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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5)
  2. 2006.02.21 [본문 스크랩] 신라 3기 8괴

【고적】
진한육부(辰韓六部)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의 여섯 마을에 나누어 살았으니,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이것을 진한육부(辰韓六部)라 한다. 6부 사람들이 혁거세를 높여서 임금으로 세웠다.
유리왕(儒理王) 8년에 이르러 6부의 이름을 고쳐서, 양산을 급량부(及梁部), 고허를 사량부(沙梁部), 진지를 본피부(本彼部), 대수를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라 하고, 가리를 한기부(漢祇部) 혹은 한기부(韓岐部)라 하고, 명활을 습비부(習比部)라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주(州)를 승격시켜 대도독부(大都督府)로 하고 6부의 이름을 고쳐, 급량부를 중흥부(中興部), 사량을 남산부(南山部), 본피를 통선부(通仙部), 습비를 임천부(臨川部), 한기를 가덕부(加德部), 모량을 장덕부(長德部)라고 하였다.


양산라정(楊山蘿井)
본부 남쪽 7리에 있다. 한 나라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에 고허 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옆의 수풀 사이를 바라보니, 흰 말이 꿇어앉아 절하는 모양으로 있는 것이 보였다. 가서보니, 말은 홀연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13세에 자질이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6부의 사람들은 그의 탄생이 신기하므로 임금으로 세우고,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이라고 하였다. 진한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고 하므로, 큰 알이 박과 같다고 하여 박(朴)을 성(姓)으로 삼았으며, 거서간(居西干)은 방언(方言)에, ‘높은 어른’을 일컫는 말이다.

알영정(閼英井) 본부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시조 5년에 용(龍)이 이 우물에서 나타나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 거두어 양육하고,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장성하자 덕스런 용모가 있었다. 시조(始祖)가 왕비로 맞아들이니, 어진 행실이 있어서 내조(內助)를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두 명의 성인이라고 하였다.

금성정(金城井)
부내(府內)에 있다. 신라 시조 때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

추라정(雛羅井)
본부 남쪽 7리에 있다. 신라 소지왕(炤智王) 때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

시림(始林)
본부 남쪽 4리에 있다.
탈해왕(脫解王) 9년에 임금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수풀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시켜 보도록 하였더니, 황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우는 것이었다. 임금이 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어찌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아들을 보내줌이 아니겠는가?” 하고, 곧 거두어 양육하였다.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그가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인하여 그 숲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숲 속에 쌓인 돌이 있어서 높이가 3척이나 되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알지(閼智)의 태(胎)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았던 돌로, 가위의 흔적이 있다.” 한다. 알지의 7대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미추가 대신 즉위하였으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소유한 시초이다.


금성(金城) 본부 동쪽 4리에 있다. 신라 시조 혁거세 때에 쌓은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천 4백 7척이다. 월성(月城) 본부 동남쪽 5리에 있다. 파사왕(婆娑王) 22년에 쌓았는데, 모양이 반달같기 때문에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토축으로 둘레가 3천 23척이다. 처음 탈해왕이 어렸을 때에, 토함산에 올라가 성중(城中)의 살 만한 곳을 바라보다가, 양산(楊山)의 한 봉우리가 일월(日月)의 형세와 같음을 보고, 곧 내려가 찾아보니, 즉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옆에 묻어놓고 호공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할아버지 집입니다.” 하니, 호공이 다투어 변명하다가 드디어 관(官)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관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가지고 너의 집이란 것을 증명하겠는가?” 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우리 집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마을에 나간 사이에 남에게 빼앗겼습니다. 땅을 파서 증험해 보소서.” 하였다.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었다. 드디어 탈해에게 주어서 살게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월성(月城) 터이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詩)에,
               “외로운 성이 약간 굽어서 반달과 같은데,
                가시덤불이 반이나 족제비 굴을 덮었네,
                곡령(鵠嶺)의 푸른 솔은 기운이 왕성하고,
                계림(谿林)의 누런 잎은 가을이 쓸쓸하네.
                태아(太阿)의 자루를 거꾸로 준 뒤부터     [태아는 보검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권력을 빼앗김을 말함]
                중원(中原)의 사슴이 누구 손에 죽었던고.  [간신 조고의 지록위마에서 나온 말로 나라가 망함을 말함]
                강가의 계집들은 속절없이 옥수화(玉樹花) 3자를 전하는데,
                봄바람은 몇 번이나 금제(金堤)의 버들을 스쳤나.” 하였다.


만월성(滿月城)
월성(月城) 북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9백 45척이다.

명활성(明活城)
월성 동쪽에 있다. 신라 자비왕(慈悲王)이 여기로 옮겨 살았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8백 18척이다.

남산성(南山城) 월성 남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5백 44척이다.

관문성(關門城)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천 7백 99척이다. 지금을 허물어졌다.

영창궁(永昌宮)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세웠다 한다. 지금은 그 있던 곳이 자세하지 않다.

요석궁(瑤石宮) 신라의 중 원효(元曉)가 일찍이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가 없는 도끼를 허락할꼬? 나는 하늘을 지탱할 기둥을 베겠네.” 하였다. 태종왕(太宗王)이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다면 이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종실(宗室) 과부가 있었다. 임금이 요석궁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더니, 원효가 남산(南山)에서 와서 유교(楡橋)를 지나다가 요석궁 관리를 만났다. 거짓으로 물 속에 빠지니 그 관리가 원효에게 요석궁으로 가서 옷을 말리게 하고 그대로 묵게 하였더니, 과부가 과연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다. 요석궁의 터는 향교 남쪽에 있고, 유교(楡橋)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

황학루(黃鶴樓)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

금송정(琴松亭) 금오산(金鰲山) 산마루에 있다.
○ 옥보고(玉寶高)가 노닐고 즐기던 곳이다. 옥보고는 신라 사찬(沙粲) 공영(恭永)의 아들로 경덕왕(景德王) 때 사람이다. 그는 지리산(智異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50년 동안 배웠다. 직접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 연주하니,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다. 또 현금(玄琴)이라도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는, 옥보고가 신선의 도(道)를 얻었다 한다.


