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사키 소오지 지음 / 최혜주 옮김 2001/12/25
다카사키 소오지 지음 / 최혜주 옮김

① 1948년경 스즈키 망언

일본의 조선통치가 구미 강국의 식민지 통치보다 심하게 조선인을 노예적으로 착취하고 그 행복을 유린했다는 논고에 대해서는 정당한 항변의 여지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뜻대로 안된 많은 실패도 있지만, 일본의 조선통치는 이상으로서 이른바 식민지 지배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중략)
제 1 차 세계대전 전야, 20세기 초두의 세계정세 및 세계사조와 그 때까지의 조선의 상태를 돌아볼 때,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이 책망을 들어야 할 탐욕스런 팽창정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
조선 경제가 그토록 비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중략)
재정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 보면 플러스이다.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 재외재산조사회 편,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 제11책, 대장성, 발행년월일 불명, 2,4,25,57쪽) ※ 1947년 대장성 내에 설치된 재외재산조사회는 1950년에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라는 이름의 전 35책(총목록을 합치면 36책)의 책을 비밀리에 출판했다. 이것은 조선, 대만, 가라후토(사할린)등에서 일본인이 형성했고 패전과 함께 연합국에 의해 접수된 재산의 실태를 밝힌 것이었다. 일본은 이것을 근거로 이들 지역에서 배상을 요구해 올 경우, 그것을 거부하거나 삭감했던 것이다.
조선편은 전 10책으로, 전쟁 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대륙병참기지론'이나 '북선(北鮮)루트론'을 제창한, 조선론의 권위자 스즈키 다케오(전쟁 후에는 도쿄대학 교수)가 편집했다. 그 중에서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은 조선편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출판되어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망언으로서 문제가 된 적은 없지만, 일본 보수파의 조선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② 1949년 외무성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

(1)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시정(施政)은 결코 이른바 식민지에 대한 착취정치라고 인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중략) 각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과 근대화는 오로지 일본측의 공헌에 의한다.(중략)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는 '반출'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중략)
(2) 다음으로 이들 지역에서 긴 세월에 걸쳐 평화적인 생업을 영위하고 있던 일본국민은 전부 추방당했고, 일본 자산은 공유재산뿐 아니라 그들의 노력으로 평화리에 축적된 사유재산까지 이미 사실상 박탈당했으며, (중략) 이같은 가혹한 조치는 정말로 국제관례상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3) (중략) 이들 지역은 모두 당시로는 국제법이나 국제관례상 보통이라고 인정받고 있던 방식으로 취득되고, 세계각국도 오랫동안 일본령으로 승인하고 있던 것으로, 일본으로서는 이들 지역을 포기하는 데 이의는 없지만, 과거의 이들 지역의 취득 및 보유를 가지고 국제적 범죄로 보고, 징벌적 의도를 배경으로 이들 지역의 분리와 관련된 제반 문제 해결의 지도원칙으로 삼으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일이다.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마이크로필름, "대일 평화조약관계준비 연구관계" 제5권, 740-742) ※ 이것은 불과 5쪽의 팜플렛을 발췌한 것이다. "문서가 작성된 쇼와24년 당시는 대일 강화에 관하여 각국으로부터 배상문제 등 여러 가지 요구가 나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미국측에 참고자료로서 제출한" 것이다. <<아사히신문>> 1982년 9월 20일자)
자료를 조선에 맞춰 읽어보면, 일본은 조선에서 좋은 일도 했고, 한국병합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셈이 된다. 이것도 1982년 9월 20일까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망언으로 문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러나 정부관계자의 조선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는 앞의 자료와 같다.

③ 1953년 구보다 망언

구보다 간이치로 : 일본측으로서는 대한청구권이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보하여 접근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갖고 있다. 당신들에게는 청구권이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은 곤란하다.

홍 진기 :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일본이 말하고 있는 청구권과 한국이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법률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한국이 말하는 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따르는 청산문제이다.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이다. 성질이 다른 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측이 그러한 말을 한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일본측의 청구권도 법률문제이다.

홍 : 한국의 국회에서는 수원의 학살사건, 한일합병조약 직후의 학살사건, 또는 36년간의 통치동안 치안유지법으로 투옥, 사망한 점 등에 대한 청구권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또 조선쌀을 세계시장보다 부당하게 싼 값으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가격의 반환을 요구하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본이 이런 청구권을 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순법률적인 청구권만을 내고, 정치적 색채가 있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이 36년간의 축적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한국측으로서도 36년간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는 수 밖에 없다.

구보다 : 한국측에서 국회의 의견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청구권을 낸다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이 당시 많은 해는 2천만엔도 내놓았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한국측의 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측 각 위원들 흥분한 표정으로 각자 발언한다.)

홍 : 당신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말하는 것인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보다 : 좋아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견으로서 말하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장 경근 : 천만엔이나 2천만엔의 보조는 한국인을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돈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만들지 않았는가.

유 태하 : 구보다씨, 그런 말을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일본측에서 옛날 일은 흘려보내고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말으 한다면 다르지만.

구보다 : 서로 장래의 일을 생각해서 하고 싶다. 법률적인 청구권 문제로 말을 진행하고 싶다.

홍 : 법률적이라고 해도, 당시 일본인의 재산이 한국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축적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구보다 : 자세한 것을 말하려면 한이 없다. 다만 36년간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기구하에서 평등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시대를 생각하기 바란다.

홍 : 무엇 때문에 카이로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구보다 : 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중의 흥분한 심리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나는 노예라고 생각지 않는다.

장 : 일본이 재산을 불린 것은 투자나 운영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본인이 토지를 산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총독부의 정책으로 산 것이지 기회균등은 아니었다.

구보다 : 일본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선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홍 : 구보다씨는 서로 도와주는 정신이라든가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우리는 양보할 여지가 없다.

('외무성의 회의의사록에 남겨진 구보다와 한국측 대표간의 응수', <<아사히신문>> 1953년 10월 22일자)

※ 10월 15일에 열린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분과위원회 제2회 회합에서,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는 위와같이 발언해 한국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내용이 <앞의 1,2번>과 비슷한 것은 구보다가 그 자료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보다 발언에 대해 오카자키(岡崎勝男)외무장관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말했을 뿐이다."라고 옹호했다. 한편 변영태 외무장관은 "한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은 그들 일본인이 한국에 대한 침략근성을 아직까지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는 등, 제3차 한일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제4차 한일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1957년 일본측은 구보다 발언을 '철회'했지만, '잘못'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때 도중에서 오프 더 레코드가 되었는데도 외무성이 회의록이 <<아시히신문>>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문제삼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④ 1963년 이케다 망언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제 43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5호, 16쪽)

※ 제6차 한일회담의 예비절충이 이루어지고 있던 1월 26일, 공산당의 노사카(野坂參三)가 "조선인민에 대한 이러한 비도덕적인 여러 가지[식민지화나 노예노동의 강요]에 대해서 총리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어떤지, 이 단상에서 분명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이케다(池田勇人) 수상의 답변이다.

⑤ 1963년 시이나 발언

[숙부 고토 신페이(後소新平)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도 있다. 세계의 조류가 그러했고,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서구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 이외에는 없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이것은 일개 역사학도로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역시 일본의 지향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의 운명공동체이며, 그 해방, 독립, 그리고 공존공영이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 신페이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동화와 정치", 동양정치경제연구소, 1963, 58~59쪽)

※ 이 망언으로부터 2년 뒤에 외무장관이 된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도착성명에서 "양국간의 오랜 역사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음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 깊이 반성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는 그것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 자도 있었지만, 의문을 갖는 자도 적지 않았다. <<한국일보>> 2월 18일자는 시이나의 도착성명과 그 저작인 "동화와 정치"를 다루면서, "유감과 반성"이 어떻게 "영광"과 일치하는 것일까. 시이나 자신은 생각한 끝에 말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말만으로 한국국민이 [시이나가] 진정으로 반성했다고 생각할지 어떨지 의문이다."라고 썼다. 사실 시이나는 결코 본심에서 '깊이 반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눈앞에 둔 '한국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기(당시 서울에 파견되어 있던 외무성 조사관 마에다의 말)위해 '깊은 반성'을 해 보인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⑥ 1965년 다카쓰기 망언

36년간은 착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중략)
"일본은 조선에 대해 36년간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 교섭은 쌍방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감정으로서도 사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20년쯤 더 일본과 붙어 있었다면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패전으로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만의 경우는 성공한 예이지만...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말하면 상대편도 할 말은 있겠지만, 우리쪽에는 할 말이 더 많다. 그러므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일본은 친척이 된 기분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 좋다.

