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
李用圈(이용구)(1868∼1912)
1904년 진보회 조직
1904년 일진회 조직
1907년 자위단 조직하여 의병 토벌
1912년 훈1등서보장1904년 진보회 조직
1904년 일진회 조직
1907년 자위단 조직하여 의병 토벌
1912년 훈1등서보장1904년 진보회 조직
 
애국을 가장한 일진회 조직

1900년대의 일제 침략사의 중요한 일면으로서 일제침략의 추종세력인 이완용*과 같은 자가 생겨나기도 하고, 송병준*, 이용구와 같은 자들의 '일진회'(一進會)와 그 주변 단체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용구는 초명이 우필(愚弼), 후에 상옥(祥玉), 만식(萬植), 자는 대유(大蔭)였고, 호는 해산(海山), 시천교주(侍天敎主)로서의 도호는 봉암(匪庵)이었다. 1868년(고종 5) 1월 21일(음) 경북 상주군 낙동면 진두리에서 고려 벽진장군 총언의 32대손으로, 아버지 일화(一和)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몹시 가난하여 이사를 자주 하였다. 거기에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더욱 가난에 쫓기어 그는 한때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세 때 안동 권씨 종학(鐘學)의 딸과 결혼하고 노모를 봉양하면서 농사로 겨우 살아가다가 1890년 23세 때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는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에게 배워서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서군에 참가하였고, 최시형 등이 붙잡혀 처형될 무렵에는 그도 붙들려 옥에 갇혔으나 사형을 면하고 풀려났다. 제3세 교주 손병희는 최시형이 죽은 뒤 동학교도의 재수습에 노력해 보았으나 관헌의 탐색이 극심해져 그 형세가 날로 식어가 국내에서는 도저히 교세를 제대로 재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병희는 장래 동학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면 문명의 대세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세계 대세를 살펴볼 의도도 있고 해서 1901년 3월에 아우 손병흠, 이용구와 함께 일본에 망명하여 조용히 대세를 살폈다. 이용구는 먼저 손병희의 명교(命敎)를 받고 귀국하여 포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9월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주관하였다. 진보회가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국정개혁이나 갑진(甲辰) 개화운동은 일진회와는 달리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진보회의 혁신운동을 탄압하자, 이를 주시하던 일진회의 송병준은 진보회장 이용구에게 유혹적인 권고와 매수로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 이보다 앞서 러일전쟁 당시 송병준은 전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군을 배경으로, 전 독립협회원이었던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염중모(銳仲模) 등을 포섭하여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뒤이어 8월 20일에는 유신회가 일진회로 회명을 개정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칙령을 내려 경무사 신태휴(申泰休)로 하여금 그들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이 이를 막았고, 오히려 경무청 순검을 검속한다고 위협하여 일진회의 회합을 옹호하였다. 이와 같이 일진회는 처음부터 일제의 보호와 지원 속에서 발족한 단체였다. 일진회가 창립 당시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국정의 개혁'과 '독립 추구'는 명분일 뿐, 처음부터 애국을 가장한, 표리가 부동한 상투적인 구호에 불과하였다. 창립하던 해인 1904년 9월에는 일진회의 급선무로서 회원의 일심단결의 표시로 모두 단발을 하고, 모자를 쓰고, 양복 차림을 하게 하는 등 문명 개화를 급격히 서두르는 체 하면서, 10월 22일에는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헌병대장 다카야마(高山墻明) 그리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조(林權助)에게 보낸 공식서한을 보내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 군략상에 조금도 방해가 없다"며 친일색채를 공공연히 드러내었다. 실제로 진보회의 취지와 목적은 일진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는데, 그 후 송병준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이용구를 매수하고 그로 하여금 손병희의 명교를 배반케 하였으며, 13도지회 지방총장을 거쳐 1905년 12월 22일에 일진회 회장이 되게 하였다. 이 때부터 이용구는 일제의 지원하에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던 것이다. 일진회는 조직에서부터 해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우치다(內田良平)·다케다(武田範之)·스기야마(杉山茂丸) 등의 막후조종과 자문을 받았다. 일진회가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일제는 막후에서 흉계를 전수하였으며, 일진회원들은 그들의 지시를 실천하는 데 급급하였다. 또한 일진회는 표면상으로 그 운영의 재정염출 문제는 각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정규적인 회비 징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일정한 수입의 재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일진회가 창립할 당시부터 송병준이 일제의 군사 기밀비로 망동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진회가 친일적인 행위의 기치를 점차 선명히 내세움에 따라 일제도 이를 이용하려고 5만 원을 밀조하여 특별한 보호를 하였다. 러일전쟁중 일진회 회원들은 일본군을 위한 수송·정탐·노역 등을 수행하고는 일군으로부터 급료 8만 9940원을 받았다. 전쟁 종료 후 통감부는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원씩 기밀 보조금을 주었고, 그 해 5월 15일에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10만 원을, 이어 8월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廬博文)가 보조금으로 26만 원을 주었다. 결국 일진회는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히 결부되어 그 경제적인 뒷받침을 받았던 것이다.


거리낌없는 일제 앞잡이 행각

일제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한일의정서'(1904. 2. 23)와 '한일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1904. 8. 22)를 체결하고, 이른바 '고문정치 체제'를 확립하여 식민지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일진회를 이끌고 있던 이용구는 일제에 협력하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일군의 북진을 위한 함경도 지방의 군수물자 수송(1905. 6. 10∼10. 20)에 총 11만 4500백 명을 동원하였다. 이 때 사상자는 49명에 달하였다. 또한 일진회는 함경도에서부터 간도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에 침투하여 비밀정탐을 하여 일본군을 거들었다. 이 때 각종 경비(실비)는 19만 원을 초과하였는데, 고금(임금) 영수액은 겨우 6만 3530원이였고, 회원 부담액은 13만 4230원으로 총 실비 중 일군은 실비의 3분의 1에도 미달한 급여를 지불했다. 이와 같이 일진회 회원들은 하루에 20전 내외의 임금을 받으면서 일군을 위해 전장에서 생사의 지경을 헤매었다. 또한 우리 정부에서 회피하려 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1904. 10∼1905. 9) 에도 일진회는 자진해서 회원들을 동원하였다. 동원된 회원이 총 14만 9114명에 달하였으나, 그들이 받은 총임금은 겨우 2만 6410원에 불과했고, 회원부담액은 12만 2704원으로 총 임금액보다 회원의 부담액이 약 5배에 가까웠다. 공사 시간 동안 그들이 받은 임금은 한 사람당 불과 18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용구, 송병준 등은 자신의 영달과 명예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을 돕기 위해 거의 무보수로 회원들의 희생을 한 셈이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 나라를 보호국화한다는 불길한 내용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일진회는 고문인 사세(佐__態__)가 기초한 선언서에 수정을 가하여, 1904년 11월 6일에 이른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을사조약'이 강요되기에 앞서 관제 민의를 조작케 하였다. 이 선언서는 "일본의 지도보호를 받기 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로써 일진회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선언서가 발표된 지 10일 후인 17일, 드디어 일군의 위압 아래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의하여 우리 나라는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지고 결정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손병희는 긴급히 이용구를 불러 "도대체 어쩌자고 보호선언이란 망동을 하였느냐?"라고 책망하니, 이용구는 "현하의 대한은 보호독립이 시의에 적합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라고 보호독립이라는 망답을 하였다. 그러자 손병희는 "보호를 받으면 독립이 아니요, 독립을 하면 보호가 불필요한 것인데, 어떻게 보호독립이란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용구는 "선생님 걱정마십시오. 제가 이토에게 '안네기'를 걸었습니다. 이제 적당한 시기에 제가 닥치기만 하면 이토는 나가 자빠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손병희는 "이토가 어떤 사람인데 안네기에 걸리겠나, 바로 그대가 걸리면 걸렸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손병희는 이용구의 배신과 일제에 매수된 망동으로 말미암아 진보회를 조직하여 국권을 찾으려는 깊은 충정이 도리어 실패로 돌아가자, 동학혼 수습과 교도의 재조직에 착수하여 1905년 12월 1일 동학의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라 개칭하였다. 그리하여 일진회의 망동을 계속 고집하는 이용구 등 동학의 대두목들인 친일 앞잡이 62명을 출교처분하였다. 이에 이용구는 시천교를 창설하여 교조가 되었다. 한편, 일진회는 '을사조약'에 의하여 1906년 2월에 일제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1906. 3)하자, 지금까지의 일본 군부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 통감부의 휘하에서 일진회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진회 선언서와 강요된 '을사조약'에 대하여 전국민의 격분은 절정에 달하고 있는 반면에 일진회원들은 반민족적 행위의 대가로 조약이 체결된 지 2개월 뒤에는 군수로 임명되기 시작하더니 반년 뒤에는 관찰사에까지 기용되고,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뒤에 내무대신)이 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은 침략의 앞잡이를 등용함으로써 침략정책을 무난히 강행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國民新報, 1906. 6)를 통해서 온갖 친일적인 망발을 퍼뜨렸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파견문제를 계기로 하여 송병준은 이완용 친일내각과 결탁하여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였다. 동시에 이용구는 일진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궁궐 밖에서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면서 시위하게 하였다. 일본의 압력과 일제 앞잡이들에 의하여 고종이 양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격분한 시민들은 이완용의 집을 태워 버리고 부근의 파출소를 파괴하였다. 또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사를 습격하여 건물과 기계를 부수고 사원을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 또한 시위보병 제1연대의 일부 병사가 무기를 가지고 병영을 벗어나 경무청에 발포하여 일본 경찰관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민중시위와 무력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제는 '정미7조약'(1907. 7. 24)을 체결하고 통감의 내정간섭을 합리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완용 친일정부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 '보안법'(保安法)을 공포케 하여 우리 나라 국민의 정당한 의사표시와 항일운동에 규제를 가하였다. 여기에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차적으로 해산을 당하였다. 뒤이어 한국군이 해산되고 이에 항일의병이 봉기하자, 이용구는 일진회 고문인 우치다, 다케다 등의 조종 아래 의병을 진압할 이른바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여 의병토벌에 앞장을 섰으며, 심지어 의병을 폭도로 매도하였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는 일본 제국주의 이상으로 분격을 샀다.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입은 일진회원의 피해는 사살자 9천 2060명, 부상자 140명, 불에 탄 집이 360호, 재산손해액 5만 501원 31전에 이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무수한 일진회원들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10월에 일본 왕세자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도 일진회의 이용구는 그들 고문의 지시에 의하여 환영 녹문을 세우고, 토산물 헌납과 제등행렬을 하였다. 또 같이 따라온 대한 강경파인 가스라(功太郞)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용구는 갖은 망동의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앞잡이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이용구는 일왕 메이지로부터 1907년 7월 18일 '삼등서보장'(三呂瑞寶章)이라는 훈장을 받기까지 하였다.