포석정(鮑石亭) 본부 남쪽 7리, 금오산 서쪽 기슭에 있다. 돌을 다듬어 포어(鮑魚)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적(遺跡)이 완연히 남아 있다.
○ 고려 태조 10년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을 침공하여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고 성읍에까지 바싹 다가왔다.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연식(連式)을 고려(高麗)에 보내 급변을 호소하였다. 고려 태조가 시중(侍中) 공훤(公萱),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우리와 우호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급변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훤 등에게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갑자기 신라 도성(都城)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경애왕은 비빈(妃嬪)ㆍ종척(宗戚)들과 포석정에 나가 잔치를 하며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애왕은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에 있는 이궁(離宮)에 숨고, 수행하던 신하와 배우(俳優)ㆍ궁녀들은 모두 함몰되었다. 견훤이 군사를 풀어 마구 약탈하게 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 신하들을 시켜서 임금을 찾아내어 궁중에 가두고서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능욕하고 부하들에게는 임금의 빈첩(嬪妾)들을 함부로 욕보이게 하였다. 임금의 표제(表弟 외사촌 동생) 김부(金傅)를 임금으로 세우고, 왕제(王弟)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子女)ㆍ백공(百工)들과 병기와 보물 등을 모두 빼앗아 돌아갔다.
○ 이인로의 시에,
                     “석호궁(石虎宮) 안에는 가시가 나고,
                      동타(銅駝)가 있는 길가에는 행인도 없네.
                      높은 정자에는 금송(琴松)이 반이나 영락(零落)했는데
                      새벽달은 여전히 옛 성을 비추고 있네. 
                      당시의 악기 소리 마침내 처량하고,
                      둥둥 뜬 황금 술잔은 물굽이 따라 꺾였네.
                      중류에서 위 나라의 신하를 속절없이 애석해 하고,
                      취향(醉鄕)에는 진(陳) 나라의 일월(日月)도 아랑곳 없었다네.” 하였다.
            *전국 시대 위무후(魏武候)가 서하(西河)에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류(中流)에서, “아름답다.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이여, 이는 위 나라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덕에 있지 험고한 산하에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진후주가 장려화(張麗華) 등 미인들과 술을 마시며 음탕하게 놀아서 밤과 낮이 없었다 한다.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맑은 시냇물 한 가닥이 굽이쳐 흐르는데, 
                               황량한 골짜기가 구불구불 열렸구나.
                      포어(鮑魚)는 시냇물에 떨어져 흩어졌는데,
                                봄은 가고 돌은 오래되어 파란 이끼 끼었구나. 
                      옛날 신라왕은 정치하기 싫어하고,
                                금수레ㆍ옥가마 타고 놀러만 다녔다.
                      이곳에서 질펀히 놀며 맑은 물 희롱하니,
                                술잔 둥둥 떠서 물결 따라 내려왔네.
                      임금과 신하 흥겨워 노래 부르며 취향(醉鄕)에 들었는데,
                                 피리ㆍ북소리가 봄 우레처럼 땅을 진동하네. 
                      적병이 궁궐에까지 쳐들어옴도 몰랐는데,
                                 대낮에 철기가 몰래 하무를 울고 달려왔네.

 *하무[행군할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말과 군사에 물리는 나무]

                      궁정에 피를 뿜은 일 어찌 차마 말할소냐.
                                매우 다급한 서울에는 먼지가 날렸구나.
                      궁녀들은 뒹굴며 적군 앞에서 울부짖는데, 
                                값진 비녀 풀밭에 버려졌네.
                      해목령(蟹目嶺) 위에는 수심 어린 구름 엉기었는데,
                                솔바람 소리 아직도 천년의 슬픔을 띠었네.
                      임춘각(臨春閣) 안에서 흠뻑 취하여
                               문 밖에 한장군(韓將軍) 온 것도 몰랐다네.


*진후주가 임춘각과 결기각(結綺閣) 등의 화려한 집들을 짓고 지냈는데 뒤에 수 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가 쳐들어와서 진 나라는 망하였다.

                     옥수(玉樹)ㆍ벽월가(璧月歌
)
가 끝나기도 전에, 
                               진(陳) 나라 강남의 왕업(王業)이 연기처럼 사라졌네.

*진후주의 가곡에, “구슬달[璧月 夜光珠]은 밤마다 차고 옥수(玉樹)는 아침마다 새롭네.”라는 구절이 있었다.

                     전인들의 잘못은 후인들의 경계가 되련마는, 
                               후인들도 서로 이어 잘못하네.
                    내 원하노니 하느님은 귀신에게 이 돌을 지키게 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거울삼게 하소서.” 하였다.


첨성대(瞻星臺)
본부 동남쪽 3리에 있다.
○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 돌을 다듬어 대(臺)를 쌓았는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이며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천문(天文)을 관측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전대(前代)의 흥망이 세월이 지나
                  천척(千尺)의 석대(石臺)만이 하늘에 솟아 있네.
                  어떤 사람이 오늘날 천상(天象)을 살핀다면,
                  문성(文星)의 한 점이 사성(使星)으로 되었다 하리.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월성 가운데 첨성대 우뚝하고,
                  옥피리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구나.
                  문물은 이미 신라와 함께 다하였건만,
                   슬프다. 산과 물은 고금이 같구나.” 하였다.

『신증』 조위의 시에,
                 “늘어진 벼와 기장으로 밭둑 길 어두운데,
                  한가운데에 백척이나 되는 높은 대가 있네.
                  기단은 대지(大地) 속에 깊숙이 뻗쳤고,
                  그림자는 청산(靑山)과 마주하고 구름 밖에 뾰족하다.
                  치병(齒餠)으로 임금을 정하던 당시에 민심은 순후 하였는데,
                  희씨(羲氏)ㆍ화씨(和氏)의 역상(歷象)의 관측도 차례로 베풀어졌네. 
                  규포(圭表 해 그림자를 재는 기구)를 세워 그림자를 재서 일월(日月)을 관찰하고,
                  대(臺)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고 별로 점쳤네.
                  천문이 도수에 순하여 태계(泰階)가 평온하고,
                  낭렵(狼鬣)이 나타나지 않으니 하늘이 맑았다.
                  기후가 알맞아 백성이 재앙 받지 않으니,
                  사방 들에 풍년을 즐기는 노래 소리 터졌네. 
                  천지 만고에 구렁에 감춘 배나 견고한 금사발
                  끝까지 온전한 것은 못 보았네.
                  어지러운 인간 세계 몇 번의 먼지인가?
                  화려한 궁궐 모서리 모두 가시밭이 되었어도,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저만 홀로 남아 있어,
                  포개진 돌이 풍우(風雨) 밖에서 우뚝하네.
                  노 나라의 영광전(靈光殿) 지금도 있는지?
                  신라 때의 제작(制作) 한 번 감탄할 만하구나.” 하였다.


구성대(九聖臺) 금오산에 있는데, 속설에 신라 때 아홉 명의 성인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

아진포(阿珍浦)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는데, 용성국(龍城國)이라고도 한다. 그 나라 임금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 하니, 그 아내가 비단으로 싸서 궤 속에 넣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축원하기를, “어디든 인연 있는 곳에 닿아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어라.” 하였다. 진한(辰韓) 아진포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가 열어보니, 어린애가 들어 있었다. 거두어 길렀더니, 장성하자 풍채가 뛰어나고 밝으며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姓氏)를 모르는데, 처음 왔을 때에 까치가 날아와 울었으니, 까치 작(鵲) 자에서 새조(鳥) 자를 떼어 버리고 석(昔) 자로 성을 삼는 것이 좋으며, 또 궤를 풀고 나왔으니, 벗고 풀었다는 뜻으로 탈해(脫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임금이 그의 훌륭함을 듣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으려 할 때 유언하기를,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에, ‘내가 죽은 뒤에는 아들이냐 사위이냐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으면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셨다.” 하고, 드디어 탈해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이가 신라의 제4대 임금이다.


