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5.04.04 우장춘 박사의 선택
< 우장춘 박사의 선택 >
(서울=연합뉴스) 이종호 기자 = 일본 에루무(ELM) 극단 대표인 사토 요시카즈( 佐藤嘉一) 씨는 동북아 문화교류에 관심이 많다. 한일 월드컵대회가 열린 2002년에 는 한중일 3국 합작으로 '바다를 건너는 도깨비들'이란 작품을 만들었고, 그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한일합작극 '거짓말쟁이 여자 영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 또다시 한일 합작품을 들고 서울에 왔다. 두 나라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씨앗-우장춘 박사의 선택'(김순영 연출).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禹長春. 1898-1959) 박사의 일대기를 극화한 것이다. 한국측 파트너는 민중극장(대 표 이종렬)이다(2월 16일 연합뉴스 참조). 우장춘 박사는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당사자로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왔지만, 그보다는 먹을 것 없던 한국 땅에서 소중한 작물을 키워내고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 은혜로운 인물로 기억돼야 한다. 병충해 때문에 수확을 해도 먹을 게 없었던 감자를 개량해 100%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배추와 무 종자를 외국서 들여다 한국형으로 개량했다. 제주도를 밀감 재배단지로 만든 것도 그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앞으로는 꽃이 돈이 된다"며 꽃씨를 개발한 사람도 그였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형편에 꽃은 무슨 꽃이냐며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바람에 그가 어렵사리 개발한 겹페튜니 아 종자(당시에는 금값과 같았던)는 일본의 한 원예회사에 '선물로' 넘어갔고, 이 일본 회사는 이를 발판으로 오늘날 세계 3위권의 원예기업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오늘날 한국 농업을 도맡고 있으니 박사야말로 50 년대 '한국을 먹여살린' 주인공이자 이후 농업발전의 초석을 깔아준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 지금도 해마다 그에 대한 추모식을 열고 있는 것 도 당연한 일이겠다. 겨우 9년(1950-59)에 불과한 한국 체류 기간이지만 그 업적은 한 마디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토 대표가 한일 수교 40주년 기념 '우정의 해'를 맞아 한국과의 합작 공연 소재로 우장춘 박사를 택한 것은 그가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여서가 아니다. 그가 근대 한일관계의 비극과 갈등,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성을 매우 극 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표 사례이기 때문이다. 부친인 우범선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는지는 아직도 분명히 밝혀진 것이 없다지만 어쨌든 그는 개화파였고, 이때문에 일본에 망명해 일본 여성과 결혼해 살 던 중 그를 찾아온 조선인 자객들에 의해 죽었다. 박사의 삶은 이렇듯 시작부터 복잡했다. 장남인 그가 어머니의 나라 일본과 아 버지의 나라 한국 사이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을 지닌 채 살았던 데 비해 유복자인 동 생(차남)은 일찍부터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차남은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 억울한 떼죽음을 당한 사건에 대해 서도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철저한 일본인이 었다. 그런가 하면 우 박사가 그토록 한국을 못 잊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자식들은 2남4녀 가운데 누구도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 박사는 일본에서는 그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부당한 대우를 받아 야 했고, 한국에 건너와서는 그처럼 헌신했으면서도 섭섭한 일을 종종 당해야 했다. 한국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일각의 반감이야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아 그럴만했다 해도, 일본에 잠시 다녀오겠다는데도 출국허가를 내주지 않아 결국 어머 니의 임종을 하지 못한 일, 작고하기 하루 전에야 뒤늦게 문화포상을 받으면서 "좀 더 일찍 주었으면 고마웠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등은 이 물욕 없고 순수한 학자의 가슴에 지우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는 일들이었다.. 이번 연극은 우 박사의 일생을 간결하게, 그러나 인상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요 즘 연극들이 추구하는 재미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리고 때로는 "일본 말도 듣고 보 니 좋네" '일본 사람들도 다 나쁜 건 아니구먼" 식의 다소 계몽적인 어투가 어색하 기는 하지만 , 그래도 우장춘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전지식이 조금만 있으면 보기에 괜찮은 작품이다. 하지만 제주와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온 이 작품에 관객은 썩 많지가 않았다. "제가 만드는 동북아 합작품엔 징크스가 있나봐요. '...영자' 공연 당시엔 일본 관방장관이 한국 비하 발언(일본의 식민지배가 오히려 한국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을 내뱉는 바람에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도깨비들'의 상하이(上海) 공연 때는 야 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문제로 시끄러웠던 탓에 역시 반응이 냉담했죠." 그랬는데 이번 공연 역시 주한 일본 대사의 독도 관련 발언으로 분위기가 나빠 진 탓인지 기대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그는 웃었다. "호텔로 돌아와 거울 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담한 생각이 들어요. 내가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하고…." 이 집착에 대해 그는 무언지 모르지만 한국에 미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 인은 아니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한국에 대한 죄송함을 조금이라도 표현해야 할 것같 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가 꾸준히 한국 연수생들을 받아들여 가르치기도 하고 한일 연극교류위원회 결성에 앞장선 데에도 그런 심리가 작용했을 터이다. 올해 72세인 그는 "대학 시절부터 연출과 무대감독 일을 하며 무대와 인연을 맺 었지만 지금은 '문화의 전파'를 위해 뒤에서 조용히 일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산 다고 했다. 한일 두 나라가 수교 40주년을 맞아 '우정의 해'를 선포하고 이것저것 행사들을 펼치면서도 한편에서는 "독도는 일본 땅" 같은 의도된 듯한 망언이 서슴지 않고 튀 어나오는, 그래서 분위기가 서먹해진 요즘에 사토 대표의 이야기는, 그리고 이 한 편의 연극은 한일관계를,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13일까지 대학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764-6979). yesno@yna.co.kr
Posted by 상운(祥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