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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02 방응모씨 일제에 중기관총 헌납기록 발견
  2. 2004.12.12 미국 망명시절의 이승만
방응모씨 일제에 중기관총 헌납기록 발견
[한겨레   2005-09-02 09:08:47] 

[한겨레]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등 조선인 지도층들이 일제의 전시동원 체제가 확립되기 전인 1933년에 일제에 무기를 헌납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일 “일본 옛 육군성에 보관됐던 ‘국방헌납 병기 수령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찾아냈다”며 “이 문서에 기록된 기관총과 고사포 등을 헌납한 20여명의 명단 가운데 방씨도 포함됐다”고 밝혔다. 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는 1933년 4월15일치 일본 육군성 정무차관실 문서로, 조선과 중국에 거주하던 은행장과 기업가, 현역 장성 등이 ‘3년식 기관총’ 21개와 고사포 등을 일제에 헌납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헌납자 대부분은 일본인이며, 조선인 헌납자는 방씨를 비롯해 △종로 화신백화점 건물의 소유주로 부동산 재벌이었던 한학수 △평안북도 의주읍장을 거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조선일보사 이사를 지낸 고일청 △경기도 수원의 거부로 독립운동가에게서 군자금을 내놓으라는 편지를 받고 경찰에 밀고한 양성관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 등 5명이다.
문서가 작성된 시점인 1933년 4월은 방씨가 조선일보사를 인수(1933년 3월)한 지 한달 뒤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무기 헌납은 대부분 1937년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동원체제가 들어선 뒤 이뤄졌다”며 “1933년에 무기를 헌납했다는 것은 방씨가 일찍부터  친일에 나섰다는 것을 말해주며, 신문사를 경영하며 어쩔 수 없이 일부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사장실 쪽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말했다. 앞서 <조선일보>는 지난달 29일 발표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친일인사 명단에 방씨가 포함된 것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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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망명시절의 이승만


우남 이승만(1875~1965)은 오늘의 한민족과 한반도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제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민족노선에 힘입어 영화와 부귀를 누린 사람도 있었으나 그의 분단노선으로 이 민족은 백범(白凡)이 우려한 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오늘날까지 분단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핵전쟁의 위협까지 받게 되어 남북 6천만 민족의 생존이 중대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간 국시(國是)인 민주주의는 수난 속에 신음하며 고난의 길을 걷고 있고 평화로운 통일 조국의 건설은 한낱 꿈처럼 민족의 비원(悲願)이 되고 만 것이 오늘 우리의 민족적 현실이다.

이승만에 대한 시비(是非)는 오늘날도 구구하다. 아직도 그의 정치노선은 현실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노선을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벌서 한 세대가 지났고 미군정하의 기밀문서도 공개되는 시기가 되었으므로 그의 노선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도 무관할 것이다.

이승만은 청년 시절부터 벼슬을 하고자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그때마다 낙방을 하고 그나마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과거제가 없어져 벼슬길이 사라지자 하는 수 없이 당시에 한창 밀어닥치던 개화바람을 타고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영학(英學)을 배우게 되었다. 고집이 세고 완강한 그는 독립협회운동 때 벌써 상당한 비중으로 개혁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 그는 한때 옥고를 겪었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태평양을 건너갔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독선과 고집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11년부터 8․15를 맞는 1945년까지 35년간의 긴 세월을 주로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물론 그가 긴 망명기간 동안 일부 인사의 경우처럼 도중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항일의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수도 있으나 35년간의 망명생활에서 그가 보여준 몇가지 특징은 이미 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앞으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운동 당시 이승만의 동지로서 그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후일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바 있는 박용만은 하와이 시절의 이승만에 대해, 이승만이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일삼아 자기의 조그마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력을 소비하는 문제의 인물임을 경고한 바 있다. 이승만은 자기가 한인 운동단체의 '장'(長)이 안되면 못 참는 인물이었으며 또 누구의 충고나 여론 같은 것에 상관없이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지나치게 독선적 인물로 알려졌으며 또한 그때부터 이미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로서 두드러졌다.

이승만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한국인 사회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불화․반목․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적대관계에 있는 한인을 용공분자(容共分者)로 몰아붙이는 사람으로 그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당시 미국무성의 일부에서 신임을 얻고 있던 한길수와 제휴할 것을 종용받자 이승만은 한길수와 합작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여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으로 하여금 루즈벨트에게 "한국인은 너무 분열도가 심해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보고를 하게 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임정을 연합국의 한나라로 인정받도록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무성에 교섭케 했으나 미국무성이 이승만을 전혀 상대조차 해주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준비가 연합국 사이에서 시작되자 이곳에 많은 한국인 지도자들이 독립문제를 협의코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는 벌써 장차 독립 한국정부를 공산주의자와 연립하여 세울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정부 요직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독립도 하기 전에 벌써 자리다툼을 하는 듯한 인상을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는 외국지도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참 정치적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8․15 직후 서울은 좌익의 장악 속에 있었고 미군 당국은 이들 좌익과 대항하기 위해서 반공으로 이름난 이승만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간 철저히 무시하고 상대조차 않던 이승만을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갑자기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대접하게 되어 이승만은 거의 힘 안 들이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민중 앞에 군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극동정책의 필요에 따라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환국하게 된 것이다. 36년간 식민통치하에 신음하는 국내 민중과 사실상 연락이나 유대가 없었고 따라서 일반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영웅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행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유리한 여건 속에서 이승만의 환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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