(<<아카하타>> 1965년 1월 21일자)

※ 1월 7일,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인 다카쓰기 신이치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다카쓰기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외무성 간부의 충고를 받고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로 해 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했지만, <<아카하타>>가 폭로함으로써 큰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다카쓰기는 한일회담이 중단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그것은 공산계의 작위적 보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이코노미스트>> 2월 9일호)라고 줄곧 발뺌했다. <<아카하타>>의 보도가 사실이었다는 것은 한국측 수석대표였던 김동조의 "한일의 화해-한일교섭 14년의 기록"(사이마루 출판회, 1993년)에서도 분명하다. 그런데 다카쓰기에게 발뺌하도록 권고한 것은 다름아닌 김동조였다.

⑦1965년 사토 망언

1)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사로 이 조약[한국합병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50회 국회 중의원 한일특별위원회의록, 제10호, 2쪽)
2) 이것이 여러가지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조약인 한 이것은 양자의 완전한 의사,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음은 굳이 제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50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8호, 18쪽)

※ 1)은 11월 5일 사회당의 이시바시 마사시(石較政강)의 "병합에 관한 조약, 이것은 대등한 입장에서 자주적으로 체결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신지 어떤지"라는 질문에 대한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답변이다.
이것에 이어 11월 19일의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공명당의 구로야나기가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라고 질문했지만, 답변은 2)와 같은 것이었다.
사토 수상의 견해는 구 뒤로도 유지되어, "병합조약은 합의에 따라 체결되었다."라는 망언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수상의 견해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때이다.

⑧ 1974년 다나카 망언

과거 일본과 조선반도의 합방시대가 길었습니다만, 그 후 한국이나 그밖의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면 긴 합방의 역사에서 지금도 민족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김양식을 가지고 와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일본의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는 지금까지도 지켜가는 훌륭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정말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세안 5개국 순방에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1월 24일에 열린 중의원 본회의에서 공명당의 다케이라가 일본에 대한 경제협력 방식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것에 대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의 답변이다.
일본이 김양식을 가르쳤다,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한국은 정식으로 항의하고 일본정부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더구나 한양대학 교수였던 리영희씨는 '다나카 망언을 생각한다'(<<세대>> 5월호, 일본어 역은 <<세계>> 9월호)라는 글을 발표해, 다나카 망언을 비판하면서도 "같은 정도의 잘못이 한국인 자신에게도 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것을 열등한 것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들이 식민지 통치시대에 우리에게 실시한 교육을 자랑하고, 그것이 한국인에게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방된 순간부터 독립민족으로서 스스로를 되찾는 과정에서 꼭 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의 존립 이유를 부정한 식민지 교육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는 해가 될지언정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실증해 보이는 데 있었을 것이다. 부정을 부정함으로써만 노예에서 주인으로 된 자아를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했는가?(중략) 노예가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작업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젖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일이 틀림없는 현실인 이상,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한국인 내지 한국에 유익했다는 다나카의 말을 어떻게 해서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말을 앞에 두고, 일본인이 "한국인에게도 잘못이 있다"라는 투로 말한다면, 그것은 골계(滑稽)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⑨ 1979년 사쿠라다 망언

1)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중략) 36년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데 있다. (중략) 당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고 있다.

(<<동아일보>> 1979년 3월 23일자)

2) 깊이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혁명정부의 경제발전은 일본 교육의 결과이다. (중략) 일본은 한국인의 문맹퇴치에 기여한 바 크다. (중략) 소학교 1학년 때, 한일합방 축하행렬에 붙어서 일장기를 흔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편집부, '사쿠라다 망언' - 일본 정재계의 대한인식을 묻는다.' <<세계>> 1979년 6월호, 286쪽)

※ 1979년 3월 21일, 경단련 회장인 사쿠라다는 한국경영자협회 주최의 국제세미나에서 위와같이 발언했다. 그리하여 동국대학교 최성실 교수 등이 "일본은 과거 한국인에게 경제 과학 기술 등 중요한 분야의 교육기회를 봉쇄하고, 우수한 인재를 매장시켜 발전을 저해했다."라고 반박하자, 사쿠라다는 "잘 모르는 것을 말한 것 같다."(<<동아일보>> 23일자)라고 사죄했다.
3월 27일자 <<동아일보>>가 사쿠라다 망언은 구보다 망언이나 다카쓰기 망언보다 "대한 경시의 정도가 더 심하다"라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역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의 잡지 <<세계>> 6월호도 사카라다 망언을 비판하며, 일본 정재계 인사들의 대한(對韓) 의식을 문제삼고 있다.

⑩ 1982년 마쯔노 망언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일병합도 한국에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의 당시 국내정세등도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일본으로서도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사히신문>> 1982년 7월 24일자)

※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한국이나 북한, 중국 등이 한창 비판하고 있을 때인 7월 23일, 마쯔노(松野幸泰) 국토청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발언해, 불에 기름을 끼얹는 양상이 되었다.
<<동아일보>> 8월 9일자에 따르면, 마쯔노는 "이토 히로부미를 원흉이라고 부르고, 그 살인범인 안중근을 영웅으로 취급하고 있다"라거나, "한일병합은 정당하다"(7월 27일)라는 망언도 일삼고 있다.

⑪ 1986년 7월 후지오 망언 (제1차)

그것은 전 내각에서 끝난 것이므로 더이상의 일은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불평을 늘어놓는 자는 세계사에서 그같은 일을 한 적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쪽이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도 인정해야지.

(<<아사히신문>> 1986년 7월 27일자)

※ 7월 25일의 기자회견에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편집한 고교 일본사 교과서 '신편 일본사'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후지오 마사유키(?尾正行) 문부장관은 위와 같이 대답했다. 한국측의 항의에 대해 주한 일본공사는 나카소네 수상도 "본건 발언이 외국에 오해와 불쾌감을 주었다면 매우 유감이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했고, 31일에는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8월 22일에 열린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그 망언으로 문제가 된 후지오는, "문부대신으로서 말투가 부적당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나의 부덕이다. 사과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가 개인으로서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답변했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일본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망언의 전형이다.

⑫ 1986년 10월 후지오 망언 (제2차)

가령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침략을 받은 측에도 여러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청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influence)이라는 것은 왠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 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뿌리를 자르려고 하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방언대신(放言大臣) 크게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

※ 9월 6일자 각 언론은 후지오 문부장관이 동월 10일에 발매되는 <<문예춘추>> 10월호에 이상과 같이 발언했다고 소개했다. 조선인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투의 망언의 전형이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 간의 담판과 합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초보적인 오류로, 1910년에 체결된 한국병합조약은 한국통감 데라우찌와 한국 수상 이완용 사이에 체결된 것이었다. 이토와 고종 사이의 담판으로 체결된 것은 1905년의 한국보호조약이다.
더구나 "합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선사가인 가지무라가 '역사를 굽혀서는 안된다-일한합방의 진상'(<<아사히신문>> 9월10일자 석간)에서 비판하고 있다. 또 "이것을 방치해 두었더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러시아사가인 와다 하루키가 '한국정세와 우리들'(<<세계>> 1987년 3월호)에서 비판했다. 후지오 망언에 대한 일본국민의 비판의 목소리도 각 신문의 투서란을 메웠다.
9월 6일 재일 한국공사는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라면서 사실상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8일에는 한국 외무장관이 "매우 유감"이라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편 일본의 각 신문도 7일자 사설에서, '후지오 발언은 그냥 보아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의 자질이 문제시되는 후지오 발언'(<<요미우리신문>>), '외교센스가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니혼게이자이신문>>)라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후지오의 자진 사퇴를 기대하는 눈치가 많았지만, 후지오는 그것을 거부하다가 8일에 파면되었다. 각료의 파면은 33년만의 일이었다.

9일자 <<산케이신문>>은 '주장'에서, "뒤늦게 근대화한 일본은 '침략'전쟁의 책임에 대해 미국 및 영국을 비난할 만한 '서푼어치의 이유'는 적어도 있다. 그러나 한국 등 아시아에 대해서는 일리(一厘)도 없다. 후지오 발언에 대해서는 그 분별을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면서, "후지오 발언의 기조는 나카소네 수상의 지론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후지오씨의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문부장관으로 등용한 수상의 정치책임도 동시에 불문에 부칠 수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3일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가와마다가 "조약법에 관한 빈조약에는, 협박이나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는데, 한일병합조약은 본래부터 무효였던 것이 아닌가. 수상은 그 점을 인식해서 후지오 씨를 파면했는가?"라고 질문한 데 대해, 나카소네 수상은 "국교회복 당시, 한국과 일본이 협의하여 병합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사실이 양쪽이 확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당시 상당히 위압적인 배경을 가지고 체결했다고 해석하고 있고, 후지오 발언은 온당함을 상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라고 답변하고 있다.(<<아사히신문>>) 10월 4일자)
더욱이 파면에 대해서는 자민당 강경파의 젊은 중견들이 만든 국가기본문제동지회(좌장 가메이 의원)가 "한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했다"라고 반발했다.

