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28일 <친일반민족 행위자 명단> 발표!
그 속에 노덕술이 있다 !
지난 2월 28일,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로써 19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53년만에 친일파 문제를 공론화시킨 것이다.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쳤지만, 1948년 온 국민의 열망과 관심 속에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친일파를 척결하고 민족정기를 수립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특위 습격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일제 청산의 과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미 지난해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를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친일파 문제를 천착해 온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3월 10일(일요일) 밤 11시 25분, 53년만에 사라졌던 '역사의 법정'을 연다.
반민특위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일경(日警)의 호랑이'로 악명이 높았으나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으로 중용되었으며, 이후 1948년 10월 '반민특위 위원 암살 사건' 모의를 주도하는 등의 악행을 계속했다. 이렇게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던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전봉덕, 이익흥 등의 친일경찰 세력들과 함께 독재정권의 핵심 역할을 했다.
2002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에서는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을 통해 이 시대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유를 찾아본다.
●주요 내용
일경(日警)의 호랑이, 고문 경찰 노덕술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 "박처원, 이근안으로 이어지는 한국대공경찰의 맥은 노덕술로부터 시작된다."
1947년 1월 수도청장 장택상을 저격했던 한 청년의 시체가 한강 얼음 구멍에 버려졌다. 그 후 몇 달 뒤 본명 박성근, 일명 임 화라 불렸던 이 청년을 고문한 끝에 죽게 한 경찰이 검거되었다. 일명 '임 화 고문치사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장본인은 바로 수도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문에 의해 죽은 사람은 비단 박성근(임 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해방 전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고문해서 죽게 한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일제 경찰 경시를 지낸 8인 중의 한 명!
이병창(반민특위 특경대장)
- "수도청에서 비호했으니 잡는데 석 달이나 걸렸지"
1899년 울산 장생포에서 출생한 노덕술은 일제 치하에서 경시까지 오른 몇 명 안되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이다. 일본인 상점의 급사로 출발. 경남 순사 견습소를 나와 말단 경찰 생활을 시작한 노덕술. 보통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력에 집안도 그리 좋지 못했던 그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일제 시대, 동래고보 독립 시위 사건, 흑조회 김규직 고문치사 사건, 통영 M.L당 김재학 고문 사건 등에서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고문해서 죽였던 노덕술.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미군정에 의해 '수사 기술자'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중용되었다. 그리고 이후 반민특위 제3조 -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한 자-에 해당되어 검거되었지만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사건 이후, 노덕술은 보석으로 출감했고 그 이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 속에서 헌병대로 피신했다. 그에 대한 반민 재판은 종결되지 못했으며,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일제를 위한 반공에서 독재를 위한 반공으로
선우종원 (당시 검사)
- "친일파들은 큰 정치세력이었다. 이승만은 그 사람들을 데리고 끝까지 일을 했다"
이렇게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반공투사로, 이승만 정권의 전위대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정치 세력을 다지기 위해서 이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면죄부는 좌우 대립과 민족상잔의 한국 전쟁을 통해 주어진 '반공'이었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과 손 잡은 친일파들은 국회 프락치 사건, 김 구 암살 사건, 52년 부산정치 파동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에 깊숙히 개입했고, 그 속에서 노덕술은 '독립운동가를 검거하는 일제경찰'에서 '좌익을 탄압하는 반공경찰'로서 변모해갔다.
친일 민족 반역자들, '자숙'과 '반성'은 그들에게 없었다
하판락(생존하는 일제 고문경찰)
- "어디 사람이 약점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현재까지 알려졌던 노덕술의 행적은 1955년 서울 CID(육군범죄 수사단) 대장으로서의 경력이 마지막. 이후 잠적 및 사망으로 추정되던 노덕술의 행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1955년 헌병대를 그만 둔 후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나타난 것은 1960년 7.29 선거였다. 친일경찰로서 악명 높았던 그가 4.19 직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5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당히 입후보 한 것이다.
이렇게 노덕술이 국회의원 선거에 아무 거리낌없이 출마할 수 있었듯이, 이후 친일경찰들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권력의 중심부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일제 시대 경시까지 지냈던 전봉덕은 해방 이후 각종 정치 공작 사건에 깊숙히 관계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80년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법조계의 원로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그들에게 '자숙'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이광우씨를 고문, 반민특위 법정에 섰던 고문경찰 하판락.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8명 중 극히 드문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지금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친일경찰들이 대한민국 경찰로 옷만 갈아입는 과정에서, 미군정에서의 친일경찰 출신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경찰 최능진과 같은 사람들은 파면당했으며, 이후 최능진에게 돌아온 것은 '내란음모죄' 혐의와 사형집행뿐이었다.
방송 최초, 중국에서의 한간 처벌 취재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잊혀졌던 친일파 청산의 문제. 그러나 과연 우리 민족은 그 혼란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변명으로 내세울 수 있을까. 지난 해 프랑스에서의 나치 협력자 처벌 사례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 취재에 이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한국과 유사하게 좌우 대립과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공존했던 중국의 사례를 방송사상 최초로 취재했다.
종전 직후 중국은 국민당 정부와 중국공산당 정부의 대립 속에서도 일본에 협력한 한간(漢奸)들을 엄중히 재판했다. 중국에서는 종전 직후 당시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대표적인 괴뢰정부인 왕조명의 '남경정부'와 푸이의 '만주국'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벌을 실시했고, 이러한 과제를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느냐가 국민당 정부와 중국 공산당 정부간의 국공내전의 성패를 사실상 결정했던 것이다.
본 프로그램에서는 한간 처벌에 대한 당시의 기록들과 목격자, 그리고 한간 피해자 등을 만났다. 중국에서의 한간 처벌을 취재함로써 53년 전 멈춰버린 '역사의 법정'이 다시 세워져야하는 이유를 짚어보았다.
● 주요 출연자
<국내 출연자>
강신옥 : 변호사. 92년 국회 김 구 암살 진상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강원용 : 크리스챤 아카데미 회장.
선우종원 : 1952년 부산정치 파동 당시 장 면 총리 비서실장
윤경빈 : 대한광복회 회장
이기형 : 여운형 비서
이병창(반민특위 특경대장)
이원용 : 반민특위 총무과장
이항녕 : 홍익대학교 명예 총장. 일제시대 창녕 군수로 해방 후 양심 선언.
하판락 :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생존하는 고문경찰.
한현우 : 송진우 암살범. 노덕술에게 체포
<중국 출연자>
석원화 : 중국 북단대학교 국제문제 연구소 연구원
욱 풍, 욱효민 자매 : 부친 욱화신(전 강소 고등법원 재판장)이 한간에게 살해당함
임치파 : 중국항일전쟁사학자, 중국항일전쟁사 학회 이사
주애민 : 중국 흑룡강성 동북문화사연구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