매국의 정체가 드러나자

1909년에 이르러 일제는 사법권 및 감옥사무를 탈취하고(1909. 7. 12), 군부마저 폐지하였다. 그들은 '경찰권'마저 강탈하고(1910. 6. 24) 여기에다 '출판법'(1909. 3. 26)을 공포하여 우리 국민의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때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고, 부통감인 소네(曾__荒助)가 통감이 되었다가 곧 사임, 이듬해 5월에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통감이 되었다. 데라우치는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에 따라 7월에 '병합처리방안'을 성안하여 그들의 각의를 거쳐 이를 처결하였다. 이제 일제에게 남은 하나의 조치는 이른바 '합병'의 공표밖에 남지 않았다. 이 무렵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1909. 10. 26). 이용구는 이 기회에 그들의 친일적인 열성을 과시하려고 사죄단(索罪團)과 동아찬영회(東亞讚英會)를 조직하는 등 갖은 망동을 다하였다. 또한 이 의거를 계기로 해서 일본 국내의 대한 과격파인 가스라, 야마가타(山縣蔭朋) 등을 비롯해서 일진회의 고문인 우치다, 다케다, 스기야마 등이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조작하였다. 일제는 형식상의 법적 절차로 우리 나라 국민 스스로가 합방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날조하려고 한 것이다. 합방이 우리 국민 스스로의 의사라고 가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앞잡이인 이용구가 이끌고 있는 일진회를 시켜 거국 정당으로 만들고, 우리 나라 최대의 거국 정당으로 하여금 합방성명을 발표케 하는 방법이 첩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제는 먼저 일진회의 고문인 우치다를 시켜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과 이른바 3파연합의 제휴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의 흉계인 거국 연합이 깨어지자 일진회는 단독으로 강행할 것을 결의하고, 서울 회원 200명을 긴급 소집, 임시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회원들에게 앞서 조작한 합방성명서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며(1909. 12. 3) 매국 행위에 열을 올렸다. 이른바 1백만 회원을 호언장담하는 일진회가 실제는 몇 명이나 되는 회원이 결의내용에 찬성하였는지 극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튿날인 12월 4일에 발표한 일진회의 이른바 '합방성명서'를 비롯한 '상소문', '상통감서', '상내각서' 등은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압적으로 병탄하기 약 8개월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성명은 일제가 조작한 여론 환기수단이었다는 것이 너무나 명확했기에 이에 대한 전국적인 규모의 반대운동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일진회가 성명서를 발표한 이튿날인 12월 5일 {대한매일신보}는 그 사건에 대해 '노회선언'(奴會宣言)이라 혹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 한성부민회, 국시유세단, 흥사단 등의 여러 단체와 협의하여 '국민대연설회'의 개최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타도 일진회'의 선봉에 나서 일진회의 망언패설을 통렬히 공격하고 매국의 앞잡이 이용구, 송병준을 성토하였다. 손병희의 천도교, 각 학교 교사, 학생까지도 매국역적 일진회를 성토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평양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은 이용구를 서울 지방재판소 검사국에 고발까지 하였다.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이용구, 송병준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한편 일부 격렬한 애국청년들은 연설회와 같은 소극적인 방법으로 그들 망국 앞잡이 일당을 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암살을 감행함으로써 그들의 매국행위를 적극적으로 응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동경 유학생 김익삼(金益三), 이익선(李翼宣) 등이 중심이 되어 이용구 암살을 목적으로 귀국했다가 영등포역에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이재명(李在明), 김정익(金貞益) 등은 이용구·이완용 등을 암살키로 결의하여 이완용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용구의 일진회에 대한 이와 같은 성토와 응징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전국의 양반, 학생, 기독교인 할 것 업이 구국의 이념으로 상소, 연설 혹은 격문 등을 통하여 반대여론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이에 궁지에 몰린 이용구, 송병준 등도 일본경찰에 일진회 본부를 맡기고 진고개의 일본인 요정 청화정에 숨어 살았다. 일진회원들은 그들의 성명서가 반대 규탄 운동의 대상이 되어 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키자, 탈퇴자가 속출하여 서울에서는 90여 명이 한꺼번에 일진회를 탈퇴하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주민으로부터 어떤 해를 입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서울로 올라왔다가 서울의 정세가 오히려 더욱 험악한 것을 보고 일진회를 탈퇴하는 경우도 생겼으며, 평양지회에서는 회원이 모두 탈퇴하여 마침내 일진회 지부가 해체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반민족적 망동의 결과로 매국노

이와 같은 빗발치는 여론 속에서도 일진회의 선봉에 선 매국 앞잡이들은 당초 계획대로 반민족적 망동을 끝가지 감행하려 하였다. 12월 7일 이완용 내각에 합방건의서를 다시 제출하는가 하면, 이용구 등은 고문인 우치다와 결탁하여 일진회의 외곽단체인 한성보신사, 대한상무조합소, 국민동지찬성회 등 유명무실한 단체를 매수·사주해서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지지하도록 조작하고 일제가 우리 나라 병탄을 합리화하는 데 망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상무조합소 조합장 이학재(李學宰)라는 자가 매수되어 망동을 감행하자 분격한 종친회에서는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삭제하였고, 상무조합에서는 조합장직을 박탈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통감부측도 그냥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서울에 있는 일인 신문기자들에게도 돈 1000원을 주어 '합방찬성 거류민회'라는 것을 개최케 하였다. 또 '시국연구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언문, 결의문 등을 발표하게 하고 합방론을 찬성하도록 하였다. 일본 도쿄에서조차 '조선문제동지회'라는 것을 조작하여 합방론을 펴게 하였다. 이와 같은 찬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진회의 성명서에 대한 반향을 통해 반대 세력의 폭과 깊이를 알아챈 일제 당국은, 머지 않아 단행될 합방을 위한 최종적 마무리 작업을 용이하게 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한일병합조약'(1910. 8. 22)이 체결되고 우리 나라의 국권은 강점당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일진회는 반민족적 행위의 망동을 다하고 일제로부터 해산료 15만 원을 받고 해산당하였으며, 그들의 논공행상으로 송병준에 자작(子爵)을, 이용구에게는 10만 원을 주는 데 그쳤다. 일찍이(1907) 이용구는 이른바 한일합방이 성사되면 일진회원과 만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그 소요자금으로 3백만 원을 지급해 줄 것을 가스라 수상에게 요청한 적이 있는데, 가스라는 이것에 적극 찬의를 표명하고 "3백만 원은 물론 1천만 원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용구는 이 말을 믿고 더욱 반민족적 망동을 자행하였는데, 병합이 이루어진 마당에 일진회 해산명령이 내려지고 해산비로 겨우 15만 원이 지급되었을 뿐이니, 만주 이주란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처럼 냉혹하게 일제에게 배신당할 줄은 이용구로서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이용구는 배신의 충격이 너무나 컸던지 얼마 후 일본 스마에서 병석에 눕는 몸이 되었다.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이용구는 문병차 스마에 들른 우치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천리를 망각한 이용구는 처음부터 속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의 고민과 더불어 이용구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1912년 5월 22일 죄많은 그의 생애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일제는 이용구가 죽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거의 국장이나 다름없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왕으로부터 '훈일등서보장'(勳一呂瑞寶章)이 내려졌다. 일제에 충성을 바치면 죽어서도 이렇게 성대히 장례식을 치러 준다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용구는 죽어서까지 일제에 이용당한 매국노였던 것이다.