⑬ 1986년 11월 후지오 망언 (제3차)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중략)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大勳)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방언대신' 다시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1월호)

※ 문부장관에서 파면당한 후지오 마사유키는, 자신의 불만과 신념을 다시 <<문예춘추>> 지상에 털어놓았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라는 식의 망언이 총동원되었다. 더구나 이 잡지는 '후지오 발언의 파문'이라는 특집에서 후지오의 지론을 옹호했다. 10월 10일 발매된 이 잡지의 내용은 10월 5일 각 신문에 소개되었다. 그러자 아이치대학의 우부가타 교수 등의 호소로 10월 23일에 시민집회 '후지오 발언 문제를 생각한다 - 한일병합조약을 다시 묻는다'가 열렸다.
또 "책임의 일부는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망언에 대해, 지식인 102명은 그 날 낸 "국민과 국회에 호소하는 '후지오 발언 문제에 대해서'"라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한국 조선인이 식민지화된 자신들의 허약함을 반성하는 것과,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한 일본의 행위가 비판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은 침략자와 침략당한 자, 범한 자와 당한 자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는 것과 같아, 죽인 자, 범한 자를 면죄하려는 의논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지오는 각지에서 강연을 하며, "(일본은) 한국에도 산업을 일으키는 등 선의로 통치했다."라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⑭ 1990년 오자와 망언

(천황폐하의 '말씀'내용은) 발을 들여놓고 들여놓지 않고의 문제가 아닌 만큼, 우리가 의논할 것은 아니다. 천황폐하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과거 식민지 지배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면 등에서) 노력하고 있다. 이 이상 땅에 엎드려 조아릴 필요가 있는가. 상식선도 있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눈을 돌려야 한다.
천황이 정치에 연루되어서는 안된다. 천황의 이름을 빌려 권위로서 사용한 것이 과거 역사의 잘못이다. 그것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아사히신문>> 1990년 5월 16일자 석간)

※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천황의 '말씀'이 문제가 되었을 때(14일)의 망언이다. 이것은 당초 자민당의 수뇌의 발언으로 소개되었는데, 16일 오자와 이치로 자민당 간사장은 자신의 발언임을 인정하면서, 이 발언에 대해 한국측이 강하게 반발해 양국관계가 험악해진데 대해 진사(陳謝)했다.
그러나 6월 1일자 <<주간 아사히>>에서는 "기본적인 것은 천황을 정치의 무대로 내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땅에 엎드려 조아릴 필요가 없다'는 등의 말은 애초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략) 예를 들어 (천황을 정치의 무대로 끌어내려고 한다면) 머리를 숙이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니 더 숙여라, 또는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머리를 숙여라든지, 손을 짚고 사죄하다가 나중에는 땅에 엎드려 조아려야 하는 사태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이 양국민의 감정적 대립을 초래할 뿐, 한일우호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밝혔다.

⑮ 1995년 와타나베 망언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중략)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략)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으로 되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후처리를) 전부 다시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각오가 없는데 다시 꺼내면 곤란하다.

(<<마이니치신문>> 1995년 6월 4일자)

※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무장관이 6월 3일에 열린 자민당 토치기현 연합회의 대회인사나 그 후의 기자회견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동아일보>> 6월 6일자에 따르면,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부흥을 위해 협력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합방은) 국제적으로도 합법적이라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식민지배'라고 하지만, 법률적으로는 국회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6일자 사설에서 '망언'이라 비판하고, <<아사히신문>>도 6일자 사설 '역사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정치가'에서 "우리도 놀라 기가막혔다."라고 썼다.
한국의 이홍구 총리는 "정부와 국민 모두가 충격과 우려를 금할 수 없고, 일본측도 이러한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을 그만두고 깊은 반성의 계기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와타나베는 5일, '원만히'라는 부분을 취소하고 사과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 5일에 열린 참의원 본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시오카는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조약국회(<7번>)에서 소개한 사토답변)이래, 조선병합조약을 한일이 자유의사,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라는 입장과 인식을 거듭 표명해 왔습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민당 정부 하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어 온 이 입장과 인식을 단호히 전환해, 조선병합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 지배 하에 둔 것을 인정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다.
그에 대해 무라야마 수상이 "한국병합조약은 당시 국제관계 등의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제134회 국회 참의원 회의록) 제4호, 19쪽)라고 대답하여, 한국 및 북한 등으로부터 크게 비판받았다. 한국 외무장관은 사토 답변의 재검토와 한국병합조약의 무효확인을 요구했다.
10월 13일 무라야마 수상은 국내외의 비판에 대해 생각한 점이 있었던지, 다음과 같이 1965년의 사토 답변을 정정하고 정부견해를 일부 수정했다.
"당시의 일이므로 위협과 강박(협박의 잘못)이 있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서 있었다 없었다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시 상황을 생각할 때, 결코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134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의록, 제4호, 15쪽)
그리고 1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병합조약은 "민족의 자결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의 조약이다."라고 쓰고 있다. 30년만의 일보 진전이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유효'라는 입장은 변경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국 국회는 16일 본회의에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늑약(勒約)에 대한 일본의 정확한 역사인식을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일본은 한국과 북한으로부터 병합조약 당초부터의 무효 확인을 줄곧 재촉받고 있다.

16. 1996년 에토 망언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에 도장을 찍은 수상 이완용.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이다. 일본도 나빴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했으니까,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결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1주일 후에 (조약을) 발표했다.(중략)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도 했습니다. 고등농림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정비, 산에 나무도 심었다.(중략)
그러나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창씨개명.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이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본래 이름으로 육군중장이 된 사람도 있다.(중략)
일본인이 보면 거기(조선반도)는 결코 식민지라는 의식은 없었다. 내지, 외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지의 수준으로 높이려 한 것이지요. 이 왕조의 금은보화를 일본으로 갖고 가서 장식할 생각은 없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세계 속에서 날치기 했지만, 일본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중략)
일본 경제계나 예능계에 한국인 크게 활약하고 있다. M H, M K, I H 모두 그렇다.(주: 발언은 실명) 야구선수도 L의 사장도 모두 그렇다. 아카사카, 록본기에 가보라. 한국사람들 뿐이다. 빠찡코점의 7할은 조선반도 출신이다. 일본은 그런 일은 안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모든 계층에서 한국이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일병합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간 문춘>> 1995년 11월 23일호)

※ 10월 11일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오프 더 레코드로 이상과 같이 말했다. 잡지 <<선택>>, 이어 <<동아일보>>에 보도되어 문제가 되었다. <<동아일보>> 11월 8일자에 따르면, 에토는 "한일병합은 강제적이었다는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은 틀린 것이다"라고도 말했다는 것이다. 8일에 발언을 취소하며 병합조약은 "강제적으로 조인"된 것을 인정했고, 10일에는 " '좋은 일도 했다'는 내 생각은 잘못이었다. 독선적인 생각이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으로부터 사임요구를 받았지만, 무라야마 수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야당으로부터 사임결의안이 제출되자, 국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 영수의 권고로 에토는 13일에 사임했다.
역사학자인 유영렬은 "철도는 상품과 군대를 운반하는 침략을 위한 상징이었다."라는 것. "합방이전에 이미 대학교육이 시작되었다."라는 사실을 들어 에토 망언을 비판하고 있다.(<<동아일보>> 12월 8일자)
에토는 1996년 1월 4일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앞서의 발언에 대해 "왜 반성해야만 하는가. 일본은 그렇게 창피한 나라는 아니다."라는 등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한편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 마찌다는 에토 망언에 대해 언급하고, "대국의 국민답게, 맞은 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한일 양국의 골도 조금씩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떤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마이니치신문>> 1996년 1월 24일자)

