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특별시다. 1천만서울서울시민의 의식 속에는 '나는 특별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다. 서울에 살다가 경기도의 어느 신도시로 이사한 한 지인은 차량 번호판을 '경기'로 바꿔 기분이 심란했다고 고백했다.
나라마다 수도(首都)가 있지만, 특별시란 이름을 가진 수도는 서울이 유일하다. 많은 사람은 "서울은 특별하니까, 또는 수도니까 특별시라고 부르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서울이 특별시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서울시에 근무하던 1970년대까지 나도 서울특별시란 이름이 어떤 뜻으로 지어졌는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자료를 정리하다가 서울이 특별시가 된 이유를 알고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서울의 이름을 경성부(京城府)로 바꿨다. 8.15 광복 후 경성부에 근무하던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가고 한국인 직원들만 남게 되자 일제의 잔재인 경성부 대신 '서울시'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구청에 내려보내는 공문서에도 서울시라는 이름을 썼지만 그것이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당시 중앙정부 기능을 맡았던 '미 군정청 지방행정처'가 경성부라는 일제시대 이름을 쓸 것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또 당시 이범승 서울시장은 조선시대의 한성이라는 이름이 좋다며 스스로 한성시장이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당시 경찰국은 '한성경찰서'라는 간판을 달기도 했다. 광복 후 1년간 서울시는 공식 명칭을 갖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46년 8월 14일 미 군정청 공보부는 '특별발표'라는 것을 발표했다. 특별발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극동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 도시가 시민이 원하는 자치를 하게 되고 자치헌장을 가진다. 즉 조선의 수도 서울이 바로 그 도시다.

2. 서울은 미 군정장관 A L 러치 소장이 오늘 발표한 헌장에 의해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하고 '자유독립시'가 된다.

군정청 공보부장은 이 내용을 광복 1주년에 미 군정장관이 서울 시민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48년까지 미 군정은 정말 무능했다. 한국인이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구호양곡을 미 본토에서 들여오는 식량정책과 최소한의 치안대책 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한국인들의 불만이 쌓여만 갔다. 군정 당국자들도 스스로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국인의 여론은 서울시민이 좌우한다고 생각한 군정 당국자들이 광복 1주년을 맞아 서울 시민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내놓은 것이 '서울자유독립시(Seoul-freedom independent city)'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미 군정법령 제106호가 46년 9월 18일 공포됐다. 영어로 씌어진 군정법령이 한국어로 번역됐다.

영어 원문은 'Section Ⅱ (Seoul established as Independent City)'였다. 즉 서울독립시의 설치다.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방정부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법령 번역을 맡은 군정청의 한국인 직원은 고민에 빠졌다. 그의 상식으로는 '독립시'라는 이름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특별부제'란 단어였다. 30년대 말 경성부 의회가 점점 팽창하는 경성부를 경기도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당시 일본인 부윤이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는 특별부제를 연구해보겠다고 답변한 신문기사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독립시의 설치'라는 영어 원문을 '서울-특별시의 설치'로 번역했다.

이렇게 해 군정법령의 효력이 발생한 46년 9월 28일부터 서울의 공식 명칭은 서울특별시로 정해졌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필자 프로필>

▶1928년 경주 출생▶69년 명지대 경영학사▶74년 단국대 행정학석사▶77년 단국대 법학박사▶52년 제2회 고등고시합격▶57년 경북 예천 군수▶60년 경북도청 선거지도과장▶63년 총무부 중앙공무원 교육원 교관▶70~75년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75~78년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장▶78~94년 서울시립대 교수
서울은 6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건물은 손꼽을 정도다. 근대화 과정에서 개발 바람으로 헐린 건물도 많다. 하지만 서울의 모습을 송두리째 뒤바꾼 것은 바로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강다리가 끊어져 서울을 떠나기도 어렵게 된 나는 신당동 친척집 지하실에 숨어지내며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읽었다.

어둠 속 독서에 지쳐 후암동에 있는 은사댁을 다녀오기 위해 남산에 오른 1950년 7월 16일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당시 울창한 솔밭이었던 남산을 오르려면 오솔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폭이 너무 좁아 차량은 다닐 수 없었다.

지금의 해방촌 언덕을 지나 남산 능선에 오른 순간 요란한 비행기 굉음에 놀라 뒤돌아보았더니 남쪽 하늘이 미군 폭격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때 1시간 가까이 지켜본 폭격장면은 평생 가장 무서웠던 체험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날 폭격으로 용산 일대가 완전히 파괴됐다. 폭격의 이유는 북한군에 이용당하고 있던 용산 철도시설과 화폐를 찍어내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공장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시민들에게 서울을 사수한다는 거짓방송을 내보면서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피란을 가버린 정부는 화폐를 찍어내는 시설은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났다. 이를 접수한 북한군이 마구 화폐를 찍어내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한 화폐공장 폭격 때문에 인근 지역이 큰 피해를 본 것이다. 피해지역은 이촌동에서 후암동.원효로를 지나 마포구 도화동.공덕동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대표적 건물의 하나였던 용산역사, 철도국, 용산.마포구청 등이 이날 파괴됐다. 이날의 대폭격 외에도 북한에 점령된 석달과 인천상륙작전, 1.4후퇴를 거치면서 서울은 수많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남대문과 동대문, 그리고 경복궁과 창덕궁의 문화재가 일부라도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데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주일대표부 공사는 김용주였다.

그는 50년 9월 도쿄(東京)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인천상륙에 앞서 서울을 전면 폭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김공사는 맥아더 장군을 만나 서울에 대한 폭격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맥아더 장군에게 서울문화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배석한 하키 참모장에게는 덕수궁과 경복궁.창덕궁.남대문 등을 지도에 표시해가며 4대문 안 도심을 대략 반월형으로 그려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탐탁지 않게 대꾸하는 참모장과는 달리 맥아더 장군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해진다. 많지않은 서울의 문화재와 사적들이 그나마 전화(戰禍)를 피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데는 이런 작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3. 선비 장훈 씨
많은 사람이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전후에 곧바로 도시계획을 세워 재건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소득 수준에서나 가능한 주장일 뿐이다. 전쟁 직후 1953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며. 대다수 서울 시민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한때 동료였던 박유서(한국전쟁 당시 서울특별시 공보계장)는 "예산도 부족한 정부가 서울 재건을 위해 사유재산을 몰수해가며 도시계획을 세울 수는 없었다. 전쟁에 시달린 시민이 하는 일을 조금씩 도와줘 그들이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게 정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쟁 뒤 서울의 재건 과정은 서울의 도시계획사를 연구하는 내게 중요사안이었다. 이와 관련된 자료와 증언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장훈'이란 사람이 1945년 9월 17일부터 56년 4월 9일까지 10여년간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맡았다는 것이다.

수소문 끝에 그의 집을 찾아 그를 만났다.