병합청원서 전문
##############################################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과 # # 이용구의 병합청원서 # ############################################## [ 읽기 전에 ] 다음 논설 2편은 1905년 '을사보호조역'체결로부터 1910년 '한일합방조약'체결까지 치욕스런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을사보호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 사실상 주권을 박탈당한 조약으로 '을사 오조약'이라고도 한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오늘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란 뜻이다. 이것은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이 황성 신문에 게재한 논설로서, 당시 전국에, 일제에 대한 거부와 항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병합 청원서는 '이용구'가 총리 '이완용'에게 보낸 청원서이다. '이용구는 을사조약 체결과 한일합방조역 체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던 친일 단체(일진회)의 중심 인물이었다. ♠ 을사보호조약 내용 1.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대외국관계 사무를 통치 지휘하고 재외 한국인의 이 해를 보호한다. 2.일본 정부가 한국과 외국과의 현존 조약을 실행하고 일본 정부의 승인 없이 는 외국과의 조약 또는 약속을 할 수 없다. 3.일본 정부는 한국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무를 관리한다. 4.한일간의 현존 조약은 이 조약에 저촉되지 않는 것만 유효하다. 5.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저번에 이토우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순진하게도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에 동양 삼국이 정족(鼎足:재래식 솥, 밑의 솥을 지지하는 세 발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안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하는 안녕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이었으니, 오늘날 < 그가 >한국에 온 것은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굳게 부식(扶植:어떠한 곳에 영향력이나 힘의 기틀을 마련함)하자고 할 방법을 권고하리라'고 하여 시골에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이나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아니 하였는데, 천하의 일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아니라 실상 동양 3국이 분열할 조짐을 빚어낼 것이니, 이토우 후작의 본래부터 주장했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대황제폐하의 강경하신 성의(聖意)가 거절하여 마지아니 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컨대 이토우 후작 스스로 알고 스스로 간파하였을 것이어늘.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거짓된 위협에 겁을 먹고서 머뭇거리고 벌벌떨면서 달갑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 년을 이어온 강토와 5백 년의 종묘와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국민)으로 하여금 모두 다른 사람의 노예 노릇을 하게 하였으니, 조들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 대신 박제순 및 각부 대신들은 족히 깊게 나무랄 것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관인데도 다만 부(扉)자로써만 책임을 막고서 이름을 유지하는 밑천이나 꾀하였던가. 김청음이 국서를 찢고 통곡하던 일도 하지 못했고, 정동계가 칼로 할복하던 일도 못하고서 그저 편안히 살아 남아서 세상에 나서고 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폐하를 다시 대할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를 다시 대하리오. 아 !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2천만이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의 4천 년의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끝났도다.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 병합청원서 총리 이완용에게 올리는 합방청원서 일진회장 이용구 등 1백만 회원은 2천만 국민을 대표하여 머리 숙여 재배(再拜: 두 번 절함 여기서는 간곡히 청함)하면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각하에게 삼가 말씀을 올립니다. 이용구 등이 삼가 살피건대, 우리 대한국의 자리는 대일본제국의 도움과 보호에 의해서 그 안전을 보전하며, 또한 근심할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과거로써 미루어 장래를 생각할 때, 우리 대한국의 앞길은 멀고 아득하여, 또한 깊은 근심을 금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근래 세계의 대세는 일변하여 국제 경쟁은 점점 극렬하며 또한 매우 심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기는 자는 흥하고 지는 자가 망함은 하늘의 이치요 필연의 형세인 것입니다. 인도·버마·하와이·필리핀이 멸망하는 까닭도, 안남(安南:베트남)·섬라국(暹蠣國:태국)이 쓰러지는 까닭도, 청국이 쇠퇴하는 까닭도 모두가 거기에 연유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만일 청·일전쟁 때 대일본제국이 의(義)로써 우리 위급을 구하고, 노·일전쟁 때 대일본제국이 용맹으로써 우리의 어려움을 배제함이 없었다면, 우리 대한 나라의 종묘 사직이 무슨 수로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대한 나라에 오늘이 있음은 어느 하나도 대일본제국의 도움과 보호에 인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때문에 한일협약으로써 우리의 외교·군사·사법의 3대 권한을 모두 대일본제국에 위임한 것도 이 또한 우리 사직을 보전하고 그 대본(大本)을 부지(扶持)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일에 그 혐약만을 믿고 무사태평을 만대에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오늘이 있음을 알 뿐 내일이 있음을 모르는 자라 할 것입니다. 세계의 대세는 날로 움직이고 달로 변하여 잠시도 멈추지 않거늘,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하루아침에 동아의 평화가 깨어지고, 열국의 세력균형이 무너져서, 우리 대한 나라의 위치를 뒤집음에 이른다면, 군신은 유망(膺亡)하고 사직은 폐허로 될 것임이 우(虞)나라와 상(商)나라가 망한 전철(正轍)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근년에는 버마가 안남이, 하와이가, 필리핀이 그러했던 바이라, 이것이 곧 이용구 등이 주야로 근심을 놓을 줄 몰라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이용구 등이 위로는 천리(天理)를 비추어 살피고, 아래로는 인사(人事)에 비추어 살피며 대한 나라의 앞길을 생각할 때, 우리 사직과 백성을 보전하여 영원케 하는 길은 다만 일한 합방을 실행함에 있을 뿐이라 하겠습니다. 만일 다른 계책이 있을지라도 간사하게 변하는 모책(模策)이 시대적 급무에 부응해서 큰 도리에 맞을 까닭이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그것을 시론(試論)해보려 하거니와, 이용구 등이 삼가 대일본제국이 우리를 대하는 참 뜻을 살펴볼 때, 청·일전쟁에서나 노·일전쟁에서나 아직껏 그 덕을 변동시킨 적이 없으며, 일정한 방침이 시종 변색된 바 없었습니다. 일본은 말하되 우리 한국의 사직과 인민을 보전하며, 동양의 대국적 평화를 담보한다 하였습니다. 그 엄정한 믿음성과 넘쳐흐르는 어질음, 또한 천황폐하께옵서는 우리 황제폐하와 황태자전하를 예우하시는 넓고 두터운 은혜, 옥처럼 밝고 환한 은혜와 사랑을 보면 충분히 알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우리 대한 나라는 먼저 오늘에 있어서 우리 측이 스스로 이것을제언하고 군신·상하가 덕을 하나로 의심하지 않으며, 이로써 대일본 천황에 의뢰하여 합방을 조성하고 일한일가(日韓一家), 우리 황실로 하여금 길이 만대의 존영을 누리게 하고, 우리 인민으로 하여금 함께 1등국의 줄에 오르게 하며, 이리하여 우리의 신의와 맹서가 또한 해와같이 밝은 바 있다면, 대일본 천황폐하의 성의를 미루어 살필 때 그와 같거늘, 우리의 사직에는 반드시 동화(同和)로써 날로 더하는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양쪽 날개로써 몸을 움직이고 양쪽 바퀴로써 수레를 끈다면 우리 국권이 어찌 떨치지 않을 것이며, 동아의 형세를 감당치 못하리라고 근심할 바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우리와 일본은 지리에서 서로 일치하며, 인종에서 서로일치하며, 역사에서 서로 일치하며, 종교에서 서로 일치하며, 글자와 학문에서 서로 일치하며, 정치에서 서로 일치합니다. 이것을 나누면 약한 나무로서 휘기 쉽고, 합치면 엄연한 일대 강국입니다. 하물며 일본을 이미 먼저 세계 1등국의 줄에 들지 않았습니까. 그 옛날 독일연방은 분열해 프랑스에게 유린되었고, 통합해서 패권을 유럽대륙에 떨쳤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일한합방이란 것이 우리의 사직과 인민을 보전하며 그럼으로써 깊이 동방 안녕의 근거를 굳히고, 아시아 국면의 평화를 보장하며,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는 소이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대한의 위치는 이미 정해졌으며, 대일본국의 성(誠)과 신(信)의 이미 우리 2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말씀을 각하에게 올리오니, 각하께서는 청하건대 백관을 대표하여 이를 황제폐하에게 주상하소서. 우리나라의 안위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용구 등의 혈성(血誠)로써 지지를 다햐겠습니다. 이용구 등은 충성의 지극한 성심을 미처 가누지 못하는 바입니다.
1909년 12월 4일 일진회장 이용구 등 1백만 인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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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사키 소오지 지음 / 최혜주 옮김 2001/12/25
다카사키 소오지 지음 / 최혜주 옮김

① 1948년경 스즈키 망언

일본의 조선통치가 구미 강국의 식민지 통치보다 심하게 조선인을 노예적으로 착취하고 그 행복을 유린했다는 논고에 대해서는 정당한 항변의 여지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뜻대로 안된 많은 실패도 있지만, 일본의 조선통치는 이상으로서 이른바 식민지 지배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중략)
제 1 차 세계대전 전야, 20세기 초두의 세계정세 및 세계사조와 그 때까지의 조선의 상태를 돌아볼 때,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이 책망을 들어야 할 탐욕스런 팽창정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
조선 경제가 그토록 비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중략)
재정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 보면 플러스이다.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 재외재산조사회 편,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 제11책, 대장성, 발행년월일 불명, 2,4,25,57쪽) ※ 1947년 대장성 내에 설치된 재외재산조사회는 1950년에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라는 이름의 전 35책(총목록을 합치면 36책)의 책을 비밀리에 출판했다. 이것은 조선, 대만, 가라후토(사할린)등에서 일본인이 형성했고 패전과 함께 연합국에 의해 접수된 재산의 실태를 밝힌 것이었다. 일본은 이것을 근거로 이들 지역에서 배상을 요구해 올 경우, 그것을 거부하거나 삭감했던 것이다.
조선편은 전 10책으로, 전쟁 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대륙병참기지론'이나 '북선(北鮮)루트론'을 제창한, 조선론의 권위자 스즈키 다케오(전쟁 후에는 도쿄대학 교수)가 편집했다. 그 중에서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은 조선편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출판되어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망언으로서 문제가 된 적은 없지만, 일본 보수파의 조선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② 1949년 외무성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

