있어서 이런 졸렬한 시를 만났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그 부분을 파내어 버리고 흙을 발랐다. 안동(安東)에 이르렀을 때에, 장선이 듣고 성내어 맹장(猛將) 3ㆍ4명에게 뒤쫓아가서 잡으라고 하였다. 하인 한 사람을 잡아 가지고 돌아가서 문 밖에 큰 칼을 씌워 세워 놓았다. 최해는 몰래 죽령(竹嶺)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래서 크게 유림(儒林)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뒤에 성남(城南)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더니, 늦게 사자갑사(獅子岬寺) 중에게서 밭을 빌려 경작하여 농장을 열어서 자급자족하고, 스스로 호(號)를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하였다. 《좌우명(座右銘)》과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의 저술이 있다.

이달충(李達衷) 충숙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공민왕 원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전임하였으며,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승진되었다. 15년에 명유(名儒)로 뽑히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굽히지 않았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었다. 일찍이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있다가, 돌아올 때에 우리 환조(桓祖)가 들에서 그를 전별하였는데, 우리 태조가 환조 뒤에 서 있었다. 환조가 술을 권하니 달충이 서서 마시고, 태조가 권하니 꿇어앉아서 마셨다. 환조가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분은 진실로 범인(凡人)과 다른 사람이니, 공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공의 가업(家業)을 이분이 필시 크게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자기 자손을 부탁하였다. 그의 저서(著書)로 《제정집(霽亭集)》이 세상에 전한다. 그의 시문(詩文)은 이제현이 크게 칭찬하였다. 신돈(辛旽)이 한창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달충이 일찍이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상공(相公)이 주색(酒色)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니, 신돈이 좋아하지 않았다. 신돈이 처형되자 달충이 시를 지었는데, “범의 위엄을 빌리니 곰들도 두려워하고, 사내로서 미혹하니 계집들 따랐네. 누런 개와 푸른 매 더욱 미우니, 새들과 백마(白馬) 무슨 죄런고?” 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보림(李寶林) 제현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엄하고 굳세며 방정(方正)하고 정사의 재주가 있었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이성서(李成瑞) 충정왕(忠定王) 때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공민왕이 즉위해서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승진시켰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파천(播遷)하면서 성서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에 임명하였더니, 군사를 징집하는 데에 공이 있었다. 덕흥군(德興君)의 변란 때에는 최영(崔瑩)을 따라서 역적을 치는 데에 또한 공이 있어서 모두 공 1등에 책정되었다. 원 나라에 가서 새 해를 축하하고, 태위감대경(太尉監大卿)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하여 뜻과 절조가 있었다.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서기(水原書記)에 임명되고, 선발되어 사한(史翰)에 보직(補職)되었다.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 등과 서로 잘 지냈으며, 강론(講論)을 쉬는 날이 없었다.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고, 15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신돈이 정권을 잡아 참람하고 불법(不法)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존오가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극언(極言)하였다. 그때 신돈이 임금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존오가 신돈을 지목하여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한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상에서 내려 앉았다. 임금이 더욱 성내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시켰다. 국인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이존오는 참 정언(正言)이다.” 하였다. 뒤에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살면서 근심과 분함으로 병에 걸렸다. 위독해졌을 때에,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도 기세가 성한가?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겠다.” 하더니, 자리에 다시 눕기도 전에 죽으니, 나이 31세였다. 죽은 지 석 달만에 신돈이 처형되었다. 임금이 그의 충성을 사모하여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증직하였다.

김진양(金震陽)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10년이 못 되어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고,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조준(趙浚) 등의 죄를 논핵(論覈)하였더니 대간(臺諫)들이 번갈아 소를 올려, “진양의 무리가 일을 만들어 내어 화란(禍亂)에 이르게 합니다.” 하여, 곤장 맞고 먼 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호(號)를 초옥자(草屋子)라 하였으며, 이숭인(李崇仁)이 전(傳)을 지었다.

김자수(金子粹) 자는 순중(純仲)이다. 공민왕 말년에 장원 급제하였다. 신우(辛禑) 초년에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일을 논하다가, 전라도 돌산수(突山戍)로 좌천되었다. 공양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뒤에 본조에 벼슬하였다.

본조
설장수(偰長壽) 원 나라 숭문감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설손이 원 나라 말기 공민왕 때에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로 왔다. 장수는 벼슬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뒤에 본조에 벼슬하였다. 관향(貫鄕)을 정해 주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계림으로 관향을 삼도록 하였다.

 김균(金稛) 인위(因渭)의 후손이다. 태조조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이래(李來) 존오(存吾)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였고, 좌명 공신(佐命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설순(楔循) 손의 손자이다.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두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김맹성(金孟誠) 균의 아들이다.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희경(僖敬)이다.

김신민(金新民)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아들 승경(升卿)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문형(李文炯)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풍채가 옥같이 아름다우며 문아(文雅)하기로 유명하였다.

이윤인(李尹仁)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안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정효상(鄭孝常) 갑술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익대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손소(孫昭) 과거에 급제하였다. 적개 공신(敵愾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졌다.
김영유(金永濡)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신증』
김천령(金千齡)병진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났다.
최숙생(崔淑生) 과거에 급제하였다. 시문(詩文)을 잘 하였는데, 더욱 사륙체(四六體)에 능하였다. 호는 충재(盅齋)이다.
손중돈(孫仲暾) 소(昭)의 아들이다. 천성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우거】 고려
오세재(吳世才) 고창군(高敞郡)의 인물조에 자세히 나온다.
안치민(安置民) 자는 순지(淳之)이고, 호는 기암(棄菴)이다.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정동성(征東省) 막료(幕僚)로 있을 때에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시의 격조가 높음은 황정견(黃庭堅)의 체(體)보다 낫고, 문장이 풍부하기는 오히려 유자후(柳子厚)의 풍(風)이 있도다. 다만 나라를 빛내는 솜씨가 되지 못하고, 풀 사이 가을 벌레 우는 것을 배움이 한스럽다.” 하였고, 또, “눈썹은 실처럼 드리워졌고, 눈동자는 물같이 맑구나. 내가 방덕공(龐德公)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대를 보니 그인가 하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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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
진한육부(辰韓六部)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의 여섯 마을에 나누어 살았으니,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이것을 진한육부(辰韓六部)라 한다. 6부 사람들이 혁거세를 높여서 임금으로 세웠다.
유리왕(儒理王) 8년에 이르러 6부의 이름을 고쳐서, 양산을 급량부(及梁部), 고허를 사량부(沙梁部), 진지를 본피부(本彼部), 대수를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라 하고, 가리를 한기부(漢祇部) 혹은 한기부(韓岐部)라 하고, 명활을 습비부(習比部)라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주(州)를 승격시켜 대도독부(大都督府)로 하고 6부의 이름을 고쳐, 급량부를 중흥부(中興部), 사량을 남산부(南山部), 본피를 통선부(通仙部), 습비를 임천부(臨川部), 한기를 가덕부(加德部), 모량을 장덕부(長德部)라고 하였다.