나는 지금도 오만불손하고 건방지다는 말을 듣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러니 젊었을 때는 더 했을 것이다. 20년 가까이 중앙도시계획위원을 지내면서 많은 도시계획안을 심의했다. 민간업체 관계자들이 심의장에 나와 도시계획 재정비 용역안을 설명하면 위원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그 때마다 앞장서 큰소리쳤다.

용역업체 대표는 '업자'라는 입장 때문인지 나의 무례에 가까운 질문 공세에도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곤 했다. 동아기술단도 그런 용역업체의 하나였다. 선비 풍모의 동아기술단 대표는 나의 무례함에도 늘 미소를 띠곤 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집에서 나를 맞이하는 장훈씨가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나는 지난날의 무례함이 생각나 구멍이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고요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1911년 함남 북청에서 태어난 장훈씨는 서울에서 휘문중을 다니다 일본 와세다대 부속 공과학교 토목과에서 1년간 공부한 뒤 서울로 돌아와 소화공과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황해도청 내무부 토목과 조수로 3년간 일한 다음 38년부터 경성부 시가지계획과 조수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도시계획 분야의 이론과 실무에 모두 밝은 그가 미 군정 초기 경성부의 초대 도시계획과장이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일제 유산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제 말기에 거의 마무리된 영등포.돈암.대현지구 등 세곳의 구획정리사업이 대표적이다. 장훈씨는 서울 도시계획과장을 맡자마자 대방.한남.사근.용두.청량리.신당.공덕지구 등 모두 7개 지구의 약 2백62만평에 대한 구획정리사업을 시작, 50년 6월 끝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피란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51년 5월부터 엄청난 전후 복구계획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4> 전후 복구 사업
한국전쟁 전에 서울 시내 주택가 골목에서 집을 찾는 것은 고역이었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일제 초기 도심 일부지역의 도로가 직선화되고 하수도 시설이 정비됐으나 뒷골목은 소방차도 다닐 수 없는 꼬부랑길이었다. 이런 서울의 중심부가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다.

전후 서울시 복구를 담당했던 장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1951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김태선 서울시장을 임명하면서 피란갔던 시민이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복구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해 7월 부산에 가 있던 서울시청이 서울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시민이 한꺼번에 돌아와서 전에 살던 집터에 다시 집을 지어 서울 시가지는 전쟁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판이었다. 따라서 간선도로망.뒷골목 정비.공원 조성.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 조성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정작 전후 첫 복구사업은 시신 매장작업이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와 가로수를 치우고 파괴된 도로.상하수도 시설 등을 정비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아직 많은 시민이 돌아오지 않은 때여서 이런 일을 할 인력을 구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장과장은 "이승만 대통령.밴플리트 장군.김태선 시장을 모시고 명동.진고개.남대문 일대를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당시 부산에 있던 李대통령은 전후 복구계획을 서둘러 수립하라고 지시한 뒤에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자주 서울에 올라왔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폐허를 걷다가 지치면 진고개(충무로) 2가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다방에서 차를 마셨다고 했다.

전후 복구계획이라는 게 사실상 서울 시가지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당시 장과장은 김태선 시장과 거의 매일 도면을 놓고 밤을 새웠다고 한다. 그 결과가 52년 3월 내무부 고시 제23호로 발표된 '서울 도시계획 가로변경.토지구획정리지구 추가 및 계획지역 변경'이었다. 고시의 주요 내용은 도로 39개 신설, 기존 도로 중 6개 폐지 및 18개 확장 등이다.

세부 계획으로는 ▶광화문 네거리~중앙청 간 도로의 폭을 53m에서 1백m로 확장▶광화문 네거리~오간수교 간 도로의 폭을 50m로 확장하기 위한 청계천 오간수문까지 복개▶중앙청 앞.광화문 네거리.안국동.서울역 앞 등 모두 19곳에 광장 조성 등이었다. 이와 함께 을지로3가.충무로.관철동.종로5가.묵정동을 포함, 모두 19곳이 구획정리사업 대상 지구로 선정됐다.

이처럼 거창한 도로.광장 신설 및 구획정리사업 계획을 세웠지만 해당 토지를 사들이기에는 서울시의 재정이 넉넉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계획은 70년대 말 구자춘 시장에 이르러서야 마무리 됐다. 전쟁 직후 혼란기에 서울 도심의 골격이 되는 도시계획이 이 정도나마 마련됐던 것이 다행스럽다. 하지만 당시 폐허의 서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들의 공적이 대부분 잊혀져 아쉽다.
<5> 워커힐 건립
워커힐(Walker Hill)의 영문이름 머리글자인 W자를 상징하는 기둥. [‘워커힐 30년사’에서]
도시의 모습이 정치와 깊은 관계가 있다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세계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도시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조선왕조가 한양(서울)으로 천도한 것부터가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이 느리지만 조금씩 복구되고 있던 시기에 4.19, 5.16 등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잇따랐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5.16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에 5.16 주역이었던 김종필씨는 미국 정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주한미군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위락시설을 갖춘 대규모 호텔 건설'이다. 위락시설을 만들면 주로 일본으로 휴가가는 주한미군이 서울에서 휴가를 보내며 돈을 쓰게 하는 동시에 군사정권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에 따라 1961년 하반기 대규모 호텔을 조성할 곳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한강변 별장터가 선정됐다. 부지 면적은 19만1천여평. 李대통령은 가끔 이곳에 들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울창한 아차산을 등진 이곳은 한강의 흐름과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

새 호텔에는 '워커힐(Walker Hill)'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의 휴가 장병을 유치하기 위해 짓는 호텔인 만큼 한국전쟁 중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호텔과 함께 들어설 빌라의 이름도 더글러스(맥아더).머슈즈(리지웨이) 등 미군이나 유엔군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워커힐 건립 계획은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이 앞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군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알려졌다. 미국의 AP.뉴스위크 등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카지노.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워커힐의 주설계는 김수근씨가 맡았다. 그는 서울대 공대 재학 중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뒤 도쿄(東京)예술대 건축과, 도쿄대 건축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워커힐 설계에는 김수근 외에 김희춘.나상진.엄덕문.이희태.강명구 등 여러 명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63년 4월 워커힐이 문을 열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러자 서울시장들은 워커힐 가는 길을 정비하고 도로변에 건설공사를 벌였다. 이는 朴대통령에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양대 앞 성동교는 64년부터 2년간 확장공사를 벌였다. 또 뚝섬지구의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시작되고, 성동교에서 워커힐에 이르는 광나루길은 폭 10m에 불과했으나 66년에 30m로 넓어졌다.