(1)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시정(施政)은 결코 이른바 식민지에 대한 착취정치라고 인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중략) 각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과 근대화는 오로지 일본측의 공헌에 의한다.(중략)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는 '반출'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중략)
(2) 다음으로 이들 지역에서 긴 세월에 걸쳐 평화적인 생업을 영위하고 있던 일본국민은 전부 추방당했고, 일본 자산은 공유재산뿐 아니라 그들의 노력으로 평화리에 축적된 사유재산까지 이미 사실상 박탈당했으며, (중략) 이같은 가혹한 조치는 정말로 국제관례상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3) (중략) 이들 지역은 모두 당시로는 국제법이나 국제관례상 보통이라고 인정받고 있던 방식으로 취득되고, 세계각국도 오랫동안 일본령으로 승인하고 있던 것으로, 일본으로서는 이들 지역을 포기하는 데 이의는 없지만, 과거의 이들 지역의 취득 및 보유를 가지고 국제적 범죄로 보고, 징벌적 의도를 배경으로 이들 지역의 분리와 관련된 제반 문제 해결의 지도원칙으로 삼으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일이다.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마이크로필름, "대일 평화조약관계준비 연구관계" 제5권, 740-742) ※ 이것은 불과 5쪽의 팜플렛을 발췌한 것이다. "문서가 작성된 쇼와24년 당시는 대일 강화에 관하여 각국으로부터 배상문제 등 여러 가지 요구가 나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미국측에 참고자료로서 제출한" 것이다. <<아사히신문>> 1982년 9월 20일자)
자료를 조선에 맞춰 읽어보면, 일본은 조선에서 좋은 일도 했고, 한국병합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셈이 된다. 이것도 1982년 9월 20일까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망언으로 문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러나 정부관계자의 조선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는 앞의 자료와 같다.

③ 1953년 구보다 망언

구보다 간이치로 : 일본측으로서는 대한청구권이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보하여 접근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갖고 있다. 당신들에게는 청구권이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은 곤란하다.

홍 진기 :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일본이 말하고 있는 청구권과 한국이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법률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한국이 말하는 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따르는 청산문제이다.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이다. 성질이 다른 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측이 그러한 말을 한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일본측의 청구권도 법률문제이다.

홍 : 한국의 국회에서는 수원의 학살사건, 한일합병조약 직후의 학살사건, 또는 36년간의 통치동안 치안유지법으로 투옥, 사망한 점 등에 대한 청구권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또 조선쌀을 세계시장보다 부당하게 싼 값으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가격의 반환을 요구하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본이 이런 청구권을 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순법률적인 청구권만을 내고, 정치적 색채가 있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이 36년간의 축적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한국측으로서도 36년간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는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한국측에서 국회의 의견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청구권을 낸다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이 당시 많은 해는 2천만엔도 내놓았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한국측의 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측 각 위원들 흥분한 표정으로 각자 발언한다.)

홍 : 당신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말하는 것인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보다 : 좋아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견으로서 말하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장 경근 : 천만엔이나 2천만엔의 보조는 한국인을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돈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만들지 않았는가.

유 태하 : 구보다씨, 그런 말을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일본측에서 옛날 일은 흘려보내고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말으 한다면 다르지만.

구보다 : 서로 장래의 일을 생각해서 하고 싶다. 법률적인 청구권 문제로 말을 진행하고 싶다.

홍 : 법률적이라고 해도, 당시 일본인의 재산이 한국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축적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구보다 : 자세한 것을 말하려면 한이 없다. 다만 36년간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기구하에서 평등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시대를 생각하기 바란다.

홍 : 무엇 때문에 카이로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구보다 : 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중의 흥분한 심리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나는 노예라고 생각지 않는다.

장 : 일본이 재산을 불린 것은 투자나 운영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본인이 토지를 산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총독부의 정책으로 산 것이지 기회균등은 아니었다.

구보다 : 일본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선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홍 : 구보다씨는 서로 도와주는 정신이라든가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우리는 양보할 여지가 없다.

('외무성의 회의의사록에 남겨진 구보다와 한국측 대표간의 응수', <<아사히신문>> 1953년 10월 22일자)

※ 10월 15일에 열린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분과위원회 제2회 회합에서,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는 위와같이 발언해 한국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내용이 <앞의 1,2번>과 비슷한 것은 구보다가 그 자료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보다 발언에 대해 오카자키(岡崎勝男)외무장관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말했을 뿐이다."라고 옹호했다. 한편 변영태 외무장관은 "한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은 그들 일본인이 한국에 대한 침략근성을 아직까지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는 등, 제3차 한일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제4차 한일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1957년 일본측은 구보다 발언을 '철회'했지만, '잘못'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때 도중에서 오프 더 레코드가 되었는데도 외무성이 회의록이 <<아시히신문>>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문제삼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④ 1963년 이케다 망언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제 43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5호, 16쪽)

※ 제6차 한일회담의 예비절충이 이루어지고 있던 1월 26일, 공산당의 노사카(野坂參三)가 "조선인민에 대한 이러한 비도덕적인 여러 가지[식민지화나 노예노동의 강요]에 대해서 총리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어떤지, 이 단상에서 분명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이케다(池田勇人) 수상의 답변이다.

⑤ 1963년 시이나 발언

[숙부 고토 신페이(後소新平)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도 있다. 세계의 조류가 그러했고,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서구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 이외에는 없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이것은 일개 역사학도로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역시 일본의 지향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의 운명공동체이며, 그 해방, 독립, 그리고 공존공영이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 신페이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동화와 정치", 동양정치경제연구소, 1963, 58~59쪽)

※ 이 망언으로부터 2년 뒤에 외무장관이 된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도착성명에서 "양국간의 오랜 역사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음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 깊이 반성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는 그것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 자도 있었지만, 의문을 갖는 자도 적지 않았다. <<한국일보>> 2월 18일자는 시이나의 도착성명과 그 저작인 "동화와 정치"를 다루면서, "유감과 반성"이 어떻게 "영광"과 일치하는 것일까. 시이나 자신은 생각한 끝에 말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말만으로 한국국민이 [시이나가] 진정으로 반성했다고 생각할지 어떨지 의문이다."라고 썼다. 사실 시이나는 결코 본심에서 '깊이 반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눈앞에 둔 '한국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기(당시 서울에 파견되어 있던 외무성 조사관 마에다의 말)위해 '깊은 반성'을 해 보인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⑥ 1965년 다카쓰기 망언

36년간은 착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중략)
"일본은 조선에 대해 36년간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 교섭은 쌍방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감정으로서도 사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20년쯤 더 일본과 붙어 있었다면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패전으로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만의 경우는 성공한 예이지만...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말하면 상대편도 할 말은 있겠지만, 우리쪽에는 할 말이 더 많다. 그러므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일본은 친척이 된 기분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 좋다.

(<<아카하타>> 1965년 1월 21일자)

※ 1월 7일,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인 다카쓰기 신이치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다카쓰기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외무성 간부의 충고를 받고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로 해 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했지만, <<아카하타>>가 폭로함으로써 큰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다카쓰기는 한일회담이 중단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그것은 공산계의 작위적 보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이코노미스트>> 2월 9일호)라고 줄곧 발뺌했다. <<아카하타>>의 보도가 사실이었다는 것은 한국측 수석대표였던 김동조의 "한일의 화해-한일교섭 14년의 기록"(사이마루 출판회, 1993년)에서도 분명하다. 그런데 다카쓰기에게 발뺌하도록 권고한 것은 다름아닌 김동조였다.

⑦1965년 사토 망언

1)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사로 이 조약[한국합병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50회 국회 중의원 한일특별위원회의록, 제10호, 2쪽)
2) 이것이 여러가지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조약인 한 이것은 양자의 완전한 의사,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음은 굳이 제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50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8호, 18쪽)

※ 1)은 11월 5일 사회당의 이시바시 마사시(石較政강)의 "병합에 관한 조약, 이것은 대등한 입장에서 자주적으로 체결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신지 어떤지"라는 질문에 대한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답변이다.
이것에 이어 11월 19일의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공명당의 구로야나기가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라고 질문했지만, 답변은 2)와 같은 것이었다.
사토 수상의 견해는 구 뒤로도 유지되어, "병합조약은 합의에 따라 체결되었다."라는 망언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수상의 견해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때이다.

⑧ 1974년 다나카 망언

과거 일본과 조선반도의 합방시대가 길었습니다만, 그 후 한국이나 그밖의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면 긴 합방의 역사에서 지금도 민족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김양식을 가지고 와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일본의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는 지금까지도 지켜가는 훌륭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정말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세안 5개국 순방에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1월 24일에 열린 중의원 본회의에서 공명당의 다케이라가 일본에 대한 경제협력 방식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것에 대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의 답변이다.
일본이 김양식을 가르쳤다,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한국은 정식으로 항의하고 일본정부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더구나 한양대학 교수였던 리영희씨는 '다나카 망언을 생각한다'(<<세대>> 5월호, 일본어 역은 <<세계>> 9월호)라는 글을 발표해, 다나카 망언을 비판하면서도 "같은 정도의 잘못이 한국인 자신에게도 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것을 열등한 것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들이 식민지 통치시대에 우리에게 실시한 교육을 자랑하고, 그것이 한국인에게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방된 순간부터 독립민족으로서 스스로를 되찾는 과정에서 꼭 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의 존립 이유를 부정한 식민지 교육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는 해가 될지언정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실증해 보이는 데 있었을 것이다. 부정을 부정함으로써만 노예에서 주인으로 된 자아를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했는가?(중략) 노예가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작업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젖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일이 틀림없는 현실인 이상,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한국인 내지 한국에 유익했다는 다나카의 말을 어떻게 해서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말을 앞에 두고, 일본인이 "한국인에게도 잘못이 있다"라는 투로 말한다면, 그것은 골계(滑稽)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⑨ 1979년 사쿠라다 망언

1)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중략) 36년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데 있다. (중략) 당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고 있다.

