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한 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 권중현 (權重顯)  

● 권중현 (權重顯) 1854∼1934 호 경농(經農).


을사5적중 1인 
1904년 육군부장으로 러일전쟁중인 일본군 위문 공로로 일본의 훈1등 팔괘장 수여 받음
1905년 농상공부 대신
1910년 자작, 중추원 고문 
친일 한 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편저 : 《태사권공실기(太師權公實記)》 《국재선생실기(菊齋先生實記)》
 
개화파 중에서도 일본통 권중현의 초명은 재형(在衡)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충북 영동 출신인데 서자라고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일본어를 습득하여 일본 정계의 사정에 정통하였고 이러한 능력이 인정되어 개화파 중에서도 일본통으로서 매우 주목을 받았다.

1883년 부산감리서 서기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888년에는 조정의 명을 받고 일본을 직접 견학, 각종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였으며, 이때부터 일본의 문물제도에 크게 계발된 바 있어 점차로 일본 취미에 '감화'되기 시작하였다.

1891년 인천항 방판통상사무를 지냈고 주일공사로 동경에 재임중 1892년 6월에는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항해 등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기에는 내무참의 겸 군국기무처 회의원에 임명되었으나 곧 군부협판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개화파 정권에 참여한 인물 중에서도 특히 일본 공사관의 신임이 두터운 이른바 왜당(倭黨)으로 알려져 있었다.

1895년 이후에도 육군참장, 법부협판, 고등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농상공부 협판을 하다가 칙명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대연습을 참관하였으며, 돌아와서는 고종의 황제 위호 상소자가 되어서 그 공로로 정2품에 올랐다. 대한제국기에도 1898년 의정부 참찬, 찬정을 거쳐 농상공부 대신으로 승진되었고, 1899년에는 법부·농상공부 대신을 겸임하였으며 표훈원이 창설되자 부총재의 직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4년에는 육군부장으로서 당시 러일전쟁중인 일본군의 위문사가 되어 랴오양(遼陽), 뤼순(旅順)을 순방하였다. 그 공로로 일본에서 훈1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받고 다시 훈1등팔괘장(勳一等八卦章)을 받았다.

1905년 8월에 군부대신, 이어 9월에 농상공부 대신, 1906년 다시 군부대신을 역임하고 1907년 5월 박제순 친일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그도 물러났다. 이처럼 그는 개화파로 입신한 이래 한순간도 벼슬길을 떠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유배에 처하거나 망명의 위기에 처한 적이 없는 극히 평탄한 생애를 살았다. 성격이 원만하고 모가 나지 않아 적을 만드는 일이 없어서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러한 일직선상의 안전운행은 시종일관 일본과 연결되어 지낸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옳은 판단일 것이다.
 
 마침내 오적의 '반열'에 오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당시 권중현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었다. 11월 17일 이른 아침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진) 각처에 주둔해 있던 일본병은 모두 경성에 입성했다.

기병 780명, 포병 4, 5천 명, 보병 2, 3만 명이 사처를 종횡하니 우리나라 인민들은 촌보의 자유도 없었다. 그들은 궁성내외를 겹겹이 둘러싸서 대소관리도 출입하는 데 전율을 느꼈다. 하오 2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의정부 대신 한규설(韓圭卨),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탁지부 대신 민영기(閔泳綺) 등을 공사관으로 불러 자신들이 제기한 5개조에 조인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규설 등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 하야시는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협박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모두 입궐하여 어전회의를 열었으나 역시 결론은 같았다. 이에 하야시는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결코 퇴궐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일본에서 특파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및 그 수행원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와 그 부하 무관들, 다수의 보병, 기병 ,헌병, 순사, 고문관, 보좌원 등이 연달아 질풍같이 입궐하여 각 문을 파수하였다.

수옥헌(漱玉軒)의 고종은 지척에서 겹겹이 포위되었고 총칼로 철통같이 경계하면서 내정부와 궁중을 협박함이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 것을 강요하였다.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李載克)을 불러 황제 알현을 요청하였다. 황제는 이때 인후염을 앓고 있다고 하면서 만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황제가 이미 협의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면서 대신들에게 회의를 재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끝내 회의 속개를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은 골방에 가둬놓고 나머지 대신들로만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 이하영, 민영기는 여전히 '부'(否)를 쓰고 이완용은 "만약 약간 자구를 변개한다면 인준하겠다"고 하였다.