서출지(書出池)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에 임금이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는데, 이상한 까마귀와 쥐가 있으므로 임금이 기사(騎士)에게 까마귀를 쫓아가게 하였다. 기사가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렀을 때에 두 마리 돼지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머물러 그것을 구경하다가 홀연히 까마귀를 놓쳤다. 그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겉봉에 쓰기를, “뜯어 보면 두 명이 죽고 뜯어 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 하였다. 기사가 와서 바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두 명이 죽는 것보다는 뜯지 않아서 한 명이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명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함이고, 한 명이라고 한 것은 임금을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뜯어 보니, 씌어져 있기를, “거문고 갑(匣)을 쏘라.” 하였다. 임금이 궁궐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바로 내전(內殿)에서 분수(焚修)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고 간계(奸計)를 꾸몄던 것이다.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 못을 서출지라고 하였다.


안압지(雁鴨池)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을 본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성부산(星浮山) 본부 남쪽 20리에 있는데, 한 봉우리가 빼어났다.
○ 신라 때에 벼슬하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에게 길다란 횃불을 가지고 밤에 성부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들고 있게 하였다. 서울 성내의 사람들이 요성(妖星)이 나타났다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집하여 재앙을 물리칠 방술을 하고자 하였다. 그 아버지가 장차 그 모집하는 왕명에 응하려 하는데, 일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큰 요괴(妖怪)가 아닙니다. 다만 한 집의 아들이 죽고 아비가 곡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그날 밤에 그 아들이 과연 범에게 물려 죽었다.


여나산(余那山) 본부 남쪽 40리에 있다. 속설에, “한 서생(書生)이 이 산에서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고, 세족(世族)의 집안과 혼인하였으며, 뒤에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그 처갓집에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여 여나산가(余那山歌)를 지었다. 그 뒤부터는 과거 시관이 연회를 열 때에는 이 곡조를 먼저 노래하였다.” 한다.

봉생암(鳳生巖) 남산에 있다. 신라의 정사와 교화(敎化)가 순후하고 아름다워 봉(鳳)이 이 바위에서 울었다. 인하여 봉생암이라 이름짓고 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찬미하였다.

월명항(月明巷) 금성(金城) 남쪽에 있다.
○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을 유람하고 개운포(開雲浦)에 이르니, 홀연 한 사람이 기이한 형상과 괴상한 복장으로 임금 앞에 나아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임금의 덕을 찬미하였다. 임금을 따라 서울로 와서 스스로 처용(處容)이라 이름짓고, 달밤마다 시가(市街)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마침내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神)이라 하고, 그가 가무(歌舞)하던 곳을 후인들이 월명항(月明巷)이라고 하였다. 인하여 처용가(處容歌)와 처용무(處容舞)를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신라의 옛날 처용은 푸른 바다 속에서 왔다네.
                  옥 같은 이와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
                  솔개 어깨와 보라빛 소매로 봄바람에 춤추었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냇물에 가득한 달 밝은 밤이 긴데, 동해의 신인(神人)이 시루(市樓)로 내려왔네.
                  길이 넓으니 긴 소매로 춤출 수 있고, 세상이 태평하니 백전(百錢)을 막대에 걸고 놀 만하네.
                  고상한 종적은 아득히 멀리 신선의 고장으로 돌아가고, 남긴 노래는 전해져 경주(慶州)에 있네.
                  골목 어귀에 봄바람이 때로 한번 일어나니, 의연히 꽃 꽂은 머리를 불어 스치는 듯하네.” 하였다.


열박령(悅朴嶺) 본부 남쪽 30리에 있다. 동도(東都)의 기녀 전화앵(囀花鶯)이 묻힌 곳이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옥 같은 얼굴 혼(魂)을 재촉해 간 지 오래인데,
                                  하늘 끝에는 층층이 있는 산꼭대기만 보이네.
                 무협 신녀(神女)의 비무협(巫峽)에서 거두고, 
                                  미인의 바람은 낙천(洛川)에서 끊어졌네.
                 구름은 춤추는 옷자락처럼 땅에 끌리고,
                                 달은 노래하는 부채처럼 하늘에 떠 있네.
                 지나가는 길손이 몇 번이나 꽃다운 자질 슬퍼했던고?
                                수건 가득히 피눈물 흐른다네.” 하였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문왕(神文王) 때에 동해 가운데에 작은 산이 둥둥 떠 와서 감은사(感恩寺)를 향해 물결에 따라 왔다갔다 하였다. 임금이 이상히 여겨 바다에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산 위에 한 그루의 대[竹]가 있었다. 명하여 피리를 만들었더니,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도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비가 개며, 바람도 그치고 파도도 잠잠해져서 만파식적이라고 하였다.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여겼다. 효소왕 때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가호(加號)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옥적(玉笛) 길이가 한 자 아홉 치인데, 그 소리가 맑다. 속설에 동해의 용(龍)이 바친 것이라 한다. 대대로 보배로 전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신라가 나라를 그 옛날에 열었으니, 
                    풍속이 순박하고 간략하여 제작(制作)이 없었다.
                    옥적이라는 한 보물이 언제 만들어졌던가?
                    재료가 실도 아니고 돌도 아니며 또 대도 아닐세. 
                    예악(禮樂)이 야박한 풍속을 돌이킬 수 있는데,
                    하물며 형산(荊山)의 옥을 다듬었음에랴?
                    당시에는 초목도 혜택을 입었으니,
                    어찌 생각하였으랴? 지금 계림(鷄林)에 누런 잎이 되었을 줄을.
                    첨성대 오래되어 포석정 눌렀는데
                    피리 소리는 멀리 집집마다에 들려지네.
                    하루아침에 온갖 일이 연기처럼 사라지니, 
                    보배로 여기던 것 사람 아니고 오직 물건이었네.
                    돈은 일전(一錢)어치도 못 되는 것,
                    완전하거나 이지러졌거나 버려 두었네.
                    내가 와서 홀연히 한 소리의 가락을 듣고,
                    붓을 잡아 노래를 짓노라니 글재주가 졸렬하네. 
                    상왕(商王)의 상저(象箸)도 매몰(埋沒)되니,   [주(紂)임금이 상아(象牙)로 젓가락을 만들었다.]
                    목야(牧野) 천년에 먼 생각이 나네.” 하였다.
       *목야(牧野)-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칠 때에 목야(牧野)에서 싸워 이겼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계림의 지나간 일 일찍이 들었는데,
                     묻노라. 옥적(玉笛)은 어느 시대에 만들었던고?
                     이야기 들으니, 신라의 태평시절에,
                     태평풍월(太平風月)을 관현(管絃)에 실었네.
                     대에서 나는 소리는 오히려 위천(渭川)의 속됨싫어
                     옥공(玉工)에게 명하여 남전옥(藍田玉)을 다루게 하였네.
                     가늘고 미끄럽게 갈고 다듬으니,
                     교묘하게 뚫은 여섯 구멍 별이 듬성듬성한 듯.
                     현악(絃樂)이 금석(金石)과 조화되게 하니,
                     부딪치는 맑은 소리 연주장 고요히 하였네.
                     그때의 물건들 다 사라지고 지금까지 남은 것은 오직 이 물건.
                     귀신이 지켜서 완전무결하게 영구히 전한 것 아닌가?
                     내 생각을 모아 노래 한 곡조 부르려 하나,
                     곡조도 되지 않고 가사(歌詞)도 졸렬하네.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기산(岐山)의 석고(石鼓)가 오랫동안 인멸(湮滅)된 것을. 
                     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가 홀로 노래 불렀네.


