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1.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4)

【학교】
향교(鄕校)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신증』 부윤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였다. 제도(制度)는 성균관을 모방하였다.

『신증』 소학당(小學堂) 부의 동쪽 2리에 있으며 부윤 양순석(梁順石)이 중수하였다. 학술(學術)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고 아이들을 모아서 교육한다.

【역원】
구어역(仇於驛) 부의 동쪽 48리에 있다.
조역(朝驛)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노곡역(奴谷驛) 부의 남쪽 26리에 있다.
아화역(阿火驛)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어느 곳이 슬퍼할 만한가, 새벽에 일어나 먼 길을 떠날 때.
            길에 오르기를 급히 서둘렀으나, 떠나기는 짐짓 머뭇거려지네.
            재 위의 아침 햇빛 솟아오르고, 숲 사이에는 자던 안개 걷혀지네.
            잔을 들어도 함께 말할 이 없고, 뜰 나무는 푸르름이 짙었네.” 하였다.

사리역(沙里驛)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의곡역(義谷驛) 부의 서쪽 57리에 있다.
경역(鏡驛) 안강현(安康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에는 39리이다.
잉보역(仍甫驛) 부의 남쪽 55리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멀고 먼 산 아래 길에, 말고삐 놓고 서늘한 날씨에 시를 읊네.
            물속에는 가스랑이[芒] 머금은 게[蟹]가 있고, 숲에는 잎으로 몸 가린 매미가 없네.
            시냇물 소리는 빗소리처럼 맑고, 들기운은 연기같이 담담(淡淡)하다.
            밤이 되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촌부(村夫)는 아직도 자지 않고 있네.” 하였다.

인비역(仁庇驛) 기계현(杞溪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76리이다.
육역(六驛) 신광현(神光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75리이다.
모량역(牟梁驛)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고향 생각하는 마음 만리 밖에서 오랫동안 깃발처럼 흔들리더니,
              홀연히 고향 항하여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가네.
              먼 재[嶺]는 점점 타향의 물색에 잠겨 가고, 
              어지러운 물소리는 처음으로 고향소리 들려 주네.
              마침내 끊어진 나무토막이 바람 물결 따르듯,
              종적을 거두어 떠다니는 구름이 메뿌리 그리워하는 정(情)을 위로하련다.
              세상의 영화롭고 쇠하는 것 한 번 웃음거리일 뿐,
              어찌 분주하게 이름을 위하여 괴롭게 달릴 것인가.”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역로(驛路)에 매미가 늙은 나무에 우는 가을인데,
              동도(東都)에 노니는 손[客] 홀로 누(樓)에 오르네.
              오후(五侯)의 저택에는 잡초만 우거졌고,
              옥적(玉笛) 한가로운 소리에 지나간 일 아득하네.” 하였다.
○ 조준(趙浚)의 시에,
             “계림(鷄林)의 산수에 맑은 가을 들려 하는데,
              만고의 흥망에 손[客]은 누에 기대었네.
              오히려 후세 사람들 미혹하여 거울삼을 줄 모르니,
              하늘 동쪽 오늘날 나 홀로 근심에 잠기네.” 하였다.