결국 워커힐은 당초 건립 목적인 많은 미군 장병 유치에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했지만, 서울 동부지역 개발에는 큰 역할을 한 셈이다.
<6> 인구집중억제
시굴은 시골의 서울사투리다. 1950년대 서울에 올라온 나는 이 '시굴띠기'란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당시는 시골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완전히 이방인이었다. 광복과 한국전쟁기에 많은 피란민이 서울에 정착하고, 그 이후 60년대에 농촌 이탈자들이 서울에 모여들면서 서울 사람들의 배타의식.거부반응이 시골 사람을 대할 때 무심히 뱉는 '시굴띠기'란 말로 극명하게 표현되곤 했다.

63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서울시장에 임명된 윤치영씨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삼촌으로 대대로 서울에서 살아온 전형적인 '서울 사람' 이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신념이 있었는데 "서울에는 서울 사람이 살고, 시골에는 시골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서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좀더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없느냐"고 따졌다. 尹시장의 답변은 "농촌인구가 서울로 모여들지 않게 하려면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서울을 방치해 두는 것은 바로 서울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 방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 생각을 가진 尹시장이 64년 국회에 '지방민의 서울이주를 허가제로 하는 입법'을 요구하고 이 내용이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는 한편 모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서울의 인구집중 문제에 온 국민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지방민의 서울이주 허가제는 채택됐다면 가장 강력한 수도권 인구 집중방지책이 될 뻔한 아이디어인 셈이다.

한편 尹시장의 발언과 언론의 관심으로 인해 朴대통령도 서울의 인구집중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장교 신분으로 한국전쟁을 치른 朴대통령의 고민은 '50년 1백70만명의 서울인구로도 피란이 어려웠는데 3백50만명의 인구를 데리고 전쟁을 치를 수 있을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64년 최초의 '대도시 인구집중방지책'이 수립됐다. 당시 대책도 오늘날 추진되고 있는 지방균형발전정책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 뒤로도 서울의 인구집중방지를 위한 정책은 꾸준히 추진됐다. 내가 72년에 기획관리관으로 재직할 때 각계의 권위자를 동원해 만든 '수도 서울에 있어서의 인구집중 억제에 관한 연구'도 그러한 결과물의 하나로 각종 방안이 담겨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도시계획상 공업지역이란 것이 없어졌으며, 공장건설도 금지됐다. 주민세 신설, 개발제한구역 설정, 대학의 신설금지 및 증원억제 등 다른 수단도 동원됐다. 이와 함께 반월.구미.여천.창원 등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도 추진됐다.

그러나 이러한 대도시 인구집중 방지책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인구는 늘어만 갔다. 60년의 서울 인구는 2백44만명이었는데 70년에는 두배인 5백43만명으로 늘어났다.

75년까지 서울의 인구억제는 주로 강북의 인구억제책이었다. "이북에서 남침하면 그 많은 인구가 한강을 건너 피란이 어려울 것이므로 강북인구의 상당부분을 강남으로 이주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75년부터 강북억제책은 서울 전체에 대한 집중억제대책으로 바뀐다. 그 이유의 하나는 베트남의 패망에 따른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 도미노현상이었고, 또 하나는 북한이 보유하게 된 장거리포의 사정거리 때문이었다.
<7> 불도저 김현옥
1966년 끝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춘궁기가 사라졌다. 봄에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60~64년에는 연평균 5.5%, 65~69년의 경우 연평균 11.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같은 고도성장에는 급격한 도시화가 뒤따랐다. 도시화 현상을 성장동력으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사례가 '한강의 기적'이다.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이 김현옥 서울시장이었다.

도시를 연구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66년은 金시장이 등장한 해로도 기억할 만하다. 그는 우리나라의 지방행정.도시개발사에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남겼다.

경제성장과 동시에 서울은 인구 집중으로 인한 교통난.주택난 등의 도시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윤치영 서울시장은 속수무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66년 4월 당시 부산시장이었던 김현옥씨를 서울시장으로 전격 임명했다.

김현옥씨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에 미친 사람'이다. 그의 별명은 부산시장 때부터 '불도저'였다. 무슨 일이건 한번 결심하면 밀어붙이는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金시장이 부임한 66년 4월 당시 서울 인구는 3백50만명, 차량 수는 1만7천대였다. 자가용 승용차는 5천대에 불과했다. 대다수 시민의 교통수단은 시속 20㎞의 전차와 1천3백여대의 버스였다. 출퇴근 시간대에는 버스나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정류장마다 아우성이었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독립문과 마포.돈암동.청량리.왕십리가 서울 시가지의 끝이었다. 시 외곽으로 나가면 도로 폭이 8~10m로 좁아졌다. 도심에서 갈현동.미아리.광나루까지 왕복하는데 지프형 차량으로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였다.

金시장은 도로 신설.확장을 주요 내용으로 한 교통난 완화대책을 서울시정의 중점 과제로 삼았다.

그는 4.19, 5.16 등의 기념일에 수십 건의 건설공사 기공식을 열었다. 예컨대 66년 5월16일 하루에만 홍제동~갈현동과 돈암동~미아리 구간의 도로 확장공사 등 모두 10건의 건설공사와 가압펌프장 16곳, 공동수도 94곳의 기공식을 가졌다. 그는 기공.준공 테이프를 끊은 가위를 시장실 벽에 걸어 놓았다. 가위들이 시장실 벽을 거의 채웠을 무렵 그는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주요 간선도로는 대부분 金시장 재임 때 넓혀졌다. 사직터널을 뚫고 청계고가도로를 놓았다. 남산1.2호 터널과 마포대교도 첫삽을 떴다. 1백44개의 보도육교와 북악스카이웨이, 강변도로도 만들었다.

金시장이 수많은 건설공사를 한꺼번에 벌리자 건자재 부족 파동이 일어났다. 전국 공사장에서 시멘트.철근.골재가 동 난 것이다.

경제기획원 장관이 건설공사 중지 또는 속도 조절을 지시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중앙정부가 부랴부랴 시멘트.철근 등 자재를 외국에서 들여와 사태를 수습했다.

70년 4월 8일 11명의 희생자를 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물러나기까지 만 4년 4일 동안 金시장은 하루도 쉼없이 일에 미쳐 지냈다.
<8> 세운상가
일제가 서울에 남기고 간 수많은 상처 가운데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조성한 소개공지(疏開空地)였다.

폭격으로 인한 불이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데군데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폭 40~50m의 빈터를 만든 게 소개공지다. 회현동~서울역 구간의 퇴계로와 서울역~충정로 구간의 의주로 등은 소개공지를 광복 후 포장해 도로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소개공지는 건물을 허문 뒤 정리되지 않은 흉한 모습의 빈터로 방치되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이 끝나자 피란민들이 소개공지였던 빈터로 몰려들었다. 종묘 앞에서 필동까지, 경운동에서 종로까지의 소개공지에는 판잣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또 이 일대에는 '종삼'으로 불리는 윤락가가 형성됐다.