맺음말

이상에서 소개한 것처럼,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 이외의 망언도 많다. 1958년의 사와다 망언은 그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부쳐 (38도선을) 거기에 설치하는 것이 일본외교의 임무이자 한일교섭의 목적이다. 38도선이 부산까지 내려오면, 일본은 당장 캄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은 지하에 잠든 조선관계 선배들의 영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 일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부치는 문제는 내가 유엔에 있을 때, 지금 한일회담 한국측 대표인 임병직과 굳게 약속했다. 한일회담의 구체적인 의제는 사소한 것들로, 우리는 이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아카하타>> 1958년 6월 21일자)
이러한 생각은 당시 '부산적기론'이란 불렸다. 6월 11일 제4차 한일회담 수석대표 사와다는 '한일회담의 정부대표를 둘러싼 모임'에서 위와 같이 연설했다. 그러나 <<조선통신>>이 전한 것을 <<아카하타>>가 소개했을 뿐, 일반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 6월 24일에 열린 제29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이마가 사와다 망언의 속기록과 테이프에 의거해, 사와다는 "이승만이 38도선을 압록강 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데는 일본인이 무기를 들고 응원하는 대신, 한일회담에서 될 수 있는 한 양보해 이를 원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문제삼자(제3호 의사록, 8쪽), 기시 수상은 "사와다 전권이 여러 장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모두 정부의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피했다. 25일에 열린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사회당의 다나카가 사와다 대표의 파면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노의 망언도 유명하다. 1963년 12월, 방한에 앞서 "박 대통령과 나는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라고 말하고 방한중에 "한국에는 원양어업이 필요없다."고 말해, 한국의 야당이나 국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이다.(<<아사히신문>> 1963년 12월 20일자)

1995년 12월에 다시 오자와 신진당 간사장이, "나는 한국에 대해 '철저한 반일교육을 시켜놓고 무슨 장래 우호냐. 끝까지 증오를 잊지 못하게 하면, 남는 것은 미움뿐이다.'라고 항시 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서로 마주보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해(<<아사히신문>> 12월 9일자), 한국 외무부 대변인으로부터 "한국 교육이 정치적 의도에 따른 반일교육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비판받았다.(<<아사히신문>> 12월 20일자)

그런데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된 망언이, ① "병합조약은 합의에 의해 체결되었다.", ② "조선에서 좋은 일도 했다.", ③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라는 세가지임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①은 1995년에 이르러 겨우 정부견해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러나 ②와 ③은 아직 명확히 부정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 에토 망언 등이 이어지는 토양이 있다. 그리고 새로 나온 오자와 망언은, 이들 망언을 망언으로 인식할 수 없는 정치가가 지금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망언이 망언인 이유를 분명히 하는 역사연구를 계속함으로써, 그 성과를 국민 일반의 역사인식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교육이 새롭게 요구된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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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완섭 "독도 일본에 돌려줘라" 망언
[고뉴스   2005-03-16 19:32:30]  
(고뉴스=최형우 기자) 친일인사 김완섭 명의의 "양심불량 대한민국! 독도는 일본에 돌려줘라"라는 글이 한 정치 사이트에 게재되어 메가톤급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도에 대한 시마네현 망발로 국민의 가슴이 짓무를대로 짓무른 상태에서 이 망언은 그야말로 모든 한국인의 가슴을 분노의 불길로 태울 것 같다.

이 글의 작성자로 명기된 김완섭은 "한국인 여러분,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에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중국 이렇게 세 나라밖에 없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는 다케시마를 일본 땅으로 생각하고 있고 한국이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 불법 점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며 한국인의 자긍심인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습니다. 역사를 날조해 착한 일본인들을 마치 강도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 민족의 황금기였던 일제시대를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역사에 관한 한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세뇌 당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 속아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분해서 며칠동안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을 속여온 것으로 몰아가며 착한 일본인이라는 민망한 말을 거론한다.

김씨는 한승조나 지만원의 망언을 뺨치는 더 기가 막힌 막말을 해댄다.

한승조가 식민지 지배를 '축복'이라고 한 말보다 더 파렴치한 '황금기'라는 망언을 하고 있다. 그는 한술 더 떠 진실을 알게된다면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이 망언을 올린 시각은 3월16일 오후. 김완섭은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이 같은 한국의 역사 날조와 반일세뇌교육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진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한국 정부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는 반일단체들의 잇따른 고소고발과 경검찰의 편파적인 수사, 테러 등으로 인해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라며 글을 쓴 이유가 자신의 저서를 선전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을 표출하고 있다.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라는 망언을 서슴없이 뱉는 망언은 한승조와 지만원을 휠씬 능가한다.

독도 앞에서 국민들이 대성통곡하는 이 마당에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독도를 팔아먹는 이 매국행위에 심판이 내려지기를 기대한다. (김완섭 망언 전문은 원문보기 참조)
[김완섭 망언 전문] 2005-03-16(15:21:54)

양심불량 대한민국! 독도는 일본에 돌려줘라.

한국인 여러분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에서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중국 이렇게 세 나라밖에 없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는 다케시마를 일본땅으로 생각하고 있고 한국이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 불법점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습니다.
역사를 날조해 착한 일본인들을 마치 강도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 민족의 황금기였던 일제시대를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역사에 관한한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세뇌당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 속아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분해서 며칠동안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이같은 한국의 역사날조와 반일세뇌교육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진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한국 정부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는 반일단체들의 잇따른 고소고발과 경검찰의 편파적인 수사, 테러 등으로 인해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서점들이 모두 판매금지시키고 매장에서 철수시켰기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신판매만이 거의 유일한 판매방법입니다.
이 책을 구입하고자 하시는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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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은 1권당 2만원입니다.
발송료는 무료입니다.
계좌번호: 농협 000-00-000000 김완섭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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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자민당 간사장대리가 "종군위안부는 허구"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차세대 총리감 1순위로 거론되는 우파 성향의 정치인이다.
아베 간사장대리는 지난달 27일 도쿄의 메이지진구(明治神宮) 회관에서 열린 지방의원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발언했다. 아베는 "종군위안부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지어낸 이야기다. 아사히(朝日)신문이 먼저 이를 보도해 독주했다. 일본 언론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요시다는 한반도에서 위안부 강제 연행에 관여했던 일본인이다. 1980년대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하고 참회했다.
아베는 또 후쇼샤(扶桑社)의 일제 침략 역사 왜곡 교과서와 관련, "지역 교육위원회가 조용한 분위기에서 교과서를 채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가 최우선으로 할 일"이라며 "지난번에는 그렇게 못했지만 이번엔 우리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시민단체 등의 채택 반대 운동을 막고, 이 교과서의 채택률을 높이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지방의원들의 모임인 '일본 대학습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지방의원 283명을 포함한 70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 2004년 7월 11일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도쿄의 자민당 본부에서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당원들 이름위에 붉은 장미꽃을 꽂고 있다. 오른쪽에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이 아베 신조 간사장이다.
아베 신조가 어떤 놈이냐
일본여당인 자민당 내에서 매파로, 한반도에 관한 한 늘 강경정책을 주장하며 북한에 대해서는 ‘대화’보다는 ‘압력’을, ‘평화’보다는 ‘전쟁’을 더 선호하는 극우 중의 극우 정치인이다.
작년, 전후 일본이 패전한 후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 사령부(GHQ)에 의해 제정된, 전장 터에서 무기소지는 물론 전쟁을 금지하는 평화헌법에 대해, 일본이 먼저 ‘선제공격(북한에 대해)을 할 수도 있다’라고 하는 유사법 제정을 통과시킨 선봉장이기도 하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은, 태평양전쟁 개전 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각료를 지냈다. 1945년 패전 후 비록 용케도 전범 재판에 회부되는 것은 면했지만 A급 전범으로 분류되기도 한 인물이며, 특히 식민지 시절 당시 조선인들의 강제연행, 징용, 납치를 주도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시는 1955년 총리가 된 뒤일본 패전 후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초안을 만들어 준 「평화헌법」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일본을 「군사적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처음으로 내걸고 추진하였다.

아베 신조는 1954년 기시 전총리의 장녀 요오코(洋子)와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 전외상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 아베 히로시(安陪寬)도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그는 기시의 친동생이지만 사토씨 집안에 양자로 갔다)가 그의 큰아버지이고, 사토 전 총리의 아들인 사토 신지(佐藤信二) 전 통산상은 그의 사촌이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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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한승조 교수에게 돌 던지지 말라" 
 
"박정희 일본한테 배워 위업달성했다" 주장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일제 식민지배는 축복" 기고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극우 인사 가운데 한 명인 지만원씨가 "못난 민족의 모함·모략 행위부터 반성하고 한승조 교수한테 돌을 던지지 말라'며 한 교수를 옹호하고 나섰다. 한승조 파문이 인 이후 그를 옹호한 글을 공개적으로 올린 것은 지씨가 처음이다.

지 씨는 5일 자신의 홈페이지인 시스템클럽(www.systemclub.co.kr)에 올린 '한승조 교수에 돌 던지지 말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분이 사용한 용어와 표현에 부분적인 부적절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러나 일본의 선진화된 과학기술과 지식과 절제로 훈련된 정신은 잠자던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됐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지 씨는 "1960년 자학과 자조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을 일깨운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였다"며 "이는 한국의 명치유신이었고 그가 일본군에 몸담고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기에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지씨는 또 "선진국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우리도 야수일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을 욕하는 사람들의 행도거지를 보면 그야말로 야만인에 가깝다, 못 배우면 이렇게 된다, 남을 욕하고 모함하는 민족성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먹혔다"고 주장했다.