보이원(甫伊院)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동원(東院)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장령원(長嶺院)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혜리원(惠利院) 부의 동남쪽 32리에 있다.
○ 하륜(河崙)의 서문(序文)에.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인데, 전조에 들어와서도 큰 부[巨府]가 되었으니, 인물이 번성하고 많았던 것은 사적(史籍)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고려 말엽에 와서는 수십 년 동안 왜구가 우환이 되었으니 매우 슬픈 일이다.
내가 경오년 봄에 울주(蔚州)에 가려는데, 길이 경주의 성남(城南)을 지나게 되어 천왕사(天王寺)에서 유숙하였다. 당두(堂頭) 연 상인(然上人)이 좋은 말로 응접하여 주었다. 이튿날 절문을 나오니 절의 동쪽은 멀리까지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90여 리를 가서 울주에 이르렀다. 외로운 성은 바다에서 채 십리도 못 되으며, 전함(戰艦)이 포구(浦口)에 나누어 대어 있어서 불의의 환난에 대비하고 있다. 그 수졸(戍卒)들은 대개 두 달에 한 번 씩 교대하며, 생선과 소금 등을 매매하는 자들이 또한 때때로 온다. 그 90리의 길을 왕래하는 사이에 추위와 더위와 비오는 때와, 혹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 머물러 쉴 곳이 없었다. 도둑도 염려되고 맹수도 두려워서 신음하고 불안해 하면서 수풀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또 천왕사에서 자게 되었는데, 나그네들과 수졸들의 길 다니는 어려움에 말이 미치게 되었다. 상인(上人)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중이 되었으나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 땅을 멀리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대가 말한 바를 나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버이는 이미 돌아갔으니 명복을 기원한 나머지 재물로써 그 길의 중간쯤에 조그마한 원사(院舍) 짓기를 원하나 힘이 부족합니다.’ 하였다. 나는 듣고 의롭게 여겼다. 이튿날 상인은 나를 대비원(大悲院)까지 전송하여 주었다.
정축년 봄에 내가 부윤이 되어 가니 상인은 아직도 있었다. 공무에서 퇴근한 여가에 그와 함께 예전 일을 이야기하는데, 상인이 말하기를, ‘내가 전번에 말한 그 길의 반쯤 되는 곳에서 옛 사람들이 덕방동(德方洞)이라고 하던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앞뒤가 다 산이며 초목이 무성하고 시냇물이 그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방을 만들 수도 있고, 서늘한 마루를 만들 수도 있었으며, 곁에는 노는 땅이 있어서 또 채소나 과일을 심을 수도 있었습니다. 원사를 두어 나그네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정주(靜州) 남득온(南得溫)과 절제사(節制使) 이종주(李從周)가 함께 그 비용을 도와 주어서 거의 준공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듣고 기뻐하고 쉬는 날 함께 한 번 가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사신(使臣)의 명을 받들고 또 부의 경내(境內)를 지나게 되었는데, 상인이 나와보고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말하기를, ‘나의 원사가 이미 낙성하였습니다. 그때 그대는 바야흐로 중국에 가게 되었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고, 양촌(陽村) 권(權)공이 이미 기를 써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원(院)의 이름을 짓지 못하였으니, 부디 그대는 이름을 지어 주셔서 나의 원사를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길가에 원우(院宇)를 두는 것은 곧 《주례(周禮)》의 지관(地官) 유인(遺人)에, 십리마다 여(廬)가 있고, 여에는 음식이 있다고 한 여숙 제도(廬宿制度)의 유의(遺意)로서 위정자(爲政者)가 당연히 힘써야 할 일이다.
이제 상인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또 그 나머지를 미루어 길 가는 나그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사물(事物)을 이롭게 하려는 염원이 천성(天性)의 고유한 바에서 발로된 것으로서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저 심산궁곡(深山窮谷) 속의 적막한 데 앉아서 마른 나무나 차가운 재처럼 되어서 세상에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는 자와 비교한다면 그 거리가 어찌 멀지 않겠는가.
마땅히 그 원(院)을 이름지어 뒷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명명(命名)하여 혜리원(惠利院)이라 하고, 이어 그 전후에 서로 이야기한 것을 차례로 적어서 서문(序文)을 짓는다.” 하였다.