양산라정(楊山蘿井)
본부 남쪽 7리에 있다. 한 나라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에 고허 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옆의 수풀 사이를 바라보니, 흰 말이 꿇어앉아 절하는 모양으로 있는 것이 보였다. 가서보니, 말은 홀연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13세에 자질이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6부의 사람들은 그의 탄생이 신기하므로 임금으로 세우고,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이라고 하였다. 진한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고 하므로, 큰 알이 박과 같다고 하여 박(朴)을 성(姓)으로 삼았으며, 거서간(居西干)은 방언(方言)에, ‘높은 어른’을 일컫는 말이다.

알영정(閼英井) 본부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시조 5년에 용(龍)이 이 우물에서 나타나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 거두어 양육하고,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장성하자 덕스런 용모가 있었다. 시조(始祖)가 왕비로 맞아들이니, 어진 행실이 있어서 내조(內助)를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두 명의 성인이라고 하였다.

금성정(金城井)
부내(府內)에 있다. 신라 시조 때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

추라정(雛羅井)
본부 남쪽 7리에 있다. 신라 소지왕(炤智王) 때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

시림(始林)
본부 남쪽 4리에 있다.
탈해왕(脫解王) 9년에 임금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수풀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시켜 보도록 하였더니, 황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우는 것이었다. 임금이 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어찌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아들을 보내줌이 아니겠는가?” 하고, 곧 거두어 양육하였다.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그가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인하여 그 숲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숲 속에 쌓인 돌이 있어서 높이가 3척이나 되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알지(閼智)의 태(胎)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았던 돌로, 가위의 흔적이 있다.” 한다. 알지의 7대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미추가 대신 즉위하였으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소유한 시초이다.


금성(金城) 본부 동쪽 4리에 있다. 신라 시조 혁거세 때에 쌓은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천 4백 7척이다. 월성(月城) 본부 동남쪽 5리에 있다. 파사왕(婆娑王) 22년에 쌓았는데, 모양이 반달같기 때문에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토축으로 둘레가 3천 23척이다. 처음 탈해왕이 어렸을 때에, 토함산에 올라가 성중(城中)의 살 만한 곳을 바라보다가, 양산(楊山)의 한 봉우리가 일월(日月)의 형세와 같음을 보고, 곧 내려가 찾아보니, 즉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옆에 묻어놓고 호공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할아버지 집입니다.” 하니, 호공이 다투어 변명하다가 드디어 관(官)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관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가지고 너의 집이란 것을 증명하겠는가?” 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우리 집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마을에 나간 사이에 남에게 빼앗겼습니다. 땅을 파서 증험해 보소서.” 하였다.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었다. 드디어 탈해에게 주어서 살게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월성(月城) 터이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詩)에,
               “외로운 성이 약간 굽어서 반달과 같은데,
                가시덤불이 반이나 족제비 굴을 덮었네,
                곡령(鵠嶺)의 푸른 솔은 기운이 왕성하고,
                계림(谿林)의 누런 잎은 가을이 쓸쓸하네.
                태아(太阿)의 자루를 거꾸로 준 뒤부터     [태아는 보검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권력을 빼앗김을 말함]
                중원(中原)의 사슴이 누구 손에 죽었던고.  [간신 조고의 지록위마에서 나온 말로 나라가 망함을 말함]
                강가의 계집들은 속절없이 옥수화(玉樹花) 3자를 전하는데,
                봄바람은 몇 번이나 금제(金堤)의 버들을 스쳤나.” 하였다.


만월성(滿月城)
월성(月城) 북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9백 45척이다.

명활성(明活城)
월성 동쪽에 있다. 신라 자비왕(慈悲王)이 여기로 옮겨 살았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8백 18척이다.

남산성(南山城) 월성 남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5백 44척이다.

관문성(關門城)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천 7백 99척이다. 지금을 허물어졌다.

영창궁(永昌宮)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세웠다 한다. 지금은 그 있던 곳이 자세하지 않다.

요석궁(瑤石宮) 신라의 중 원효(元曉)가 일찍이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가 없는 도끼를 허락할꼬? 나는 하늘을 지탱할 기둥을 베겠네.” 하였다. 태종왕(太宗王)이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다면 이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종실(宗室) 과부가 있었다. 임금이 요석궁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더니, 원효가 남산(南山)에서 와서 유교(楡橋)를 지나다가 요석궁 관리를 만났다. 거짓으로 물 속에 빠지니 그 관리가 원효에게 요석궁으로 가서 옷을 말리게 하고 그대로 묵게 하였더니, 과부가 과연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다. 요석궁의 터는 향교 남쪽에 있고, 유교(楡橋)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

황학루(黃鶴樓)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

금송정(琴松亭) 금오산(金鰲山) 산마루에 있다.
○ 옥보고(玉寶高)가 노닐고 즐기던 곳이다. 옥보고는 신라 사찬(沙粲) 공영(恭永)의 아들로 경덕왕(景德王) 때 사람이다. 그는 지리산(智異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50년 동안 배웠다. 직접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 연주하니,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다. 또 현금(玄琴)이라도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는, 옥보고가 신선의 도(道)를 얻었다 한다.


포석정(鮑石亭) 본부 남쪽 7리, 금오산 서쪽 기슭에 있다. 돌을 다듬어 포어(鮑魚)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적(遺跡)이 완연히 남아 있다.
○ 고려 태조 10년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을 침공하여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고 성읍에까지 바싹 다가왔다.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연식(連式)을 고려(高麗)에 보내 급변을 호소하였다. 고려 태조가 시중(侍中) 공훤(公萱),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우리와 우호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급변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훤 등에게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갑자기 신라 도성(都城)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경애왕은 비빈(妃嬪)ㆍ종척(宗戚)들과 포석정에 나가 잔치를 하며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애왕은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에 있는 이궁(離宮)에 숨고, 수행하던 신하와 배우(俳優)ㆍ궁녀들은 모두 함몰되었다. 견훤이 군사를 풀어 마구 약탈하게 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 신하들을 시켜서 임금을 찾아내어 궁중에 가두고서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능욕하고 부하들에게는 임금의 빈첩(嬪妾)들을 함부로 욕보이게 하였다. 임금의 표제(表弟 외사촌 동생) 김부(金傅)를 임금으로 세우고, 왕제(王弟)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子女)ㆍ백공(百工)들과 병기와 보물 등을 모두 빼앗아 돌아갔다.
○ 이인로의 시에,
                     “석호궁(石虎宮) 안에는 가시가 나고,
                      동타(銅駝)가 있는 길가에는 행인도 없네.
                      높은 정자에는 금송(琴松)이 반이나 영락(零落)했는데
                      새벽달은 여전히 옛 성을 비추고 있네. 
                      당시의 악기 소리 마침내 처량하고,
                      둥둥 뜬 황금 술잔은 물굽이 따라 꺾였네.
                      중류에서 위 나라의 신하를 속절없이 애석해 하고,
                      취향(醉鄕)에는 진(陳) 나라의 일월(日月)도 아랑곳 없었다네.” 하였다.
            *전국 시대 위무후(魏武候)가 서하(西河)에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류(中流)에서, “아름답다.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이여, 이는 위 나라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덕에 있지 험고한 산하에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진후주가 장려화(張麗華) 등 미인들과 술을 마시며 음탕하게 놀아서 밤과 낮이 없었다 한다.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맑은 시냇물 한 가닥이 굽이쳐 흐르는데, 
                               황량한 골짜기가 구불구불 열렸구나.
                      포어(鮑魚)는 시냇물에 떨어져 흩어졌는데,
                                봄은 가고 돌은 오래되어 파란 이끼 끼었구나. 
                      옛날 신라왕은 정치하기 싫어하고,
                                금수레ㆍ옥가마 타고 놀러만 다녔다.
                      이곳에서 질펀히 놀며 맑은 물 희롱하니,
                                술잔 둥둥 떠서 물결 따라 내려왔네.
                      임금과 신하 흥겨워 노래 부르며 취향(醉鄕)에 들었는데,
                                 피리ㆍ북소리가 봄 우레처럼 땅을 진동하네. 
                      적병이 궁궐에까지 쳐들어옴도 몰랐는데,
                                 대낮에 철기가 몰래 하무를 울고 달려왔네.