지 씨는 "한국에서 새 대통령이 나올 때마다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는 정상적인 외교도 아니며, 이런 한국은 정상적인 국가가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의 사과 요구를 비판한 지 씨의 발언은 지난 2일 일본 우익신문인 <산케이신문> 서울지사장인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설전을 벌일 때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이다.

다음은 지 씨가 홈페이지에 올린 글 전문이다.

한승조 교수에 돌 던지지 말라!

못난 민족의 [모함-모략 행위]부터 반성하라

일본의 강점은 민족의 불행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직도 많은 국민은 일본인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우당은 과거청산 운동을 내걸고 매일같이 국민에너지를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소모시키고 있습니다. 과거의 인물들과 그 후손들을 모함-모략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한국은 경제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조시대에 태어났다면 많은 정적들을 모함-모략하여 귀양 보내고 죽였을 것입니다. .

1860년 미국에서는 '흑인의 인권'이라는 인류의 가치를 놓고 남북이 전쟁을 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인권-민주주의의 틀을 선포했습니다. 1858년, 일본은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부국강벙, 자본주의 도입, 근대화 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명치유신이었습니다. 선진자본주의 열강들은 제국주의로 이행해 가면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때 조선은 무얼 했던가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궁에서는 음흉한 정쟁에 날 새는 줄 몰랐습니다. 상대방을 모함-모략하여 동족을 살해하고, 귀양보내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선진국을 배격하고, 문호를 걸어 닫고, 자기들끼리 싸움질 하는 이 못난 조정이 조그만 궁궐에 갇혀있고, 먹고사는 데에도 벅차했던 오합지졸의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고려장을 당하던 원시 마을 조선! 이런 못난 나라가 열강에 먹히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누구에게 먹히든 먹히게 돼 있었습니다.

오늘날을 보십시오. 미국과 일본은 우리보다 잘난 선진국입니다. 방송장비의 100%는 일본의 소니사 제품입니다. 일인당 GNP가 우리의 4배입니다. 일본이 옛날에 선진열강들로부터 열심히 배워서 우리를 통치했듯이, 우리는 지금부터라고 열심히 선진국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위정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미국놈 싫다, 일본놈들은 더 싫다. 북한과 함께 우리끼리 살자"는 그야말로 못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가서 각고의 노력으로 선진문물을 배워 익힌 인재들을 적대시합니다.

그리고 한국식 명치유신으로 오늘날의 부국강병을 이룩한 영웅을 민족의 반역자라며 그의 딸까지 모함-모략하고 있습니다. 부국강병을 위해 새벽잠을 설치고 창밖을 내다보며 고뇌하던 박대통령과는 달리 지금은 대통령이란 사람이 한가하게 부인과 함께 한달씩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서 미용수술이나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못난 인생들 때문에 지금도 대한민국의 경제가 미국과 일본에 먹히고 있습니다. 이를 놓고 또 저 못난 것들은 미국과 일본이 그럴 수 있느냐며 또 욕을 합니다. 당하는 게 병신이지 자유경쟁에 의해 경제를 점령하는 미국과 일본이 왜 나쁩니까?

남을 비난하는자엔 발전이 없다. 나를 개선시켜라

남을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없습니다. 절대로! 나를 원망하고 나를 채찍 질 해야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나를 갈고 연마하면 절대로 당하지 않습니다. 100년 전의 일을 놓고 남을 욕만 하고 앉아 있으면 앞으로 1,000년 후에도 욕만 하고 있을 건가요?

“엽전이 뭘 하겠어!” 1960년의 한국인들은 자학과 자조에 빠져 훔치고 싸우고 게을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면 어린 나이에도 저주의 욕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런 암흑의 시대에 나타나 장래 없던 국민을 일깨워 준 정신적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이는 한국의 명치유신이었습니다. 그는 일본군에 몸담으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배웠기에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GE의 잭 웰치 회장은 배울 줄 모르는 간부는 기업을 떠나라고 호통 치며 쫓아버렸습니다. 잭 웰치의 말이 옳다면 일본을 지금까지도 욕하고 증오하는 사람들, 박대통령을 증오하는 사람들, 노무현을 포함한 위정자들, 열우당 모두가 대한민국의 경영진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한승조 교수님은 평소에 이런 소신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설사 그분이 사용한 용어와 표현에 부분적인 부적절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일부의 용어를 트집잡는 건 깨인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자극이 없을 때 나태해지고 망하게 됩니다. 일본의 선진화된 과학기술과 지식과 절제로 훈련된 정신은 잠자던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됐음을 인정합니다.

사람도 본디 없이 자라면 야수와 같습니다. 선진국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우리도 야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을 욕하는 사람들의 행도거지를 보면 그야말로 야만인에 가깝습니다. 못 배우면 이렇게 됩니다. 남을 욕하고 모함하는 민족성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먹혔습니다. 지금의 위정자들과 좌익들도 잘난 사람들, 부자들을 욕하고 모함합니다. 어쩌면 150여 년 전의 못난 선조들을 그리도 빼닮았습니까? 이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경제적으로 참략 당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이들입니다.