모화촌원(毛火村院) 부의 동쪽 43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부의 동쪽 37리에 있다.
이견원(利見院) 이견대(利見臺)의 곁에 있다.
전동촌원(典洞村院)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원(南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대로원(大櫓院)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신라의 김생(金生)이 쓴 대로원(大櫓院)이라는 석 자의 큰 글씨가 있다.
천룡원(天龍院) 부의 남쪽 18리에 있다.
구사원(仇沙院) 부의 남쪽 34리에 있다.
회은촌원(回隱村院) 부의 남쪽 38리에 있다.
구량화촌원(仇良火村院) 부의 남쪽 46리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또는 두두원(豆豆院)이라고도 한다.
금장원(金藏院) 부의 서쪽 22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고원(高院)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영경원(永慶院)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과쌍원(果雙院)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감조촌원(甘助村院)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풍정원(楓井院)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서쪽 56리에 있다.
천은원(天恩院) 부의 동쪽 14리에 있다.
관원(館院)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화산촌원(花山村院)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북쪽 16리에 있다.
소야원(所也院) 안강현(安康縣)의 동쪽 15리에 있다.
한보원(閑甫院) 안강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여원(礪院) 안강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인다원(仁多院) 기계현(杞溪縣)의 서쪽 13리에 있다.
다질원(多叱院) 안강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죽동원(竹洞院) 신광현(神光縣)의 남쪽 5리에 있다.
대후원(待候院) 죽장현(竹長縣)의 남쪽 20리에 있다.
다문촌원(多文村院) 구사부곡(仇史部曲)의 북쪽 3리에 있다.

【교량】
대교(大橋) 문천(蚊川) 위에 있다.
효불효교(孝不孝橋)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세간에 전하기를, “신라 때에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있었는데, 그가 사통(私通)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하였다. 그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 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 다리룰 효불효(孝不孝)교라 불렀다.” 한다.
『신증』
굴연천교(掘淵川橋)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또는 광제원교(廣濟院橋)라고도 한다.
신원교(神元橋)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불우】
영묘사(靈妙寺)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으로서 체제가 특이하다. 신라 때의 불전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다른 것은 다 무너지고 헐어졌는데, 유독 이 불전만은 완연히 어제 지은 듯한 모습으로서 있다. 속설이 전하기를, “이 절 터는 본래 큰 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하루 밤 사이에 메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한다.
분황사(芬皇寺)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선덕왕 3년에 세웠다.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있는데, 오금석(烏金石)이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끼는 빈 섬돌에 둘렀고 대[竹]는 처마에 스치우니,
                   경내(境內)가 청량(淸涼)하며 여름 더위 받지 않네.
                   중은 한가롭게 고아(高雅)한 웃음지며 누른 눈[黃眼] 돌리고,
                   손은 취하여 고담(高談)하며 붉은 수염 떨치네,
                   연꽃 핀 못에선 난 항상 혜원(慧遠)[晉나라의 승려]을 생각하고,
                   버드나무 선 문(門)에선 공(公) 역시 도잠(陶潛)을 잡아끄네. 
                   술잔을 머금고 취하여 돌아갈 길 잊었는데,
                   쓸쓸한 저녁 볕이 발[簾]의 반쪽을 비추네.” 하였다.

불국사(佛國寺) 토함산(吐含山) 속에 있다. 석교(石橋)가 둘이 있는데 청운교(靑雲橋)ㆍ백운교(白雲橋)라 한다. 제작이 지극히 정교하다.
신라 사람 김대성(金大城)이 창건한 것이다. 일찍이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여자가 아들이 있어 이름이 대성(大城)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그가 죽던 날 밤에 나라의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공중에서 외치기를, “모량리의 대성이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난다.” 하더니 문량의 처가 과연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오른손을 7일 동안이나 꼭 쥐고 있었는데, 금으로 새긴 대쪽이 그 손에 있어 ‘대성(大城)’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 있었으므로 그대로 이름 지었다. 장성하자 그 가난한 여자를 자기의 집에 데려다 두고 어머니와 같이 봉양하였으며, 또 이 절을 창건하여 중 표훈(表訓)을 청하여다가 거주하며 두 어머니의 장수(長壽)를 축원하였다 한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사찰(寺刹)을 찾아드니, 소나무 사이에 불긋 푸릇 겹겹일세.
                 푸른 산 반쪽에는 비[雨]요, 지는 해 상방(上方)에는 종소리로다.
                 말은 중과 더불어 부드러워지고, 술잔은 옛 정(情) 따라 짙었네.
                 쓰러질듯 탑(榻) 위에 기대어 앉아, 서로 마주보니 귀밑털이 희끔희끔.” 하였다.