서울시는 1952년 종묘에서 필동에 이르는 소개공지를 폭 50m의 도로 부지로 고시했다. 그러나 전쟁 후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도로 건설 계획을 폐지하고 자신들에게 땅을 불하해달라고 요구했다. 서울시의 반대와 도로 부지인 국유지를 개인에게 팔 수 없도록 규정된 법을 어기고 재무부는 땅을 야금야금 팔아서 60년대 말에는 도로 부지의 50% 정도가 사유지로 바뀌었다.

중구청에 근무하던 이을삼 계장이 66년 부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대한극장 앞~청계천4가 간 계획도로 정비방안'을 보고했다. 폭 50m의 도로 부지 가운데 중앙 부분 20m만 도로를 개설하고, 양쪽 15m씩은 불법점유하고 있는 주민들이 지주조합을 만들어 건물을 짓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金시장은 곧바로 이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무허가 건물 철거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건설부 도시계획위원회가 당초 도로 건설 계획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제동을 건 것이다.

이미 서울시는 "이곳을 재개발해 건물을 짓고 지역주민들을 우선 입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무허가 건물 2천동 중 3분의 2를 철거한 상태였다. 金시장은 도시계획위의 제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강행했다.

워커힐 건설로 가까워진 김수근씨에게 건물 설계를 부탁했다. 김수근씨는 윤승중.김석철씨 등과 함께 외국 건축사조를 과감하게 도입한 '입체도시' 개념 아래 설계에 착수했다.

설계안은 ▶종묘에서 필동까지 약 1㎞에 보행자용 인공덱(deck) 설치 및 상가 배치▶1~4층은 상가, 5층 이상은 아파트로 하는 주상복합 건물군 조성▶보행자 전용 인공덱은 3층에 설치하고, 지상은 차로 및 주차공간으로만 사용하는 철저한 보.차도 분리 등으로 구성됐다.

이 설계안에 대해 67년 8월 2일자 중앙일보는 "마치 서울이라는 바다에 뜬 아파트라는 이름의 선박처럼 꾸며진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설계안에 담긴 원대한 포부와 달리 완공된 건물인 세운상가는 흉측한 모습이었다. 인공덱이 종묘에서 필동까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지금도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9> 서울 요새화 계획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사건이 이른바 '1.21 사태'다. 인왕산 아래 필운동에 살고 있던 나는 그날 밤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김신조 등 수십명의 무장간첩이 휴전선을 넘어 세검정 삼거리에 이를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당시 서울의 방위망이 뚫린 원인 중의 하나는 서울의 북문인 자하문 밖 부암동.평창동 일대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속한 서울 시가지 팽창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는 바람에 주민 수가 거의 늘지 않았다.

청와대나 수도방위사령부 측이 인왕산.북악산 등 북쪽 지역의 개발을 억제해 시민의 출입을 막는 게 청와대 경호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1.21 사태는 서울 북쪽 지역에 대한 '개발 억제' 방침이 '개발 촉진' 정책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됐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그해 2월 9일 '북악스카이웨이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자하문~북악산~정릉~미아리를 잇는 길이 6.7㎞, 너비 16m의 산간도로를 개설해 군용 도로 및 시민의 드라이브 코스로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金시장은 홍은네거리에서 북악산 뒤~정릉~미아리로 이어지는 제2순환도로 건설계획도 내놓았다. 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평창동과 정릉을 가로막은 북악산에 터널을 뚫어야 했다. 金시장은 터널을 착공도 못하고 퇴임했지만, 북악터널은 71년 9월 완공됐다. 이런 조치들은 '세검정.평창동 일대를 개발해야 산악지대를 이용한 무장간첩의 침투를 막을 수 있다'는 1.21 사태의 교훈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68년 10월 말 북한 무장간첩 1백20명이 경북 울진군에 상륙한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한창이던 69년 새해를 맞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김현옥 시장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을 밝혔다. 평화시에는 교통시설로 사용하고, 전시에는 30만~4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쓰기 위해 남산에 1.2호 터널을 뚫는다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또 두 개의 터널이 교차되는 곳에는 5천~7천평 규모의 교통광장을 조성해 완전한 입체교차로를 만든다는 것이다.

삼일로에서 보광동에 이르는 길이 1천5백30m, 너비 10.15m의 남산 1호터널은 계획 발표 후 9일 만인 3월 13일 기공식을 가졌다. 이태원과 장충동을 잇는 길이 1천5백m의 2호터널 기공식은 4월 21일 열렸다. 사전 타당성 조사나 기본설계도 거치지 않고 착공한 것이다.

그러나 완공된 1.2호 터널은 당초 계획과 달리 교차하지 않았다. 교통광장도 없었다.
<10> 나비 작전
문명의 요람인 도시의 뒷골목에는 '매춘'이라는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춘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적은 없다. 기생과 관비가 있었지만 이들은 매춘부는 아니었다. 일제가 유곽(遊廓)을 지정하고 공창(公娼)제를 도입했다. 광복 후 미 군정이 이를 폐지한데 이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매춘을 금지했다. 그런데도 매춘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역 앞이나 옛 유곽 터, 기지촌 등에 사창(私娼)이 생겨났다.

그러나 종묘 앞의 속칭 '종삼'은 위의 어느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서 도심에 생겨난 특이한 매춘지역이었다. 광복 직후 이곳에 처음 사창이 들어선 것으로 알려졌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53년부터 크게 늘어났다.

60년대에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낙원동.종로5가까지 넓게 퍼졌다. 그 범위가 동서로 1㎞, 남북으로 2백m에 달했다. 이런 종삼은 문학작품의 단골 소재였다. 최일남이 '소설문학' 83년 5월호에 실은 단편 '서울의 초상'에는 당시 종삼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중앙정부와 서울시는 종삼을 비롯해 서울역 앞 양동 등 사창가에 대해 끊임없이 단속과 선도작업을 펼쳤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종삼의 사창가가 사라지게 된 것은 김현옥 서울시장이 펼친 '나비작전' 덕분이었다.

68년 9월 26일 오후 세운상가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가던 金시장이 골목에서 한 윤락녀로부터 "아저씨 놀다가요"라며 소매를 잡혔다. 金시장은 즉시 종로구청장실로 가 시 관계자들과 경찰간부 등을 긴급 소집, 종삼 소탕을 위한 나비작전을 세웠다. '나비'는 사창가를 찾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전의 목표는 나비를 뿌리뽑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꽃'(윤락녀)에 대한 단속.선도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판단에서다. 나비작전은 그날 TV.라디오에서 대대적으로 방송되고, 다음날 27일자 모든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27일 낮부터 한국전력 직원이 총동원되다시피 해 종삼 골목 입구마다 수많은 1백V짜리 전구를 달았다.

종삼으로 들어가는 나비를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작전은 27일 저녁 시작됐다. 골목에 사람이 들어서면 골목 어귀에 진을 치고 있던 시.구청 공무원과 사복 경찰관이 몰려가 "이름이 뭔가" "직업은 뭐냐" "주소가 어디냐"며 물었다.