한승조 교수님의 “불행중다행”이라는 표현은 “어차피 당할 바에야 러시아에 당하는 것보다 그래도 일본에 당하는 것이 다행이었지 않느냐”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일본으로부터 당한 고통보다 6.25의 동족상잔으로부터 당한 고통이 더욱 크고 광범위하고 비참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정상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요? 민주주의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제도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표현했다 해서 인신공격을 하고 여론재판을 하는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라 원시집단입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비민주적 행동입니다. 한교수님의 글 중에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나요? 왜 한교수님이 저들과 똑같은 생각대로 글을 써야 합니까? 맞는 부분은 수용하고 틀린 부분은 취하지 않으면 됩니다. 일본인들도 한교수님의 글을 다양한 시각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한국인 전체의 시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게 있습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면 꼭 일본에 사과를 요구합니다. 일본도 한국도 똑같이 국가입니다. 한 국가가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한번만 사과하면 됐지 어째서 대통령마다 사과를 요구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과’라고 하면 무엇을 연상합니까? "못났던 조선이 잘났던 일본에게 먹혔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를 대통령마다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 과연 잘난 행동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부추기는 언론부터 못났습니다. 이는 정상적인 외교도 아니며, 이런 한국은 정상적인 국가가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2005.03.06/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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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요사이 필자가 김구 선생을 오사마빈 라덴에 비유한 것에 대해 비난이 이는 모양입니다. 김구 선생은 민족의 얼을 나름대로 지킨 어른임에는 틀림없지만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비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봅니다.
운동선수에게 각자의 장기가 있듯이, 애국자들에도 나름대로의 장기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승만의 능력이라면 미국에서 유능한 정치인들이 양성되는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고, 그로 인해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요로의 인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고 정치력과 외교력이 뛰어나, 당대에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 지도자들 누구보다도 더 우수한 자력을 가지고 있던 세계인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반면 김구선생에겐 이러한 능력이 전혀 없고, 오직 한학을 공부한 순수 토박이 애국자였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사람의 능력이 아주 잘 대변해주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이용했고, 김구선생은 젊은 사람들에게 폭탄을 주어 일본 요인들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고, 국부적일 수밖에 없는 게릴라전을 지휘했습니다.
외교와 게릴라전, 두 가지 대안 중에 어느 대안이 조선을 독립시킬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게릴라전으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애시 당초 일본에 먹히지도 않았어야 합니다. 당시의 일본은 미국 다음의 강국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이런 일본에 무력으로 대항한 것입니다.
김구선생은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백성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백성이라 해도 세계를 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분들이라면 김구선생의 애국운동이 그 정신에 비해 성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조선은 미국의 힘에 의해 해방되었을 뿐, 김구선생의 활동에 의해 해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일본 낭아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지던 당일인 1945.8.9에일, 소련은 일본과 맺었던 불가침조약을 내 팽개치고 북한으로 들어와 모든 공장시설과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남한까지 적화시키려 했습니다.
바로 이 때 미국은 오끼나와에서 최후발악으로 덤비는 일본군과 싸운 후 한 달이 지난 9월8일에야 부산에 들어왔습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김성주 대위를 내세워 꼭두각씨 정부를 사실상 건설해 놓고, 남한까지 점령할 목적으로 남한 인사들을 꼬시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에 비해 힘은 세지만 머리가 부족한 김구 선생은 김일성에 놀아나 북한을 돕고 남한 건국을 방해했습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이승만의 역량이 없었다면 남한만의 단독정부나마 설치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북한 인민에 비해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승만 박사에게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김구에 의해 우리는 김일성 치하에 편입되어 우리와 우리 부모들은 북한 주민처럼 지옥을 맛보고 있을 것입니다.
오사마빈 라덴이 쌍둥이 빌딩을 폭파시켰을 때, 한국의 좌익들은 그를 영웅이라 불렀습니다. 오사마빈 라덴은 미국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영웅입니다. 미국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해온 좌익들 역시 김구 선생을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김구도 적국을 향해 테러를 가했습니다. 오사미빈 라덴도 적국을 향해 테러를 가했습니다. 제가 김구를 오사미빈 라덴에 비유한 것이 왜 잘못이라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 발언을 망언이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들입니다. 좌익들은 오사마빈 라덴을 영웅시했습니다. 저는 제 표현에 대해 누구보다 좌익들이 박수를 치며 반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 발언을 망발이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좌익들이 이승만 박사를 매도하지 않았다면 저 역시 이런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과거사를 왜곡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 모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승만의 동상은 이 나라에 우뚝 서야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나라에는 김구 선생만 높이 평가받고,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 묻혀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재라고요? 당시 아시아 권에 독재 아닌 나라가 어디 있었습니까? 싱가프르에서는 껌을 씹지 못합니다. 거리에 침을 밭거나 화장실을 더럽히는 사람은 곧비로 끌려 갑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이런 독재가 어디 있습니까? 싱가포르의 누가 이광요를 독재자라 하던가요?
지금도 북한,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독재를 합니다. 좌익들은 어째서 이승만과 박정희만 독재자라 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독재자라 하지 않습니까? 아니 김일성을 만족의 태양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은 한국인들은 역사도 수학도 냉철한 두뇌로 배우지 않고 외웁니다. 이렇게 외운 것은 지식이 아니라 외움물일 뿐입니다. 외운 것이 많을수록 고정관념만 높이 쌓고 새로운 것에 저항합니다. 경험과 주워들은 이야기만 많고, 학문적 이론을 배우지 못한 사람을 저는 원주민이라 칭합니다. 원주민은 과학을 몰라 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과학을 공부한 사람은 패러다임으로 사물을 평가합니다. 더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김구는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지 않고 요인만 꼭 집어 살해했기 때문에 빈라덴과는 다르다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과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패러다임 측면에서 보면 빈라덴과 김구는 테러와 게릴라를 무기로 적과 싸운 사람들이며 같은 류, 같은 과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똑같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패러다임 측면에서 보면, 김구와 인도의 간디는 현저히 다릅니다. 간디는 철저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간디의 비폭력 운동과 김구의 폭력 운동 중 어느 운동이 더 많은 효과를 얻었을까요?
간디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영국의 힘을 알았고, 힘으로 영국에 대항했다가는 더 많은 인도인이 탄압을 받고 고통을 받을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국에 대해 무력 저항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선택이며 수억의 인도인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줄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력으로 대항하려는 인도인들을 꾸짖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몇몇 일본 요인들을 암살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고, 지불한 대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폭탄을 던진 청년들이 고통 속에서 죽었고, 수많은 동족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김구선생의 독립운동에는 얼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혼을 살린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인도의 간디에게는 그런 혼이 없었던가요?
김구의 정신은 훌륭한 것이지만 그는 대한민국을 김일성에게 내줄 번한 사람입니다. 올곧은 정신만으로 큰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신력으로 말하자면 청학동 한문 할아버지도 상당할 것입니다. 국가를 경영하려면 이승만 박사처럼 넓은 세계로 나아가 많이 보면서 신학문과 신사고를 갈고 닦아야 합니다.
올곧은 정신만 간직한 채, [돌아가는 세상]을 읽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어째서 좌익들이 케케 묵은 독립운동을 따지고 친일파를 따지는 지, 그 의도를 읽지 못합니다. 이 시점에서 저들이 독립운동을 최고의 미덕으로 가꾸는 이유는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김일성 한 사람 만을 내세우면 좀 그러니까 구색을 갖추기 위해 김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둥을 치면 대들보가 울린다고 김구를 내세워야 김일성을 자연스럽게 들이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좌익들은 지금 이승만을 죽이고, 김일성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김구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왜들 모르는지요? 최근 좌익들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해 장준하를 내세웁니다. 좌익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김대중을 곧바로 연결시키려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죽어야 합니다. 제가 왜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김구와 이승만을 비교하는 이유를 알아차려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를 고대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간을 읽어야 합니다. 배운 사람은 패러다임으로 사물을 판단합니다. 원주민이 아는 것이 많다 해서 그 지역을 진보시킵니까? 과학적 이론이 그 지역을 진보시키는 것입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은 사실을 배우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을 배웁니다. 수백 개의 수학문제를 모두 풀려고 대드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수많은 문제 중에서 패러다임을 발견해내고 패러다임 별로 문제를 푸는 방법을 개발할 때에 비로소 응용능력이 길러집니다. 인문과학을 배우는 것도 같을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과학입니다. 끝없이 [왜]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남의 것을 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창의력이 없습니다. 오직 두꺼운 고정관념의 벽이 있을 뿐입니다. 고정관념은 사회발전의 걸림돌입니다. 저는 연구소에서 군간부들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기득권들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2004. 8. 21

출처: http://www.systemclub.co.kr/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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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은 감이 있지만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망언 내용을 찾아 올립니다.
지난 2005년 3월 4일. 일본 우파 계열의 월간지 ‘세이론(政論)’에 고려대 한승조 명예교수의 다음 내용을 요지로 한 기고문이 실렸다.
“필자가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하는 이유의 하나는 한일 양국의 인종적 혹은 문화적인 루트가 같은 점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민족 문화가 일제식민지 통치기간을 통해 보다 성장, 발전, 강화되었다. 한국의 역사나 어학, 문학 등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은 오히려 일본인 학자와 그들의 제자인 한국인이었던 것이 아닌가. 일본지배는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조기성장과 발전을 촉진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매국망언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 <세이론(正論)>가 자신이 쓴 글을 일부 과장했다며 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글 원본을 공개했다.
하지만 그의 글은 '親日行爲가 바로 反民族行爲인가?-한일관계의 인식전환을 위하여'라는 제목이 <세이론>지에서 '공산주의.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일한합병을 재평가하자'로 바뀌었을 뿐, 문제의 망언 등은 원본 그대로였다. 다음은 한승조의 한글 원본 전문이다.
親日行爲가 바로 反民族行爲인가?
- 한일관계의 인식전환을 위하여-

韓 昇 助/高麗大 명예교수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란 법안이 현재 한국의 국회에서 심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법안은 현 시국에서 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국가보안법, 사학법 개정안, 언론법 등과 더불어 노무현 정권과 열린 우리당이 기필코 이번 會期 안에 통과 시키려고 하는 이른바 4대 惡法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12월 초가 되면 국회는 이 법안들의 통과를 둘러싸고 여야 의원들 간에 볼꼴사나운 격돌이 예상되고 있다.

여당 내부에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가 매우 저조한 이때 이런 사회여론을 등진 법안의 강제통과가 가져올 수가 있는 민심의 離叛(이반)을 염려하여 약간의 법안 수정을 협상하려는 움직임도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친일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에 관해서는 정부 여당도 어떤 양보나 타협의사도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야당의 반대나 여론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강행을 자신하는 모양이다. 이런 법안에 대하여 한나라당이나 언론계도 반대하고 나설 명분이 강할 수가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친일파 청산문제를 둘러 싼 몇 가지 다른 시각과 입장

이 글은 친일 반민족 행위를 둘러 싼 네 가지 다른 시각과 입장을 정리하면서 비교 평가해 본 다음 좌경적인 시각과 심성이 얼마나 한국국민의 心相을 저질화, 우매화하는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에 대한 네가지 시각이나 태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첫째는 친일 협력행위을 반민족행위로 간주하여 엄하게 단죄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다. 둘째는 기본시각은 동일하나 친일행위나 처벌대상자의 범위를 다소 축소하여 보다 완화하려는 입장인데 이 두 가지 입장이 친일파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좌파의 시각을 대변한다.

