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 (6) - 김천택 vs 김수장
< 예술에 눈떠가는 市井… 탈속과 풍류로 거닐다 >
(1) 둘 다 중인 출신… 전문 시조歌客·작가로 歌團 이끌어
18세기 서울 거리에는 자못 예술의 향기가 넘실거린다. 평민들도 그 예술을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것이 물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7세기부터 진행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도시 유흥공간의 생성이 큰 몫을 했다.
신분제가 동요하고 국가로부터 독립한 예인(藝人)이 늘면서 예술이 상품화하고, 예술 수요가 증대한 것이 한 요인이었다. 말하자면 국가나 일부 사대부층이 독점해 온 상층 예술이 바야흐로 시정(市井)의 세계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변화한 예술 환경의 중심에는 중간 계층이 있었다. 조선 후기 예술의 창작과 수요에서 이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천택(金天澤)과 김수장(金壽長)은 중인 출신으로 18세기 시가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예인들이다.
그들은 노래로 한 나라에 이름을 떨친 전문 가객이자, 100수 전후의 시조 작품을 창작한 작가였으며, 가단(歌團)을 조직한 음악 그룹의 활동가였다. 또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시조문학 작품을 소중히 갈무리해 노래책으로 엮어낸 편찬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가 아직 미미했던 탓에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이 드물어 생몰 연대조차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2) 서검(書劍)을 못 이루고 산림(山林)의 주인 되어 - 김천택
김천택의 신분을 양반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중인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해동가요’에는 숙종 때의 포교라고 기록돼 있고, 1728년 그 자신이 편찬한 노래집 ‘청구영언’에서는 스스로를 사대부와 구분되는 ‘여항육인(閭巷六人)’에 넣어 다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복소라는 사람이 ‘김수장과 남파 김천택이 경정산의 고사와 같이 서로 마주하니 두 옹(翁)은 그 당시 노래에 통달한 자들이었다’고 언급한 사실이나 역대 가창자(歌唱者)의 이름을 연령순으로 기록한 ‘고금창가제씨(古今唱歌諸氏)’라는 명단에 김천택이 김수장의 바로 앞에 기재됐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김천택이 노래로는 김수장과 쌍벽을 이루었고, 나이는 1690년(숙종 16년)생인 김수장보다 몇 살 더 많았으리라고 추정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장검(長劍)을 빼어 들고 다시 앉아 헤아리니/ 흉중(胸中)의 먹은 뜻이 한단보(邯鄲步) 되야괴야/ 두어라 이 또한 명(命)이어니 일러 무엇하리오’(진본 청구영언 265번 작품)
시에서 장검은 흔히 남자가 품은 웅대한 포부나 이상을 상징한다. 작자는 서슬 푸르던 자신의 꿈이 한단보(邯鄲步)가 돼버렸다고 탄식한다. 연(燕) 나라의 한 젊은이가 조(趙)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 사람들의 맵시 있는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자신의 원래 걸음걸이마저 잊어 엉금엉금 기어왔다는 고사이다.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흉내내다가는 모두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작자가 운명의 탓으로 돌리며 끝내 꿈을 접고 체념하는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김천택의 양반 지향 의식과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따른 좌절을 읽는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왕족의 후예였던 이정섭은 김천택에 대해 ‘사람됨이 밝고 유식하여 능히 시경 300편을 외우니 한갓 노래만 하는 자는 아니다’고 평가했고, 정윤경 또한 그가 ‘성률(聲律)에 능하고 문예를 닦았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는 학식과 지성을 갖추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천택의 시조 작품에는 강호의 한가로운 삶을 노래한 작품이 적지 않다. ‘백구(白鷗)야 놀라지 마라 너 잡을 나 아니로다/ 성상(聖上)이 버리시니 갈 곳 없어 예 왔노라/ 이제는 찾을 이 없으니 너를 좇아 놀리라’와 같은 노래가 그 예이다. 조선 전기 양반사대부의 강호가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깨끗한 자연에서 갈매기를 벗삼아 노니는 삶의 지향을 노래한 이 작품의 해석도 논란거리다. 그의 강호 지향을 양반 취향의 모방으로 보는 견해와 신분 갈등으로 인한 도피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양립하고 있다.
김천택의 양반 취향과 관련한 논란의 책임은 누구보다 김천택 자신에게 있다. 중간 계층의 예인으로서 양반사대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현했다면 이와 같은 시비는 없었을 것이었다.