지림사(祗林寺) 함월산(含月山)에 있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지림에서 부처를 뵈온 뒤요, 반월성(半月城)의 관사(官舍)로 돌아올 때네.
                 산이 깊으니 구름은 골짜기에 있고, 나무가 늙으니 가지 위에 풀이 났네.
                 용맹이 적으니 이니(伊尼 사슴)가 졸고, 읊조림이 오래되니 관단(款段 느린 말)이 피곤하네.
                 이번 걸음은 진정 자랑할 만하구나, 가는 곳마다 새로운 시를 얻었으니.” 하였다.

감은사(感恩寺)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그 동쪽 3리에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사중고기(寺中古記)에 이르기를,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유조(遺詔)로 뼈를 동해 가에 장사지내게 하고 드디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신문왕(神文王)이 부왕(父王)을 위하여 절을 동해 가에 창건하며 금당(金堂)의 문지방 밑에 한 구멍을 열어 놓았으니, 이곳이 바로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던 곳이다. 그 구멍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하였다.
백률사(栢栗寺) 금강산(金剛山)에 있다. 전단(栴檀)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있다.
○ 전사경(全思敬)의 서루기(西樓記)에,
“계림(鷄林)에 있는 누관(樓觀)들 가운데에서 백률사의 누가 가장 훌륭하다. 선유(先儒) 정지상(鄭知常)의 무리가 시를 지어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절을 창시한 연월(年月)은 고증할 길이 없으나 쇠잔하고 황폐함이 이미 심하여 경치와는 서로 걸맞지 않는다. 영평군(鈴平君) 상국(相國) 윤승순(尹承順)이 부윤이 되어 온지 2년 만에 왜구가 물러가자 군사들은 오랫동안 한가하였다. 절의 주지 견해(見海)와 부(府)의 판관(判官) 심우경(沈于慶)과 함께 중수할 것을 계획하고,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김정미(金精美)와 안일(安逸) 김군자(金君子)에게 명하여 수졸(戍卒)을 거느리고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일의 향배(向背)와 더하고 줄이는 것을 적절히 조절한 것은 모두 윤공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등림(登臨)하고 관람(觀覽)하기 좋은 것이 옛날보다 배나 더하였다.
이 절은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어 왕실의 복을 비는 곳이며 사대부들이 항상 왕래하는 곳이다. 더군다나 신라 고도의 웅장한 풍경과 멀리 트인 조망이 모두 이 누에 모여 있다. 옛것을 좋아하는 군자가 아니면 누가 퇴폐된 낡은 건물을 헐어버리고 화려한 새집을 지어서 사방의 유람객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겠는가. 불전(佛殿)을 수리하여서 부처에게 복을 바라는 것 따위는 윤공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새벽에 작은 누(樓) 머리에 일어나서, 발[箔]을 걷고 하늘을 쳐다본다.
             누 아래는 곧 계림이니, 기괴한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고.
             늙은 나무에 연기가 부슬부슬, 일만호(一萬戶)에 비꼈네.
             흰 구름은 동쪽 산에 날고,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달린다.
             우뚝 솟은 황금절들, 서로 바라뵈며 아침 햇빛 따사롭구나.
             반월성(半月城) 가운데 빽빽하게 서 있는, 꽃과 대[竹] 이제는 주인이 가고 없네.
             헛되게 옛 풍류만 남아 있어, 한 곡조 높은 소리로 춤을 춘다.
             돌이켜 최고운(崔孤雲)을 생각하노니, 문장은 중국을 진동시켰네.