 *하무[행군할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말과 군사에 물리는 나무]

                      궁정에 피를 뿜은 일 어찌 차마 말할소냐.
                                매우 다급한 서울에는 먼지가 날렸구나.
                      궁녀들은 뒹굴며 적군 앞에서 울부짖는데, 
                                값진 비녀 풀밭에 버려졌네.
                      해목령(蟹目嶺) 위에는 수심 어린 구름 엉기었는데,
                                솔바람 소리 아직도 천년의 슬픔을 띠었네.
                      임춘각(臨春閣) 안에서 흠뻑 취하여
                               문 밖에 한장군(韓將軍) 온 것도 몰랐다네.


*진후주가 임춘각과 결기각(結綺閣) 등의 화려한 집들을 짓고 지냈는데 뒤에 수 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가 쳐들어와서 진 나라는 망하였다.

                     옥수(玉樹)ㆍ벽월가(璧月歌
)
가 끝나기도 전에, 
                               진(陳) 나라 강남의 왕업(王業)이 연기처럼 사라졌네.

*진후주의 가곡에, “구슬달[璧月 夜光珠]은 밤마다 차고 옥수(玉樹)는 아침마다 새롭네.”라는 구절이 있었다.

                     전인들의 잘못은 후인들의 경계가 되련마는, 
                               후인들도 서로 이어 잘못하네.
                    내 원하노니 하느님은 귀신에게 이 돌을 지키게 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거울삼게 하소서.” 하였다.


첨성대(瞻星臺)
본부 동남쪽 3리에 있다.
○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 돌을 다듬어 대(臺)를 쌓았는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이며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천문(天文)을 관측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전대(前代)의 흥망이 세월이 지나
                  천척(千尺)의 석대(石臺)만이 하늘에 솟아 있네.
                  어떤 사람이 오늘날 천상(天象)을 살핀다면,
                  문성(文星)의 한 점이 사성(使星)으로 되었다 하리.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월성 가운데 첨성대 우뚝하고,
                  옥피리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구나.
                  문물은 이미 신라와 함께 다하였건만,
                   슬프다. 산과 물은 고금이 같구나.” 하였다.

『신증』 조위의 시에,
                 “늘어진 벼와 기장으로 밭둑 길 어두운데,
                  한가운데에 백척이나 되는 높은 대가 있네.
                  기단은 대지(大地) 속에 깊숙이 뻗쳤고,
                  그림자는 청산(靑山)과 마주하고 구름 밖에 뾰족하다.
                  치병(齒餠)으로 임금을 정하던 당시에 민심은 순후 하였는데,
                  희씨(羲氏)ㆍ화씨(和氏)의 역상(歷象)의 관측도 차례로 베풀어졌네. 
                  규포(圭表 해 그림자를 재는 기구)를 세워 그림자를 재서 일월(日月)을 관찰하고,
                  대(臺)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고 별로 점쳤네.
                  천문이 도수에 순하여 태계(泰階)가 평온하고,
                  낭렵(狼鬣)이 나타나지 않으니 하늘이 맑았다.
                  기후가 알맞아 백성이 재앙 받지 않으니,
                  사방 들에 풍년을 즐기는 노래 소리 터졌네. 
                  천지 만고에 구렁에 감춘 배나 견고한 금사발
                  끝까지 온전한 것은 못 보았네.
                  어지러운 인간 세계 몇 번의 먼지인가?
                  화려한 궁궐 모서리 모두 가시밭이 되었어도,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저만 홀로 남아 있어,
                  포개진 돌이 풍우(風雨) 밖에서 우뚝하네.
                  노 나라의 영광전(靈光殿) 지금도 있는지?
                  신라 때의 제작(制作) 한 번 감탄할 만하구나.” 하였다.


구성대(九聖臺) 금오산에 있는데, 속설에 신라 때 아홉 명의 성인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

아진포(阿珍浦)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는데, 용성국(龍城國)이라고도 한다. 그 나라 임금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 하니, 그 아내가 비단으로 싸서 궤 속에 넣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축원하기를, “어디든 인연 있는 곳에 닿아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어라.” 하였다. 진한(辰韓) 아진포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가 열어보니, 어린애가 들어 있었다. 거두어 길렀더니, 장성하자 풍채가 뛰어나고 밝으며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姓氏)를 모르는데, 처음 왔을 때에 까치가 날아와 울었으니, 까치 작(鵲) 자에서 새조(鳥) 자를 떼어 버리고 석(昔) 자로 성을 삼는 것이 좋으며, 또 궤를 풀고 나왔으니, 벗고 풀었다는 뜻으로 탈해(脫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임금이 그의 훌륭함을 듣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으려 할 때 유언하기를,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에, ‘내가 죽은 뒤에는 아들이냐 사위이냐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으면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셨다.” 하고, 드디어 탈해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이가 신라의 제4대 임금이다.


서출지(書出池)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에 임금이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는데, 이상한 까마귀와 쥐가 있으므로 임금이 기사(騎士)에게 까마귀를 쫓아가게 하였다. 기사가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렀을 때에 두 마리 돼지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머물러 그것을 구경하다가 홀연히 까마귀를 놓쳤다. 그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겉봉에 쓰기를, “뜯어 보면 두 명이 죽고 뜯어 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 하였다. 기사가 와서 바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두 명이 죽는 것보다는 뜯지 않아서 한 명이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명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함이고, 한 명이라고 한 것은 임금을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뜯어 보니, 씌어져 있기를, “거문고 갑(匣)을 쏘라.” 하였다. 임금이 궁궐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바로 내전(內殿)에서 분수(焚修)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고 간계(奸計)를 꾸몄던 것이다.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 못을 서출지라고 하였다.


안압지(雁鴨池)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을 본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성부산(星浮山) 본부 남쪽 20리에 있는데, 한 봉우리가 빼어났다.
○ 신라 때에 벼슬하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에게 길다란 횃불을 가지고 밤에 성부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들고 있게 하였다. 서울 성내의 사람들이 요성(妖星)이 나타났다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집하여 재앙을 물리칠 방술을 하고자 하였다. 그 아버지가 장차 그 모집하는 왕명에 응하려 하는데, 일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큰 요괴(妖怪)가 아닙니다. 다만 한 집의 아들이 죽고 아비가 곡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그날 밤에 그 아들이 과연 범에게 물려 죽었다.


