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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2)


풍속】
 군자(君子)의 나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당 나라의 태종(太宗)이 김춘추(金春秋)의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군자(君子)의 나라로다.’ 하였다.” 하였다.

의복(衣服)의 빛깔은 흰 것을 숭상하였다

《수서(隋書)》에, “의복의 빛깔은 흰 것을 숭상하며, 부인들은 머리털을 땋아서 머리에 두르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꾸민다.” 하였다.

혼인에는 술과 음식만 있을 뿐이다

《수서(隋書)》에, “혼인의 예절에는 다만 술과 음식만 있을 뿐이며, 많이 준비하고 적게 준비하는 것은 빈부(貧富)의 정도에 따라 한다.” 하였다.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축(慶祝)한다

《당서(唐書)》에,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축하며, 이 날은 해와 달의 신(神)에게 절한다.” 하였다.

사람을 보면 반드시 꿇어 앉는다
《당서(唐書)》에, “사람을 보면 반드시 꿇어 앉아 손으로 땅을 짚고서 공손히 한다.” 하였다.

찰밥으로 까마귀를 제사한다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미 금갑(琴匣)의 화(禍)를 면하자 [주:소지왕(炤智王)의 왕비가 승(僧)과 내통하여 정월 보름날에 궁중에서 왕을 살해하려고 거문고 갑 속에 중을 숨겨 놓았다. 이날 마침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던 소지왕은 한 노인에게서 받은 글을 보고 먼저 거문고 갑을 활로 쏘아 중을 죽었다. 그래서 왕이 화(禍)를 면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까마귀와 쥐와 용과 말과 산돼지의 공(功)이 아니었더라면 임금께서는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정월의 첫 자일(子日), 첫 진일(辰日), 첫 오일(午日), 첫 해일(亥日)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 신일(愼日)로 삼았다. 이날을 속담으로 달도(怛忉)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여 금기(禁忌)한다는 뜻이다.
또 정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찰밥으로 제사하였다. 나라의 풍속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서출지(書出池)의 주(註)에 나온다.


을야(乙夜)의 길쌈[績麻]
[을야는 당태종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기수날을 갑야(甲夜)라 하고 우수날을 을야(乙夜)라고 하는데  이 글에서는 깊은 밤이란 의미로 쓰였다.]
유리왕(儒理王) 때에 경주의 6부(部)를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편을 나누어,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다가 을야(乙夜)에 이르러 헤어지곤 하였다. 8월 보름이 되어 해놓은 일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였다. 이때에 노래와 춤과 온갖 유희를 다하는데 그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에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會蘇), 회소.”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운치가 있었다. 후세 사람이 그 소리를 본떠 노래를 짓고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그런 풍속이 행하여지고 있다.

풍월주(風月主)ㆍ화랑(花郞)
법흥왕(法興王) 원년(元年)에 동남(童男)으로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 부르며, 착한 선비를 구하여 무리를 만들어 효(孝)ㆍ제(悌)ㆍ충(忠)ㆍ신(信)을 장려하였다.
○ 처음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를 알 수 없음을 근심하고, 무리를 지어 모여 놀게 하여 그들의 행의(行義)를 살펴본 뒤에 등용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아름다운 여자 두 사람을 뽑아서 원화(源花)를 삼았으니, 이름은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인데, 모인 무리가 3백여 명이었다. 두 여자는 미모를 서로 다투어 질투하였다. 준정이 자신의 집에 술을 준비하고 남모에게 억지로 권하여 취하자 물에 던져 죽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그 시체를 찾아가지고 고발하여 준정은 사형을 받았다. 드디어 원화(源花)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단장시켜서 화랑(花郞)이라 칭하니, 많은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勸勉)하고, 혹은 노래와 풍악으로 서로 즐기면서 산과 물의 경치를 찾아다니며 노닐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알게 되어 가려서 등용하였다.