옥대(玉帶) 진평왕(眞平王) 원년에 신인(神人)이 궁전 뜰에 내려와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나에게 옥띠[玉帶]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꿇어앉아 받아서 교제(郊祭)[하늘에 지내는 천제]와 묘제(廟祭) [종묘의 제사]등 큰 제사에 모두 착용하였다. 그때 사람이 찬미하기를, “구름 밖에서 하늘이 옥띠를 하사하니, 임금의 곤룡포와 잘 어울리네. 우리 임금 지금부터 몸 더욱 무거우시니, 내일 아침에는 쇠로 섬돌을 만드리라.”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에 고려 태조에게 바치니, 바로 금을 새기고 옥을 박아 모나게 만든 허리띠로, 길이가 10위(圍)이고, 띠쇠가 62개였다. 물장고(物藏庫)에 간직하게 하였다.
처음 신라 사자 김률(金律)이 고려에 왔을 때에, 태조가 묻기를, “들으니,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장륙금상(丈六金像)ㆍ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제대(聖帝帶)라 한다. 이것들이 있는가?” 하였다. 김률이 대답하기를, “성제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높은 신하인데, 어찌 모르는가?” 하니, 김률이 부끄럽게 여겼다. 돌아와 경순왕에게 보고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나이가 90세가 넘은 황룡사 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착용하던 것으로, 역대의 임금들이 보배로 전해 와서 남고(南庫)에 간직해 두었다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창고를 열고 찾으려 하니,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대낮이 캄캄하게 되었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재계하고 제사한 뒤에야 찾아내었다.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이 성골(聖骨)의 왕이기 때문에 성제대라 일컫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 바친 것이다.


정전(井田) 신라 때의 정전(井田)으로 터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사절유택(四節遊宅) 신라의 서울 사람들은 부유하고 윤택한 집을 금입택(金入宅)이라 하였는데, 모두 35채가 있었다. 또 사계절에 유상(遊賞)하는 곳을 사절유택이라 하였으니, 봄의 동야택(東野宅), 여름의 곡량택(谷良宅), 가을의 구지택(仇知宅), 겨울의 가이택(加伊宅)이다.

재매곡(財買谷) 김유신(金庾信)의 종녀(宗女)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가 골짜기에 장사하고, 재매곡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매년 봄철에 일가의 남녀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연회를 한다. 그때는 온갖 꽃이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庵子)를 짓고, 송화방(松花房)이라고 이름지었다.

일정교(日精橋) 춘양교(春陽橋)라고도 한다. 옛날의 본부 동남쪽 문천(蚊川) 가에 있었다.

월정교(月精橋) 옛날에 본부 서남쪽 문천 가에 있었다. 두 다리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 김극기의 시에,
                 “반월성 남쪽 토령(兎嶺) 옆에, 무지개 모양의 다리 그림자가 거꾸로 문천에 비치네.
                  용(龍)이 꿈틀거리며 은하수에 오르니 꼬리가 땅에 드리워지고,
                  무지개가 하수(河水)를 마시매 허리가 하늘에 걸쳤네.
                  손으로 푸른 이무기를 베었으니, 주처(周處)의 용맹이요, 
                  몸이 흰 학으로 되었으니 정령위(丁令威)의 신선이네.
                  옛날 현인(賢人)들의 숨은 자취 모두 세속을 놀라게 하는데,
                  구구하게 자주 왕래하는 내 자신 부끄럽구나.” 하였다.


귀교(鬼橋) 신원사(神元寺) 옆에 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기를,
진지왕(眞智王)이 사량부(沙梁部)의 도화랑(桃花娘)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가까이하려 하니, 도화랑이 말하기를, “저에게는 남편이 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농담으로 이르기를, “남편이 없다면 되겠느냐?”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 해에 임금이 죽고 2년 뒤에 그녀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뒤의 밤에 임금이 평상시처럼 그녀의 방에 와서 이르기를, “네가 전날 허락한 바 있는데, 이제 남편이 없으니 되겠구나.” 하고 7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홀연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이 비형(鼻荊)이다. 진평왕(眞平王)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는데, 15세가 되자 밤마다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으로 황천(荒川) 언덕에 이르러 귀신들과 놀다가, 여러 절의 새벽 종 소리를 듣고는 흩어지는 것이었다. 임금이 용사(勇士)를 시켜 엿보게 하여 그것을 알고 비형에게 묻기를,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 하는데 참말이냐?”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서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게 하여라.” 하니, 비형이 그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으므로 귀교(鬼橋)라고 이름을 지었다.
임금이 또 묻기를, “귀신들 중에 인간 세계에 나와서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길달(吉達)이라는 자가 쓸 만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비형이 길달을 데리고 와서 함께 뵈었다. 임금이 길달에게 벼슬을 내리고 일을 시키니 과연 충직(忠直)하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으므로, 임금이 길달을 후사(後嗣)로 삼으라 하였다. 임종은 길달에게 흥륜사(興輪寺)에 누문(樓門)을 창건(創建)하게 하고,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하였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므로,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 뒤부터는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을 들으면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그때 사람이 가사(歌詞)를 짓기를, “성제(聖帝)의 혼이 아들을 낳은 비형랑(鼻荊郞)의 집이로다. 날거나 달리는 모든 귀신들은 이곳에 머물지 말라.” 하였다. 경주의 풍속에 지금도 이 가사를 문에 붙여서 귀신을 쫓는다. 이것이 동경 두두리(豆豆里)의 시초이다.


백운량(白雲梁) 역시 문천(蚊川) 가에 있다.

상서장(上書莊) 금오산 북쪽에 있다.
○ 고려 태조가 일어나자,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그가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을 것을 알고, 글을 올렸으니,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鵠嶺 송악(松嶽))은 푸른 솔이로다.”는 말이 있었다. 신라의 임금이 듣고 그를 미워하니, 최치원은 즉시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신라 사람들이 탄복하여, 마침내 그가 살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고 이름지었다.


