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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3)

산천】
낭산(狼山) 부(府)의 동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토함산(吐含山)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동악(東嶽)이라고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금강산(金剛山)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
비월동산(非月洞山) 부의 서쪽 67리에 있다.
명활산(明活山)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선도산(仙桃山)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악(西嶽)이라 불렀다. 혹은 서술(西述)ㆍ서형(西兄)ㆍ서연(西鳶)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함월산(含月山)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남악(南嶽)이라 불렀다.
금오산(金鼇山)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 당 나라의 고운(顧雲)이 최치원에게 지어준 시에,
               “들으니 바닷가에 세 마리의 금오(金鼇)가 있어,
                머리 위에 높디 높은 산을 이었다[戴]네.
                산 위에는 구슬궁[珠宮]ㆍ진주대궐[貝闕]ㆍ황금전(黃金殿)이요,
                산 밑에는 천리 만리 끝없이 넓은 물결,
                그 곁에 한 조각 계림(鷄林)이 푸른데,
                금오산이 정기(精氣)를 모아 기특(奇特)한 인재 낳았네.” 하였다.

형산(兄山) 안강현(安康縣) 동쪽 21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고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울개산(蔚介山)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복안산(伏安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묵장산(墨匠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지화곡산(只火谷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단석산(斷石山)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구해가지고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修鍊)하였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 하였다.” 한다.
자옥산(紫玉山) 안강현(安康縣)의 서쪽 13리에 있다.

달성산(達城山) 안강현 남쪽 13리에 있다.
비학산(飛鶴山) 신광현(神光縣) 서쪽 5리에 있다.
인박산(咽薄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김유신이 보검(寶劍)을 지니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고유(告由)하여 병법(兵法)을 기도하던 곳이다.” 한다.
박가리산(朴加利山) 자인현(慈仁縣) 동쪽 20리에 있다.
점산(簟山) 자인현 북쪽 16리에 있다.
사라현(舍羅峴)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건대령(件代嶺) 부의 동쪽 36리에 있다.
여근곡(女根谷) 부의 서쪽 41리에 있다. 세간에 전하기를, “백제의 장군 우소(亏召)가 여기에 복병(伏兵)을 숨겨둔 것을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각간(角干) 알천(閼川)에게 습격하게 하여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다 죽였다.” 한다. 이것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중의 한 가지이다.
성현(成峴) 부의 북쪽 58리에 있다.
팔조령(八助嶺) 부의 동쪽 53리에 있다.
마북산(馬北山) 신광현(神光縣) 북쪽 26리에 있다.
시령(柹嶺) 부의 동쪽 54리 장기현(長鬐縣)의 경계에 있다.
추령(楸嶺)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성령(筬嶺)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치술령(鵄述嶺) 부의 남쪽 36리에 있다.  『신증』 신라 때에 박제상(朴堤上)이 왜국(倭國)에서 피살되자, 그의 아내가 이 재에 올라 바라보며 울다가 죽었다.

바다 부의 동쪽 54리에 있다.
팔조포(八助浦) 부의 동쪽 53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형산포(兄山浦) 안강현(安康縣)의 동쪽 24리에 있다. 어량(魚粱)이 있으며 굴연(堀淵)의 하류이다.
동천(東川) 북천(北川)이라고도 하고, 알천(閼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추령에서 발원(發源)하여 굴연으로 흘러들어간다. 서천(西川)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발원지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인박산(咽薄山)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묵장산(墨匠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지화곡산(只火谷山)에서 발원한다. 합류(合流)되어 형산포로 흘러들어간다.
온지연(溫之淵) 안강현의 동쪽 24리에 있다. 용당(龍堂)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굴연천(堀淵川)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어량이 있으며 서천(西川)의 하류(下流)이다.
사등이천(史等伊川) 황천(荒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24리에 있다. 토함산(吐含山)에서 발원하여 서천으로 흘러들어간다.
문천(蚊川)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사등이천의 하류이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동황(東皇)이 한 손으로 내려주신 은택, 만물이 골고루 받았구나.
            꽃 마음은 화한 바람에 놀래고, 새들의 성질도 화사한 기운을 느끼는구나.
            붉고 붉은 빛은 홍도화에 오르고, 희디 흰 빛은 오얏꽃을 찾았구나.
            꾀꼬리 혀는 가동(歌童)과 다투고, 제비의 허리는 춤추는 기녀(妓女)를 깔보네. 
           고운 봄날을 맞이하여, 경치 좋은 곳 찾아가네. 
           토령(兎嶺)의 정상에 올라보고, 문천의 물가를 따라가네.