(3) 노래같이 좋은 것을 벗님네야 아시는가 - 김수장
숙종 때 서리를 지낸 김수장은 다소 경박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노래 같이 좋고 좋은 것을 벗님네야 아시는가/ 봄 버들 여름 청풍 가을 달 겨울 설경에 필운대 소격대 탕춘대와 남북 한강 절경처에 술 안주 난만한데 좋은 벗 갖은 악기 아름다운 어떤 계집 제일 명창들이 차례로 벌여 앉아 엇걸어 불러 내니 중대엽 삭대엽은 요순(堯舜) 우탕(禹湯) 문무(文武) 같고 후정화 낙시조는 한당송이 되었는데 소용 편락은 전국(戰國)이 되어서 창칼 쓰는 솜씨를 각자 떨치어 관현성(管絃聲)에 어리었다. 공명도 부귀도 나 몰라라/ 남아(男兒)의 호기(豪氣)를 나는 좋아 하노라.’(주씨본 해동가요 548번 작품)
사시사철 좋은 날에 서울 경치 빼어난 곳에서 술 마시고 벗들과 악공, 기녀, 명창들이 가곡 한바탕을 엮어 부르며 솜씨를 다투는 질탕한 풍류의 현장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처럼 김수장의 노래는 유락(遊樂) 지향적이며 득의의 정감이 넘쳐 난다. 장복소는 김수장을 일러 ‘그는 진실로 이른 바 티끌세상의 호걸 군자이며, 김군은 대개 노래의 법통을 얻어 뜻과 기개가 속되지 않다’고 평가했다. 도시 유흥 공간에서 자신의 기예를 발휘하며 만족스럽게 살아간 김수장을 온당하게 평가한 것이다.
그는 가난하여 자주 밥그릇이 비었지만 만년까지 가악 활동을 주도했다. 1755년에는 ‘해동가요’를 편찬했고 이후 몇 번에 걸쳐 수정ㆍ증보했다. 1760년에는 서울 화개동에 노가재를 짓고 노가재 가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김천택이 가슴에 품은 이상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번뇌와 갈등의 세월을 보냈다면, 김수장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고 중인 가객으로서 예인의 삶에 자긍심마저 느꼈다.
(4) 탈속의 정취와 세속의 풍류 사이에서
김천택과 김수장의 관계와 관련해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사람이 팽팽한 라이벌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다. 근거는 첫째, 김수장은 자신이 편찬한 ‘해동가요’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료 가객이라 하더라도 ‘군(君)’자를 붙여 친밀감을 표시했는데 김천택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둘째, ‘청구영언’에서 김천택이 스스로 뽑은 30수의 작품 가운데 김수장은 절반 이상을 버리고 14수만을 인정했던 점, 김수장에 다른 가객과의 교분을 표 나게 강조한 것과 달리 김천택과의 우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 등이다. 작품 세계는 물론 기질조차 현저하게 달랐던 두 사람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서로를 폄하하면서 은근한 질시를 보내었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에 대한 이들의 관점도 크게 다르다. 김천택은 김성기(金聖器ㆍ조선 후기 가인)의 작품에 대해 ‘표표하여 세속의 일에 구애되지 않는 정취가 있다’고 평가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노래가 지향하는 목표점이기도 했다. ‘오수(午睡)를 늦게 깨어 취한 눈 열어 보니/ 밤비에 갓 핀 꽃이 그윽한 향 보내도다/ 아마도 산가(山家)에 맑은 맛이 이 좋은가 하노라’와 같은 작품을 보면 게으른 잠과 취한 눈에서는 예교를 뛰어넘은 은자의 탈속함이 엿보이고 매화 향기 그윽한 산가의 모습에서는 맑고 깨끗한 기품이 느껴진다.
김수장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평가할 때 ‘호탕(豪宕)’이나 ‘호방(豪放)’ 등의 용어를 썼다. 자신의 풍류가 추구하는 길이기도 했다. 김수장의 작품에는 농염한 도회지의 미학이 스며 있다. ‘눈썹은 그린 듯하고 입은 단사(丹砂)로 찍은 듯하다/ 날 보고 웃는 양은 햇빛이 비치는 데 이슬 맺힌 벽련화(碧蓮花)로다/ 네 부모 너 낳아 내올 때 나만 사랑하게 하도다’라는 작품을 보자. 아마도 어느 기녀에게 보내는 희롱의 노래인 듯한데 연꽃처럼 아리따운 그녀의 자태를 햇빛 아래 금세 스러질 이슬의 운명에 빗대어 절묘한 여운을 남겼다.
♣ 탈속의 정취 김천택 : "白鷗야~ 이제는 너를 좇아 놀리라" 신분 한계에 울며 현실 너머를 꿈꿔. 조선 숙종조와 영조조에 활약한 중인 가객이다.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수장보다 약간 연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노래를 잘하는 가객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문예도 겸비했다고 한다. 1728년에 당시까지 전해지던 시조 작품을 모아 곡목별, 작가별, 주제별로 안배한 최초의 가집 '청구영언'을 편찬했다. 그 자신 또한 80수 정도의 평시조 작품을 남겼다.
♣ 세속의 풍류 김수장 : "눈썹은 그린듯~ 입은 丹砂찍은듯" 도시의 유흥에 취한 호방한 삶 노래. 1690년(숙종 16년)년에 태어나 최소한 80세인 1769년까지는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병조 서리를 역임한 일이 있다. 김천택과 쌍벽을 이루는 가객으로 서울 화개동에 노가재를 짓고 노가재 가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1755년 조선조 3대 가집 중의 하나인 '해동가요'를 편찬했고, 이후 여러 차례 개정해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사설시조를 포함, 대략 130수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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