봉덕사종(奉德寺鍾)
신라 혜공왕(惠恭王)이 주조(鑄造)한 종으로 구리 12만근이 들었다. 치면 소리가 백여 리까지 들린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北川)에 침몰하자, 천순(天順) 4년 경진년에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달았다.

○ 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의 종명(鍾銘)에,
“지극한 도(道)는 형상(形像) 밖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를 진동하기 때문에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설(假說)을 설정하여 삼진(三眞)의 오묘한 일을 살피고, 신기한 종(鍾)을 달아서 일승(一乘)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한다.
종(鍾)이라는 것은 부처의 고향에서 상고하면 계이(罽膩 서역 국명(西域國名))에 증거가 있고, 중국에서 찾으면 고연(鼓延)에게서 처음 제작되었다. 비었으므로 잘 울려 그 소리가 다하지 않고, 무거워서 옮기기가 어려우니 그 몸이 쭈그러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왕자(王者)의 큰 공을 그 위에 새기는 것이며,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성덕대왕(聖德大王)께서는, 덕(德)은 산하(山河)와 함께 높고 이름은 일월과 나란히 높았다. 진실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속을 살폈다.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는 넘쳐나는 물건이 없었다. 시속은 금옥(金玉)을 싫어하고 세상은 글재주를 숭상하였다. 여색을 생각지 않고 노년의 경계에 마음을 두어 40여 년 동안을 국가에 군림하여 정치에 부지런하였다. 한 번도 전란으로 백성들을 놀라고 시끄럽게 한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만리에서 복종해 와서, 다만 임금의 풍화(風化)를 흠모함이 있을 뿐, 일찍이 화살을 날려 엿보는 일이 없었다. 연(燕) 나라와 진(秦) 나라의 인재 쓴 것이나 제(齊) 나라와 진(晉) 나라가 교대로 패권(覇權)을 잡은 것과, 어찌 나란히 비교하여 말할 것이겠는가?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시기는 예측하기 어려웠고, 천추의 밤은 길어지기 쉬웠다. 승하하신 뒤로 지금 34년이 되었다.
근년 효자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 큰 기업을 계승해 지켜서 나라의 온갖 정사를 잘 다스렸다. 일찍 어머니 여읜 것을 세월이 갈수록 더욱 그리워하더니, 거듭 부왕을 잃게 되어 궁궐에 다다를 때마다 더욱 슬퍼하였다. 부모를 추모하는 정은 갈수록 슬퍼지고, 영혼의 명복을 빌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삼가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큰 종 한 개를 주조하려고, 뜻을 세웠는데, 성취하지 못하고 문득 세상을 버리셨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행실이 조종(祖宗)과 합치되고 뜻이 지극한 이치와 부합되어 기이한 상서(祥瑞)는 천고(千古)에 특이하고, 아름다운 덕은 당시에 으뜸이다. 육가(六街)의 용의 구름은 옥계(玉階)에 덮어 비를 내리고, 구천(九天)의 우레 북은 금궐(金闕)에 소리를 떨친다. 과목(菓木)의 수풀은 외경(外境)에 무성하고, 연기 아닌 서기는 서울에 빛난다. 이것은 즉 이 땅에 탄생하신 날이 그 정사를 시작한 시기에 부합한 것이 우러러 생각건대, 대군(大君)께서는, 은덕은 땅처럼 공평하여 백성들을 인교(仁敎)로 감화시키고, 마음은 하늘의 거울과 같아서 부자(父子)의 효성을 권장하였다. 아침에는 어진 외삼촌에게, 저녁에는 보필하는 충신에게서 채택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무엇을 행한들 허물이 있겠는가?
이에 선왕의 유언을 돌아보아 드디어 오래된 뜻을 성취하였다. 유사(有司)는 일을 처리하고, 장인들은 재주를 다하였다. 해는 신해년이고, 달은 12월이다. 이때에 해와 달은 빛을 더하고, 음과 양은 기운을 조화롭게 하였다.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한데, 신령한 그릇(종)이 이루어지니, 모양은 산악(山岳)이 서 있는 것 같고, 소리는 용(龍)의 울음 같다.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고, 가만히 끝없는 지옥 밑에까지 통하리라. 보는 자는 기이하다고 칭찬하고, 듣는 자는 복을 받는다.
원컨대, 이 묘한 인연이 선왕의 높으신 영(靈)을 받들어, 도와서 음문(音聞)의 맑은 소리를 듣고, 말 없는 법연(法筵)에 오르시어 삼명(三明)의 승한 마음에 합하고, 일승(一乘)의 진경(眞境)에 거하고, 또는 왕가의 자손들이 금지(金枝)와 함께 길이 무성하며, 국가의 기업은 철위산(鐵圍山)처럼 더욱 번창하여,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지혜의 바다에서 물결을 같이하여, 모두 티끌 세계에서 벗어나 모두 깨달음의 길에 오르게 하소서.
신 필혜(弼奚)는 글이 졸렬하고 재주가 없으면서, 감히 조서(詔書)를 받들어 반초(班超)의 붓을 빌리고 육좌(陸佐)의 말에 따라 그 원하는 뜻을 기술하여 종(鍾)에 새긴다.” 하였다.

그 명(銘)에,
 “하늘은 상(象)을 드리우고 땅은 방위(方位)를 여니, 산과 물은 진압하고 나라들이 벌여 섰다. 동해(東海) 가는 여러 신선이 숨은 곳으로 땅은 도학(桃壑)에 있고, 경계(境界)는 부상(扶桑)에 이어져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있어 합하여 한 고장이 되었다.
임금들의 성덕(聖德)이 대(代)가 오래될수록 더욱 새롭고, 오묘하고 오묘한 맑은 교화는 원근에까지 미치었다. 은혜를 가지고 먼 곳까지 덮으니, 만물과 더불어 고르게 은택에 젖는다. 성하도다. 천세(千歲)에 온갖 무리를 편히 한다. 수심 어린 구름이 홀연히 벗겨지고 지혜의 해가 봄[春]이 없었다. 공손하고 효성스런 사왕(嗣王)께서 일천 가지 기무(機務)를 계승하여 세속을 다스림을 옛날대로 하니, 풍속을 변화시킴에 어찌 어긋남이 있으랴? 날마다 부왕(父王)의 훈계를 생각하고, 항상 모후(母后)의 자애로움을 사모하네. 다시 명복을 빌기 위하여 종(鍾)을 만들어 기원하네.
거룩하시도다. 우리 임금, 덕(德)에 감응함이 가볍지 않아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생기고, 신령스런 징조가 매양 생긴다. 임금이 어질매 하늘이 보우하니 시절이 태평하고 나라가 평안하다. 조상을 추모하기를 오직 부지런히 하니, 소원대로 이루어지리. 마침내 선왕의 유명(遺命)을 생각하여 이에 종을 주조하였다. 신(神)과 사람이 힘을 도우니 진기한 그릇이 만들어졌다. 위엄은 창곡(暢谷 해 뜨는 곳)에 떨치고, 소리는 삭봉(朔峯)에까지 맑게 들리리. 듣는 이와 보는 이가 모두 신뢰하여 꽃다운 인연이 진실로 여기에 모이리라. 능히 마귀도 보전하고 어룡(魚龍)도 구제한다. 둥글고 빈 신체(神體)가 바야흐로 성스런 자취 나타내어, 길이 큰 복이 항상 거듭하소서.” 하였다.
『신증』
부윤(府尹) 예춘년(芮椿年)이 남문(南門) 밖에 옮겨서 종각(鐘閣)을 지어 달아 놓고 군사들을 징집할 때에 쳤다.


