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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온고지신 2004. 12. 12. 20:45
1. 약력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생.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용화와 결혼하고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고, 21년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鎬)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23년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고, 28년 세계 20여 개국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학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최초의 구연동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사랑의 선물(1922)》을 비롯한 개작번안, 창작동화를 남겼으며 《어린이》지를 통해서 신인아동문학가를 발굴하였다. 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고 78년 금관문화훈장, 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저서에 《소파전집(1940)》 《소파동화독본(1947)》 《소파방정환아동문학전집(1974)》 등이 있다.

2. 어린이날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어린이에 대한 애호정신을 앙양함으로써 이들을 바르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하여 지정한 기념일. 매년 5월 5일이다. 1923년 방정환(方定煥), 마해송(馬海松), 윤극영(尹克榮) 등이 주축이 된 <색동회>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1927년부터는 5월 5일로 날짜를 바꾸어 행사를 열었다. 당시의 <색동회> 활동은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의 하나로서 진행되었으며, 어린이를 위한 동요․동화의 창작 등을 병행하여 내실을 기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1961년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 의해 국정기념일로 되었다가 75년부터 공휴일이 되었다. 이날은 모범어린이를 선발 표창하고 아동복지에 힘쓴 유공자를 발굴․표창하는 한편, 체육대회,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사생대회, 가장행렬, 연극공연 등 어린이들의 정서함양과 체력향상을 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된다.


3. 어린이날을 만드신 방정환 선생님
방정환은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때 야주개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 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일곱 살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소성 소학교에 다녔으나 너무도 가난하여 소학교를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왕고모 집으로 옮겨 미동 보통 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선린 산업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2년만에 중퇴하고 조선 총독부 토지 조사국에 취업했습니다. 그곳은 우리의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하는 일과 농민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는 곳이기도 해서 그는 이를 박차고 나와 천도교 예배당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 전문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1운동의 기세가 꺽일 무렵, 그는 짐을 싸들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동양 대학 아동 미술과에 입학했습니다.
방정환은 2년 뒤 고국에 돌아와 천도교 안에 정식으로 소년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는 문예, 체육 등의 활동을 통해 어린이에게 정서와 건강과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조직한 것입니다. 또 이 때 그는'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고 어린이 동화집도 냈습니다. 더욱이 1923년 3월 1일에는 월간「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이어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색동회'도 조직하였으며, 이 해 5월1일 어린이 날로 지정하여 기념 식도 가졌습니다. 이 색동회에는 윤극영, 마해송, 윤석중 등이 가입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 어린이날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였습니다. 그는 뚱뚱한 몸집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어찌나 이야기를 잘했던지 어른들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가 첫 번째 어린이날 뿌린 전단의 첫 구절에서 어른에게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 보아 주시오."라고 했으며, 어린이에게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고 했다. 얼마나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표현입니까!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고 강연할 때, 일제의 경찰은 그 내용을 꼬투리 잡아서 서대문 경찰서에 가두는 따위의 탄압을 했으나 그는 결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눈물을 흘리며 쏘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동요를 남겼습니다.


겨울 밤에 오는 눈은 어머니 소식
혼자 누운 들창에 바아삭 바아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납니다.

방정환은 구연 동화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눈물을 옷깃에 적셨다 합니다. 그를 감시하던 순사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눈물을 흘려 그에게 "순사를 울린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고, 감옥에 가서는 죄수들에게 병원에 들러서는 간호사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를 보아도 그는 타고난 어린이 운동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정환은 서른 셋,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입원했는데 돌아가시던 날 밤 "가야겠어. 문간에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바로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그는 곧장 동화의 나라로 갔을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어린이 사랑'이란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출처 :  http://user.chollian.net/~tnsl/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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