(<<동아일보>> 1979년 3월 23일자)

2) 깊이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혁명정부의 경제발전은 일본 교육의 결과이다. (중략) 일본은 한국인의 문맹퇴치에 기여한 바 크다. (중략) 소학교 1학년 때, 한일합방 축하행렬에 붙어서 일장기를 흔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편집부, '사쿠라다 망언' - 일본 정재계의 대한인식을 묻는다.' <<세계>> 1979년 6월호, 286쪽)

※ 1979년 3월 21일, 경단련 회장인 사쿠라다는 한국경영자협회 주최의 국제세미나에서 위와같이 발언했다. 그리하여 동국대학교 최성실 교수 등이 "일본은 과거 한국인에게 경제 과학 기술 등 중요한 분야의 교육기회를 봉쇄하고, 우수한 인재를 매장시켜 발전을 저해했다."라고 반박하자, 사쿠라다는 "잘 모르는 것을 말한 것 같다."(<<동아일보>> 23일자)라고 사죄했다.
3월 27일자 <<동아일보>>가 사쿠라다 망언은 구보다 망언이나 다카쓰기 망언보다 "대한 경시의 정도가 더 심하다"라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역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의 잡지 <<세계>> 6월호도 사카라다 망언을 비판하며, 일본 정재계 인사들의 대한(對韓) 의식을 문제삼고 있다.

⑩ 1982년 마쯔노 망언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일병합도 한국에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의 당시 국내정세등도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일본으로서도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사히신문>> 1982년 7월 24일자)

※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한국이나 북한, 중국 등이 한창 비판하고 있을 때인 7월 23일, 마쯔노(松野幸泰) 국토청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발언해, 불에 기름을 끼얹는 양상이 되었다.
<<동아일보>> 8월 9일자에 따르면, 마쯔노는 "이토 히로부미를 원흉이라고 부르고, 그 살인범인 안중근을 영웅으로 취급하고 있다"라거나, "한일병합은 정당하다"(7월 27일)라는 망언도 일삼고 있다.

⑪ 1986년 7월 후지오 망언 (제1차)

그것은 전 내각에서 끝난 것이므로 더이상의 일은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불평을 늘어놓는 자는 세계사에서 그같은 일을 한 적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쪽이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도 인정해야지.

(<<아사히신문>> 1986년 7월 27일자)

※ 7월 25일의 기자회견에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편집한 고교 일본사 교과서 '신편 일본사'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후지오 마사유키(?尾正行) 문부장관은 위와 같이 대답했다. 한국측의 항의에 대해 주한 일본공사는 나카소네 수상도 "본건 발언이 외국에 오해와 불쾌감을 주었다면 매우 유감이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했고, 31일에는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8월 22일에 열린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그 망언으로 문제가 된 후지오는, "문부대신으로서 말투가 부적당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나의 부덕이다. 사과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가 개인으로서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답변했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일본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망언의 전형이다.

⑫ 1986년 10월 후지오 망언 (제2차)

가령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침략을 받은 측에도 여러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청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influence)이라는 것은 왠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 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뿌리를 자르려고 하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방언대신(放言大臣) 크게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

※ 9월 6일자 각 언론은 후지오 문부장관이 동월 10일에 발매되는 <<문예춘추>> 10월호에 이상과 같이 발언했다고 소개했다. 조선인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투의 망언의 전형이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 간의 담판과 합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초보적인 오류로, 1910년에 체결된 한국병합조약은 한국통감 데라우찌와 한국 수상 이완용 사이에 체결된 것이었다. 이토와 고종 사이의 담판으로 체결된 것은 1905년의 한국보호조약이다.
더구나 "합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선사가인 가지무라가 '역사를 굽혀서는 안된다-일한합방의 진상'(<<아사히신문>> 9월10일자 석간)에서 비판하고 있다. 또 "이것을 방치해 두었더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러시아사가인 와다 하루키가 '한국정세와 우리들'(<<세계>> 1987년 3월호)에서 비판했다. 후지오 망언에 대한 일본국민의 비판의 목소리도 각 신문의 투서란을 메웠다.
9월 6일 재일 한국공사는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라면서 사실상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8일에는 한국 외무장관이 "매우 유감"이라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편 일본의 각 신문도 7일자 사설에서, '후지오 발언은 그냥 보아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의 자질이 문제시되는 후지오 발언'(<<요미우리신문>>), '외교센스가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니혼게이자이신문>>)라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후지오의 자진 사퇴를 기대하는 눈치가 많았지만, 후지오는 그것을 거부하다가 8일에 파면되었다. 각료의 파면은 33년만의 일이었다.

9일자 <<산케이신문>>은 '주장'에서, "뒤늦게 근대화한 일본은 '침략'전쟁의 책임에 대해 미국 및 영국을 비난할 만한 '서푼어치의 이유'는 적어도 있다. 그러나 한국 등 아시아에 대해서는 일리(一厘)도 없다. 후지오 발언에 대해서는 그 분별을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면서, "후지오 발언의 기조는 나카소네 수상의 지론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후지오씨의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문부장관으로 등용한 수상의 정치책임도 동시에 불문에 부칠 수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3일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가와마다가 "조약법에 관한 빈조약에는, 협박이나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는데, 한일병합조약은 본래부터 무효였던 것이 아닌가. 수상은 그 점을 인식해서 후지오 씨를 파면했는가?"라고 질문한 데 대해, 나카소네 수상은 "국교회복 당시, 한국과 일본이 협의하여 병합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사실이 양쪽이 확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당시 상당히 위압적인 배경을 가지고 체결했다고 해석하고 있고, 후지오 발언은 온당함을 상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라고 답변하고 있다.(<<아사히신문>>) 10월 4일자)
더욱이 파면에 대해서는 자민당 강경파의 젊은 중견들이 만든 국가기본문제동지회(좌장 가메이 의원)가 "한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했다"라고 반발했다.

⑬ 1986년 11월 후지오 망언 (제3차)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중략)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大勳)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방언대신' 다시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1월호)

※ 문부장관에서 파면당한 후지오 마사유키는, 자신의 불만과 신념을 다시 <<문예춘추>> 지상에 털어놓았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라는 식의 망언이 총동원되었다. 더구나 이 잡지는 '후지오 발언의 파문'이라는 특집에서 후지오의 지론을 옹호했다. 10월 10일 발매된 이 잡지의 내용은 10월 5일 각 신문에 소개되었다. 그러자 아이치대학의 우부가타 교수 등의 호소로 10월 23일에 시민집회 '후지오 발언 문제를 생각한다 - 한일병합조약을 다시 묻는다'가 열렸다.
또 "책임의 일부는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망언에 대해, 지식인 102명은 그 날 낸 "국민과 국회에 호소하는 '후지오 발언 문제에 대해서'"라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한국 조선인이 식민지화된 자신들의 허약함을 반성하는 것과,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한 일본의 행위가 비판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은 침략자와 침략당한 자, 범한 자와 당한 자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는 것과 같아, 죽인 자, 범한 자를 면죄하려는 의논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지오는 각지에서 강연을 하며, "(일본은) 한국에도 산업을 일으키는 등 선의로 통치했다."라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⑭ 1990년 오자와 망언

(천황폐하의 '말씀'내용은) 발을 들여놓고 들여놓지 않고의 문제가 아닌 만큼, 우리가 의논할 것은 아니다. 천황폐하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과거 식민지 지배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면 등에서) 노력하고 있다. 이 이상 땅에 엎드려 조아릴 필요가 있는가. 상식선도 있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눈을 돌려야 한다.
천황이 정치에 연루되어서는 안된다. 천황의 이름을 빌려 권위로서 사용한 것이 과거 역사의 잘못이다. 그것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아사히신문>> 1990년 5월 16일자 석간)

※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천황의 '말씀'이 문제가 되었을 때(14일)의 망언이다. 이것은 당초 자민당의 수뇌의 발언으로 소개되었는데, 16일 오자와 이치로 자민당 간사장은 자신의 발언임을 인정하면서, 이 발언에 대해 한국측이 강하게 반발해 양국관계가 험악해진데 대해 진사(陳謝)했다.
그러나 6월 1일자 <<주간 아사히>>에서는 "기본적인 것은 천황을 정치의 무대로 내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땅에 엎드려 조아릴 필요가 없다'는 등의 말은 애초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략) 예를 들어 (천황을 정치의 무대로 끌어내려고 한다면) 머리를 숙이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니 더 숙여라, 또는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머리를 숙여라든지, 손을 짚고 사죄하다가 나중에는 땅에 엎드려 조아려야 하는 사태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이 양국민의 감정적 대립을 초래할 뿐, 한일우호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밝혔다.