분명 인권침해였지만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무원과 경찰관이 몰려들어 묻기도 전에 달아났다.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면서 종삼에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다. 포주.윤락녀들에 대한 설득작업도 병행됐다.

金시장은 10월 말까지는 나비작전을 펼쳐야 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10월 초에 나비의 발길이 완전히 끊기면서 종삼은 끝을 맞았다.

종삼 소탕작전이 예상보다 쉽게 성공한 이유는 뭘까. 전쟁 후 허무주의에 빠져 사창가를 찾던 사람들이 68년에 이르러 이성을 되찾기 시작한 때였다고 여겨진다. 결국 시대적 변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았던 사창가를 없앤 일은 세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특이한 사례로 남을 만하다.
<11> 서민의 발 전차
1899년 5월 17일 처음 서울시내에 등장한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확히 69년 6개월 13일 간 시민의 발노릇을 했다.

건양 원년(1896년) 인천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두명의 미국인 콜브란.보스트위크는 고종의 홍릉(명성황후의 능) 나들이를 보고 전차 도입을 생각했다. 이들은 가마를 탄 많은 신하가 뒤따르는 고종의 홍릉 행차에 당시 돈으로 10만원 안팎의 경비가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차를 이용하면 경비와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전차 운행을 위한 전차.전기 부설권 허가를 황실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황실에서 75만원을 투자한 한.미 합작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서울시내에 전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1909년 이 회사의 경영권이 일본 기업으로 넘어갔다.

일제 때 전차 운행은 엄청난 수익사업이었다. 일제 초기 서대문~청량리, 종로~남대문~원효로4가, 서대문~마포 구간 등 3개에 불과했던 노선이 점차 늘어났다. 왕십리까지 가는 을지로선과 남대문~신용산~노량진 노선, 서대문~영천~창경궁 앞~돈암동 노선 등이 잇따라 신설됐다.

한국전쟁 전까지 전차는 서울 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50년 서울 시내버스는 50대 정도. 승용차는 몇 백대였으므로 대다수 시민은 전차로 출퇴근하거나 등하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전차사업은 곤경에 빠졌다. 우선 정부가 전차요금을 회사 맘대로 올리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레일.차량 등의 시설 노후화와 늘어나는 인건비도 큰 부담이 됐다.

여기에 미군이 한국전쟁 중 사용했던 지프.트럭들을 민간인에게 싸게 팔았으며, 국산 버스.택시도 생산되기 시작했다. 55년 6백22대였던 서울의 시내버스가 60년 1천9백4대, 65년 2천4백46대로 급격하게 늘었다.

차량이 증가함에 따라 주요 간선도로 곳곳에 정류장을 두고 평균시속 7㎞의 거북이 운행을 하는 전차가 장애물로 전락했다.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데는 당시 유럽.미국.일본 등 선진국이 전차를 철거하고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외국의 대도시에서 전차가 없어진 이유는 전철이 놓여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하철 등 전차를 대체할 수 있는 대중교통시설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서울시내 전차 철거는 성급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외국 대도시의 교통정책과 비교해 볼 때 10~20년 이른 조치라는 것이다.
<12> 남산 서울타워
남산 정상에 있는 높이 2백36.7m의 서울타워는 기공 6년 만인 1975년 8월 중순 완공됐다. 남산이 해발 2백43m이니 서울타워 꼭대기까지는 4백80m에 이르는 셈이다.

KBS 등 3개 방송국의 송신탑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울타워가 세워진 가장 큰 목적은 북한 방송의 전파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타워가 건립되기 전에는 서울시내 어디에서나 북한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구파발.불광동 등 북부 지역에서는 북한 TV 방송 시청도 가능했다.

69년부터 지반공사를 벌였지만 건축허가는 73년에 났다. 나는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서 서울타워 건축허가 신청서를 접수했다. 내가 많은 건축허가 신청서 가운데 이 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서류를 갖고 온 사람이 중앙정보부 직원이었고, 그 서류에 체신부.공보부.농림부.경제기획원 등 여러 행정기관의 국장.차관.장관 도장이 빽빽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 직원이 건축허가 신청서를 들고 온 것은 북한 방송의 전파 관리 문제 때문이었지, 정보기관이 타워 건설의 주체는 아니었다. 따라서 제출한 건축허가 신청서에 적힌 사업자는 동아.동양.문화방송 등 3개 민간방송사가 공동 출자해 설립한 기업이었다.

그러나 서울타워는 건설 과정에서 송신.전파 관리 등 주된 기능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5층 규모로 지어질 전망대만 크게 보도됐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은 서울타워를 식사하면서 서울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장소 정도로 알았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 돼가던 74년 5월 한 한국일보 기자가 타워에 올라갔다. 송신탑에서 50m 정도 위에 있는 철탑 부분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그해 5월 12일자 한국일보에 '북의 땅 송악이 보인다. 북악도 성큼 수채화처럼"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본 박정희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서울타워에서 북의 땅 송악이 보인다면 송악에서도 이 시설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했다.

朴대통령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우선 북한이 서울을 사정권에 두는 장거리 대포를 개발할 경우 서울타워가 장거리포의 주요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북악이 수채화처럼 보인다면 청와대도 한 눈에 들어온다는 뜻이므로 서울타워에서는 몇 자루의 고성능 총포만으로 청와대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뿐 아니라 사회부장.편집국장 등이 줄줄이 정보기관으로 연행돼 보도 저의와 배후에 대해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타워 준공 소식은 우리나라 모든 언론매체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朴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일반인의 전망대 출입이 전면 금지됐다.
<13> 한강 개발 계획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1966년 4월 서울의 인구는 3백60만명이었으며, 국민의 1인당 소득수준은 1백15달러 정도였다. 그 뒤을 이은 양택식.구자춘 시장이 시장직을 떠난 78년 12월 서울의 인구는 7백82만명, 1인당 국민소득은 1천3백30달러였다. 이 세 시장이 재임한 12년9개월간 서울시의 인구는 4백22만명이 늘어났고 국민의 1인당 소득은 12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와 같은 경제의 고도성장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인구의 서울 집중이 진행된 것이다.

집은 아무리 지어도 모자랐고, 길은 아무리 넓혀도 부족했다. 수돗물의 증산은 수요를 따르기 어려웠고, 무허가 건물은 헐어도 헐어도 계속 늘어났다.

김현옥.양택식.구자춘 세 명의 시장은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시민의 생활을 토요일.일요일도 없는 일을 통해 이겨나갔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하부구조를 거의 마무리지었다.