             포의(布衣)로 갔다가 비단 입고 돌아오니, 나이는 아직 29세도 안 되었다.
             흰 옥에 파리가 점(點)을 찍으니[최치원을 소인배가 헐뜯으니], 당시에 쓰여지지 못하였네.
             지금 남산(南山) 속에, 오직 채소밭 하나 남아 있네.
             아득하구나 구세손(九世孫)이여, 소년으로서 졸오(卒伍)에 들어갔네.
             불러다가 선비의 관(冠)을 씌우니, 세상 사람들이 어진 이의 후예임을 알게 되었네.
             또한 설(薛)선생이 있었으니, 용범[龍虎]같이 일어났네.
             방언(方言)으로 오경(五經)을 강의하니, 학자(學者)가 동로(東魯)[공자가 태어난 곳]에 비하는도다.
             세상에서는 이군자(二君子)라 불러서, 명성이 같기가 이두(李杜)와 같았네.
             휘파람 불고 읊으며 맑은 바람에 서니, 묵은 병도 오히려 나을세라.
             돌아와 부처를 뵈오니, 빈 당(堂)에 향이 한 가닥 타네.
             머리를 조아려 우리 임금 수복 축원하노니, 만년 하느님의 보우를 받으소서.
             상상하건대 부처님의 묘하고 밝은 거울, 나의 이 마음을 알아 주시리.
             민자천(閔子泉)에서 차[茶]를 시음(試飮)하니, 차 그릇에 운유(雲乳)가 발(發)하네.
             수옹(壽翁 최해(崔瀣))의 시(詩)를 세 번 거듭 읽으니, 벽에 가득할손 구슬을 토해놓은 듯. 
             즐거워라 근심하는 바가 없으니, 이 즐거움이 어찌 그리 예[古]스러운가.
             일산[蓋]을 날리며 송문(松門)을 내려오니, 송문에 해가 정오(正午)로세.” 하였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내 걸음이 아름다운 시절에 미치니, 봄 산에 두견새 소리 들리네.
             붉은 깃발이 돌아가는 길 인도하니, 옛 풍속의 예절이 남아 있구나.
             푸른 솔 그늘에서 길 비키라 소리치고, 종(鍾)을 두드려서 구름 속의 문을 연다.
             보타산(補陀山)에 오른 것 같은데, 불전(佛殿)이 은포(銀浦) 스쳤었네.
             흰 꽃이 사계절 항상 피어 있어, 향기가 언제나 봄날 같구나.
             거주하는 중은 오직 두세 사람, 누가 향화(香火)의 주(主)인고.
             멀리 조망하려고 서루(西樓)에 오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
             남쪽 트인 곳에 인가가 조밀하며, 문물은 신라의 옛 땅일세.
             금찰(金刹)들이 인가 사이에 섞여 있어 열에 아홉은 되는 듯.
             성적(聖跡)이 세속에 섞여 있어서, 지나가는 손이 구경하기에 바쁘도다.
             큰 저택과 아름다운 절들이, 전란(戰亂) 뒤엔 들밭을 이루었구나.
             법당 안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있으니, 묘한 조화가 비할 데 없다네.
            거문고와 옥피리로 바다를 건넜으니, 지난 그 일이 가득 벽에 쓰여 있네. 
            병화(兵禍)가 두려워서 여기 와 빌었더니, 방패와 창이 곧 위세를 감추었다네.
            노둔함을 한탄하여 총명을 빌었더니, 어리석고 노둔한 자에게 총명을 내려줬네.
            구하는 모든 것에 감응해주니, 넓은 문[普門]은 일찍이 닫히지 않았구나.
            시원하고 서늘한 감로(甘露)가 많아서, 나머지를 뿌려주니 뜨거운 번뇌 나아지네.
             나는 피로 기름을 만들고, 이 몸은 믿음을 촛불심지 삼으니,
             다만 원하노니 황제(皇帝)의 수만 년이요. 우리 임금 온갖 복을 누리기를 축원하네.
             삼한(三韓)이 태평되어, 항상 형통케 하고 비(否)는 제(除)하소서.
             어린애가 어머니를 생각하듯 만방(萬方)이 와서, 우러러 문왕사유(文王四乳)를 마시게 하소서.
             온 천하가 다같이 기뻐하며, 강자와 약자가 먹고 먹힘이 없게 하소서.
             자연히 수역(壽域) 열려진다면, 세상은 복희씨(伏羲氏)의 태고(太古)로 돌아가리라.
             이것을 생각하며 밤 깊도록 앉았으니, 달이 바로 하늘 가운데에서 누를 비치네.” 하였다.