담암사(曇巖寺) 옛터가 사릉(蛇陵) 남쪽에 있다.

천관사(天官寺) 오릉(五陵) 동쪽에 있다.
○ 김유신(金庾信)이 소시적에는 어머니가 날마다 엄한 훈계를 하여 함부로 남들과 사귀지 않더니, 하루는 우연히 창녀(娼女) 집에서 유숙하였다.
어머니가 훈계하기를,
“나는 이미 늙어서 낮이나 밤이나 네가 성장하여 공명(功名)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지금 네가 천한 아이들과 함께 음란한 술집에서 놀아난단 말이냐?”하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유신이 즉시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 문을 지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술에 흠뻑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말이 전날 다니던 길을 따라 잘못 창녀의 집으로 갔다. 창녀는 한편으로는 반기고 한편으로는 원망하며 울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유신이 알고는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로 돌아갔다. 그 여자가 원망하는 노래 한 곡조를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절은 바로 그 여자의 집이며, 천관(天官)은 그 여자의 이름이다.
○ 고려 이공승(李公升)의 시에,
               “절 이름 천관(天官)은 옛 사연이 있어서 홀연 그 유래를 들으니 처연(凄然)하도다.
                정 많은 공자(公子)가 꽃 아래에 놀더니, 원망을 품은 가인(佳人)이 말 앞에서 울었네.
                말은 정이 있어 도리어 옛길을 알았는데, 하인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을 더했던고?
                다만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오묘하여 달에서 함께 잔다말만 만고에 전하네.” 하였다.


황룡사(黃龍寺)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다. 지금은 없어지고, 장륙존상(丈六尊像)만이 있다.
○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해당관사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더니, 누런 용이 그곳에서 나왔다. 왕이 이상히 여겨 다시 절을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솔거(率去)라는 이가 있어서 절 벽에 노송(老松)을 그려 놓으니, 뿌리와 줄기는 비늘처럼 되어 있고 가지와 잎은 서리에 구불구불했다. 새들이 이따금 멀리서 바라보고 날아 왔다가 벽에 부딪쳐 미끄러져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빛이 바래졌으므로 중이 단청(丹靑)으로 칠을 하였더니,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조유궁(朝遊宮)을 철거하고, 그 재목을 가져다 이 절의 탑을 수축하였다. 송 나라 학사(學士) 호종단(胡宗旦)이 사신으로 와서 초헌(軺軒)을 타고 이 절의 양화문(兩花門)을 지나다가, 진사 최홍빈(崔鴻賓)이 머물며 지은, “고목(古木)은 북풍(北風)에 울고, 작은 물결은 지는 햇빛을 일렁이네. 배회하며 옛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라는 시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진실로 세상에 드문 뛰어난 재주로다.” 하였다. 자기 나라에서 복명(復命)할 때, 임금이 동도(東都)에 남아 있는 옛일을 물으니, 드디어 이 시를 아뢰었다 한다.
○ 김극기의 시에,
                     “오후(五侯)의 큰 집들은 여름이 되어도 더위를 받지 않네.
                      더위를 맡은 신관(神官)이 위엄 잃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누추한 작은 집에 번거롭게 화풀이를 하네.
                      마음을 태우니 시름은 불과 같고, 몸을 지지니 땀은 비오듯 하네.
                      섭정능(葉靜能)[유명한 도사 이름]을 따라 청허부(淸虛府)로 날아가서
                      몸은 푸른 옥두꺼비를 타고 손으로는 흰 옥토끼를 희롱하고 싶네. 
                      애석하게도 평범한 세속 냄새가 나서 구름 낀 하늘에서 돌아갈 길 잃었네.
                      숨어 사는 사람 찾아가서 맑고 부드러운 말에 적심만 같지 못하네.
                      새벽에 일어나 등나무를 짚고 서사(西社)의 주인을 찾는다. 
                      달팽이 침은 섬돌 이끼에 둘러 있고, 새 울음 소리는 구름 속의 나무를 침노한다.
                      전각(殿閣)은 웅장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여 공중을 향해서 날아갈 듯하구나. 
                      집 가득히 만다라꽃[曼陀羅花]은 어지러이 떨어져 옥티끌 같다. 
                      오래 앉아 있노라니 황금 향로에서는 침향(沈香) 연기가 
                      전자(篆字) 모양으로 줄줄이 가로로 흩어진다. 
                      불을 살려 향기로운 차를 시험삼아 달이니
                      꽃 무늬 자기(磁器)에 흰 젖이 뜨네.
                      향기롭고 달아서 맛이 더욱 좋구나.
                      한 번 마시니 백 가지 생각이 없어지네.
                      저녁 빛이 질펀한 숲에 드니 긴 행랑에서 법고(法鼓)가 울리네.
                      재주가 적으니 온갖 경치가 교만한 듯하여,
                      붓을 잡고 읊기 더욱 괴롭구나.”하였다.
○ “층계로 된 사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 물과 일천 산이 한 눈에 트이네.
    몸은 옛날 노오(盧敖)가 신선을 따라 오르내린 밖에 나왔고,
    눈은 수해(豎亥)가 오가던 가운데를 삼키네.
    성사(星槎)의 그림자는 처마 앞 비에 떨어지고,
    달 속의 계수나무 향기는 난간 밑 바람에 나부끼네.
    굽어보니, 동도(東都)의 아주 많은 집들이,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하였다.