김현옥 시장의 재임기간 동안 월간지 '도시문제' 등을 발간하며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일했던 나는 양택식 시장이 취임한 뒤 서울시의 기획관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급으로는 다른 국장과 같은 2급이었지만 기획.예산.통계.법무 등 시(市)행정 전반에 걸쳐 관여했고, 양시장의 많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됐다. 이 때문에 당시 시청에서는 1.2 부시장 위에 있는 '0부시장'이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당시의 시장들이 얼마나 '일에 미쳐' 또는 '일에 묻혀' 지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김현옥 시장은 재임 4년간 해마다 그 정열의 초점이 달랐다. 처음 부임했던 66년에는 교통소통에 주력해 지하도 공사와 육교 공사, 도로 확장 등에 주력했다. 다음 해에는 세운상가.낙원상가.파고다 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재임 3차년도인 68년에는 한강개발사업을 시작했으며, 69년에는 남산 1.2호 터널 등 서울 요새화계획에 주력했다.

훗날 '강변1로'로 불리는 '제1한강교~영등포간 연안도로'의 기공식은 67년 3월 17일 거행됐다. 3월에 시작한 한강 연안도로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던 8월 김시장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즉 새로 생기는 강변도로와 기존의 제방 사이에 2만4천평이라는 '새로운 택지'가 조성됐던 것이다. 제방을 종전보다 안으로 들여쌓은 결과였다. 2만4천평의 땅은 20동의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넓이였다.

이때 김시장의 머리를 스친 것이 여의도 1백20만평을 개발하면 엄청난 택지가 새로 생기고 그것을 팔면 한동안 구상했던 여러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편이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그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한강개발계획을 세워라. 그 내용은 첫째,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서 가능한 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둘째, 여의도와 마포.영등포를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한다. 셋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차적으로 축조함으로써 한강홍수를 방지하고,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한다." 결심이 선 김시장의 명령은 추상같았다.

이에 따라 한달여 만에 한강개발계획이 수립되고,"여의도를 시가지로, 4백62억원 투입, 한강개발 3개년 계획 마련"이라는 기사가 일제히 보도된 것은 67년 9월 22일이었다. 김시장은 한강개발과 여의도 건설을 '조국의 시대적 과업이며 꼭 이룩해야 할 민족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14> 여의도 개발
요즘 젊은이들은 한강을 변하지 않는 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년내내 강 폭이나 수량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 전만 해도 한강은 노량진 쪽으로 붙어서 가늘게 흐르다가 홍수 때만 넓어졌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곳곳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선거유세 등 대중집회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

한강 하류 용산.마포 나루터에서 당인리 앞까지도 보통 땐 넓은 백사장이었다. 이 백사장의 가운데에 홍수에도 가라앉지 않는 두 개의 섬이 있었다. 밤섬과 여의도이다.

1916년 여의도에 간이비행장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다. 민간비행장 기능은 61년 김포로 옮겨졌으나, 군용비행장 기능은 67년까지 계속됐다.

67년 9월 김현옥 서울시장이 발표한 '한강개발 3개년 계획'에 따르면 여의도를 1백26만평 규모의 도시용지로 개발토록 했다. 건설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87만평으로 축소됐고 군용비행장 기능은 성남에 있는 서울공항으로 옮겨졌다.

물길을 막기 위해 여의도 둘레에 둑(윤중제)을 쌓아도 강물의 흐름이 원활하려면 인근 밤섬을 없애야 했다. 또 밤섬의 흙이나 돌을 사용해 둑을 쌓는 게 가장 손쉬웠다. 당시 밤섬에는 78가구 4백여명이 살고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마(馬).판(判).석(石).인(印).선(宣)씨 등의 집성촌이었다. 이들은 가구당 1천5백여만원을 받고 마포구 창천동의 연립주택으로 이주했다.

68년 2월 밥섬이 폭파됐다. 밤섬에서 나온 11만4천t의 돌이 여의도 윤중제 축조공사에 쓰여졌다. 장마철이 닥치기 전에 완공하기 위해 매일 철야작업을 했다. 인력은 하루 3교대로 투입됐다. 1백10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 金시장은 신들린 사람처럼 살았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여의도로 달려갔다. 4월에는 아예 여의도에 '이동시청'을 열어 시정을 봤다. 당시 토목공사 기술 수준으로는 하루 작업량이 최대 5만t이었다. 하지만 金시장의 호령과 질타로 하루 작업량이 10만t에 달했다. 5월 말까지의 여의도는 흙먼지투성이었다. 나는 윤중제 공사 현장을 떠올리면 '혈투'라는 낱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윤중제 착공 후 얼마되지 않아 국회에서 새로 조성되는 땅 약 10만평을 국회의사당 부지로 쓰겠다고 서울시에 신청했다. 여의도 입주 신청 제 1호였다.

68년 6월 1일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강건설'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쓰인 화강암 블록의 검은 휘장을 벗기는 것으로 여의도 윤중제 공사는 끝났다. 그리고 70년에 서울대교(현 마포대교)가 준공될 때까지 여의도 개발은 휴식기에 들어갔다.

한편 金시장은 윤중제 공사가 시작되던 무렵 김수근씨에게 여의도 시가지 개발 관련 도시계획안 수립을 맡겼다. 김수근씨는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생활방식과 행동이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이런 金씨가 내놓은 여의도 설계는 이상적이라는 표현을 넘어 환상이었다. 당시 수준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비현실적 작품'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은 지금에도 실현하기 어려운 설계라고 여겨진다. 그의 작품은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가 60년 설계한 '도쿄계획 1960'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됐다.
<15> 시범 아파트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현옥 시장이 물러나고 양택식 시장이 부임했다. 梁시장의 당면 과제는 바닥 난 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梁시장이 부임하면서 나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서울시 기획관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서울시 재정 상태는 '제때 봉급을 줄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같은 재정 악화는 金시장이 벌여놓은 수많은 사업에서 비롯됐다. 특히 여의도 윤중제 건설이 주요 원인이었다. 윤중제를 쌓아 조성된 땅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울시 재정을 살릴 방안도 여의도에서 찾아야 했다.

나는 땅이 안 팔리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70년 8월 초 처음으로 여의도에 갔다. 눈 앞에 펼쳐진 80만평의 평지가 장관이었지만 내 입에서는 "아이고 이것을 어떻게 하나"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땅이 안 팔리는 이유는 도시계획 때문"이라는 동행한 시 직원의 말이 들려왔다. 그 때까지 김수근팀이 설계한 여의도 개발 계획안을 못 본 나는 곧바로 그 계획을 검토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이런 계획으로는 땅이 팔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땅을 팔기 위해선 우선 거점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시범아파트 입주자 모집에 나섰다. 시범아파트는 대지 3만3천여평에 24개동 1천5백84가구가 들어서는 대단지였다. 70년 9월부터 입주자를 모집했으나 신청자가 없었다. 梁시장을 비롯한 시 간부들이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시범아파트 홍보에 나섰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梁시장은 훗날 내게 "여의도 시범아파트 홍보물을 들고 거리에 섰을 때가 가장 비참했다"고 말했다.