천주사(天柱寺) 월성(月城)의 서북쪽에 있다.
○ 세간에 전하기를, “소지왕(炤智王)이 거문고의 갑(匣)을 쏘아 넘어뜨렸더니 그 속에 있던 자는 바로 이 절의 중이었다.” 한다. 그 북쪽에 안압지(雁鴨池)가 있다.

석장사(錫杖寺)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 세간에 전하기를, “신라의 중 양지(良志)가 석장(錫杖)의 머리에 한 개의 포대(布帒)를 걸어 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서 시주(施主)의 집에까지 와서 흔들어 울리면 사람들이 알고 돈을 넣어준다. 포대가 가득 차면 날아 돌아오니, 그가 살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 하였다.” 한다.

법광사(法光寺) 법광산(法光山)에 있다.
천룡사(天龍寺) 고위산(高位山)에 있다.

『신증』 무장사(鍪藏寺) 부의 동북쪽 30리, 암곡촌(暗谷村)의 북쪽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무기와 투구를 골짜기 속에 감추었으므로 무장사라 이름 지었다.” 한다. 옛 비석이 있다.
용장사(茸長寺) 금오산(金鰲山)에 있다. 시승(詩僧) 설잠(雪岑)이 일찍이 이 절을 짓고 살았다. 설잠의 속명(俗名)은 김시습(金時習)이며,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世宗)이 불러들여 운자를 불러 주고 삼각산(三角山)을 제목으로 절구를 짓게 하였더니 당장에 짓기를,
            “세 봉우리를 묶어 세워 하늘을 꿰니, 그 위에 오르면 두우성(斗牛星) 딸 수 있겠네.
             멧부리에서 구름과 비를 일으킬 뿐 아니라, 능히 국가로 하여금 만세(萬世)에 편안하게 하네.” 하였다.
임금이 칭찬하고 물품을 상으로 내려 표창하였다. 뒤에 미친 체하며 중이 되었으나 또한 선율(禪律)에 구애되지 않았다. 스스로 호를 청한(淸寒)이라 하였다. 성리학(性理學)과 음양 술서(陰陽術書)와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 백가(百家)에 통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문장 호한(浩汗)하고 멋대로 방사(放肆)하여 꺼림이 없었다. 저작으로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ㆍ《역대연기(歷代年紀)》ㆍ《금오신화(金鰲新話)》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혁거세묘(赫居世廟) 부의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아조(我朝) 세종(世宗) 11년에 묘(廟)를 세우고, 매년 중추(仲秋)에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게 하였다.
석탈해사(昔脫解祠) 동악(東嶽) 산정(山頂)에 있다. 탈해왕(脫解王)이 무열왕(武烈王)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소천(疏川) 언덕에서 나의 해골을 파내어 소상(塑像)을 토함산(吐含山)에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무열왕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두개골(頭蓋骨)의 주위는 3척 2촌, 뼈의 길이는 9척 7촌, 치아는 하나로 응결되어 있었으며, 뼈마디는 모두 이어져 있었다. 드디어 동악에 사당을 세웠다.
성모사(聖母祠) 서악(西嶽)의 선도산(仙桃山)에 있다. 성모(聖母)는 본래 중국 황실(皇室)의 여자로, 이름이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되는 술법을 배웠는데, 해동(海東)에 와서 머무르며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고 드디어 신(神)이 되었다. 속설에, 혁거세는 곧 성모가 낳은 이라 한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지은 찬(讚)에, “선도성모(仙桃聖母)가 어진 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 본부의 동북쪽 4리에 있다. 절일(節日)마다 주(州)의 수석(首席) 아전이 삼반(三班)을 거느리고 제사한다.
신모사(神母祠) 치술령(鵄述嶺) 위에 있다. 신모(神母)는 곧 박제상(朴堤上)의 아내이다. 제상이 왜국에서 죽으니, 그의 아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치술령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드디어 치술령의 신모가 되었다 한다. 그 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 여단 본부 북쪽에 있다.