여나산(余那山) 본부 남쪽 40리에 있다. 속설에, “한 서생(書生)이 이 산에서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고, 세족(世族)의 집안과 혼인하였으며, 뒤에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그 처갓집에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여 여나산가(余那山歌)를 지었다. 그 뒤부터는 과거 시관이 연회를 열 때에는 이 곡조를 먼저 노래하였다.” 한다.

봉생암(鳳生巖) 남산에 있다. 신라의 정사와 교화(敎化)가 순후하고 아름다워 봉(鳳)이 이 바위에서 울었다. 인하여 봉생암이라 이름짓고 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찬미하였다.

월명항(月明巷) 금성(金城) 남쪽에 있다.
○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을 유람하고 개운포(開雲浦)에 이르니, 홀연 한 사람이 기이한 형상과 괴상한 복장으로 임금 앞에 나아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임금의 덕을 찬미하였다. 임금을 따라 서울로 와서 스스로 처용(處容)이라 이름짓고, 달밤마다 시가(市街)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마침내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神)이라 하고, 그가 가무(歌舞)하던 곳을 후인들이 월명항(月明巷)이라고 하였다. 인하여 처용가(處容歌)와 처용무(處容舞)를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신라의 옛날 처용은 푸른 바다 속에서 왔다네.
                  옥 같은 이와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
                  솔개 어깨와 보라빛 소매로 봄바람에 춤추었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냇물에 가득한 달 밝은 밤이 긴데, 동해의 신인(神人)이 시루(市樓)로 내려왔네.
                  길이 넓으니 긴 소매로 춤출 수 있고, 세상이 태평하니 백전(百錢)을 막대에 걸고 놀 만하네.
                  고상한 종적은 아득히 멀리 신선의 고장으로 돌아가고, 남긴 노래는 전해져 경주(慶州)에 있네.
                  골목 어귀에 봄바람이 때로 한번 일어나니, 의연히 꽃 꽂은 머리를 불어 스치는 듯하네.” 하였다.


열박령(悅朴嶺) 본부 남쪽 30리에 있다. 동도(東都)의 기녀 전화앵(囀花鶯)이 묻힌 곳이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옥 같은 얼굴 혼(魂)을 재촉해 간 지 오래인데,
                                  하늘 끝에는 층층이 있는 산꼭대기만 보이네.
                 무협 신녀(神女)의 비무협(巫峽)에서 거두고, 
                                  미인의 바람은 낙천(洛川)에서 끊어졌네.
                 구름은 춤추는 옷자락처럼 땅에 끌리고,
                                 달은 노래하는 부채처럼 하늘에 떠 있네.
                 지나가는 길손이 몇 번이나 꽃다운 자질 슬퍼했던고?
                                수건 가득히 피눈물 흐른다네.” 하였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문왕(神文王) 때에 동해 가운데에 작은 산이 둥둥 떠 와서 감은사(感恩寺)를 향해 물결에 따라 왔다갔다 하였다. 임금이 이상히 여겨 바다에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산 위에 한 그루의 대[竹]가 있었다. 명하여 피리를 만들었더니,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도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비가 개며, 바람도 그치고 파도도 잠잠해져서 만파식적이라고 하였다.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여겼다. 효소왕 때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가호(加號)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옥적(玉笛) 길이가 한 자 아홉 치인데, 그 소리가 맑다. 속설에 동해의 용(龍)이 바친 것이라 한다. 대대로 보배로 전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신라가 나라를 그 옛날에 열었으니, 
                    풍속이 순박하고 간략하여 제작(制作)이 없었다.
                    옥적이라는 한 보물이 언제 만들어졌던가?
                    재료가 실도 아니고 돌도 아니며 또 대도 아닐세. 
                    예악(禮樂)이 야박한 풍속을 돌이킬 수 있는데,
                    하물며 형산(荊山)의 옥을 다듬었음에랴?
                    당시에는 초목도 혜택을 입었으니,
                    어찌 생각하였으랴? 지금 계림(鷄林)에 누런 잎이 되었을 줄을.
                    첨성대 오래되어 포석정 눌렀는데
                    피리 소리는 멀리 집집마다에 들려지네.
                    하루아침에 온갖 일이 연기처럼 사라지니, 
                    보배로 여기던 것 사람 아니고 오직 물건이었네.
                    돈은 일전(一錢)어치도 못 되는 것,
                    완전하거나 이지러졌거나 버려 두었네.
                    내가 와서 홀연히 한 소리의 가락을 듣고,
                    붓을 잡아 노래를 짓노라니 글재주가 졸렬하네. 
                    상왕(商王)의 상저(象箸)도 매몰(埋沒)되니,   [주(紂)임금이 상아(象牙)로 젓가락을 만들었다.]
                    목야(牧野) 천년에 먼 생각이 나네.” 하였다.
       *목야(牧野)-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칠 때에 목야(牧野)에서 싸워 이겼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계림의 지나간 일 일찍이 들었는데,
                     묻노라. 옥적(玉笛)은 어느 시대에 만들었던고?
                     이야기 들으니, 신라의 태평시절에,
                     태평풍월(太平風月)을 관현(管絃)에 실었네.
                     대에서 나는 소리는 오히려 위천(渭川)의 속됨싫어
                     옥공(玉工)에게 명하여 남전옥(藍田玉)을 다루게 하였네.
                     가늘고 미끄럽게 갈고 다듬으니,
                     교묘하게 뚫은 여섯 구멍 별이 듬성듬성한 듯.
                     현악(絃樂)이 금석(金石)과 조화되게 하니,
                     부딪치는 맑은 소리 연주장 고요히 하였네.
                     그때의 물건들 다 사라지고 지금까지 남은 것은 오직 이 물건.
                     귀신이 지켜서 완전무결하게 영구히 전한 것 아닌가?
                     내 생각을 모아 노래 한 곡조 부르려 하나,
                     곡조도 되지 않고 가사(歌詞)도 졸렬하네.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기산(岐山)의 석고(石鼓)가 오랫동안 인멸(湮滅)된 것을. 
                     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가 홀로 노래 불렀네.


옥대(玉帶) 진평왕(眞平王) 원년에 신인(神人)이 궁전 뜰에 내려와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나에게 옥띠[玉帶]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꿇어앉아 받아서 교제(郊祭)[하늘에 지내는 천제]와 묘제(廟祭) [종묘의 제사]등 큰 제사에 모두 착용하였다. 그때 사람이 찬미하기를, “구름 밖에서 하늘이 옥띠를 하사하니, 임금의 곤룡포와 잘 어울리네. 우리 임금 지금부터 몸 더욱 무거우시니, 내일 아침에는 쇠로 섬돌을 만드리라.”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에 고려 태조에게 바치니, 바로 금을 새기고 옥을 박아 모나게 만든 허리띠로, 길이가 10위(圍)이고, 띠쇠가 62개였다. 물장고(物藏庫)에 간직하게 하였다.
처음 신라 사자 김률(金律)이 고려에 왔을 때에, 태조가 묻기를, “들으니,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장륙금상(丈六金像)ㆍ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제대(聖帝帶)라 한다. 이것들이 있는가?” 하였다. 김률이 대답하기를, “성제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높은 신하인데, 어찌 모르는가?” 하니, 김률이 부끄럽게 여겼다. 돌아와 경순왕에게 보고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나이가 90세가 넘은 황룡사 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착용하던 것으로, 역대의 임금들이 보배로 전해 와서 남고(南庫)에 간직해 두었다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창고를 열고 찾으려 하니,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대낮이 캄캄하게 되었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재계하고 제사한 뒤에야 찾아내었다.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이 성골(聖骨)의 왕이기 때문에 성제대라 일컫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 바친 것이다.