           공중을 우러러 아득히 바라보고, 언덕에 올라서서 고요히 귀 기울이네.
           첩첩한 산은 병풍처럼 둘러있고, 출렁이는 물은 거울처럼 반짝이네.
           구름 끝엔 황곡(黃鵠)이 붙어 날고, 수면에는 붉은 잉어 뛰노네.
           혜초(蕙草) 난초의 그윽한 향기 움키고, 연(蓮)과 마름꽃은 먹음직하다.
           아름다운 경치는 만나기 어렵거니, 부생(浮生)을 어찌 오래 믿을쏘냐.
           세상 밖의 놀음을 하려 한다면, 인간의 얽매임을 버려야 하네. 
           붓을 놀려 미친 듯 시를 써보고, 술잔을 들어 취함을 자랑하네.
           시비(是非)는 모두 통발[筌]을 잊은 듯하고, 영췌(榮悴)도 함께 헌신짝 벗듯 하네.
           푸른 술 아직도 다하지 않았는데, 붉은 해는 어느덧 서산을 넘어가네.
           이 저녁은 어느 때며, 이 몸은 누구집 아들인가.
           만약에 봉래산(蓬萊山)의 신선(神仙)이 아니라면, 참으로 칠원리(漆園吏)이리.
          뜨고(浮) 쉼(休)[삶과 죽음을 말하며 장자에 나온다]에도 오히려 마음을 잊었으니,
           가는 것과 머무름을 내 어찌 생각에 두랴.
          머리 들어 산수(山水)를 하직하고, 부축받으며 발길을 돌리노니,
          오직 두려운 건 수레 몰고 말 타는 마당에서, 아침 일찍부터 명리(名利)를 따르는 것.” 하였다.
○ 또 불계시(祓禊詩)에는,
        “금년 봄 날씨 궂어 시원하게 갠 적 없고,
         열흘이나 장마비는 강물을 뒤엎은 듯 즐거워라,
         홀연히 씻은 듯 구름 걷히니,
         남산(南山) 1만 송이 푸른빛 소라[靑螺] 드러나네.
         산의 세찬 형제 5백 리를 치닫다가,
         중도에 구부러져 비스듬히 솟았네.
         그 아래 한 줄기 문천이 있으니,
         만 번 꺾고 천 번 서려 구불구불 흐르네.
         월정교(月精橋) 어귀 향해 달려 나아가니,
         놀란 물결 부서져 옥을 울리는 소리로다.
         엄장루(嚴莊樓) 아래 와선 흐름 차츰 질펀하여,
         물결은 잔잔하고 모래는 평편하여 비단을 펼쳐 놓은듯.
         낙읍(洛邑)의 모든 선비 10만 명이 물에서 불계(祓禊)하니,
         어깨 서로 닿았구나.
         양신(良辰)과 미경(美景)은 예부터 함께 갖기 어려운데,
         영화(永和)의 난정(蘭亭) 같은 성한 모임을 뉘라서 사양하리.
         더구나 나는 젊어서부터 방광(放狂)하니,
         붉은 놀잇배 끌고 흰 물결 저어 가려네.
         어째서 총총히 학사(學舍)로 향할쏘냐.
         자리를 맞대고 우리 함께 금잔을 기울이세.
         포도주 넘친 듯한 푸른 물빛 움킴직하구나.
         실컷 술 마셔 붉은 낯빛 된 줄을 몰랐네.
         맑게 즐겨 반쯤이나 취했을까. 손은 아직 가지 않았는데,
         대숲 저 편에서 붉은 해가 먼저 지네.
         취한 김에 의기(意氣)가 갑자기 솟아
         청천(靑天)에 올라가서 노양(魯陽)의 창 휘두르고자하였다.

     *노양의 창-노(魯)나라 양공(陽公)이 한(韓)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해가 지자,
      양공이 해를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창을 휘두르니, 해가 뒤로 3사(舍 1사는 30리)를 물러갔다 한다.
토상지(吐上池)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신증』 고위산(高位山)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토산】
백반(白礬) 사라현(舍羅峴)에서 난다.
사철(沙鐵) 부의 동쪽 팔조포(八助浦)에서 난다.
석유황(石硫黃) 비월동산(非月洞山)에서 난다.
전복[鰒]ㆍ연어(鰱魚)ㆍ넙치[廣魚]ㆍ은어[銀口魚]ㆍ대구(大口)ㆍ홍합(紅蛤)ㆍ청어(靑魚)ㆍ방어(魴魚)ㆍ황어(黃魚)ㆍ홍어(洪魚)ㆍ김[海衣], 미역[藿] 바다 속에 나물이 있으니 속명(俗名)으로 미역[藿]이라고 한다. 그 종류는 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와 같은 것으로서 통틀어 미역이라 한다.