【능묘】
혁거세릉(赫居世陵) 담엄사(曇嚴寺) 곁에 있다. 관(官)에서 전지(田地)의 개간이나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혁거세왕이 하늘에 올라간 지 7일 뒤에 오체(五體)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합쳐서 장사지내려고 하였으나 요사스런 뱀의 방해로 인하여 각각 장사지내고, 드디어 오릉(五陵)이라 하였다.” 한다.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본부의 남쪽 황남리(皇南里)에 있다. 유리왕(儒理王) 때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침공하였다. 우리 군사가 방어하였으나 대항할 수 없더니, 홀연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는데, 모두 댓잎[竹葉]의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힘을 합쳐 적병을 쳐서 부수었다. 적군이 물러간 뒤에, 그 군사들은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다만 미추왕릉(味鄒王陵) 앞에 쌓여 있는 댓잎이 보일 뿐이었다. 비로소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운 공(功)이 있었음을 알았다.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
법흥왕릉(法興王陵)ㆍ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길가 촌락 사이에 파란 보리가 이미 패었네.
          우뚝 솟은 두어 길 산봉우리, 둥글기가 엎드린 짐승 같구나.
          끊어진 비석이 거친 풀 속에 누웠는데, 높이 쳐든 귀두(龜頭)가 보이네.
          질펀한 초원은 길게 뻗쳤고, 시내 언덕 구불구불 달렸네.
          이것이 무열왕릉, 인산(因山)의 제도가 누추하지 않구나.
          말에서 내리매 머리털 으쓱하니, 두 손 모아 잡고 두 소매 여미었네. 
          비문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이지러진 글자 많아 알아보기 어렵구나.
          아득한 긴 세월에, 버려둔 채 지키는 이 없네.
          생각하니, 옛날에 음(陰 여자)이 양(陽 왕) 되었으니, 덕만(德曼)과 승만(勝曼)은 참 임금이 아니었다.
          강한 이웃 나라가 제멋대로 침노하여 사방 국경에 병란이 많더니,
          무열왕 들어와서 왕통을 계승하매 우뚝히 공덕(功德)이 성하였네.
          유신(庾信)으로 장수를 삼았으니, 무략(武略)은 하늘이 준 것이었네. 
          백제를 합병하여 패업(覇業)을 세워 백년 원수를 소탕했네.
          당 나라 황제가 공훈을 가상히 여겨 비단을 무더기로 내려주었네.
          큰 은명(恩命)을 주니, 영토(領土)를 열어 길고 넓게 뻗치었네.
          준걸(俊傑)과 어진 이는 모두 등용되고, 창고는 날로 풍부해졌도다.
          우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하더니, 슬프다. 기울어지는 대운(大運)을 막을 수 없었네.
          칼과 신발[의 주인]은 무덤 속에 들어가고, 정령(精靈)은 묘수(昴宿)로 돌아갔네.
          옛날 사기(史記)에서 대략 고증할 수 있으나, 기록의 소루(疏漏)함이 한스럽구나.
          사람의 일이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누군들 능히 우주 끝까지 살 수 있으랴?
          가성(佳城)은 만고에 닫혔는데 날이 저무니 족제비가 휘파람 부네.” 하였다.

진흥왕릉(眞興王陵) 모두 본부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낭산(狼山) 남령(南嶺)에 있다.
효소왕릉(孝昭王陵) 본부 동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본부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본부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있다.
김유신묘(金庾信墓) 본부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경서원(京西原)에 있다.
김양묘(金陽墓) 태종왕릉(太宗王陵)에 배장(陪葬) 하였다.

Posted by 상운(祥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