정전(井田) 신라 때의 정전(井田)으로 터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사절유택(四節遊宅) 신라의 서울 사람들은 부유하고 윤택한 집을 금입택(金入宅)이라 하였는데, 모두 35채가 있었다. 또 사계절에 유상(遊賞)하는 곳을 사절유택이라 하였으니, 봄의 동야택(東野宅), 여름의 곡량택(谷良宅), 가을의 구지택(仇知宅), 겨울의 가이택(加伊宅)이다.

재매곡(財買谷) 김유신(金庾信)의 종녀(宗女)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가 골짜기에 장사하고, 재매곡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매년 봄철에 일가의 남녀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연회를 한다. 그때는 온갖 꽃이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庵子)를 짓고, 송화방(松花房)이라고 이름지었다.

일정교(日精橋) 춘양교(春陽橋)라고도 한다. 옛날의 본부 동남쪽 문천(蚊川) 가에 있었다.

월정교(月精橋) 옛날에 본부 서남쪽 문천 가에 있었다. 두 다리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 김극기의 시에,
                 “반월성 남쪽 토령(兎嶺) 옆에, 무지개 모양의 다리 그림자가 거꾸로 문천에 비치네.
                  용(龍)이 꿈틀거리며 은하수에 오르니 꼬리가 땅에 드리워지고,
                  무지개가 하수(河水)를 마시매 허리가 하늘에 걸쳤네.
                  손으로 푸른 이무기를 베었으니, 주처(周處)의 용맹이요, 
                  몸이 흰 학으로 되었으니 정령위(丁令威)의 신선이네.
                  옛날 현인(賢人)들의 숨은 자취 모두 세속을 놀라게 하는데,
                  구구하게 자주 왕래하는 내 자신 부끄럽구나.” 하였다.


귀교(鬼橋) 신원사(神元寺) 옆에 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기를,
진지왕(眞智王)이 사량부(沙梁部)의 도화랑(桃花娘)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가까이하려 하니, 도화랑이 말하기를, “저에게는 남편이 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농담으로 이르기를, “남편이 없다면 되겠느냐?”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 해에 임금이 죽고 2년 뒤에 그녀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뒤의 밤에 임금이 평상시처럼 그녀의 방에 와서 이르기를, “네가 전날 허락한 바 있는데, 이제 남편이 없으니 되겠구나.” 하고 7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홀연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이 비형(鼻荊)이다. 진평왕(眞平王)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는데, 15세가 되자 밤마다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으로 황천(荒川) 언덕에 이르러 귀신들과 놀다가, 여러 절의 새벽 종 소리를 듣고는 흩어지는 것이었다. 임금이 용사(勇士)를 시켜 엿보게 하여 그것을 알고 비형에게 묻기를,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 하는데 참말이냐?”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서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게 하여라.” 하니, 비형이 그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으므로 귀교(鬼橋)라고 이름을 지었다.
임금이 또 묻기를, “귀신들 중에 인간 세계에 나와서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길달(吉達)이라는 자가 쓸 만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비형이 길달을 데리고 와서 함께 뵈었다. 임금이 길달에게 벼슬을 내리고 일을 시키니 과연 충직(忠直)하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으므로, 임금이 길달을 후사(後嗣)로 삼으라 하였다. 임종은 길달에게 흥륜사(興輪寺)에 누문(樓門)을 창건(創建)하게 하고,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하였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므로,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 뒤부터는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을 들으면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그때 사람이 가사(歌詞)를 짓기를, “성제(聖帝)의 혼이 아들을 낳은 비형랑(鼻荊郞)의 집이로다. 날거나 달리는 모든 귀신들은 이곳에 머물지 말라.” 하였다. 경주의 풍속에 지금도 이 가사를 문에 붙여서 귀신을 쫓는다. 이것이 동경 두두리(豆豆里)의 시초이다.


백운량(白雲梁) 역시 문천(蚊川) 가에 있다.

상서장(上書莊) 금오산 북쪽에 있다.
○ 고려 태조가 일어나자,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그가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을 것을 알고, 글을 올렸으니,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鵠嶺 송악(松嶽))은 푸른 솔이로다.”는 말이 있었다. 신라의 임금이 듣고 그를 미워하니, 최치원은 즉시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신라 사람들이 탄복하여, 마침내 그가 살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고 이름지었다.


봉덕사종(奉德寺鍾)
신라 혜공왕(惠恭王)이 주조(鑄造)한 종으로 구리 12만근이 들었다. 치면 소리가 백여 리까지 들린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北川)에 침몰하자, 천순(天順) 4년 경진년에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달았다.