송이[松蕈]ㆍ잣[海松子]ㆍ꿀[蜂蜜]ㆍ옻[漆]ㆍ산무애뱀[白花蛇]ㆍ천문동(天門冬)ㆍ하수오(何首烏)ㆍ오수유(吳茱萸)ㆍ산수유(山茱萸) 『신증』 왜저(倭楮)ㆍ농어[鱸魚]ㆍ문어(文魚)ㆍ송어(松魚)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4천 75척, 높이가 12척이며, 성안에 우물 80개가 있다.
부산성(富山城) 부의 서쪽 32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6백 척, 높이가 7척이었는데, 지금은 반이나 무너졌다. 성안에 내[川]가 넷, 못이 하나, 샘이 아홉 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감포영(甘浦營) 부의 동쪽 72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을 둔다. 『신증』 정덕(正德) 임신년에 돌로 성을 쌓았다. 둘레가 7백36척,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형산 봉수(兄山烽燧) 동쪽으로 영일현(迎日縣) 사화랑산(沙火郞山)의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永川郡) 소산(所山)의 봉수에 호응한다.
하서지 봉수(下西知烽燧) 부의 동쪽 63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蔚山郡) 유포(柳浦)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독산(禿山)에 호응한다.
독산 봉수(禿山烽燧) 부의 동쪽 54리에 있다. 남쪽으로 하서지(下西知)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장기현(長鬐縣) 복길(卜吉)에 호응한다.
대점 봉수(大岾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 가리산(加里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동악(東岳)에 호응한다.
동악 봉수(東岳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대점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고위산 봉수(高位山烽燧)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동쪽으로 동악에 호응하고, 남쪽으로 소산(所山)에 호응하며, 서쪽으로 내포점(乃布岾)에 호응한다.
내포점 봉수(乃布岾烽燧) 부의 서쪽 26리에 있다. 동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주사산(朱砂山)에 호응한다.
주사산 봉수(朱砂山烽燧) 부의 서쪽 42리에 있다. 동쪽으로 내포점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永川郡) 방산(方山)에 호응한다.
소산 봉수(所山烽燧) 부의 동쪽 68리에 있다. 남쪽으로 언양현(彦陽縣) 부로산(夫老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궁실】
집경전(集慶殿)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아태조(我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화상[睟容]을 봉안하였다. ○ 참봉(參奉) 2인.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신전(神殿)은 엄숙하고 깊은데, 새벽 햇빛 밝게 오르네.
         요지(瑤池)에 채장(綵仗)이 벌여 있고, 비단 문턱에 향연(香煙)이 둘렀구나.
         궁관(宮官)이 창합(閶闔 궁궐의 정문) 여니, 푸른 무늬 놓은 문이 깊고도 그윽하네.
         소신(小臣)이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리며, 목목(穆穆)하신 천표(天表 제왕의 의(儀))를 우러르니,
         용안(龍顔) 일각(日角) 준상(俊爽)함이 천하에 드물도다.
         어찌 뜻하였으랴, 중동(重瞳)의 빛, 신묘한 화필(畫筆) 끝에서 나왔을 줄이야.
         삼가고 두려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옵고, 흥건히 땀만 흘러 도포 함빡 적시었네.
         아, 나의 출생(出生) 너무나 늦었으니, 정호(鼎湖)의 궁검(弓劍)이 아득하여라. 
     *정호의 궁검(황제(黃帝) 늙어 정호(鼎湖)에서 용(龍)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자  그 신하들이 그가 평일에 쓰던 활[弓]과 검(劒)을 붙들고 울었다 한다.
         크도다, 제세안민(濟世安民)하신 공적 하늘과 같이 넓으셨고,
         고려 이미 운(運) 다하여 병란(兵亂)이 연이었네. 
         비 바람에 시달리며 노고함이 몇 해런고, 남으로 출정하고 북에서 토벌하셨네.
         밝은 전략 하늘과 꾀하시니, 신병(神兵)은 이로 인해 적을 빨리 소탕(掃蕩)했네.
         드디어 삼한(三韓)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음에서 벗어나서 태평세계 맞게 했네.
         육룡(六龍)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 올라가니[왕위에 오르시니], 태양의 수레 황도(黃道)에 올랐도다.
         화산(華山)의 남쪽에 수도(首都)를 정하시니, 이 서울 주(周) 나라의 풍(豐)ㆍ호(鎬)와 비등하구나.