셋째는 친일 협력행위가 반민족행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불가피한 행위였으므로 본의 아니게 취해진 친일 행위는 응징 처벌함이 옳지 못하다. 또 일제의 식민통치가 종식된 후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이제 와서 진상규명이나 사후 처리도 어려운 일이니 그런 법안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마지막 네 번째 입장은 일제치하의 친일행위는 그때 상황여건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또 보기에 따라서는 친일협력행위가 반드시 반민족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며 한국인 또는 국민에게 나쁘기만 했던 일이 아닐 뿐 더러 도리어 유익한 면도 적지 않았으니 오늘에 와서 청산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좌파세력의 동기

본래 어느 나라 어느 정파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에서 공산주의 집단을 능가하는 정파는 없었다. 국가 중에서도 일본의 과거청산을 강조하며 일본을 압박하는 것이 중국과 북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日帝가 가장 위험시하고 가혹하게 탄압했던 대상도 공산주의 집단이었다. 가히 불구대천의 원수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終戰후 일제 청산과 친일파 숙청에 대하여 시종일관 적극성을 보여온 것이 북한공산주의와 그 노선을 추종하는 한국의 386세대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이 이번에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국회심의에 상정한 이유는 첫째, 次期에 대통령 후보로서 大權에 도전해 올 것으로 보이는 박근혜 한나라당 총재의 정치적 발판을 무너뜨리자는데 있다. 박근혜는 일제시대의 친일파이며 해방전후의 독재자 박정희의 딸인데 그런 자가 민주화된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가 있느냐는 여론몰이를 위한 事前布石인 면이 없지 않다.

둘째, 남한의 좌파세력이 대적하여 싸우는 대상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자들이며 보수세력들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제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기 보다는 적극적 또는 소극정인 扶日協力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세력을 모두 친일파로 몰아서 정치적으로 무력화함으로써 좌파세력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할 목적으로 이런 법안을 국회에 상정한 것이니 기필코 가결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左派기회주의의 사고방법과 주장

좌파정권 하에서 요즘 잘 나가는 중견 정치학자인 任赫伯(임혁백) 교수는 11월 22일자 조선일보에 “권위주의의 청산 해법”이란 제하의 時論(시론)을 기고하였다. 그 글의 요지는 軍部권위주의와 민주화의 관계에서 민주화가 군부권위주의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면 군부는 강제력을 동원하여 판을 쓸어버리려고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에 성공한다면 장기적으로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수가 있는 것인데 한국은 성공적으로 권위주의의 과거를 청산한 사례이다.

노태우 정권은 구 군부출신이 대통령이 되었으므로 과거청산의 전망이 밝지 못했으나 여소야대의 정국과 시민운동단체의 압력에 의하여 과거청산 작업에 진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 前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 보낸 것이 그 성과라고 하겠다.

김영삼 정권은 군부정권을 떠받쳐 오던 군 내부의 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였으며 안기부와 보안사령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시행하여 또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통하여 전두환?노태우 등 前대통령을 형사처벌 할 수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에서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핵심을 단죄한 것은 세계 민주화의 역사에서도 기록될 업적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과거청산은 인적 청산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지만,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정부는 그 토대 위에 구 권위주의 제도의 청산, 민주적 제도 개혁, 그리고 인권의 향상에 획기적인 진척을 이루어냈다. 현 노무현 정권은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마무리하는 제도개력의 완결판을 제시할 것이다. 앞으로의 과거청산은 부정적 과거유산 청산에 주력하기 보다는 진실규명 후 피해자 보상과 가해자 사면을 통해 용서와 화해, 국민통합을 도모하는 긍정적 과거청산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해결책이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안’이라는 열린 우리당의 과거청산 법안 이름에 걸맞는 것이고 한나라당을 과거청산에 등장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고 온건 원만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과거의 친일협력 행위는 용서받을 수가 없는 반민족행위였으나 그네들이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치며 자숙한다면 굳이 보복이나 처벌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보수세력과 친일파 후손들은 좌경정권의 후의와 온정에 감사하고 새 민주정권에 적극 충성을 하거나 자숙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글이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 내지 학자나 언론인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는 아니고 또 좌파세력의 핵심골수 분자라고 볼 수도 없다. 다만 좌경세력에 잘 보이면서 보수 우익 편의 사람들에게도 밉게 보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들을 온건한 중도주의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좌경적인 기회주의적인 입장으로 보아야 할까? 그는 노태우 보다는 김영삼을, 또 김영삼 보다는 김대중을 더 높이 평가하며 노무현에게는 김대중에 못지 않은 치적을 올리도록 훈수 조언하려는 학자처럼 보아진다.

소설가 복거일 씨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비판의 논리

셋째는 그 반대의 입장에 서는 지식인의 논거를 정리해 보겠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좌파세력이 일제청산이나 친일파 숙청문제가 나오면 그에 동조 찬성하거나 아니면 이상스러울만큼 입을 다무는 경향을 보여 주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유달리 적극적인 발언으로서 이의를 제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소설가 卜鉅一(복거일)씨이다. 이런 문제에 所信있고 용감한 발언을 하는 사람은 복씨 이외에 이문열씨 정도이다.

특히 복거일 씨는 다른 신문에도 기고했지만 <月刊 朝鮮> 2004년 10월호에 장문의 글을 기고하였는데 그 논리가 매우 精巧(정교)하다. 여기서 그 논리를 상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의 論旨(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親日행위들과 친일파를 처벌하자는 주장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그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에 의하여 세워진 仮定(가정)일 수가 있느냐? ① 친일행위들이 뚜렷이 정의될 수가 있느냐? ② 친일 행위들을 한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가? ③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친일행위들과 친일파들에 대하여 그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 만한 도덕적인 권위를 지녔다고 보는가? ④ 그런 판결은 우리 사회의 개선과 발전을 위하여 필수적이거나 적어도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복거일 씨는 이러한 가정에 대하여 조목조목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그 말의 핵심은 일본의 식민통치 시기에 어떤 행위가 친일행위이고 또 무엇이 아니다 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우며 더구나 단죄한다는 것은 실제로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①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없어서 민족정기가 서지 않았다. ② 민족정기가 서지 않아서 우리 사회가 혼탁하고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③ 따라서 지금이라도 단죄해야만 민족정기가 바로 서며 우리 사회를 덜 혼탁케 함으로써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④ 親日행위들과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수적이냐? 적어도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인가? 아니다. 그 반대일 것이다.

필자도 복씨의 주장에 공감하고 동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첨언하겠다. 친일파를 단죄해서 민족정기가 선 사회는 북한이며 그러지 못하여 혼탁하며 발전하지 못한 사회가 남한이라고 공산주의자나 좌파들은 일상적으로 주장해 왔지만 그렇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남한보다도 훨씬 더 크게 성장 발전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지 못하고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났다면 그들 주장이 얼마나 부실하며 잘못된 기본전제 위에 서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친일청산’ 주장은 중대한 역사왜곡이며 억지주장임이 드러났다. 또 그들은 한국사회가 친일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우리 사회는 이미 반세기 전에 공식적으로 다루었으며 또 적절하게 친일문제에 대처하였다고 복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1948년에 제정된 헌법 제101조에서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서기 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가 있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서 1948년 9월22일 ‘반민족행위법’이 공포되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이미 정식 재판절차를 통해 한일문제를 다루었다.… 국회는… 반세기 전에 자신이 한 일의 정당성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일이었다고 비판적으로 결론짓고 있다.

親日 협력행위를 민족반역행위로 단정할 수가 없다는 논거

넷째, 마지막으로 친일파 논의에 대한 전면부정과 재검토를 요구하는 시각과 입장을 정리해 보겠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 협력행위를 무조건 죄악시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친일행위가 반드시 반민족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수많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었을 것이나 공개적으로 입밖에 내놓지 못해온 것은 행방후의 한국의 사회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實例를 들어서 검토해 보자. 崔南善 李光洙 徐廷柱 洪蘭坡 崔承喜 崔璘 등의 예를 보아도 그들이 일시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들을 반민족행위자였다고 볼 수가 있는가? 아니다. 또 金性洙 方應模 홍종인 毛允淑 金活蘭 손병희 朴正熙를 비롯한 日軍 출신 국군장교들 등을 반민족행위자로 몰아붙이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되는 주장일까?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못해온 이유는 아마도 惡意와 憎惡로 가득찬 공산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직접적인 공격에 자기자신을 노출하기 싫어하는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동아일보가 김성수를, 조선일보가 방응모를 부일협력으로 반민족행위를 했다는 좌파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변호하려고는 힘썼으나 명확한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지 못해온 것도 終戰후 한국의 反日的인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크게 보아서 친일파라고 지목되는 사람들 중에는 다음 세 가지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부류는 한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뜻있는 좋은 일을 하려다 보니 최소한 일본총독부의 정책에 부응하고 협력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문 잡지를 발행하려다 보니 더러는 일본 정책에 유리한 보도나 논평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유지하자니 일본어로 교육해야 했고 또 조선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힐책 어야 했을 것이다.

둘째 부류는 일본이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았으니 한국인의 대우 개선과 정치적 참여 또는 자치의 권리라도 얻기 위하여 일본 총독부의 정책에 순응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일본이 원자탄을 얻어맞아 또 떨어뜨리겠다는 협박에 굴복하여 연합국에 無條件降伏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예측하였던가? 그런 정세를 예측할 수가 있었던들 그처럼 적극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협조하였겠는가?