○ 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의 종명(鍾銘)에,
“지극한 도(道)는 형상(形像) 밖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를 진동하기 때문에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설(假說)을 설정하여 삼진(三眞)의 오묘한 일을 살피고, 신기한 종(鍾)을 달아서 일승(一乘)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한다.
종(鍾)이라는 것은 부처의 고향에서 상고하면 계이(罽膩 서역 국명(西域國名))에 증거가 있고, 중국에서 찾으면 고연(鼓延)에게서 처음 제작되었다. 비었으므로 잘 울려 그 소리가 다하지 않고, 무거워서 옮기기가 어려우니 그 몸이 쭈그러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왕자(王者)의 큰 공을 그 위에 새기는 것이며,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성덕대왕(聖德大王)께서는, 덕(德)은 산하(山河)와 함께 높고 이름은 일월과 나란히 높았다. 진실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속을 살폈다.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는 넘쳐나는 물건이 없었다. 시속은 금옥(金玉)을 싫어하고 세상은 글재주를 숭상하였다. 여색을 생각지 않고 노년의 경계에 마음을 두어 40여 년 동안을 국가에 군림하여 정치에 부지런하였다. 한 번도 전란으로 백성들을 놀라고 시끄럽게 한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만리에서 복종해 와서, 다만 임금의 풍화(風化)를 흠모함이 있을 뿐, 일찍이 화살을 날려 엿보는 일이 없었다. 연(燕) 나라와 진(秦) 나라의 인재 쓴 것이나 제(齊) 나라와 진(晉) 나라가 교대로 패권(覇權)을 잡은 것과, 어찌 나란히 비교하여 말할 것이겠는가?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시기는 예측하기 어려웠고, 천추의 밤은 길어지기 쉬웠다. 승하하신 뒤로 지금 34년이 되었다.
근년 효자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 큰 기업을 계승해 지켜서 나라의 온갖 정사를 잘 다스렸다. 일찍 어머니 여읜 것을 세월이 갈수록 더욱 그리워하더니, 거듭 부왕을 잃게 되어 궁궐에 다다를 때마다 더욱 슬퍼하였다. 부모를 추모하는 정은 갈수록 슬퍼지고, 영혼의 명복을 빌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삼가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큰 종 한 개를 주조하려고, 뜻을 세웠는데, 성취하지 못하고 문득 세상을 버리셨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행실이 조종(祖宗)과 합치되고 뜻이 지극한 이치와 부합되어 기이한 상서(祥瑞)는 천고(千古)에 특이하고, 아름다운 덕은 당시에 으뜸이다. 육가(六街)의 용의 구름은 옥계(玉階)에 덮어 비를 내리고, 구천(九天)의 우레 북은 금궐(金闕)에 소리를 떨친다. 과목(菓木)의 수풀은 외경(外境)에 무성하고, 연기 아닌 서기는 서울에 빛난다. 이것은 즉 이 땅에 탄생하신 날이 그 정사를 시작한 시기에 부합한 것이 우러러 생각건대, 대군(大君)께서는, 은덕은 땅처럼 공평하여 백성들을 인교(仁敎)로 감화시키고, 마음은 하늘의 거울과 같아서 부자(父子)의 효성을 권장하였다. 아침에는 어진 외삼촌에게, 저녁에는 보필하는 충신에게서 채택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무엇을 행한들 허물이 있겠는가?
이에 선왕의 유언을 돌아보아 드디어 오래된 뜻을 성취하였다. 유사(有司)는 일을 처리하고, 장인들은 재주를 다하였다. 해는 신해년이고, 달은 12월이다. 이때에 해와 달은 빛을 더하고, 음과 양은 기운을 조화롭게 하였다.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한데, 신령한 그릇(종)이 이루어지니, 모양은 산악(山岳)이 서 있는 것 같고, 소리는 용(龍)의 울음 같다.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고, 가만히 끝없는 지옥 밑에까지 통하리라. 보는 자는 기이하다고 칭찬하고, 듣는 자는 복을 받는다.
원컨대, 이 묘한 인연이 선왕의 높으신 영(靈)을 받들어, 도와서 음문(音聞)의 맑은 소리를 듣고, 말 없는 법연(法筵)에 오르시어 삼명(三明)의 승한 마음에 합하고, 일승(一乘)의 진경(眞境)에 거하고, 또는 왕가의 자손들이 금지(金枝)와 함께 길이 무성하며, 국가의 기업은 철위산(鐵圍山)처럼 더욱 번창하여,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지혜의 바다에서 물결을 같이하여, 모두 티끌 세계에서 벗어나 모두 깨달음의 길에 오르게 하소서.
신 필혜(弼奚)는 글이 졸렬하고 재주가 없으면서, 감히 조서(詔書)를 받들어 반초(班超)의 붓을 빌리고 육좌(陸佐)의 말에 따라 그 원하는 뜻을 기술하여 종(鍾)에 새긴다.” 하였다.

그 명(銘)에,
 “하늘은 상(象)을 드리우고 땅은 방위(方位)를 여니, 산과 물은 진압하고 나라들이 벌여 섰다. 동해(東海) 가는 여러 신선이 숨은 곳으로 땅은 도학(桃壑)에 있고, 경계(境界)는 부상(扶桑)에 이어져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있어 합하여 한 고장이 되었다.
임금들의 성덕(聖德)이 대(代)가 오래될수록 더욱 새롭고, 오묘하고 오묘한 맑은 교화는 원근에까지 미치었다. 은혜를 가지고 먼 곳까지 덮으니, 만물과 더불어 고르게 은택에 젖는다. 성하도다. 천세(千歲)에 온갖 무리를 편히 한다. 수심 어린 구름이 홀연히 벗겨지고 지혜의 해가 봄[春]이 없었다. 공손하고 효성스런 사왕(嗣王)께서 일천 가지 기무(機務)를 계승하여 세속을 다스림을 옛날대로 하니, 풍속을 변화시킴에 어찌 어긋남이 있으랴? 날마다 부왕(父王)의 훈계를 생각하고, 항상 모후(母后)의 자애로움을 사모하네. 다시 명복을 빌기 위하여 종(鍾)을 만들어 기원하네.
거룩하시도다. 우리 임금, 덕(德)에 감응함이 가볍지 않아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생기고, 신령스런 징조가 매양 생긴다. 임금이 어질매 하늘이 보우하니 시절이 태평하고 나라가 평안하다. 조상을 추모하기를 오직 부지런히 하니, 소원대로 이루어지리. 마침내 선왕의 유명(遺命)을 생각하여 이에 종을 주조하였다. 신(神)과 사람이 힘을 도우니 진기한 그릇이 만들어졌다. 위엄은 창곡(暢谷 해 뜨는 곳)에 떨치고, 소리는 삭봉(朔峯)에까지 맑게 들리리. 듣는 이와 보는 이가 모두 신뢰하여 꽃다운 인연이 진실로 여기에 모이리라. 능히 마귀도 보전하고 어룡(魚龍)도 구제한다. 둥글고 빈 신체(神體)가 바야흐로 성스런 자취 나타내어, 길이 큰 복이 항상 거듭하소서.” 하였다.
『신증』
부윤(府尹) 예춘년(芮椿年)이 남문(南門) 밖에 옮겨서 종각(鐘閣)을 지어 달아 놓고 군사들을 징집할 때에 쳤다.


담암사(曇巖寺) 옛터가 사릉(蛇陵) 남쪽에 있다.

천관사(天官寺) 오릉(五陵) 동쪽에 있다.
○ 김유신(金庾信)이 소시적에는 어머니가 날마다 엄한 훈계를 하여 함부로 남들과 사귀지 않더니, 하루는 우연히 창녀(娼女) 집에서 유숙하였다.
어머니가 훈계하기를,
“나는 이미 늙어서 낮이나 밤이나 네가 성장하여 공명(功名)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지금 네가 천한 아이들과 함께 음란한 술집에서 놀아난단 말이냐?”하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유신이 즉시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 문을 지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술에 흠뻑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말이 전날 다니던 길을 따라 잘못 창녀의 집으로 갔다. 창녀는 한편으로는 반기고 한편으로는 원망하며 울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유신이 알고는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로 돌아갔다. 그 여자가 원망하는 노래 한 곡조를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절은 바로 그 여자의 집이며, 천관(天官)은 그 여자의 이름이다.
○ 고려 이공승(李公升)의 시에,
               “절 이름 천관(天官)은 옛 사연이 있어서 홀연 그 유래를 들으니 처연(凄然)하도다.
                정 많은 공자(公子)가 꽃 아래에 놀더니, 원망을 품은 가인(佳人)이 말 앞에서 울었네.
                말은 정이 있어 도리어 옛길을 알았는데, 하인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을 더했던고?
                다만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오묘하여 달에서 함께 잔다말만 만고에 전하네.” 하였다.


