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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2.17 의정부 노강서원
노강서원 [ 老江書院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에 있는 서원. 경기도 기념물 제41호.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때 인현왕후의폐출 반대를 죽음으로 충간(忠諫)하였던 박태보(朴泰輔- 박세당의 둘째 아들)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창건하여 위폐를 모셨다. 1697(숙종 23)년에 조윤벽(趙潤璧)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노강(鷺江)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754년에 중건되었다. 1791년(정조 15) 노강서원으로 승격하여 다시 사액받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6·25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동재(東齋)·서재(西齋)·삼문(三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박태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성 명】 박태보(朴泰輔)
【생몰년】 1654(효종 5)∼1689(숙종 15)
【본 관】 반남(潘南) 박(朴)
【자·호】 사원(士元), 정재(定齋)
【시 호】 문렬(文烈)
【저서·작품】 《정재(定齋集)》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654(효종 5)∼1689(숙종 15).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로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朴世堂)이고, 어머니는 의령(宜寧) 남씨(南氏)로 남일성(南一星)의 딸인데, 백부 박세후(朴世譽)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개가 있어 옳지 못한 일이 있으면 어른에게도 수시로 직언하였다고 한다. 숙종 1년(1675) 생원시에 급제하고, 1677년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그 후 여러 요직을 거쳐 1678년 예조 좌랑이 되었는데, 과거시험의 운영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평안도 선천(宣川)으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방면되어 이듬해 홍문관 수찬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27세였다.
문장에 능하여
홍문관에서 상소나 차자를 올리게 되면 매번 그가 작성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고위관료였던 최석정(崔錫鼎) · 조지겸(趙持謙) · 임영(林泳) 등이 특히 총애하였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도 많았으나,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숙종 8년(1682) 국왕의 특별 배려로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그 후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한때 좌천되었다가 1686년 다시 홍문관으로 옮겨 교리 · 수찬 등을 역임하고, 이조 좌랑이 되었다. 이조 좌랑으로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방을 순회하며 오래된 온갖 폐단을 시정하고 혁신하니, 그곳 백성들이 참 어사라고 칭송하였다. 귀경하여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고 이어서 파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후 남인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하려 함에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항변하여 심한 고문을 받고 전라도 진도(珍島)로 귀양가는 도중 노량진(동작구 노량진동)에서 젊은 나이로 죽었다. 숙종은 심히 후회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였다. 노량진의 노강서원(鷺江書院)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저서로 《정재집(定齋集)》이 전하고, 시조 한 수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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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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