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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2.17 안성 덕봉서원

용인 심곡서원

온고지신 2006. 2. 17. 13:47
심곡서원(深谷書院) 경기도 용인시(龍仁市) 수지면(水枝面) 상현리(上峴里)에 있는 서원.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현면(慕賢面)의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한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입향하였다가 1650년(효종 1) 건립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위패를 옮겨와 모셨다. 같은 해 <심곡>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양팽손(梁彭孫)을 추가 제향하였다. 경내의 건물은 사우(祠宇)·일조당(日照堂)·재실(齋室))·장판각(藏板閣)·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 제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장판각에는 67종 486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1985년의 도난으로 지금은 《정암집(靜庵集)》 《조선사(朝鮮史)》 등만 전한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낸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7 호.
조광조 (1482 성종 13 - 1519 중종 14) 자는 효직(孝直)이며 호는 정암(靜庵).한양 조씨.
한성 출생이며 개국 공신 온(溫)의 5대 손으로 감찰 원강(元鋼)의 아들이다. 정암은 유년 시절부터 영특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17세 되던 해에 魚川(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찰방(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평안도 희천에 귀양 와 있던 한훤 김굉필 (寒喧 金宏弼 1454-1504)에게서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 <근사록(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뒷날 김종직(金宗直)의 대를 이어 사림(士林)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 5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화태(禍胎)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06년 이후 중종 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515년(중종 10년)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선 조광조는 벼슬로는 성균관전적,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등을 지냈고, 홍문관으로 옮겨 수찬과 부제학을 역임하면서는 왕 앞에 나아가 학문을 강의하는 등 임금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는 유신의 정치를 펴면서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을 장려했다. 조광조는 이러한 새 기운 속에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 사류 가운데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당시 그는 사간원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는 ‘도학을 존숭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성현을 본받음으로써 지치(至治)를 일으킬 것’, 즉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은, 주)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지치주의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지치주의란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를 현실에서 건설하려는 것이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지치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조광조는 왕에게 성현을 본받아 수양에 힘 쓸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기존 훈구세력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했다.

또 현실의 여러 요소들을 이상적인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한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혁신 정치를 방해하는 요소는 학문적으로는 이단, 인격적으로는 소인으로 지목하여 냉엄하게 배척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1517년(중종 12년) 조광조는 도교의 제사를 주관해 온 소격서(昭格署)를 철폐시키는 등 이단을 타파하는 데 힘썼고 인심을 교화하고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처음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했다. 한편 1518년(중종 13년)에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본격적인 혁신정치를 담당할 인적 자원을 선발하여 각 부문에 배치했으며 사헌부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로 김식(金湜), 안처겸(安處謙), 박훈(朴薰)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 박상(朴尙), 이자(李耔), 김구(金絿), 기준(奇遵), 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현량과 실시를 통하여 신진 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이들 신진 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현량과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류들은 기존의 관리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더구나 이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시될 혁신정치는 장차 기성 관리들의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릴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동안 소인배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거나 지방으로 좌천되거나 하면서 조광조 등 사림파에 대한 반발을 키워 오던 훈구세력은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훈구세력의 반발에 불을 당긴 것은 훈적삭제(勳籍削除) 사건이었다. 중종은 반정에 성공한 후 반정 참가자 103명을 공로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靖國功臣에 봉했다. 정국 공신들은 대대로 귀족의 지위를 받고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특권을 누렸다. 1519년(중종 14년) 신진사류들은 훈구세력인 반정 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성희안(成希顔)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하여 반정하였는데, 이러한 류의 반정 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즉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 공신 2. 3 등 중 가장 심한 것은 이를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 사건으로 보수 세력의 불만은 극도에 다다랐다. 이 무렵 중종도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주장에 차츰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로인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태도를 그리 달가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는 2. 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판을 뒤집을 기회를 엿보던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 공신들은 그 낌새를 포착했다. 그들은 우선 희빈인 홍경주의 딸을 시켜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으니 지금 꺾지 않으면 장차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자주 왕에게 하도록 하고, 대궐 안의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주초가 왕이 된다,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趙자가 됨)이라는 글자를 꿀물로 써 놓아 벌레가 갉아먹게 한 후에 왕에게 보이도록 했다. 그 자신이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이었으니 그 심리적 효과은 컸을 것이다.

마침내 중종 14년(1519) 11월 15일 밤,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金詮),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이 밀의하여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벌을 주라고 청했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 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 이른바 기묘사화가 터진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尹自任), 박세희(朴世憙), 박훈 등 사림파는 줄줄이 잡혀가 투옥되었다. 처음에는 김정, 김식, 김구와 함께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靜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성균관 유생 1000여명이 광화문 앞에 모여 석방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관련자들은 국문을 받은 후 각지로 유배되었다. 현량과 출신의 관리들은 축출되었고 조광조를 두둔하던 관리들은 파직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 남곤, 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조광조는 이들에 의하여 그해 12월 사사되었다. 노련한 훈구 세력들이 그를 죽이고 그의 지지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아 후환을 없애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 김정, 기준, 한충, 김식, 김구, 박세희, 박순, 윤자임 등을 기묘명현이라 불렀다. 그의 시신은 같은 사림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和順郡 道谷面 月谷里)에 내려와 있던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의 손으로 현 이양면 증리(梨陽面 甑里)에 가매장했다가 익년(翌年) 정암의 유족에게 인도하였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류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흔히 조광조가 실패한 것은 너무 저돌적이고 급진적으로 개혁정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비타협성이 시기를 앞당겼는지는 몰라도, 기득권 세력이 저절로 물러나는 일은 결코 없음은 역사를 통해 익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 후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祀)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 (선조 38년)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각지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서원이 섰다. 마침내 광해군 때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 책(策), 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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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덕봉서원

온고지신 2006. 2. 17. 13:41
덕봉서원 [德峰書院]
지정번호 경기유형문화재 제8호
지정연도 1972년 5월 4일
소재지 경기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
목조단층의 와가(瓦家) 건물로, 1695년(숙종 21)에 사림(士林)들이 건립하였다. 오두인은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폐비 사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의주로 유배되어 가던 중 경기도 파주에서 죽었으나, 같은 해에 복관되고 1694년(숙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덕봉서원은 창건된 해에 숙종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조선 중기 이후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지어받고 서적·노비·토지 등을 하사받은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94년(정조 18) 정의당(正義堂)을 중수하고 학문도야에 힘쓰며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온갖 비리의 온상이었던 서원들에 대해 폐지령을 내렸을 때에도 이곳은 훼손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1979년에 사당을 중건했고, 동재·서재는 1940년에 훼손되었는데 1984년에 중건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사당, 정의당, 내삼문, 외삼문, 동재, 서재, 홍살문 등이 있고 숙종이 하사한 현판이 남아 있다. 정의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쓰이고 있고, 사당에는 오두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당의 전면 중앙에는 ‘덕봉사우(德峰詞宇)’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오른쪽 앞에는 수령이 약 250년 된 향나무가 서 있다. 서원은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소장하고 있는 전적과 유물은 오두인의 문집인 《양곡집》 2권 4책과 오두인의 화상 1점 등이 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음력 중순에 드는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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