         태평(太平) 제도를 넓혀 베푸니, 문물(文物)은 지극히 아름답고 빛나도다.
         전조(前朝)의 규모를 누(陋)하게 보니, 자손에게 규모를 끼침이 어찌 초초(草草)할까 보냐.
         크게 나타내는 신성(神聖)한 자손 있어,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다함이 없을지고.
         남기신 화상(畫像)은 옛 도읍을 진압(鎭壓)하고, 황령(皇靈)은 저 하늘 높이 계시리.” 하였다.

객관(客館)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신라가 계림(鷄林)에 도읍하였더니,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자, 나라가 없어지고 경주(慶州)로 되었다. 얼마 뒤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였으며, 성종(成宗)은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유수를 폐지하고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강등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 유수를 다시 두었으며, 중간에 변고(變故)를 겪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였다. 고종(高宗)은 다시 유수로 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은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일컬었다. 아조(我朝)의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15년에 다시 경주부로 하고,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 때에 태조강헌대왕의 화상을 집경전에 모시었다.
경주부는 경상(慶尙) 전도에서 제일 크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고, 백성은 부유하며 많다. 인심은 순박하여 옛날 신라 때에 유풍(遺風)이 있다. 여기저기에 경승지(景勝地)와 옛 현인(賢人)들의 유적(遺跡)이 있어 전대 인물들의 풍류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거정(居正)이 젊었을 때에 영남(嶺南)을 유람하여 여러 이름난 곳을 거쳐 경주에 이르니, 번화함과 아름다움이 실로 동남(東南)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었다. 다만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의풍루(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조망(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시원히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경주로 된 것이 고려 때부터 이미 5백 년이 된다. 이 고을에 원으로 온 이가 어진 이는 몇 사람이며, 유능한 이는 몇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 한 사람도 퇴락(頹落)한 객관을 수리한 사람이 없어 이 지경이 되게 했단 말인가.’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내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자헌대부(資憲大夫) 김담(金淡)이 부윤(府尹)이었으며, 승의랑(承議郞) 신중린(辛仲磷)이 통판(通判)이었다. 감사(監司) 복천(福川) 권개(權愷)공이 의풍루 위에서 나를 위하여 주연을 열었다.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였더니 부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있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重修)하기로 하고, 재목을 축적하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세.’ 하였다. 감사가 듣고 또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경주 객관이 새로 되는 것에 운수가 있는 게로군. 어진 부윤이 있고 어진 통판이 있고 또 어진 감사가 있어 뜻이 같고 의논이 합치하였으니 일은 기일을 지정하여 할 수 있게 되었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부윤은 이조판서가 되어 소환되고, 계미년 여름에 봉원(蓬原) 정흥손(鄭興孫)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다. 신통판(辛通判)이 일의 유래를 자세히 사뢰고, 객관의 옛터에다 규모를 더 크게 경영하여 지으려고 하니, 고을의 대족(大族)인 지금 영의정 고령부원군(領議政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공과 대사성(大司成) 김영유(金永濡)공이 그 일을 가상히 여겨 대목[梓人] 서휴(徐休)를 보내어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대청(大廳) 5칸을 세우니 앞 뒤에 툇마루가 있고, 크고 시원하고 널찍하다. 동편과 서편에 헌(軒)이 있으니, 각각 상방(上房)과 곁방[挾室]이 있어 서늘하고 따뜻함이 알맞게 되어 있다. 단청을 하니 무늬와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보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갑신년 겨울에 신통판이 감찰(監察)이 되어 돌아가니, 양석견(楊石堅)공이 와서 수선하여 낭무(廊廡)를 날개처럼 붙이고 담을 둘러쌓아 공사가 완성되었다. 병술년 봄 정월에 정부윤이 임기가 차서 소환되고, 화성(和城) 최선복(崔善復)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으며, 2월에는 양통판(楊通判)이 체직되고 정란손(鄭蘭孫)이 이어 통판이 되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사는 두 후(侯)가 조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루는 신공(辛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주의 동헌(東軒)이 새롭게 되었는데, 의풍루가 또 불타 버려서 선유(先儒) 가정(稼亭) 이선생(李先生)의 기(記)도 따라 없어졌으니, 경주의 지나간 문적[牒]을 증거할 것이 없네. 일의 시말(始末)을 알기로는 그대 만한 이가 없으니, 부디 기(記)를 써주게.’ 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경주의 부족한 점이라고 여기던 것을 몇 분의 힘으로 한 번에 크게 새로 중수하였으니 어찌 기뻐하며 쓰지 않겠는가. 더구나 《춘추(春秋)》에도 공사를 일으킨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그것은 민사(民事)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이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요즘 수령(守令)이 된 자는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며, 시기는 적당치 못한데 공사를 지나치게 벌려서, 누각(樓閣) 하나를 세우고 청사(廳舍) 하나를 영조(營造)하는 데에도 정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침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김부윤과 신통판이 앞에서 일을 처음 시작하여서는 목재 하나와 돌 한 개도 비용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 정부윤과 양통판은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면서 부리기를 때맞추어 하였으니, 이 몇 분의 경우에는 춘추(春秋)의 예(例)를 보더라도 포장(褒獎)하고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거정은 직책이 예원(藝苑)에 참여하여 있으니 글을 잘 못한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기에, 우선 일의 대개를 써서 돌려 보낸다. 최(崔)ㆍ정(鄭) 두 후(侯)의 명성에 관한 것은 계속하여 쓸 사람이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영청(營廳) 경주부가 예전에는 관찰사(觀察使)의 본영(本營)이었으므로 감영(監營)의 청사가 있다.

