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민중은 거리에서 일군경과 기왓장으로 맞서며 체결 무효 시위를 벌였다. 관원들은 반대상소를 끊임없이 올리고 자결로 이 조약체결의 불합리성을 알리려 하였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실상 을사조약은 일본에게 있어 통감정치 시작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조선 식민지화의 발판인 셈이었다. 1905년 11월 이토오는 고종을 만나 이 조약으로 두나라의 발전과 동양의 평화를 꾀하자는 회유로 조인을 종용했지만 고종의 강력한 거절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에 이토오는 서울을 일군경으로 에워싸고 대신들을 위협하고 협박하며 조인을 요구해 왔다. 고종이 불참한 어전회의에서 한규설 등이 무조건 절대불가를 주장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이를 쫓아내고 옥새를 뺏어 찍어버렸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완용 외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하영이 바로 민족의 숙적인 을사오적인 것이다. 이상설 외 을사오적을 죽이란 상소가 쇄도하고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을사오적의 약력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을사조약 체결의 주동자로 조약체결의 불가란 말은 한번도 비치지 않았다. 일본의 무력을 등에 업고 왕을 협박하여 학부대신의 이름으로 조약을 솔선 체결하였다. 그는 절대불가의 완강한 태도로 조인을 거부하는 대신들에게 "지난날의 모든 조약이 일방적으로 강요에 못이겨 체결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늘 그 조약의 글자 수정을 못하여 후회하였다. 그러하니 이번 새로운 조약은 서로 변동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절대 불가로만 말해선 안된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도, 보호를 받아야한다." 며 조약체결을 종용했다.

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고종에게 책임을 물어 양위를 강요하며 결국 순종에게 양위토록 하기도 하였다. 1910년엔 테라우치 통감과 한일합방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으로부터 백작.후작을 받고 나라와 겨레를 팔았다.

3.1운동 당시엔 "학생 청년들은 부질없이 생명 재산을 잃지 말고 자중하여 실력양성을 기다리라"고 동포를 위협하고 공갈하는 경고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예술도 이해하는 교양인이었고 시와 글씨. 영어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던 그는 매국매족함에 있어서도 철저하였던 것이다. 또한 친일 사학자로서 조선사편수회에서 조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실증주의 사학을 주창했던 두계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 손주(姪孫)이기도 하다.

이지용(李址鎔 1870~1928) 역시 완전히 능동적인 친일파로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와 한일의정서를 조인하고 내부대신이 되어 을사조약을 찬성, 조인했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을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근택(李根澤 1865~1919)도 민족 반역자이며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조인하고 합방과 함께 자작을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하영(李夏榮 1858~1919)은 미국주재 공사관 서기관을 역임하고 주일 전권공사로 일본에 있다가 법무대신이 된 후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자작을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권중현(權重顯 1854~1934)은 주일공사, 참찬을 지내고 농공상부 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 서명하여 자작을 받고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

또 박제순(朴齊純 1854~1916)은 조약체결을 강력히 반대하는 한규설 대신으로 일본에 의해 외부대신에 봉해져 을사조약에 조인해 을사오적에 넣기도 한다.

이 조약은 이토오 하세가와의 주도와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완용.이지용의 강한 야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들이 을사조약으로 동양평화와 황실보호, 교육문화 증진과 실력양성,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물산장려를 떠들었지만 모두가 일본의 대한정책에 동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들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오기호. 나인영 등은 박제순. 이지용 집에 폭발물을 선물로 가장하여 보내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하수인을 매수하여 오적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가택의 경계가 삼엄하여 또한 불가하였다.

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자신회(自新會).기산도(寄山度) 등의 결사대가 조직되었고 이근택과 권중현은 결국 저격당하였다.

이완용은 이재명에게 칼로 찔려 부상을 당하기만 하였고 오적의 집이 민중에 의해 소각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몇몇 매국노에 의해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은 민중은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해 무력과 문력(文力)을 불사해야만 했던 것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한 민중의 항일투쟁은 장지연이나 순국자결한 애국지사들의 언론투쟁과 상소항쟁과 의병 항일전쟁의 형태를 띠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최근 미국의 한 대학도서관에서 고종의 친서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에서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이라 칭하며 국제법으로도 무효이며, 물론 위협과 강제에 의한 조약이거니와 황제 자신의 허가도 없었고 대신들도 강제로 갇힌 채 이루어진 조약이라 당연히 불법이라 말했다.

덧붙여 "짐은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이 조약을 응낙하지 않을 것"이라며 옥새와 함께 조선의 비장함을 전했다. 이 문서는 을사조약 체결 7개월 후인 1906년 6월에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벨기에 등의 원수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고종의 퇴위와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고 세계 여론에 전해지지 못했던 것이다.




Posted by 상운(祥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