⑮ 1995년 와타나베 망언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중략)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략)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으로 되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후처리를) 전부 다시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각오가 없는데 다시 꺼내면 곤란하다.

(<<마이니치신문>> 1995년 6월 4일자)

※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무장관이 6월 3일에 열린 자민당 토치기현 연합회의 대회인사나 그 후의 기자회견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동아일보>> 6월 6일자에 따르면,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부흥을 위해 협력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합방은) 국제적으로도 합법적이라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식민지배'라고 하지만, 법률적으로는 국회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6일자 사설에서 '망언'이라 비판하고, <<아사히신문>>도 6일자 사설 '역사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정치가'에서 "우리도 놀라 기가막혔다."라고 썼다.
한국의 이홍구 총리는 "정부와 국민 모두가 충격과 우려를 금할 수 없고, 일본측도 이러한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을 그만두고 깊은 반성의 계기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와타나베는 5일, '원만히'라는 부분을 취소하고 사과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 5일에 열린 참의원 본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시오카는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조약국회(<7번>)에서 소개한 사토답변)이래, 조선병합조약을 한일이 자유의사,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라는 입장과 인식을 거듭 표명해 왔습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민당 정부 하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어 온 이 입장과 인식을 단호히 전환해, 조선병합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 지배 하에 둔 것을 인정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다.
그에 대해 무라야마 수상이 "한국병합조약은 당시 국제관계 등의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제134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4호, 19쪽)라고 대답하여, 한국 및 북한 등으로부터 크게 비판받았다. 한국 외무장관은 사토 답변의 재검토와 한국병합조약의 무효확인을 요구했다.
10월 13일 무라야마 수상은 국내외의 비판에 대해 생각한 점이 있었던지, 다음과 같이 1965년의 사토 답변을 정정하고 정부견해를 일부 수정했다.
"당시의 일이므로 위협과 강박(협박의 잘못)이 있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서 있었다 없었다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시 상황을 생각할 때, 결코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134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의록, 제4호, 15쪽)
그리고 1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병합조약은 "민족의 자결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의 조약이다."라고 쓰고 있다. 30년만의 일보 진전이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유효'라는 입장은 변경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국 국회는 16일 본회의에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늑약(勒約)에 대한 일본의 정확한 역사인식을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일본은 한국과 북한으로부터 병합조약 당초부터의 무효 확인을 줄곧 재촉받고 있다.

16. 1996년 에토 망언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에 도장을 찍은 수상 이완용.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이다. 일본도 나빴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했으니까,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결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1주일 후에 (조약을) 발표했다.(중략)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도 했습니다. 고등농림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정비, 산에 나무도 심었다.(중략)
그러나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창씨개명.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이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본래 이름으로 육군중장이 된 사람도 있다.(중략)
일본인이 보면 거기(조선반도)는 결코 식민지라는 의식은 없었다. 내지, 외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지의 수준으로 높이려 한 것이지요. 이 왕조의 금은보화를 일본으로 갖고 가서 장식할 생각은 없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세계 속에서 날치기 했지만, 일본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중략)
일본 경제계나 예능계에 한국인 크게 활약하고 있다. M H, M K, I H 모두 그렇다.(주: 발언은 실명) 야구선수도 L의 사장도 모두 그렇다. 아카사카, 록본기에 가보라. 한국사람들 뿐이다. 빠찡코점의 7할은 조선반도 출신이다. 일본은 그런 일은 안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모든 계층에서 한국이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일병합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간 문춘>> 1995년 11월 23일호)

※ 10월 11일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오프 더 레코드로 이상과 같이 말했다. 잡지 <<선택>>, 이어 <<동아일보>>에 보도되어 문제가 되었다. <<동아일보>> 11월 8일자에 따르면, 에토는 "한일병합은 강제적이었다는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은 틀린 것이다"라고도 말했다는 것이다. 8일에 발언을 취소하며 병합조약은 "강제적으로 조인"된 것을 인정했고, 10일에는 " '좋은 일도 했다'는 내 생각은 잘못이었다. 독선적인 생각이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으로부터 사임요구를 받았지만, 무라야마 수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야당으로부터 사임결의안이 제출되자, 국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 영수의 권고로 에토는 13일에 사임했다.
역사학자인 유영렬은 "철도는 상품과 군대를 운반하는 침략을 위한 상징이었다."라는 것. "합방이전에 이미 대학교육이 시작되었다."라는 사실을 들어 에토 망언을 비판하고 있다.(<<동아일보>> 12월 8일자)
에토는 1996년 1월 4일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앞서의 발언에 대해 "왜 반성해야만 하는가. 일본은 그렇게 창피한 나라는 아니다."라는 등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한편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 마찌다는 에토 망언에 대해 언급하고, "대국의 국민답게, 맞은 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한일 양국의 골도 조금씩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떤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마이니치신문>> 1996년 1월 24일자)

맺음말

이상에서 소개한 것처럼,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 이외의 망언도 많다. 1958년의 사와다 망언은 그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부쳐 (38도선을) 거기에 설치하는 것이 일본외교의 임무이자 한일교섭의 목적이다. 38도선이 부산까지 내려오면, 일본은 당장 캄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은 지하에 잠든 조선관계 선배들의 영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 일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부치는 문제는 내가 유엔에 있을 때, 지금 한일회담 한국측 대표인 임병직과 굳게 약속했다. 한일회담의 구체적인 의제는 사소한 것들로, 우리는 이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아카하타>> 1958년 6월 21일자)
이러한 생각은 당시 '부산적기론'이란 불렸다. 6월 11일 제4차 한일회담 수석대표 사와다는 '한일회담의 정부대표를 둘러싼 모임'에서 위와 같이 연설했다. 그러나 <<조선통신>>이 전한 것을 <<아카하타>>가 소개했을 뿐, 일반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 6월 24일에 열린 제29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이마가 사와다 망언의 속기록과 테이프에 의거해, 사와다는 "이승만이 38도선을 압록강 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데는 일본인이 무기를 들고 응원하는 대신, 한일회담에서 될 수 있는 한 양보해 이를 원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문제삼자(제3호 의사록, 8쪽), 기시 수상은 "사와다 전권이 여러 장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모두 정부의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피했다. 25일에 열린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사회당의 다나카가 사와다 대표의 파면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노의 망언도 유명하다. 1963년 12월, 방한에 앞서 "박 대통령과 나는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라고 말하고 방한중에 "한국에는 원양어업이 필요없다."고 말해, 한국의 야당이나 국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이다.(<<아사히신문>> 1963년 12월 20일자)

1995년 12월에 다시 오자와 신진당 간사장이, "나는 한국에 대해 '철저한 반일교육을 시켜놓고 무슨 장래 우호냐. 끝까지 증오를 잊지 못하게 하면, 남는 것은 미움뿐이다.'라고 항시 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서로 마주보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해(<<아사히신문>> 12월 9일자), 한국 외무부 대변인으로부터 "한국 교육이 정치적 의도에 따른 반일교육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비판받았다.(<<아사히신문>> 12월 20일자)

그런데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된 망언이, ① "병합조약은 합의에 의해 체결되었다.", ② "조선에서 좋은 일도 했다.", ③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라는 세가지임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①은 1995년에 이르러 겨우 정부견해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러나 ②와 ③은 아직 명확히 부정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 에토 망언 등이 이어지는 토양이 있다. 그리고 새로 나온 오자와 망언은, 이들 망언을 망언으로 인식할 수 없는 정치가가 지금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망언이 망언인 이유를 분명히 하는 역사연구를 계속함으로써, 그 성과를 국민 일반의 역사인식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교육이 새롭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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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완섭 "독도 일본에 돌려줘라" 망언
[고뉴스   2005-03-16 19:32:30]  
(고뉴스=최형우 기자) 친일인사 김완섭 명의의 "양심불량 대한민국! 독도는 일본에 돌려줘라"라는 글이 한 정치 사이트에 게재되어 메가톤급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도에 대한 시마네현 망발로 국민의 가슴이 짓무를대로 짓무른 상태에서 이 망언은 그야말로 모든 한국인의 가슴을 분노의 불길로 태울 것 같다.

이 글의 작성자로 명기된 김완섭은 "한국인 여러분,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에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중국 이렇게 세 나라밖에 없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는 다케시마를 일본 땅으로 생각하고 있고 한국이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 불법 점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며 한국인의 자긍심인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습니다. 역사를 날조해 착한 일본인들을 마치 강도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 민족의 황금기였던 일제시대를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역사에 관한 한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세뇌 당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 속아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분해서 며칠동안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을 속여온 것으로 몰아가며 착한 일본인이라는 민망한 말을 거론한다.

김씨는 한승조나 지만원의 망언을 뺨치는 더 기가 막힌 막말을 해댄다.

한승조가 식민지 지배를 '축복'이라고 한 말보다 더 파렴치한 '황금기'라는 망언을 하고 있다. 그는 한술 더 떠 진실을 알게된다면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이 망언을 올린 시각은 3월16일 오후. 김완섭은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이 같은 한국의 역사 날조와 반일세뇌교육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진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한국 정부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는 반일단체들의 잇따른 고소고발과 경검찰의 편파적인 수사, 테러 등으로 인해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라며 글을 쓴 이유가 자신의 저서를 선전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을 표출하고 있다.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라는 망언을 서슴없이 뱉는 망언은 한승조와 지만원을 휠씬 능가한다.