황룡사(黃龍寺)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다. 지금은 없어지고, 장륙존상(丈六尊像)만이 있다.
○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해당관사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더니, 누런 용이 그곳에서 나왔다. 왕이 이상히 여겨 다시 절을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솔거(率去)라는 이가 있어서 절 벽에 노송(老松)을 그려 놓으니, 뿌리와 줄기는 비늘처럼 되어 있고 가지와 잎은 서리에 구불구불했다. 새들이 이따금 멀리서 바라보고 날아 왔다가 벽에 부딪쳐 미끄러져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빛이 바래졌으므로 중이 단청(丹靑)으로 칠을 하였더니,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조유궁(朝遊宮)을 철거하고, 그 재목을 가져다 이 절의 탑을 수축하였다. 송 나라 학사(學士) 호종단(胡宗旦)이 사신으로 와서 초헌(軺軒)을 타고 이 절의 양화문(兩花門)을 지나다가, 진사 최홍빈(崔鴻賓)이 머물며 지은, “고목(古木)은 북풍(北風)에 울고, 작은 물결은 지는 햇빛을 일렁이네. 배회하며 옛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라는 시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진실로 세상에 드문 뛰어난 재주로다.” 하였다. 자기 나라에서 복명(復命)할 때, 임금이 동도(東都)에 남아 있는 옛일을 물으니, 드디어 이 시를 아뢰었다 한다.
○ 김극기의 시에,
                     “오후(五侯)의 큰 집들은 여름이 되어도 더위를 받지 않네.
                      더위를 맡은 신관(神官)이 위엄 잃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누추한 작은 집에 번거롭게 화풀이를 하네.
                      마음을 태우니 시름은 불과 같고, 몸을 지지니 땀은 비오듯 하네.
                      섭정능(葉靜能)[유명한 도사 이름]을 따라 청허부(淸虛府)로 날아가서
                      몸은 푸른 옥두꺼비를 타고 손으로는 흰 옥토끼를 희롱하고 싶네. 
                      애석하게도 평범한 세속 냄새가 나서 구름 낀 하늘에서 돌아갈 길 잃었네.
                      숨어 사는 사람 찾아가서 맑고 부드러운 말에 적심만 같지 못하네.
                      새벽에 일어나 등나무를 짚고 서사(西社)의 주인을 찾는다. 
                      달팽이 침은 섬돌 이끼에 둘러 있고, 새 울음 소리는 구름 속의 나무를 침노한다.
                      전각(殿閣)은 웅장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여 공중을 향해서 날아갈 듯하구나. 
                      집 가득히 만다라꽃[曼陀羅花]은 어지러이 떨어져 옥티끌 같다. 
                      오래 앉아 있노라니 황금 향로에서는 침향(沈香) 연기가 
                      전자(篆字) 모양으로 줄줄이 가로로 흩어진다. 
                      불을 살려 향기로운 차를 시험삼아 달이니
                      꽃 무늬 자기(磁器)에 흰 젖이 뜨네.
                      향기롭고 달아서 맛이 더욱 좋구나.
                      한 번 마시니 백 가지 생각이 없어지네.
                      저녁 빛이 질펀한 숲에 드니 긴 행랑에서 법고(法鼓)가 울리네.
                      재주가 적으니 온갖 경치가 교만한 듯하여,
                      붓을 잡고 읊기 더욱 괴롭구나.”하였다.
○ “층계로 된 사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 물과 일천 산이 한 눈에 트이네.
    몸은 옛날 노오(盧敖)가 신선을 따라 오르내린 밖에 나왔고,
    눈은 수해(豎亥)가 오가던 가운데를 삼키네.
    성사(星槎)의 그림자는 처마 앞 비에 떨어지고,
    달 속의 계수나무 향기는 난간 밑 바람에 나부끼네.
    굽어보니, 동도(東都)의 아주 많은 집들이,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하였다.


가섭연좌석(迦葉宴坐石) 황룡사에 있다. 돌의 높이는 5ㆍ6 척이나 되고, 둘레는 겨우 세 아름이다. 속설에 가섭(迦葉)이 편안히 쉰 돌이라 한다. 또 석가모니의 장륙불상(丈六佛像)이 있니, 진평왕 때에 주조한 것이다. 황철(黃鐵)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으로 만들었다.
후인이 연좌석(宴坐石) 찬가(讚歌)를 짓기를,
                     “지혜의 해빛을 감춘 뒤로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다만 연좌석만이 여전히 남아 있네.
                      상전(桑田)은 몇 번이나 창해(滄海)를 이루었던고?
                      다행하게도 웅장한 모습 아직도 변함이 없구나.” 하였고,
장륙불상의 찬가에는, 
                     “티끌 세상 어디인들 불계(佛界)가 아니련만,
                      향화(香火)의 인연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다네.
                      아육왕(阿育王)이 만들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월성(月城)은 옛터를 찾은 곳이네.” 하였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있다.
봉성사(奉聖寺) 본부 동쪽 4리에 있다.
영흥사(永興寺) 본부의 성(城) 남쪽에 있다.
흥륜사(興輪寺) 본부 남쪽 2리에 있다.
신원사(神元寺) 본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창림사(昌林寺)
금오산 기슭에 신라 때 궁전의 옛터가 있었는데, 후인들이 그 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옛 비석이 있으나 글자는 없다. 원 나라 학사 조자앙(趙子昻)의 창림사비(昌林寺碑)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이것은 당 나라 시대 신라 중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로 자획(字畫)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훨씬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디인들 재주 있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으랴?’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하였다.