칼춤의 유희
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 살 때에 백제(百濟)의 시가에 들어가서 칼춤을 추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섰다. 백제의 임금이 듣고 그를 불러다 보고는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창랑은 기회를 타서 백제왕을 칼로 찔렀다.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탈을 만들어서 칼춤 추는 형상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탈춤이 전하고 있다.” 한다.
○ 신라에는 또 향악(鄕樂)으로서 금환(金丸)ㆍ월전(月顚)ㆍ대면(大面)ㆍ속독(束毒)ㆍ준예(狻猊) 다섯 가지의 가면극(假面劇)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금환(金丸)을 읊은 시(詩)에,
              “몸 돌리고 팔 흔들어 금환을 희롱하니,
              달 구를 듯 별이 뜬 듯 눈 가득히 보이네.
              의료가 있다 한들 이보다 나을쏘냐. 
              파도치는 고래 바다[鯨海] 잔잔해짐을 알겠네라.” 하였다.
*의료(宜僚)[장자(莊子)》에 시남(市南)에 있는 의료라는 사람이 환(丸 쇠나 돌로 만든 공)을 잘 놀린다고 쓰여 있다.]
○ 월전(月顚)을 읊은 시에,
            “높은 어깨 움추린 목 머리털은 꼿꼿하게,
             팔을 걷은 뭇선비들 술잔을 다투네.
             노랫소리 듣고는 사람들 모두 웃으니,
             저녁에 세운 깃발 새벽까지 재촉하네.” 하였다.
○ 대면(大面)을 읊은 시에,
           “황금의 얼굴빛 바로 그 사람이,
            손에 잡은 구슬 채찍 귀신을 부린다네.
            빨리 닫고 천천히 걷고 운치 있는 춤을 추니, 
            요(堯) 임금 시대에 단봉(丹鳳)이 춤추듯 하네.” 하였다.
○ 속독(束毒)을 읊은 시에,
           “헝클어진 머리털에 파란 얼굴빛이 사람과는 다른데,
            무리를 거느리고 뜰에 와서 난새[鸞]처럼 춤추네.
            둥둥둥 북을 치자 바람은 선들선들,
            까닭 없이 북으로 뛰고 남으로 달아나고.” 하였다.
준예(狻猊)[사자(獅子)]를 읊은 시에,
           “멀리 유사(流沙)를 건너 만리 길 오느라고,
            털옷은 해어지고 흙먼지만 붙었구나.
            머리 젓고 꼬리 치며 인덕(仁德)에 길이 드니,
            웅장한 그 기운 뭇짐승에 비길쏘냐.” 하였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한다
김극기(金克己)의 문집(文集)에, “동도(東都)의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하고 계음(禊飮)을 하는데 이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한다.” 하였는데, 하삭(河朔)에 피서(避暑)하는 술잔치를 잘못 알고 계음(禊飮)이라고 한 것이다.

가게[肆]를 벌여 놓고 교역(交易)을 행하며, 물건을 싣는 데에는 수레를 사용한다.

백성의 풍속은 질박(質朴)하다
관풍안(觀風案)에, “민속이 질소 검박하여 신라시대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토지는 비옥하고 풍속은 순박하다
이첨(李詹)의 기(記)에, “토지는 비옥하고 풍속은 순박하며, 백성들은 예절과 겸양(謙讓)을 안다.” 하였다.

번화(繁華)하고 아름다움이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다
정인지(鄭麟趾)의 기(記)에 있다.

【형승】
땅은 산이 험(險)한 데가 많다
수서(隋書)》에, “땅은 산이 험한 데가 많다.” 하였으며, 또, “전지(田地)는 매우 비옥하며 물에 심는 곡식과 마른 땅에 심는 것을 겸해 할 수 있다.” 하였다.

거진(巨鎭)이며 웅번(雄藩)이다
고려 이달충(李達衷)의 표문(表文)에, “하물며 계림(鷄林)의 거진이며 접역(鰈域)의 웅번이겠습니까.” 하였다.

산과 물이 빼어나고 기이(奇異)하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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