【누정】
빈현루(賓賢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에,
“금상(金上) 23년에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익생(金益生)공이 경주(慶州)에 부윤으로 갔다.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옛 도읍터이다.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남방의 으뜸이다. 김공이 정사를 본 지 두어 달 만에 해이하였던 정사가 경장(更張)되고, 적체되었던 소송(訴訟)이 처리되니 덕화(德化)는 펴지고 명성은 드러났다. 이듬해 관계(官階)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니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하루는 공이 통판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은 경내(境內)의 수읍(首邑)으로서 매년 봄가을에는 감사(監司)와 원수(元帥)가 반드시 여기서 무예를 시험하는데, 성밖에 장막을 쳐서 시험장을 삼는다. 그러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위의(威儀)와 형식이 제대로 맞지 않게 된다.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아전들에게 의논하니 아전들이 그 계획에 찬동하였다. 이에 성안 객관의 동편에 터를 잡으니 그곳의 부지가 널찍하고 위치도 매우 적당하였다. 그 전면을 개척하니 화살이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를 시험장으로 만드니 말이 힘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흙을 쌓아서 대(臺)를 만드니 높이가 두어 길[仞]이나 되었다. 그 위에 누(樓)를 세우니 다섯 칸이었다. 바라보면 날아갈 듯하다. 아래로는 수많은 인가를 굽어보고, 여러 산들을 사면에 둘렀으니, 마치 이들을 자리 아래에 둔 듯하다. 한달쯤 되는 동안에 웅장하게 한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짐작할 수 있다. 김공이 임기가 차서 떠나가고, 영가(永嘉) 권극화(權克和)공이 대신하여 부윤이 되어 와서 기둥에 단청을 하여 김공의 뜻을 이어 완성하였다. 권공(權公)은 그 위에 다시 더 빛나게 하려고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를 청하여, 빈현루(賓賢樓)라는 큰 글씨 석 자[三字]를 얻어 편액(扁額)으로 달았다. 이 얼마나 경주의 다행인가.
공은 또 나에게 그 빈현루라는 명명(命名)의 뜻을 자세히 풀이하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성치는 성주(成周)[주나라 문물을 갖춘 성왕과 주공]보다 더 융성함이 없었다. 대사도(大司徒)가 향삼물(鄕三物)로써 어진 이와 능(能)한 이를 천거할 때에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으로 재예(才藝)를 고시(考試)하는 과목을 삼았으며, 《시경(詩經)》 행위편(行葦篇)에, ‘활 쏘기를 이미 고루하였으며 어진 이를 차례대로 손[賓]으로 한다.’ 하였으니 연회로 술 마실 때에도 반드시 활 쏘는 예[射禮]를 먼저 행하였다.