결국 시 간부들이 앞장서 입주 신청을 했다. 내가 가장 먼저 신청했으며, 국장.과장.구청장 등이 뒤따랐다.. 70년 9월 착공한 시범아파트는 다음해 10월 완공됐다. 아파트가 완공됐는데도 입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파트 주변은 사막과 비슷했고, 버스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첫 입주민이 됐다.

그러나 아파트 준공과 더불어 초.중.고교가 문을 열었다. 나는 서울시교육위원회와 교섭해 여의도초등학교 졸업생은 무조건 여의도중을 거쳐 여의도고로 진학하도록 했다. 이른바 특수학군의 설정이었다. 이 정책이 여의도 아파트 단지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여기에 모든 신문과 TV가 당시 서울시내 아파트단지 중 최대 규모인 시범아파트를 집중 보도했다. 그러자 아파트값이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여의도 아파트 건설에 뛰어드는 민간 업체도 잇따랐다. 이렇게 해서 여의도 땅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도시계획안을 전면 수정한 것도 토지 매각을 촉진한 이유 중 하나다. 나는 김수근팀의 도시계획을 폐기하기로 하고 홍익대 박병주 교수에게 새 계획안 마련을 부탁했다.

한편 71년 봄 한 재일동교가 벚꽃 묘목 2천4백주를 서울시에 기증했다. 나는 梁시장에게 그것을 여의도 윤중제에 심자고 건의했다. 워싱턴 포토맥강변의 벚꽃거리 처럼 만들고 싶었다. 모든 시 간부가 주말에 묘목을 심던 기억이 생생하다.
<17> 공유수면매립
서울시는 한강변에 새 제방들을 쌓고, 기존 제방은 강 쪽으로 더 들여 다시 쌓으면서 확보한 택지를 팔아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이른바 '공유수면 매립공사'사업이다. 기업.종교단체.고위 장성 등도 큰 이권사업임을 알고 달려들었다.

1962년 제정된 공유수면매립법에 따라 한강변에는 크고 작은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진행됐다. 동부이촌동.압구정동.잠실.반포 아파트단지의 부지가 그렇게 조성된 땅이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앞 원불교 중앙본부와 합정동 천주교 절두산교회는 종교단체에서 매립했다. 매립 사업권을 따내는 과정에서 압력도 있었고, 정치자금 개입설도 나돌았지만 국가 기간사업 추진을 위한 자금 조달이란 명분이 있었다.

매립지들 가운데 아파트 문화를 선도한 동부이촌동은 67년 설립된 한국수자원개발공사의 1호 사업이었다. 소양강댐 건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68년 착공해 69년 6월 준공된 약 12만2천평의 매립지 중 도로.제방부지를 제외한 약 9만평이 수자원공사에게 돌아갔다. 이 곳에는 공무원아파트단지(69년), 한강맨션아파트단지(70년), 외인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그 뒤 아파트 붐이 일면서 민간주택업자들이 뛰어들어 한강 백사장을 우리나라 최대 아파트단지로 탈바꿈시켰다.

지금의 동작대교 남단 지하철 4호선 동작역의 동쪽 일대도 원래 한강 백사장이었다. 36년 발간된 '대경성전도'를 보면 이 지역은 동부이촌동 백사장과 연결돼 큰 반원형의 백사장을 이루고 있다. 삼부.현대.대림건설이 70년 1월 7일 이 지역 18만9천여평의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서울시에 신청했다. 건설부는 그해 2월 19일 서울시에서 올린 매립면허 신청을 허가했다. 3개 회사는 매립면허를 받은 즉시 공동으로 매립공사를 전담하는 경인개발㈜를 설립했다. 70년 7월 착공한 매립공사는 꼭 2년 두에 준공됐다. 이들 회사는 총 매립면적 18만9천여평 중 공공용지 2만9천평을 제외한 16만여평을 갖게 됐다. 대한주택공사가 73년 이 곳을 사들여 5,6층짜리 아파트 99개동 3천6백50가구를 지어 일반에 분양했다. 현재 구반포 아파트단지다.

뚝섬에서 광나루까지도 원래 제방이 없었다. 68년 수자원공사가 이곳에 제방을 쌓고 매립하겠다고 신청했으나 공사에 쓸 흙이 없어 방치하다가 73년 매립면허를 반납했다. 그러나 한강 개발사업의 하나로 광나루까지 강변도로를 건설키로 한 서울시는 이 지역을 매립해야만 했다. 시는 우선 강바닥의 모래.자갈을 긁어모아 제방도로를 완공했다. 하지만 구의지구 택지 조성에 필요한 흙이 부족하자 시는 쓰레기로 매립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시내 모든 쓰레기가 이 곳에 모아졌다. 지하철 1호선 건설 공사에서 나온 흙으로 쓰레기를 덮었다. 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을 때 택지 조성사업도 거의 마무리됐다. 시가 제방을 쌓고, 택지도 조성했기 때문에 구의지구 택지는 모두 시유지가 됐다. 그러나 쓰레기로 매립했기 때문에 당장 건축을 할 수 없었다. 기반이 다져질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18> 한강변 현대아파트
압구정(鴨鷗亭)이란 동네 이름이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의 정자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꽤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름은 중국에 간 한명회가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에게 정자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해 받아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내가 서울시에 근무하던 1970년대 초에도 이 정자터가 잡목 우거진 작은 언덕 위에 남아 있었다.

현대건설이 압구정지구의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추진한다는 소문은 65년부터 났으나 실제로 매립 면허를 신청한 때는 68년 하반기였다. 매립공사는 72년 말 끝났다. 현대건설은 당초 '건설공사용 각종 콘크리트 제품 공장 건립을 위한 대지 조성 및 강변도로 개설에 일익을 담당' 목적으로 매립 면허를 신청했으나 실시계획 인가 과정에서 택지로 바뀌었다.

현대건설은 75~77년 압구정지구에 아파트 23개동 1천5백여가구를 지었다. 대형 평형에다 시설이 호화로와 시중의 화제가 된 이 아파트 단지는 그 후 모두 76개동 5천9백여가구의 대단지로 커졌다.

현대건설은 80년대 구의지구에도 아파트 단지를 조성해 한강변 고급아파트 건설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시유지였던 구의택지지구가 현대건설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정부의 단견을 보여주는 뒷얘기가 있다.

일제는 경희궁터인 서울시 신문로 2가 약 3만평에 일본인 자녀들을 위해 경성중을 세웠다. 광복 후 이 학교는 서울중.고로 바뀌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70년대 도심 중.고교들이 잇달아 강남으로 옮겨갔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서울고도 서초구로 이전키로 했다. 서울고 부지는 1백억원이 넘는 땅값 때문에 매수자가 없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현대건설에 이 땅을 사라고 권유했다. 현대건설은 "매입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 정부가 권유하니까 인수하겠다"며 1백10억4천6백만원에 땅을 샀다.