가섭연좌석(迦葉宴坐石) 황룡사에 있다. 돌의 높이는 5ㆍ6 척이나 되고, 둘레는 겨우 세 아름이다. 속설에 가섭(迦葉)이 편안히 쉰 돌이라 한다. 또 석가모니의 장륙불상(丈六佛像)이 있니, 진평왕 때에 주조한 것이다. 황철(黃鐵)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으로 만들었다.
후인이 연좌석(宴坐石) 찬가(讚歌)를 짓기를,
                     “지혜의 해빛을 감춘 뒤로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다만 연좌석만이 여전히 남아 있네.
                      상전(桑田)은 몇 번이나 창해(滄海)를 이루었던고?
                      다행하게도 웅장한 모습 아직도 변함이 없구나.” 하였고,
장륙불상의 찬가에는, 
                     “티끌 세상 어디인들 불계(佛界)가 아니련만,
                      향화(香火)의 인연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다네.
                      아육왕(阿育王)이 만들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월성(月城)은 옛터를 찾은 곳이네.” 하였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있다.
봉성사(奉聖寺) 본부 동쪽 4리에 있다.
영흥사(永興寺) 본부의 성(城) 남쪽에 있다.
흥륜사(興輪寺) 본부 남쪽 2리에 있다.
신원사(神元寺) 본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창림사(昌林寺)
금오산 기슭에 신라 때 궁전의 옛터가 있었는데, 후인들이 그 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옛 비석이 있으나 글자는 없다. 원 나라 학사 조자앙(趙子昻)의 창림사비(昌林寺碑)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이것은 당 나라 시대 신라 중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로 자획(字畫)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훨씬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디인들 재주 있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으랴?’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하였다.

남산사(南山寺) 신라 사람 대세(大世)는 방외(方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평왕 9년에 담수(淡水)라는 중과 말하기를, “이 신라의 산골 사이에서 한평생을 마친다면 못 속의 물고기나 새장 안의 새와 무엇이 다르랴? 내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오 나라나 월 나라와 같은 먼 나라에 가서 스승을 따라 명산(名山)에서 도(道)를 닦으려 한다. 만약 이 평범한 몸을 바꾸어 신선을 배울 수 있다면 광활한 하늘 밖으로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기이한 노닒이고 웅장한 구경거리다. 그대는 나를 따라가겠는가?” 하니, 담수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세가 물러나와서 마침 구칠(仇柒)이라는 자를 만났는데, 강건하게 기이한 절조가 있었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사에서 노닐었는데, 홀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낙엽이 뜰의 괸 물에 떴다. 대세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가고 싶은 뜻이 있다. 각각 나뭇잎 한 개씩을 가지고 배를 삼아 그것이 떠내려가는 차례를 가지고 우리가 떠나가는 차례를 보기로 하자.” 하였다. 조금 뒤에 대세의 나뭇잎이 앞에 있었다. 대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가네.” 하니, 구칠이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나도 남자인데, 어찌 나만 남는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어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뒤로는 그들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주암사지맥석(朱巖寺持麥石)
김극기의 시의 서문(序文)에,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이 산 남쪽에 주암사(朱巖寺)라는 절이 있다.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어서 깎아지른 듯하고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을 보고 먼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온갖 물상(物象)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대석(臺石)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다.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하여 올라갈 수는 없을 듯하지만, 그 위는 평탄하여 사람 백 명이 앉을 만하다.옛날 신라의 대서발(大舒發) 김유신 공이 여기에 보리를 두어 술의 재료로 공급하여 장교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ㆍ9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예전에 도인(道人)이 신중(神衆) 삼매(三昧)를 얻고, 일찍이 스스로를 격려하기를, ‘진실로 궁녀(宮女)가 아니라면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귀신들이 그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서 공중으로 날아가서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곤 하는데, 때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궁녀가 두려워서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궁녀에게 가서 자는 곳마다 단사(丹砂)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군사에게 찾게 하였다. 안으로는 성시(城市)에서부터 멀리로는 높은 산골짜기의 매우 으슥한 곳까지 찾았으나 찾아낼 수 없더니, 홀연 이 바위에 도착해서 보니, 단사의 붉은 흔적이 바위문에 찍혀 있는데, 납의(衲衣)를 입은 늙은 중이 그 안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상하고 미혹시키는 행위를 성내어 사나운 군사 수천 명을 보내어 죽이고자 하였다. 중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 번 귀신의 주문(呪文)을 외우니, 귀신 군사 수만 명이 산골짜기에 잇따라 늘어선 것이 마치 세상에서 그려 놓은 귀신의 형상과 같았다. 왕의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땅에 엎드려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로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으니 그의 요괴한 일이 드디어 없어졌다 한다.” 하였다. 그 시에,
        “멀고 먼 구름 가의 절, 
        특이한 지경이 티끌 세상과 격리되었네.
        조도(鳥道)는 푸른 하늘에 구불구불 나 있고, 
        봉대(蜂臺)는 푸른 바다에 걸쳐 있다.
        지령(地靈)은 골짜기에 감춰져 있고,
        하늘 바람은 대와 삼나무에 펄렁거린다.
        멀리 바라보매 가슴 시원하여,
        말이 재갈을 벗은 것 같구나.” 하였다.
○    “우뚝 솟은 천길 묏부리에 높직한 한 개의 돌이로다.
        깎아지른 듯 사면은 험준한 데 정상은 자리처럼 판판하다.
        상상컨대, 서발공(舒發公)이 사람들을 시켜 여기에 보리를 두고
        아침저녁으로 장교들을 위로하니,
        곰 같은 용감한 장수들이 다투어 힘을 떨치었으리.
        부월(斧鉞)을 가지고 여러 번 정벌에 나가니, 
        왕사(王師)를 마침내 대적할 자 없었네.
        지킬 때에는 우뚝 서 있는 산과 같고,
        공격할 때에는 번개치듯 하였네.
        삼한(三韓)을 한 나라로 만드니,
        큰 공훈이 금책(金冊)에 새겨졌네.
        영백(英魄)은 지금 어디 있는고? 
       푸른 이끼가 말굽 자국을 덮었네.
       내 우연히 와서 기이한 것 찾아 올라 구경하고 옛일을 생각하네.
       당시에 내가 채찍 잡고 그분을 따르지는 못했으나,
       남은 위엄이 늠름하기 어제 같네.
        흰 달은 각궁(角弓)처럼 굽어져 있고,
        파란 구름은 청유막(靑油幕)을 말아 놓은 듯,
        골짜기에는 대인호(大人虎)가 많고,
        숲에는 군자학(君子鶴)이 많네. 
        놀란 우레가 바위 멧부리를 찢으니,
        북소리와 징소리를 듣는 듯하구나.
        슬프다. 나는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고 자질구레하게 문장을 전공했네.
        반평생에 겨우 과거에 올랐으니, 두 귀밑털이 이미 희어졌네.
        왕후(王侯)되기를 어찌 기약하랴? 산꼴짜기에 눕기를 이미 각오했네.
        다만 원하기는 그분의 남은 용맹을 빌려서 문단에서 길이 승자(勝者)나 되었으면.” 하였다.


곤원사북연(坤元寺北淵) 신원사의 남쪽 2리에 있다. 고려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의종(毅宗)이 거제(巨濟)로 도망가니,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東北面兵馬使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고 다시 전왕(前王)을 세우고자 하여 장순석(張純錫) 등으로 하여금 전왕을 모시고 이 고을로 나와 있게 하였다. 이의민(李義旼) 등이 입성(入城)해서 전왕을 끌어내어 곤원사 북쪽 못가에서 시해(弑害)하고 시체를 요로 싸고 두 개의 가마솥 속에 넣어서 못 속으로 던졌다. 헤엄을 잘 치는 중이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리니, 시체가 물가로 떠내려와 여러 날이 되었으나 까마귀와 솔개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다.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하여 물가에 매장하였다.