대체로 활을 쏜다는 것은 그 도(道)는 덕(德)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 효용(效用)은 천하에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간성(干城)의 장수와 조아(爪牙)의 무사(武士)도 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임금이 이것을 서두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군사는 천일(千日)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하루라도 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경계하기를, ‘병기(兵器)를 잘 정비하여 문왕(文王)의 빛남을 우러러보게 하며, 무왕(武王)의 큰 공(功)을 선양(宣揚)하소서.’ 하였고, 소공(召公)이 강왕(康王)에게 고(告)하기를, ‘육사(六師)를 크게 베풀어 우리의 덕높은 조상의 명령을 무너뜨리지 마소서.’ 하였다. 성왕과 강왕은 예(禮)를 제작하고 풍악(風樂)을 일으켜서 잘 수성(守成)한 임금이다. 그런데도 주공과 소공이 고하고 경계함이 이러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뜻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중엽(中葉) 이후로 문관(文官)은 안일(安逸)에 빠지고 무관은 놀기를 즐겨하여 누대(樓臺)는 풍악과 노래와 춤의 처소가 되고, 꽃과 달은 놀고 구경하고 음영(吟詠)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아래 윗사람들은 서로 취한 꿈속에서 잊어버려 깨어 있는 이가 없었으니, 점차로 쇠미하고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바다의 도적이 한껏 기세를 펴, 백성들을 무찌르고 살해하여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어, 개와 닭까지도 모두 절멸(絶滅)되고, 사직(社稷)은 이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어찌 오늘날 거울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부터 국세(國勢)의 강한 것과 약한 것,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이 군비(軍備)의 잘 되고 못 된 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대대로 성군(聖君)이 서로 이어 받들어서 안팎이 태평하다. 그러나 또 편안하면서 위태한 것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진 때에 있으면서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않았다. 무사(武士)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3년마다 한 번 시험을 통해 그 준수하고 걸출한 무사를 얻고, 훈련하는 법을 설정하고 봄가을로 훈련하여 그 정예(精銳)를 뽑는다. 이것이 어찌 위무(威武)를 떨치고 선양하여 길이 다스리고 오래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경주의 부윤을 지낸 사람은 몇 사람을 거듭하였으나, 누(樓)를 세운 것은 공이 처음이니, 공은 국가의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다. 뒤를 잊는 군자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의풍루(倚風樓) 객관의 서쪽에 있다. 이곡(李穀)의 시의 서문에,
“내가 동경(東京)의 객사에 이르러 동루(東樓)에 오르니 도무지 아름다운 경치가 없었는데, 서루(西樓)에 오르니 자못 웅장하고 아름답고 시원히 트여서 성곽과 산천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썼다고 하는 의풍루(倚風樓) 석자가 있을 뿐, 제영(題詠)한 것이 없다. 생각하건대,
이 부(府)는 천년구도(千年舊都)로서 옛날 어진 이들의 유적(遺跡)이 곳곳에 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 동경(東京)으로 삼은 지도 또한 곧 5백 년이 되려 한다.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동남에서 으뜸이며, 봉명사신(奉命史臣)의 절월(節鉞)을 잡고 와서 풍속을 살핀 이(감사), 병부(兵符)를 쪼개어 받아 교화(敎化)를 펼친 이(부윤)들 중에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많았다. 내 생각으로는 반드시 홍벽사롱(紅甓紗籠)[붉게 단청칠한 벽에 푸른 사(紗)로 덮은 것. 추앙을 받는 시는 실로 덮었다.]과 은구옥근(銀鉤玉筋)[은(銀) 같고 옥(玉) 같은 좋은 시]이 그 사이에 서로 빛날 것이라 하였는데,
이제 본 바로는 다만 빈헌(賓軒)에 써 놓은 절구(絶句) 한 수(首)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선유(先儒) 김군유(金君綏)가 처음 지은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옛날에 객관에 화재가 나서 시를 쓴 현판들이 따라 다 없어졌다.’ 한다. 그러나 김씨의 시는 어찌 홀로 불타지 않았으며, 화재 뒤에 지은 글은 또한 어찌 보이지 않는가. 어떤 이가 하는 말은 징빙(徵憑)하기에 부족하다.
향교(鄕校)의 유생(儒生) 한 사람이 말하기를. ‘김씨의 시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백년 전의 풍류와 인물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개 그때에는 백성들은 순박하고 정사는 간략하여서 사건이 있으면 곧 처리하고, 흥이 나면 바로 즐겼습니다. 문부(文簿)가 앞에 펼쳐 있고, 풍악이 뒤에 벌여 있어도 남들이 비난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백년이 지난 뒤에는 조급하고 스스로 닦고 조심하기를 힘써서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일도 혹시나 때가 아닐까 두려워하니, 어찌 감히 경치를 찾아 시를 읊어서 썩은 선비라는 비난을 자취(自取)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선생께서는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펼치는 수고로움도 없이, 심신의 경계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일로 삼아 오셨습니다. 풍악(楓岳)과 설악(雪嶽)의 높은 산들을 마음껏 보고, 또 철관(鐵關)을 넘어 동해(東海)에 들어가서는 섬들의 기이하고도 신비스러움을 남김 없이 다 구경하였으며, 드디어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석과 삼일포(三日浦)의 돌에 새긴 붉은 글씨 여섯 자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영랑호(永郞湖)와 경포(鏡浦)에 배를 띄워 사선(四仙)이 놀았다는 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성류굴(聖留窟)에 촛불을 비춰 그 그윽함과 기이함의 극치를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으니, 놀고 구경하는 일에는 마음껏 하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라 고도의 웅장한 형세와 멀리 트인 조망이 이 누(樓)에 다 모였는데 여기에 한마디의 말씀도 없이 간다면 선생을 위하여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내가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다만 시인묵객의 유(流)와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여러 교생(校生)들의 말에 깊이 느낀 바 있고, 또 시대의 변함을 살필 수 있다.’ 하고 인하여 장구 사운(長句四韻)을 지어 이 누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보인다.