남산사(南山寺) 신라 사람 대세(大世)는 방외(方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평왕 9년에 담수(淡水)라는 중과 말하기를, “이 신라의 산골 사이에서 한평생을 마친다면 못 속의 물고기나 새장 안의 새와 무엇이 다르랴? 내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오 나라나 월 나라와 같은 먼 나라에 가서 스승을 따라 명산(名山)에서 도(道)를 닦으려 한다. 만약 이 평범한 몸을 바꾸어 신선을 배울 수 있다면 광활한 하늘 밖으로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기이한 노닒이고 웅장한 구경거리다. 그대는 나를 따라가겠는가?” 하니, 담수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세가 물러나와서 마침 구칠(仇柒)이라는 자를 만났는데, 강건하게 기이한 절조가 있었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사에서 노닐었는데, 홀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낙엽이 뜰의 괸 물에 떴다. 대세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가고 싶은 뜻이 있다. 각각 나뭇잎 한 개씩을 가지고 배를 삼아 그것이 떠내려가는 차례를 가지고 우리가 떠나가는 차례를 보기로 하자.” 하였다. 조금 뒤에 대세의 나뭇잎이 앞에 있었다. 대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가네.” 하니, 구칠이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나도 남자인데, 어찌 나만 남는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어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뒤로는 그들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주암사지맥석(朱巖寺持麥石)
김극기의 시의 서문(序文)에,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이 산 남쪽에 주암사(朱巖寺)라는 절이 있다.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어서 깎아지른 듯하고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을 보고 먼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온갖 물상(物象)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대석(臺石)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다.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하여 올라갈 수는 없을 듯하지만, 그 위는 평탄하여 사람 백 명이 앉을 만하다.옛날 신라의 대서발(大舒發) 김유신 공이 여기에 보리를 두어 술의 재료로 공급하여 장교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ㆍ9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예전에 도인(道人)이 신중(神衆) 삼매(三昧)를 얻고, 일찍이 스스로를 격려하기를, ‘진실로 궁녀(宮女)가 아니라면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귀신들이 그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서 공중으로 날아가서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곤 하는데, 때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궁녀가 두려워서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궁녀에게 가서 자는 곳마다 단사(丹砂)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군사에게 찾게 하였다. 안으로는 성시(城市)에서부터 멀리로는 높은 산골짜기의 매우 으슥한 곳까지 찾았으나 찾아낼 수 없더니, 홀연 이 바위에 도착해서 보니, 단사의 붉은 흔적이 바위문에 찍혀 있는데, 납의(衲衣)를 입은 늙은 중이 그 안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상하고 미혹시키는 행위를 성내어 사나운 군사 수천 명을 보내어 죽이고자 하였다. 중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 번 귀신의 주문(呪文)을 외우니, 귀신 군사 수만 명이 산골짜기에 잇따라 늘어선 것이 마치 세상에서 그려 놓은 귀신의 형상과 같았다. 왕의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땅에 엎드려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로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으니 그의 요괴한 일이 드디어 없어졌다 한다.” 하였다. 그 시에,
        “멀고 먼 구름 가의 절, 
        특이한 지경이 티끌 세상과 격리되었네.
        조도(鳥道)는 푸른 하늘에 구불구불 나 있고, 
        봉대(蜂臺)는 푸른 바다에 걸쳐 있다.
        지령(地靈)은 골짜기에 감춰져 있고,
        하늘 바람은 대와 삼나무에 펄렁거린다.
        멀리 바라보매 가슴 시원하여,
        말이 재갈을 벗은 것 같구나.” 하였다.
○    “우뚝 솟은 천길 묏부리에 높직한 한 개의 돌이로다.
        깎아지른 듯 사면은 험준한 데 정상은 자리처럼 판판하다.
        상상컨대, 서발공(舒發公)이 사람들을 시켜 여기에 보리를 두고
        아침저녁으로 장교들을 위로하니,
        곰 같은 용감한 장수들이 다투어 힘을 떨치었으리.
        부월(斧鉞)을 가지고 여러 번 정벌에 나가니, 
        왕사(王師)를 마침내 대적할 자 없었네.
        지킬 때에는 우뚝 서 있는 산과 같고,
        공격할 때에는 번개치듯 하였네.
        삼한(三韓)을 한 나라로 만드니,
        큰 공훈이 금책(金冊)에 새겨졌네.
        영백(英魄)은 지금 어디 있는고? 
       푸른 이끼가 말굽 자국을 덮었네.
       내 우연히 와서 기이한 것 찾아 올라 구경하고 옛일을 생각하네.
       당시에 내가 채찍 잡고 그분을 따르지는 못했으나,
       남은 위엄이 늠름하기 어제 같네.
        흰 달은 각궁(角弓)처럼 굽어져 있고,
        파란 구름은 청유막(靑油幕)을 말아 놓은 듯,
        골짜기에는 대인호(大人虎)가 많고,
        숲에는 군자학(君子鶴)이 많네. 
        놀란 우레가 바위 멧부리를 찢으니,
        북소리와 징소리를 듣는 듯하구나.
        슬프다. 나는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고 자질구레하게 문장을 전공했네.
        반평생에 겨우 과거에 올랐으니, 두 귀밑털이 이미 희어졌네.
        왕후(王侯)되기를 어찌 기약하랴? 산꼴짜기에 눕기를 이미 각오했네.
        다만 원하기는 그분의 남은 용맹을 빌려서 문단에서 길이 승자(勝者)나 되었으면.” 하였다.


곤원사북연(坤元寺北淵) 신원사의 남쪽 2리에 있다. 고려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의종(毅宗)이 거제(巨濟)로 도망가니,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고 다시 전왕(前王)을 세우고자 하여 장순석(張純錫) 등으로 하여금 전왕을 모시고 이 고을로 나와 있게 하였다. 이의민(李義旼) 등이 입성(入城)해서 전왕을 끌어내어 곤원사 북쪽 못가에서 시해(弑害)하고 시체를 요로 싸고 두 개의 가마솥 속에 넣어서 못 속으로 던졌다. 헤엄을 잘 치는 중이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리니, 시체가 물가로 떠내려와 여러 날이 되었으나 까마귀와 솔개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다.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하여 물가에 매장하였다.

왕가수(王家藪) 본부 남쪽 10리에 있다.
고을 사람들이 목랑(木郞)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목랑은 속칭 두두리(頭頭里)라고 한다. 비형(鼻荊)이 있은 이후로 세속에서는 두두리를 섬기기를 매우 성대하게 하였다. 고종(高宗) 18년에 몽고의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이 와서 이전에 원 나라의 사신 저고여(箸古與)가 국경에서 암살된 사건을 성토하였다. 동경(東京 경주)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목랑이 말하기를,‘내가 이미 적군의 진영에 도착하였으니, 적의 원수는 누구누구입니다. 우리들 다섯 명이 적들과 싸우고자 하니, 10월 18일을 기해서 만약 무기와 안장 얹은 말을 보내준다면 우리들이 곧 승첩(勝捷)을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시를 지어 최우(崔瑀)에게 보내기를 ‘장수(長壽)와 요절(夭折)과 재해(災害)와 상서(祥瑞)는 같은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일찍이 알지 못하네. 재앙을 제거하고 복이 오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하늘 위나 인간 세상에서 나 아니면 누가 하랴?” 하였다. 최우가 그것을 믿고 사적으로 안장 얹은 말을 그려서 내시 김지석(金之蓆)을 시켜 보내주었으나, 그 뒤에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임관군(臨關郡) 군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 때에 성을 모화군(毛火郡)에 쌓아 일본의 침입을 막았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임관(臨關)이라고 명칭을 고쳤다. 고려 때에 합쳐서 주(州)에 예속시켰다. 돌로 쌓은 성의 남은 터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關門)이라 한다.

상성군(商城郡)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음즙화현(音汁火縣)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음즙벌국(音汁伐國)을 빼앗아 음즙화현(音汁火縣)을 두었다. 뒤에 안강현(安康縣)에 합속(合屬)하였다.

약장현(約章縣) 본래는 악지현(惡支縣)이었다.

동기정(東畿停) 본래는 모지정(毛只停)이다.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 사람들은 영(營)을 정(停)이라고 하였으니, 곧 진을 치고 주둔한 곳이다.” 하였다.

남기정(南畿停) 본래는 근내정(根乃停)이다.
서기정(西畿停) 본래는 두량미지정(豆良彌知停)이다.
○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지금의 밀양부 두야보부곡(密陽府豆也保部曲)이 바로 그곳이다.” 하였다. 양(良)과 야(也), 미지(彌知)와 보(保)는 방언(方言)에 서로 비슷한 말이니, 이첨의 말이 옳을 듯하다.

북기정(北畿停) 본래는 우곡정(雨谷停)이다.
막야정(莫耶停) 본래는 관아량지정(官阿良支停)으로 북하량(北河良)이라고도 한다.

성법이부곡(省法伊部曲)  법(法)은 잉(仍) 자로도 쓴다. 본부 북쪽 50리에 있다.
팔조부곡(八助部曲)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대포부곡(大庖部曲)ㆍ대창부곡(大昌部曲) 본부 서쪽 50리에 있다.
남안곡부곡(南安谷部曲) 본부 서쪽 45리에 있다.
근곡부곡(根谷部曲) 안강현 서남쪽 5리에 있다.
도계부곡(桃界部曲)ㆍ호명부곡(虎鳴部曲) 안강현 동남쪽 7리에 있다.
호촌부곡(虎村部曲) 신광현(神光縣) 동남쪽 5리에 있다.
하서지목책(下西知木柵)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안에 못 1개와 우물 2개가 있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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