독도 앞에서 국민들이 대성통곡하는 이 마당에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독도를 팔아먹는 이 매국행위에 심판이 내려지기를 기대한다. (김완섭 망언 전문은 원문보기 참조)
[김완섭 망언 전문] 2005-03-16(15:21:54)

양심불량 대한민국! 독도는 일본에 돌려줘라.

한국인 여러분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에서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중국 이렇게 세 나라밖에 없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는 다케시마를 일본땅으로 생각하고 있고 한국이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 불법점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습니다.
역사를 날조해 착한 일본인들을 마치 강도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 민족의 황금기였던 일제시대를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역사에 관한한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세뇌당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 속아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분해서 며칠동안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이같은 한국의 역사날조와 반일세뇌교육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진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한국 정부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는 반일단체들의 잇따른 고소고발과 경검찰의 편파적인 수사, 테러 등으로 인해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서점들이 모두 판매금지시키고 매장에서 철수시켰기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신판매만이 거의 유일한 판매방법입니다.
이 책을 구입하고자 하시는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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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은 1권당 2만원입니다.
발송료는 무료입니다.
계좌번호: 농협 000-00-000000 김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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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자민당 간사장대리가 "종군위안부는 허구"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차세대 총리감 1순위로 거론되는 우파 성향의 정치인이다.
아베 간사장대리는 지난달 27일 도쿄의 메이지진구(明治神宮) 회관에서 열린 지방의원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발언했다. 아베는 "종군위안부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지어낸 이야기다. 아사히(朝日)신문이 먼저 이를 보도해 독주했다. 일본 언론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요시다는 한반도에서 위안부 강제 연행에 관여했던 일본인이다. 1980년대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하고 참회했다.
아베는 또 후쇼샤(扶桑社)의 일제 침략 역사 왜곡 교과서와 관련, "지역 교육위원회가 조용한 분위기에서 교과서를 채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가 최우선으로 할 일"이라며 "지난번에는 그렇게 못했지만 이번엔 우리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시민단체 등의 채택 반대 운동을 막고, 이 교과서의 채택률을 높이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지방의원들의 모임인 '일본 대학습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지방의원 283명을 포함한 70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 2004년 7월 11일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도쿄의 자민당 본부에서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당원들 이름위에 붉은 장미꽃을 꽂고 있다. 오른쪽에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이 아베 신조 간사장이다.
아베 신조가 어떤 놈이냐
일본여당인 자민당 내에서 매파로, 한반도에 관한 한 늘 강경정책을 주장하며 북한에 대해서는 ‘대화’보다는 ‘압력’을, ‘평화’보다는 ‘전쟁’을 더 선호하는 극우 중의 극우 정치인이다.
작년, 전후 일본이 패전한 후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 사령부(GHQ)에 의해 제정된, 전장 터에서 무기소지는 물론 전쟁을 금지하는 평화헌법에 대해, 일본이 먼저 ‘선제공격(북한에 대해)을 할 수도 있다’라고 하는 유사법 제정을 통과시킨 선봉장이기도 하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은, 태평양전쟁 개전 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각료를 지냈다. 1945년 패전 후 비록 용케도 전범 재판에 회부되는 것은 면했지만 A급 전범으로 분류되기도 한 인물이며, 특히 식민지 시절 당시 조선인들의 강제연행, 징용, 납치를 주도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시는 1955년 총리가 된 뒤일본 패전 후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초안을 만들어 준 「평화헌법」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일본을 「군사적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처음으로 내걸고 추진하였다.

아베 신조는 1954년 기시 전총리의 장녀 요오코(洋子)와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 전외상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 아베 히로시(安陪寬)도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그는 기시의 친동생이지만 사토씨 집안에 양자로 갔다)가 그의 큰아버지이고, 사토 전 총리의 아들인 사토 신지(佐藤信二) 전 통산상은 그의 사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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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한승조 교수에게 돌 던지지 말라" 
 
"박정희 일본한테 배워 위업달성했다" 주장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일제 식민지배는 축복" 기고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극우 인사 가운데 한 명인 지만원씨가 "못난 민족의 모함·모략 행위부터 반성하고 한승조 교수한테 돌을 던지지 말라'며 한 교수를 옹호하고 나섰다. 한승조 파문이 인 이후 그를 옹호한 글을 공개적으로 올린 것은 지씨가 처음이다.

지 씨는 5일 자신의 홈페이지인 시스템클럽(www.systemclub.co.kr)에 올린 '한승조 교수에 돌 던지지 말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분이 사용한 용어와 표현에 부분적인 부적절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러나 일본의 선진화된 과학기술과 지식과 절제로 훈련된 정신은 잠자던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됐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지 씨는 "1960년 자학과 자조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을 일깨운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였다"며 "이는 한국의 명치유신이었고 그가 일본군에 몸담고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기에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지씨는 또 "선진국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우리도 야수일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을 욕하는 사람들의 행도거지를 보면 그야말로 야만인에 가깝다, 못 배우면 이렇게 된다, 남을 욕하고 모함하는 민족성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먹혔다"고 주장했다.

지 씨는 "한국에서 새 대통령이 나올 때마다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는 정상적인 외교도 아니며, 이런 한국은 정상적인 국가가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의 사과 요구를 비판한 지 씨의 발언은 지난 2일 일본 우익신문인 <산케이신문> 서울지사장인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설전을 벌일 때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이다.

다음은 지 씨가 홈페이지에 올린 글 전문이다.

한승조 교수에 돌 던지지 말라!

못난 민족의 [모함-모략 행위]부터 반성하라

일본의 강점은 민족의 불행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직도 많은 국민은 일본인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우당은 과거청산 운동을 내걸고 매일같이 국민에너지를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소모시키고 있습니다. 과거의 인물들과 그 후손들을 모함-모략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한국은 경제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조시대에 태어났다면 많은 정적들을 모함-모략하여 귀양 보내고 죽였을 것입니다. .

1860년 미국에서는 '흑인의 인권'이라는 인류의 가치를 놓고 남북이 전쟁을 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인권-민주주의의 틀을 선포했습니다. 1858년, 일본은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부국강벙, 자본주의 도입, 근대화 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명치유신이었습니다. 선진자본주의 열강들은 제국주의로 이행해 가면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때 조선은 무얼 했던가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궁에서는 음흉한 정쟁에 날 새는 줄 몰랐습니다. 상대방을 모함-모략하여 동족을 살해하고, 귀양보내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선진국을 배격하고, 문호를 걸어 닫고, 자기들끼리 싸움질 하는 이 못난 조정이 조그만 궁궐에 갇혀있고, 먹고사는 데에도 벅차했던 오합지졸의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고려장을 당하던 원시 마을 조선! 이런 못난 나라가 열강에 먹히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누구에게 먹히든 먹히게 돼 있었습니다.

오늘날을 보십시오. 미국과 일본은 우리보다 잘난 선진국입니다. 방송장비의 100%는 일본의 소니사 제품입니다. 일인당 GNP가 우리의 4배입니다. 일본이 옛날에 선진열강들로부터 열심히 배워서 우리를 통치했듯이, 우리는 지금부터라고 열심히 선진국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위정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미국놈 싫다, 일본놈들은 더 싫다. 북한과 함께 우리끼리 살자"는 그야말로 못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가서 각고의 노력으로 선진문물을 배워 익힌 인재들을 적대시합니다.

그리고 한국식 명치유신으로 오늘날의 부국강병을 이룩한 영웅을 민족의 반역자라며 그의 딸까지 모함-모략하고 있습니다. 부국강병을 위해 새벽잠을 설치고 창밖을 내다보며 고뇌하던 박대통령과는 달리 지금은 대통령이란 사람이 한가하게 부인과 함께 한달씩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서 미용수술이나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못난 인생들 때문에 지금도 대한민국의 경제가 미국과 일본에 먹히고 있습니다. 이를 놓고 또 저 못난 것들은 미국과 일본이 그럴 수 있느냐며 또 욕을 합니다. 당하는 게 병신이지 자유경쟁에 의해 경제를 점령하는 미국과 일본이 왜 나쁩니까?

남을 비난하는자엔 발전이 없다. 나를 개선시켜라

남을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없습니다. 절대로! 나를 원망하고 나를 채찍 질 해야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나를 갈고 연마하면 절대로 당하지 않습니다. 100년 전의 일을 놓고 남을 욕만 하고 앉아 있으면 앞으로 1,000년 후에도 욕만 하고 있을 건가요?

“엽전이 뭘 하겠어!” 1960년의 한국인들은 자학과 자조에 빠져 훔치고 싸우고 게을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면 어린 나이에도 저주의 욕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런 암흑의 시대에 나타나 장래 없던 국민을 일깨워 준 정신적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이는 한국의 명치유신이었습니다. 그는 일본군에 몸담으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배웠기에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GE의 잭 웰치 회장은 배울 줄 모르는 간부는 기업을 떠나라고 호통 치며 쫓아버렸습니다. 잭 웰치의 말이 옳다면 일본을 지금까지도 욕하고 증오하는 사람들, 박대통령을 증오하는 사람들, 노무현을 포함한 위정자들, 열우당 모두가 대한민국의 경영진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한승조 교수님은 평소에 이런 소신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설사 그분이 사용한 용어와 표현에 부분적인 부적절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일부의 용어를 트집잡는 건 깨인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자극이 없을 때 나태해지고 망하게 됩니다. 일본의 선진화된 과학기술과 지식과 절제로 훈련된 정신은 잠자던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됐음을 인정합니다.

