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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7)


【효자】 신라
손순(孫順) 흥덕왕 때 사람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린아이가 있어서 매양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데,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찾을 수 없다.” 하고는, 아이를 등에 지고 취산(醉山)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 하는데, 홀연 매우 기이하게 생긴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아내가 말하기를, “이 보물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아이의 복일 것이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손순도 그렇게 여기고, 곧 아이와 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집 들보에 달아 놓고 치니, 소리가 왕궁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알아 보니,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으려 하매, 하늘이 황금 가마솥을 내려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전후의 일이 서로 부합된다.” 하고, 마침내 집 한 채와 쌀 50석을 하사하였다.

지은(知恩) 한기부(韓岐部)의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여 나이 32세가 되어서도 시집가지 않았다. 어머니 봉양할 재산이 없어서 남의 고용살이와 구걸로 봉양하였다. 날이 갈수록 궁핍해져서 부잣집에 몸을 팔아 쌀 10석을 받고는, 온종일 힘든 일을 하고 저물면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 봉양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날의 음식은 비록 소찬이지만 달더니, 지금은 비록 좋은 음식이나 가슴이 찌르듯이 아프니, 무슨 까닭이냐?” 하였다. 딸이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를 남의 종이 되게 하느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 하고 통곡하니 딸도 울었다. 화랑도 효종랑(孝宗郞)이 나갔다가, 그 광경을 보고 돌아가 부모에게 청하여 쌀 백 석과 의복 등을 실어보냈다. 그리고 몇 천 명이나 되는 화랑도들이 다투어 곡식을 내주었다.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 또한 벼 5백 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였으며,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곡식을 지키게 하고, 그 마을에 방(牓)을 붙여 효양리(孝養里)라 하였다. 이어 당 나라 황제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당 나라 황실에 아름다움을 돌렸다.

본조
허조원(許調元)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 정문(程文)이 미친 병에 걸렸는데, 조원이 스스로 자기 손가락을 찍어서 피를 내어 약에 타서 마시게 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남득온(南(得溫)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 하였다. 태종조에 정문을 세웠다.
김윤손(金允孫)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자, 윤손이 범을 쫓아가서 왼손으로는 범의 턱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서 쳐 죽이니, 아버지가 살게 되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신증』
박희남(朴希楠)ㆍ희장(希樟)ㆍ희정(希楨)
삼형제가 모두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하였으며, 상복을 벗은 뒤에도 여전히 흰 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곡하며 전(奠)을 올리기를 또 3년을 하고서야 그쳤다.
최영린(崔永嶙)
아버지 섬기기를 지극한 효로 하더니,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을 시묘살이하면서 소금이나 장도 먹지 않았고,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도 삭망제(朔望祭)를 그치지 않았다.

【열녀】 신라
설씨(薛氏) 율리(栗里)의 민간 여자이다. 아버지가 늙었는데도 북적(北狄)의 침략에 대비하는 군사로 소집되자 딸이 자신이 대신 가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이에 소년 가실(嘉實)이 대신 가기를 원하였다. 설씨가 들어가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하니, 아버지가 가실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그대가 나대신 가려 한다니, 내 딸을 그대에게 시집보내겠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혼인할 기일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기를, “첩이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혼례를 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거울을 반쪽씩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았다. 가실은 말 한 필을 남겨 두고 드디어 떠났다. 6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한을 정했으니 이제 다른 집으로 시집가는 것이 어떠냐?” 하였다. 설씨가 말하기를, “전날 아버지 때문에 가실과 약혼하였는데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정리(情理)라 하겠습니까? 그것만은 끝까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늙었으므로 같은 동네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도, 설씨는 완강히 거부하고 외양간에 가서 말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가실이 돌아왔는데, 몸이 마르고 의복이 남루하여 설씨가 알아볼 수 없었다. 가실이 깨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가 그것을 보고 소리내어 울었다. 드디어 날을 가려서 혼례를 치렀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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