        동도(東都)의 문물(文物)이 아직도 번화한데,
        다시 높은 누를 세워 붉은 노을 스치네.
        성곽에는 천년 된 신라 때의 나무요, 여염에는 반가량 절이었네.
        구슬발[珠簾] 걷고 보니 산빛은 그림 같고,
        옥피리 불고 나니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네.
        기둥에 비껴서서 시를 읊고 스스로 웃노니,
        다음에 다시 올때에 홍벽사롱(紅壁紗籠) 필요없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조령(鳥嶺)의 남쪽은 본래부터 이름난 곳과 경치 좋은 땅이 많다고 일컫는다. 거정은 젊을 때에 사마자장(司馬子長)의 뜻이 있어 영(嶺)을 넘어 상주(尙州)에 들르고, 상주를 거쳐 선산(善山)에 갔으며, 화산(花山)을 경유하여 성주(星州)에 이르고, 김해(金海)ㆍ진주(晉州)를 지나서 함안(咸安)과 밀양(密陽)을 찾은 뒤에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는 곧 예전의 계림(鷄林)으로서 신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산수는 빼어나고 풍경은 기절(奇絶)한데, 옛 어진 이들의 유적이 많아서 멀리 노니는 사람의 질탕(跌宕)한 기운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객관이 누추하고 좁은 것이다. 비록 의풍루가 있으나 사면의 처마가 낮게 처져 시루[甑] 속에 앉은 것 같아서 사람을 숨막히게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봉명사신이 되어 다시 오니 부윤 김담(金淡)공이 나를 맞아 누에 올라 조용히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 내가 말하기를, ‘등왕각(滕王閣)은 천하에 이름난 명승으로서 사해(四海)의 호걸(豪傑), 문인(聞人), 재사(才士)들이 등림(登臨)하여 조망하는 자가 매우 많았지만, 왕중승(王中丞)을 만나 비로소 중수되고 한퇴지(韓退之)를 만나 기(記)가 지어졌던 것이다. 이 누를 중수하고 기를 쓰는 일은 과연 누가 하게 될 것일까.’ 하니, 김부윤이 빙그레 웃었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객관의 집이 중수되고 통판(通判) 신중린(辛仲磷)이 나에게 기를 지으라고 하므로 대략 전말을 써서 돌려 보냈었다.
얼마 안 되어 들으니 의풍루가 또 불에 탔다 한다. 불탄 뒤에 새로 짓지 못한 지가 2년이 되었다. 정해년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부윤으로 와서 정사는 잘 닦아지고 폐해는 제거되었다. 이에 누를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고 곧 누의 옛터에다가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해서 경영하여 세우니, 우뚝 솟아 한 도(道)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이를 이어 부윤 전동생(田秱生)과 통판 유자빈(柳子濱)이 더욱 아름답게 꾸며서 공사가 비로소 완성되자, 거정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사물이 흥하고 폐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다. 그러나 한번 성하고 한번 쇠하게 되는 것은 또한 시운(時運)에 관계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신라의 시초에는 하늘이 이인(異人)을 내려 보내어, 원시(原始)의 생활을 개화시키고 나라를 세워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와 어질고 후하게 정치하고, 삼성(三姓)이 서로 전하여 거의 천년 만에 마침내 능히 고구려를 평정하고 백제를 병합하여 동방의 땅을 넓게 차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당사(唐史)》에서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와 시서(詩書)의 나라라고 칭찬한 바로서, 인물의 번화함이 성하였음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경순왕(敬順王)이 국토를 바치고 고려에 항복하기를 오월(吳越)의 전왕(錢王)과 같이 하였으니, 이때부터 이후로는 혹은 주(州)로 되고, 혹은 부(府)로 되며, 혹은 현(縣)으로 되어 연혁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고려가 쇠하자 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누관(樓觀)들은 불타버리고, 풍경이 시들고 손상되었던 것이니, 가정(稼亭) 이 선생의 기를 읽어보면 당시에 변고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조(聖朝 조선(朝鮮)을 가리킴)에서 천지의 만물이 생육되고 변방이 안정한지 이제 백년이 되었다. 