서울고는 80년 신학기에 서초구의 새 교사로 옮겨갔다. 옛 교사 자리는 현대그룹 사원 연수원으로 활용됐다. 현대그룹은 이 곳에 28층짜리 건물을 지어 그룹 사옥 겸 외국 바이어 전용호텔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대규모 현대사옥이 들어선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우선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경희궁 복원을 주장하며 반발했다. 시민 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궁지에 몰린 서울시는 85년 서울고 자리를 공원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건설에 땅을 되팔라고 부탁하는 처지가 됐다.

이때 현대건설은 구의지구 택지와 맞바꾸자고 제의, 뜻을 이뤘다. 결국 시는 1백10억원에 판 땅을 7년 뒤에 약 5백억원을 주고 되산 꼴이 됐다.

구의지구를 받은 현대건설은 지하철역 옆 5만평에 아파트를 지어 분양했다.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아차산이 솟아 있어 전망이 뛰어난 이 곳의 아파트는 불티나게 팔렸다.
<19> 청계천 복개
최근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복개도로도 뜯겨지고 있다.

1958년 9월 착공된 청계천 복개공사는 61년 12월 광교에서 오간수교(동대문) 간 1단계가 완공됐다. 이후 반세기 동안 서울 시민은 땅 속 청계천만 알고 있다.

청계천은 인왕산.북악산 남쪽 기슭과 남산 북쪽 기슭에서 각각 발원한 두 물줄기가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그러나 고려 말까지는 장마나 홍수 때 외에는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 이름뿐인 하천이었다. 조선 태종은 재위 11년(1411년) 말 개천(開川)도감을 설치, 5만명의 군졸을 동원해 개천 굴착공사를 벌였다. 인공하수도 조성 공사였던 셈이다. 세종 .영조 등도 보수.준설작업에 힘을 쏟았다. 개천의 용도가 인공하수도였으니 물이 깨끗할 수가 없었다.

조선 5백년 동안 많은 빈민이 개천변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오물을 버렸다. 시체까지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는 70만명이 넘는 일본인을 조선에 이주시켰다. 서울에 정착한 17만명(42년 기준)의 일본인 중 대다수가 개천 남쪽 지역에 살았다.

일제는 일본인 밀집 거주지인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수시로 개천을 준설하면서 보통명사 개천에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풍계천(淸風溪川)의 줄임말이라는 것이다. 그 뒤 물이 맑아져 아낙네들이 개천에서 빨래를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등으로 준설이 어려워지자 청계천의 수질은 다시 나빠졌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군수물자 수송도로 건설에 열을 올렸다. 서울에서는 청계천을 복개해 도로를 넓히는 계획을 세우고 42년 광화문우체국 앞~광통교 구간을 복개했다.

광복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청계천은 썩은 하천이 됐다. 하천 바닥에는 오물과 흙이 쌓이고 주변은 판자촌을 이뤘다. 동대문에서 동쪽으로만 들어서던 판잣집이 청계천 3,4가까지 다닥다닥 늘어났다. 주민의 배설물이 하천 바닥에 그대로 흘러들어 악취를 풍겼다.

자유당 정권 말기 허정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복개하기로 했다. 시 재정 부족으로 58년부터 매년 조금씩 공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5.16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공사를 서둘러 61년 1단계 청계천 복개 준공식을 열었다. 이어 청계천 복개공사는 오간수교에서 동쪽으로 진행되다가 70년대 초 마장동에서 마무리 됐다. 청계천 지류인 중학천.청운천.오장천.성북천 등도 모두 복개됐다.

더러운 물이 안 보이고 악취가 사라진 복개된 청계천에 영향을 받아 부산.대구.광주 등 지방도시의 개천도 거의 대부분 복개돼 도로나 주차장으로 쓰였다. 경주와 남원은 읍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垓字)마저 복개해 버린 기막히는 일도 벌어졌다.
<20> 청계 고가도로
청계천이 복개되자 도로의 너비가 50m로 넓어졌다. 196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였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부임 이듬해인 67년 봄 문득 "미아리고개~청계천~신촌.홍제를 잇는 유료 고가도로를 건설하면 서울시내 차량 소통이 훨씬 원활해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金시장은 건축가 김수근씨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설계 스케치를 부탁했다. 때마침 일본 도쿄(東京)에 64년 올림픽을 대비한 고가도로가 건설돼 편리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한 김씨는 도쿄 고가도로 설계 등을 참고해 만든 고가도로 조감도를 金시장에게 보였다. 金시장은 67년 8월 8일 '유료 고가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청계천을 거쳐 동북쪽으로는 미아리, 서쪽으로는 서대문~홍제동, 서대문~신촌, 서대문~의주로~삼각지를 연결하는 유료 고가도로를 69년까지 완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계획을 보고 '엉뚱하지만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67년 말 현재 서울시에 등록된 차량은 2만5천6백80대였으며, 이 중 자가용은 4천75대에 그쳐 굳이 고가도로를 건설하지 않아도 차량 소통에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이 발표되자 전문가들과 언론이 반대하고 나섰다. 주로 외곽지역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드는 고가도로를 도심에 건설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지하철 건설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유료 고가도로 건설 계획은 크게 후퇴했다. 무교동~신문로~서대문로터리를 거쳐 신촌과 홍제동에 이르는 당초 계획과 달리 신촌은 커녕 서대문로터리까지도 못 가고 광교에서 공사가 끝났다.


이같이 계획이 크게 축소됐지만 金시장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광교에서 청계천을 거쳐 용두동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로 청계고가도로를 이용해 워커힐을 뻔질나게 찾았다.


청계고가도로 건설공사는 70년 양택식 시장이 부임 후에도 계속됐다. 1호터널이 뚫린 남산과 연결되고, 청계천 7가에서 마장교까지 연장됐다. 朴대통령의 워커힐 나들이가 훨씬 편리해졌다.


청계고가도로가 지난 7월 철거 직전의 모습을 갖춘 때는 71년 8월 15일이었다. 본선 길이 5.86km에 25개 램프의 길이가 2.58km에 달했다. 청계고가도로는 교각이 세워질 때부터 투박한 인상을 줬다. 이는 '적은 비용으로 많은 양을 짓는다'는 金시장의 건설철학에 따라 비싼 수입 철근.철판은 적게 쓰는 대신 값싼 시멘트를 많이 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개통 후 이용 차량의 급증으로 뻔질나게 벌어진 '땜질식 보수'도 한몫했다.


복개도로를 들어내고 복원한 인공 청계천에 잠자리나 개똥벌레가 찾아올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청계천의 너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쪽 10m씩 도로를 내고 나면 청계천의 너비는 30m를 못 넘는다. 청계천 양쪽으로 재개발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탁 틔인 시원한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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