왕가수(王家藪) 본부 남쪽 10리에 있다.
고을 사람들이 목랑(木郞)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목랑은 속칭 두두리(頭頭里)라고 한다. 비형(鼻荊)이 있은 이후로 세속에서는 두두리를 섬기기를 매우 성대하게 하였다. 고종(高宗) 18년에 몽고의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이 와서 이전에 원 나라의 사신 저고여(箸古與)가 국경에서 암살된 사건을 성토하였다. 동경(東京 경주)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목랑이 말하기를,‘내가 이미 적군의 진영에 도착하였으니, 적의 원수는 누구누구입니다. 우리들 다섯 명이 적들과 싸우고자 하니, 10월 18일을 기해서 만약 무기와 안장 얹은 말을 보내준다면 우리들이 곧 승첩(勝捷)을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시를 지어 최우(崔瑀)에게 보내기를 ‘장수(長壽)와 요절(夭折)과 재해(災害)와 상서(祥瑞)는 같은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일찍이 알지 못하네. 재앙을 제거하고 복이 오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하늘 위나 인간 세상에서 나 아니면 누가 하랴?” 하였다. 최우가 그것을 믿고 사적으로 안장 얹은 말을 그려서 내시 김지석(金之蓆)을 시켜 보내주었으나, 그 뒤에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임관군(臨關郡) 군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 때에 성을 모화군(毛火郡)에 쌓아 일본의 침입을 막았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임관(臨關)이라고 명칭을 고쳤다. 고려 때에 합쳐서 주(州)에 예속시켰다. 돌로 쌓은 성의 남은 터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關門)이라 한다.

상성군(商城郡)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음즙화현(音汁火縣)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음즙벌국(音汁伐國)을 빼앗아 음즙화현(音汁火縣)을 두었다. 뒤에 안강현(安康縣)에 합속(合屬)하였다.

약장현(約章縣) 본래는 악지현(惡支縣)이었다.

동기정(東畿停) 본래는 모지정(毛只停)이다.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 사람들은 영(營)을 정(停)이라고 하였으니, 곧 진을 치고 주둔한 곳이다.” 하였다.

남기정(南畿停) 본래는 근내정(根乃停)이다.
서기정(西畿停) 본래는 두량미지정(豆良彌知停)이다.
○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지금의 밀양부 두야보부곡(密陽府豆也保部曲)이 바로 그곳이다.” 하였다. 양(良)과 야(也), 미지(彌知)와 보(保)는 방언(方言)에 서로 비슷한 말이니, 이첨의 말이 옳을 듯하다.

북기정(北畿停) 본래는 우곡정(雨谷停)이다.
막야정(莫耶停) 본래는 관아량지정(官阿良支停)으로 북하량(北河良)이라고도 한다.

성법이부곡(省法伊部曲)  법(法)은 잉(仍) 자로도 쓴다. 본부 북쪽 50리에 있다.
팔조부곡(八助部曲)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대포부곡(大庖部曲)ㆍ대창부곡(大昌部曲) 본부 서쪽 50리에 있다.
남안곡부곡(南安谷部曲) 본부 서쪽 45리에 있다.
근곡부곡(根谷部曲) 안강현 서남쪽 5리에 있다.
도계부곡(桃界部曲)ㆍ호명부곡(虎鳴部曲) 안강현 동남쪽 7리에 있다.
호촌부곡(虎村部曲) 신광현(神光縣) 동남쪽 5리에 있다.
하서지목책(下西知木柵)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안에 못 1개와 우물 2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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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三機)팔괴(八怪)

신라의 서울 경주에는 3가지 기이하고 여덟가지 괴이한 것이 있습니다.

3기 = 신라 3기는 금자와 만파식적, 에밀레종을 일컫는데

1. 신라 시조인 박 혁거세(朴 赫居世)가 왕으로 즉위하자 하늘에서 병든 사람을 낳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금으로 만든 신비한 금자를 내려주었습니다. 금자에 대한 소문을 들은 당시 중국의 한(漢)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여 달라고 하자, 신라에는 금자를 땅에 묻고 비슷한 봉분을 수십게 만들어 금자를 찾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 이후 이곳이 금자가 묻힌 곳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금척(金尺)이라고 부릅니다.

2. 옥적(玉笛) 또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검은 모양의 옥피리는 세 조각난 것을 은(銀)으로 이어 국립 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나 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신라 30대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이 옥피리를 불면 왜구가 겁을 먹고 물러났다는 전실이 전해고 있습니다.


3. 흔히 에밀레종(鐘)이라고 알려진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鍾)은 국립 경주박물관 정문들 들어서면 정면에 배치돼 있습니다. 신라 34대 경덕왕(景德王)이 부왕인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기 위해 주조하기 시작해 36대 혜공왕(惠恭王) 때 완성했는데, 종을 만들다가 실패를 거듭하자, 정성을 들이기 위해 어린 아이를 주조과정에 제물로 넣었기에 종을 칠 때 마다 어머니를 찾아 에밀레 하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8괴 = 신라의 서울 경주에는 8가지 괴이한 것이 있는데 전래되어오는 과정에서 일부 첨가되어 지금은 10가지로 늘어났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8괴 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1.남산부석(南山浮石) : 남산 국사골 바위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2.문천도사(蚊川倒沙) : 문천 곧 남천의 모래는 물위를 떠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3.계림황엽(鷄林黃葉) : 계림 숲에서는 가을 아닌 여름에도 잎사귀가 단풍 진다.이를보고 신라 말학자 최치원이 신라의 국운이 이미쇠퇴 하였음을 알고 예언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4.금장낙안(金丈落雁):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형산강가, 임금이 놀던 금장대에 날아온 기러기는 반드시 쉬어간다.

5.백률송순(栢栗松筍): 제래종 소나무는 순(筍)이 생기지 않는데 백률사의 소나무는 가지를 친 뒤 솔순이 생긴다고 한다.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이 있으며 솔 순은 불교 소생을 의미한다.

6.압지부평(鴨池浮萍): 안압지에 있는 마름이라는 여러해살이풀은 뿌리를 땅에 내리지 않고 물위에 떠 있다.

7.불국영지(佛國影池):영지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길 기다린 아사녀와 아사달의 전설이 얽혀있다.

8.나원백탑(羅原白塔):경주시 현곡면 나원리에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초기의 탑 인데 지금까지도 순백색의 빛깔을 간직 하고있다.

9.선도효색(仙桃曉色):선도산의 석양에 비친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꼽았다.

10.금오만하(金鰲晩霞):금오산 곧, 남산의 저녁놀이 아름답고 오래도록 남아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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