경주는 땅은 넓고 민가는 조밀하여, 물산은 풍부하고 재화(財貨)는 넉넉하여 동남(東南) 부고(府庫)의 제일이 되고, 관원도 또한 인재를 얻어서 일이 폐하거나 실추된 것이 없어서 관각(館閣)과 누대(樓臺) 같은 것조차도 다 일신(一新)하게 되었다. 하늘이 전일(前日)에 아끼던 것은 바로 오늘을 기다린 것이 아닐까. 이제 이 누에는 첨유계극(幨帷棨戟)이 순림(巡臨)하고[관찰사가 순찰함을 말함], 시인묵객이 유람할 때, 난간에 기대서서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며 고도(古都)의 흥폐(興廢)를 느끼고, 시대와 사물의 변천을 살펴서 편안하고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정(性情)을 쏟아내어 누에 올라 글짓던 옛 사람의 기상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시대의 성한 일이며, 물리(物理)의 흥하고 폐하는 기틀이 아니겠는가. 아, 평양(平壤)은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서 산하와 인물의 훌륭함이 경주와 더불어 서로 비슷한데, 목은(牧隱) 선생이 일찍이 평양의 풍월루(風月樓)의 기를 썼더니, 거정이 그 중수기(重修記)를 썼고, 가정(稼亭) 선생이 의풍루의 기를 썼는데, 거정이 또 그 중수기를 쓰게 되었다. 거정처럼 재주 없는 몸으로서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의 두 곳에서 이름을 가정ㆍ목은 부자(父子)의 이름을 잇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글이 졸렬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힘껏 기를 쓴다.” 하였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당시에는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일렀더니,
           반월성(半月城)은 비었는데 저녁 노을 잠겼구나.
           마을에는 금불찰(金佛刹)의 청태(靑苔) 낀 비석이 있고,
           지경은 봉래섬[蓬萊鳥] 신선의 집에 잇닿았네.
           북천에 물이 줄어 여울 소리 목메이고,
           서악(西岳)에 구름 달리니 빗발은 비껴오네.
           흥망의 일순간이여, 헌함(軒檻)에 기대서서
           시 읊으며 오사모(烏沙帽) 젖혀 쓰네.” 하였다.

남정(南亭) 주(州)의 남쪽 5리 오릉(五陵)의 북쪽에 있다. 부윤 김담(金淡)이 세운 것이다.
동정(東亭)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 전록생(田綠生)의 시에,
            “반월성은 비었는데 강 달은 희고,
             최고운(崔孤雲) 신선되어 간 뒤 들구름 한가롭다.
             다시 왕찬(王粲)의 등루부(登樓賦)를 지으려 하나, [왕찬은 악양루에 올라 등루부를 지었다.]
             마음속 시정(詩情)이 쉽사리 풀리지 않네.” 하였다.

이견대(利見臺) 부의 동쪽 50리 해안(海岸)에 있다.
○ 세간에 전하기를, “왜국(倭國)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니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근심하여, 죽으면 용(龍)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 ‘나를 동해의 물 속에 장사하라.’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그 유언대로 하고 장사 지낸 뒤에 추모하여 대(臺)를 쌓고 바라보았더니 큰 용이 바다 가운데 나타나 보였다. 그로 인하여 이견대(利見臺)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대 아래의 10보(步) 바다 가운데 네 뿔이 우뚝 솟은 돌이 네 문과 같은 곳이 있는데, 이것이 그 장사한 곳이다. 지금까지 대왕암(大王巖)이라고 일컫는다.
○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신라 때 군왕(君王)의 효자대(孝子臺)에,
             지금 올라보니 이끼 이미 짙었네.
             예정우개(霓旌羽蓋)[왕이 쓰는 물건으로 신문왕을 가리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하고,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은[峻宇雕墻] 터마저 폐하였구나.
             은하수 분명한데 북두(北斗) 보이고, [용이 된 문무왕의 가호로 천지가 청명함]
             연기물결 저편에는 동래(東萊)가 보이는 듯
             가련하다, 물결 위의 흰 갈매기는,
             조수(潮水) 가고 조수 올 때 의구(依舊)히 돌아오네.” 하였다.

금장대(金藏臺) 서천(西天)의 언덕 위에 있다.
『신증』 함벽정(涵碧亭) 의풍루의 남쪽에 있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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