이토가 결연히 붓을 잡고 "그렇다면 마땅히 변개하자" 하고는 내키는 대로 두세 곳을 고쳐 다시 가부를 물었다. 이에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5인은 일제히 '가'(可)자를 썼다. 마침내 을사오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18일 상오 1시경. 조약이 날인된 후 일본병은 철수하고 이토, 하야시, 하세가와 등도 돌아갔다. 새벽 2시경 한규설은 풀려났고 조금 있다가 각부 대신들도 모두 모여 한바탕 방성통곡을 하였다. 외부대신 박제순도 또한 통곡을 하였다.

조약서에 날인하라고 도장을 내줄 때는 언제고 사후에 대성통곡함은 또 왜인가. 당일 도성내외의 인민들은 조약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개가 분개하여 소의문 밖 이완용의 집을 불태웠고 각부 관리들도 눈물로 탄식하였으며 각 학교 학도들도 모두 등교 거부로 항의를 표했다.

잘 알려진 바이지만 이 조약의 내용은 제1조 '한일 양국은 동아의 대세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맹약하고 이전보다 더욱 친밀할 것', 제2조 '한국의 외교사무를 확장하기 위해 외교부를 동경에 설치하여 외교사항에 관한 것은 일체 여기서 관할할 것', 제3조 '한국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사무를 감독할 것' 등이었다.

당시 고종과 황실측근들이 끊임없이 국제여론에 호소하면서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유지하려 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일단 한국을 '병합'하기 위해서는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못박은 조약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권중현은 조선 말기에는 국가개혁을 위해 모인 개화파라고 자부하였고, 대한제국기에는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고종이 황제의 지위에 올라야 한다고 상소한 주창자이면서 이번에는 또 '을사보호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보호조약'이 대한제국의 영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고 강변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의 평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세에 영합하고 특히나 일본을 따른 일생이었으며 일평생 관직이 몸에서 떠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을사조약'에 '가'(可)를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오적의 '반열'에 오른 이후 그의 앞날이 결코 평탄할 수만은 없었다.
 
을사오적 암살 미수사건
1907년 3월 5일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 을사오적 암살단은 권중현의 집이 있는 사동(寺洞) 입구에서 그가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 이때 이홍래(전직 총순)가 앞장을 섰다. 양복을 차려입은 권중현이 인력거를 타고 나오고 일본 병정 및 순사 6∼7명이 모두 총칼을 들고 그를 둘러싼 채 지나가고 있었다.

이홍래가 용기있게 앞을 가로막고 권중현의 어깨를 잡고서 "역적은 네 죄를 알렸다"라고 꾸짖으며 협대(夾袋)에 간직한 육혈포를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혈포가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권중현의 종자들이 일제히 이홍래를 붙잡았다. 이때 또한 의사 강원상(康元相)이 육혈포를 꺼내 권중현을 향해 쏘았으나 권중현이 급히 피하여 길가의 민가로 들어가 문을 닫고 몸을 숨겼다. 강원상이 또 한 발을 쏘았으나 문이 닫혀 있어 맞지 않았다. 이에 병사와 순검들이 호각을 불어 사동 부근을 파수하던 순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강원상은 몸을 날려 교동 민영휘의 집 뒷간에 숨었으나 그 집 노복들이 알려주어 순검의 추적에 잡히고 말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권중현은 5월 박제순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관직을 물러나, 모든 가족을 이끌고 표연히 추풍령 아래 산간 마을 영동으로 퇴거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이제 일체 정계에 욕심이 없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였으나 곧이어 6월 중추원 고문에 다시 임명되고 칙명으로 일본박람회 시찰을 떠나게 되었다.

6월 19일 민영기, 이지용 등과 함께 일본 도쿄로 가기 위해 부산진에 이르렀을 때 부산 진민(鎭民) 남녀 수백인이 길을 막고 통곡하였다. "대감들은 전국의 금고권(金庫權)을 일본인에게 양여하고도 부족하여 또 다시 일본인에게 본진(本鎭)의 기지를 팔아먹으니, 이 땅의 사람은 장차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하늘로 올라갑니까, 땅으로 들어갑니까. 대감들이 이미 이 땅에 도착했으니 이 무죄한 백성들은 모두 갱살(坑殺)당하거나 아니면 구제되어 살려지거나 양단 중에 결말이 내려진 후에야 대감들은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윽박지르며 여러 사람의 분노가 조수와 같이 밀어닥쳐 사태는 자못 참혹하였다.

마침 일본 순사와 조선 순검들이 이들을 급히 보호하여 위험에서 면하였다 한다. 이런 위험 속에 일본에 건너간 권중현은 그 해 12월에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고, 1908년에는 다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병합' 때는 58세의 나이로 자작을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내는 등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냈다.

                                                               ■ 서영희(서울대 강사·한국사)


원본 : 친일 한 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 권중현 (權重顯)
Posted by 상운(祥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