사람도 본디 없이 자라면 야수와 같습니다. 선진국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우리도 야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을 욕하는 사람들의 행도거지를 보면 그야말로 야만인에 가깝습니다. 못 배우면 이렇게 됩니다. 남을 욕하고 모함하는 민족성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먹혔습니다. 지금의 위정자들과 좌익들도 잘난 사람들, 부자들을 욕하고 모함합니다. 어쩌면 150여 년 전의 못난 선조들을 그리도 빼닮았습니까? 이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경제적으로 참략 당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이들입니다.

한승조 교수님의 “불행중다행”이라는 표현은 “어차피 당할 바에야 러시아에 당하는 것보다 그래도 일본에 당하는 것이 다행이었지 않느냐”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일본으로부터 당한 고통보다 6.25의 동족상잔으로부터 당한 고통이 더욱 크고 광범위하고 비참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정상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요? 민주주의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제도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표현했다 해서 인신공격을 하고 여론재판을 하는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라 원시집단입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비민주적 행동입니다. 한교수님의 글 중에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나요? 왜 한교수님이 저들과 똑같은 생각대로 글을 써야 합니까? 맞는 부분은 수용하고 틀린 부분은 취하지 않으면 됩니다. 일본인들도 한교수님의 글을 다양한 시각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한국인 전체의 시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게 있습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면 꼭 일본에 사과를 요구합니다. 일본도 한국도 똑같이 국가입니다. 한 국가가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한번만 사과하면 됐지 어째서 대통령마다 사과를 요구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과’라고 하면 무엇을 연상합니까? "못났던 조선이 잘났던 일본에게 먹혔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를 대통령마다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 과연 잘난 행동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부추기는 언론부터 못났습니다. 이는 정상적인 외교도 아니며, 이런 한국은 정상적인 국가가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2005.03.06/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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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요사이 필자가 김구 선생을 오사마빈 라덴에 비유한 것에 대해 비난이 이는 모양입니다. 김구 선생은 민족의 얼을 나름대로 지킨 어른임에는 틀림없지만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비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봅니다.
운동선수에게 각자의 장기가 있듯이, 애국자들에도 나름대로의 장기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승만의 능력이라면 미국에서 유능한 정치인들이 양성되는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고, 그로 인해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요로의 인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고 정치력과 외교력이 뛰어나, 당대에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 지도자들 누구보다도 더 우수한 자력을 가지고 있던 세계인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반면 김구선생에겐 이러한 능력이 전혀 없고, 오직 한학을 공부한 순수 토박이 애국자였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사람의 능력이 아주 잘 대변해주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이용했고, 김구선생은 젊은 사람들에게 폭탄을 주어 일본 요인들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고, 국부적일 수밖에 없는 게릴라전을 지휘했습니다.
외교와 게릴라전, 두 가지 대안 중에 어느 대안이 조선을 독립시킬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게릴라전으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애시 당초 일본에 먹히지도 않았어야 합니다. 당시의 일본은 미국 다음의 강국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이런 일본에 무력으로 대항한 것입니다.
김구선생은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백성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백성이라 해도 세계를 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분들이라면 김구선생의 애국운동이 그 정신에 비해 성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조선은 미국의 힘에 의해 해방되었을 뿐, 김구선생의 활동에 의해 해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일본 낭아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지던 당일인 1945.8.9에일, 소련은 일본과 맺었던 불가침조약을 내 팽개치고 북한으로 들어와 모든 공장시설과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남한까지 적화시키려 했습니다.
바로 이 때 미국은 오끼나와에서 최후발악으로 덤비는 일본군과 싸운 후 한 달이 지난 9월8일에야 부산에 들어왔습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김성주 대위를 내세워 꼭두각씨 정부를 사실상 건설해 놓고, 남한까지 점령할 목적으로 남한 인사들을 꼬시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에 비해 힘은 세지만 머리가 부족한 김구 선생은 김일성에 놀아나 북한을 돕고 남한 건국을 방해했습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이승만의 역량이 없었다면 남한만의 단독정부나마 설치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북한 인민에 비해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승만 박사에게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김구에 의해 우리는 김일성 치하에 편입되어 우리와 우리 부모들은 북한 주민처럼 지옥을 맛보고 있을 것입니다.
오사마빈 라덴이 쌍둥이 빌딩을 폭파시켰을 때, 한국의 좌익들은 그를 영웅이라 불렀습니다. 오사마빈 라덴은 미국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영웅입니다. 미국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해온 좌익들 역시 김구 선생을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김구도 적국을 향해 테러를 가했습니다. 오사미빈 라덴도 적국을 향해 테러를 가했습니다. 제가 김구를 오사미빈 라덴에 비유한 것이 왜 잘못이라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 발언을 망언이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들입니다. 좌익들은 오사마빈 라덴을 영웅시했습니다. 저는 제 표현에 대해 누구보다 좌익들이 박수를 치며 반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 발언을 망발이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좌익들이 이승만 박사를 매도하지 않았다면 저 역시 이런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과거사를 왜곡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 모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승만의 동상은 이 나라에 우뚝 서야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나라에는 김구 선생만 높이 평가받고,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 묻혀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재라고요? 당시 아시아 권에 독재 아닌 나라가 어디 있었습니까? 싱가프르에서는 껌을 씹지 못합니다. 거리에 침을 밭거나 화장실을 더럽히는 사람은 곧비로 끌려 갑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이런 독재가 어디 있습니까? 싱가포르의 누가 이광요를 독재자라 하던가요?
지금도 북한,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독재를 합니다. 좌익들은 어째서 이승만과 박정희만 독재자라 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독재자라 하지 않습니까? 아니 김일성을 만족의 태양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은 한국인들은 역사도 수학도 냉철한 두뇌로 배우지 않고 외웁니다. 이렇게 외운 것은 지식이 아니라 외움물일 뿐입니다. 외운 것이 많을수록 고정관념만 높이 쌓고 새로운 것에 저항합니다. 경험과 주워들은 이야기만 많고, 학문적 이론을 배우지 못한 사람을 저는 원주민이라 칭합니다. 원주민은 과학을 몰라 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과학을 공부한 사람은 패러다임으로 사물을 평가합니다. 더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김구는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지 않고 요인만 꼭 집어 살해했기 때문에 빈라덴과는 다르다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과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패러다임 측면에서 보면 빈라덴과 김구는 테러와 게릴라를 무기로 적과 싸운 사람들이며 같은 류, 같은 과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똑같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패러다임 측면에서 보면, 김구와 인도의 간디는 현저히 다릅니다. 간디는 철저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간디의 비폭력 운동과 김구의 폭력 운동 중 어느 운동이 더 많은 효과를 얻었을까요?
간디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영국의 힘을 알았고, 힘으로 영국에 대항했다가는 더 많은 인도인이 탄압을 받고 고통을 받을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국에 대해 무력 저항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선택이며 수억의 인도인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줄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력으로 대항하려는 인도인들을 꾸짖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몇몇 일본 요인들을 암살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고, 지불한 대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폭탄을 던진 청년들이 고통 속에서 죽었고, 수많은 동족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김구선생의 독립운동에는 얼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혼을 살린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인도의 간디에게는 그런 혼이 없었던가요?
김구의 정신은 훌륭한 것이지만 그는 대한민국을 김일성에게 내줄 번한 사람입니다. 올곧은 정신만으로 큰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신력으로 말하자면 청학동 한문 할아버지도 상당할 것입니다. 국가를 경영하려면 이승만 박사처럼 넓은 세계로 나아가 많이 보면서 신학문과 신사고를 갈고 닦아야 합니다.
올곧은 정신만 간직한 채, [돌아가는 세상]을 읽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어째서 좌익들이 케케 묵은 독립운동을 따지고 친일파를 따지는 지, 그 의도를 읽지 못합니다. 이 시점에서 저들이 독립운동을 최고의 미덕으로 가꾸는 이유는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김일성 한 사람 만을 내세우면 좀 그러니까 구색을 갖추기 위해 김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둥을 치면 대들보가 울린다고 김구를 내세워야 김일성을 자연스럽게 들이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좌익들은 지금 이승만을 죽이고, 김일성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김구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왜들 모르는지요? 최근 좌익들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해 장준하를 내세웁니다. 좌익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김대중을 곧바로 연결시키려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죽어야 합니다. 제가 왜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김구와 이승만을 비교하는 이유를 알아차려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를 고대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간을 읽어야 합니다. 배운 사람은 패러다임으로 사물을 판단합니다. 원주민이 아는 것이 많다 해서 그 지역을 진보시킵니까? 과학적 이론이 그 지역을 진보시키는 것입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은 사실을 배우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을 배웁니다. 수백 개의 수학문제를 모두 풀려고 대드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수많은 문제 중에서 패러다임을 발견해내고 패러다임 별로 문제를 푸는 방법을 개발할 때에 비로소 응용능력이 길러집니다. 인문과학을 배우는 것도 같을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과학입니다. 끝없이 [왜]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남의 것을 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창의력이 없습니다. 오직 두꺼운 고정관념의 벽이 있을 뿐입니다. 고정관념은 사회발전의 걸림돌입니다. 저는 연구소에서 군간부들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기득권들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2004. 8. 21

출처: http://www.systemclub.co.kr/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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