사람은 神이 아니므로 수시로 변하는 정세에서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다. 정세 판단착오는 행동이나 대책선택에 대한 판단착오로 나타나서 잘 하려는 의도가 도리어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때마다 그 정세 판단을 잘못한 결정권자를 응징하며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냐 하는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난 친일행위를 반민족행위로 몰아서 규탄하고 응징하려는 법안을 공정하며 적절한 입법이라고 볼 수가 있겠느냐?

이런 상황을 비근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어느 家長이 식솔을 거느리고 피난 가던 길에 육로를 피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배가 파손되어 모두 강물에 빠지게 되니 일부는 죽고 나머지는 九死一生으로 구제되었다고 하자. 그 家長은 이런 과실로 인하여 살인죄 내지 살인미수죄로 형사처벌하자는 주장을 옳다고 보는가? 아니면 가장의 마음이 더 괴로울 것이니 不問에 부치자고 할 것인가? 기필코 형사고발해야만 한다는 것이 과격좌파이고, 재조사하여 진상규명이라도 하자는 것이 온건좌파이며, 그런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니 不問에 부쳐야 한다는 것이 보수측의 주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도 장차 독립을 얻을 목적으로 인도청년들을 제1차대전과 제2차 대전에 참전케 했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은 그들을 민족반역자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이와 같이 친일파라는 사람들이 한국국민들의 복지나 지위향상을 위해서 扶日協力했다면 그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세움은 부당하다. 물론 개중에는 한국인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사리사욕이나 일신의 豪强과 榮達을 위해서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니 이들에게는 반민족행위자로 지목하여 응징을 해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와 같이 親日行爲者들을 무조건적으로 모조리 反民族 行爲者로 몰아붙이려는 좌파의 논리는 당시의 역사적 시대적 국제정치적인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편파적인 역사인식이다. 이런 억지 주장은 그들 특유의 정치적인 邪心에서 나온 것이므로 경계해야만 할 일일 것이다.

日韓合邦의 국제정치학적인 분석

대한제국의 멸망과 한일합방이 한국민에게 不幸한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오로지 편협한 민족감정으로만 인식하고 대응하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한제국이 왜 일본에 의하여 합병되는 受侮와 悲運을 맞이했는지, 그 당시에 대한제국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지고 또 국가지도자들에게 어떠한 선택의 여지가 남겨져 있었는지 우리는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게 알지 않고서는 올바로 판단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상황판단에 기초하여 일한합방으로 귀착된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이 한민족에게 잘된 선택인지 아닌지 검토하고 평가해야 할 일이다.

사실상 이 세상에는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 만 한 일도 없는 법이다. 불행 중에 행복이 있고 또 행운 속에 불운이 따라 오기가 쉬운 것인데 한국의 國權喪失(국권상실)로 인한 日韓合邦은 민족적인 불행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불행 중의 多幸이었는지 不幸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접근해야 할 이유는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국제정세와 열국과의 관계를 잘 알게 되면 한국이 당시에 러시아에게 점거 倂呑(병탄)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만일 러시아에 合邦 병탄되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생기며 어떻게 되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국은 공산화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 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

그에 앞서서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강행하였는데 수천만명의 러시아농민을 학살하였다. 이런 통치행태로 보아서는 한국민의 저항을 짓밟아버리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어떠면 일천만명? 이상)이 학살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때 시베리아, 연해주, 사할린의 한인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移住(이주) 시켰다면 한국인들은 오늘 시베리아의 高麗族(고려족들처럼 실향민) 신세가 되었을 것이 아닌지?

일본은 3.1운동때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수는 천만이 아니라 천명을 크게 넘지 않았을 것 같다. 다만 경찰이나 헌병에 의하여 체포되어서 獄苦(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더 많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또 한국농민을 만주의 간도로 이주를 권장하였다고 하나 소련과 같은 강제성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서 한반도가 러시아에 의하여 점거되지 않고 일본에게 합방되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오히려 근대화가 촉진됨으로써 잃은 것에 못지않게 얻은 것이 더 많았음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필자가 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이 不幸중 多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 문화적인 뿌리가 같았음으로 인하여 한국의 민족문화가 일제식민통치의 기간을 통해서 더욱 성장 발전 강화되었을망정 소실되거나 약화된 것이 없었다. 한국의 역사나 語文學 등 韓國學 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이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과 그의 한국인 제자들이 아니었던가? 이런 말에 또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객관성을 중시함이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물론 일제가 학교에서 한글교육을 폐지하며 朝鮮語(조선어)의 연구와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1937년부터이며 1945년에 태평양전쟁이 끝났으므로 한국어문학에 큰 손실을 입은 바가 없었다. 만일 한반도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나 英美등 서방국가에 의하여 식민지 지배를 받았더라면 그 문화적이 뿌리가 너무 다름으로 인하여 민족문화의 성장이나 심화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 같다.

이 뿐 만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영어의 sibling rivalry(어린 자매들 간의 경쟁의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인에 대하여는 무조건 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을 갖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들의 성장 발전의 의욕을 크게 자극하여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위와 같은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천만 다행이며 저주할 일이기 보다는 도리어 축복이며 일본인들에게 고마워해야할 사유는 될지언정 日政 35년 동안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무라고 규탄하거나 죄인취급을 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과거사의 진상규명 노력도 이런 거시적이며 객관적인 차원에서 또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하여 긍정적인 시각에서 진상을 규명하려고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좌경사상이 국민의 低質心理(저질심리)를 자극한다

공산주의나 그 아류 좌경사상은 현실부정, 증오와 원한에 뿌리박은 사상이므로 그런 역사왜곡이 사람의 마음을 일그러뜨리고 低質化하기가 쉽다. 그래서 한국의 좌경사상이 한국국민을 오도하고 저질화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필자는 과거사 기본법안에 숨겨진 불순한 정치의도라는 글에서 한국의 친북좌경세력이 국민의 심성을 어떻게 오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잘난 국민과 못난 국민이란 글을 통하여 그 차이를 대조시키며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고찰하였다. 그 부분은 인쇄에서 누락되어 외부에 발표가 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잘난 국민과 못난 국민의 행태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 (1) 잘 난 사람은 잘못됨의 책임을 남들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잘 난 사람은 무슨 일이 잘 못되면 그 주요원인을 자신에서 찾고 반성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한다. 그러나 못난 사람은 그 원인과 책임을 자신이 아닌 남들에게 돌리며 그 책임을 전가하려고 애를 쓴다. 엄격하게 따져서 그 원인이나 책임의 소재가 남이 10분의 9이며 자신이 10분의 1이라고 할지라도 잘난 국민은 자기의 부족이나 과오를 훨씬 더 심각하게 다루면서 그 원인 제거에 주력한다. 공산주의자나 좌파사람들의 특징은 상습적으로 책임을 남들과 제도에 전가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반대로 못 난 사람은 자신의 책임이 97%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부족이나 과오는 감추거나 제켜두고 남의 책임을 끈덕지게 추궁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약점이나 단점을 최대한으로 부풀리며 과대 홍보 선전함으로써 그 원수 갚기나 보상청구에 주력을 하게 된다. 좌경사상이 인간 불행과 고통의 원인을 통치층이나 사회제도와 같은 외부로 돌리는 이데올로기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일관계에 대해서 말해 보자. 한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들이 겪는 모든 불행이 일본인들의 침략과 간악한 식민통치에 기인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좌파 측에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일본을 증오하고 경계하는 사람들 중에는 좌파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보수파들은 한일관계의 나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면, 쌍방에 은혜적인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므로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덜 적대적이며 친일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좌경세력은 은혜적인 측면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해악적인 측면이나 원한관계만 들추어낸다. 조선조가 멸망한 것은 일본의 침략주의로 기인한 것이며 한국의 지배계층이 그들을 방조해 왔다. 한국인의 모든 불행은 일본의 침략에 기인하므로 일본이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 일본이 주었다는 은혜적인 면은 친일협력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한일관계를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국인들 중에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한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갔다 붙이는 경향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마음 속으로는 경멸하면서 한국인들을 敬之遠之(경지원지)하여 왔다. 이것도 한국인 측의 못난 mentality로 인하여 생겨난 현상이라 하겠다.

잘난 사람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오늘 해야 할 일, 풀어야 할 숙제 그리고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준비하는데 全力投球(전력투구) 한다. 반대로 못 난 사람은 과거지사에 대한 미련이나 怨恨(원한) 때문에 그런 과거지사를 처리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 그 때문에 오늘의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소홀하게 하기 때문에 한국은 아직도 완전한 자립 자주국가가 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노무현 정권이 현재 추진하려는 과거사 진상규명의 법안들이 하나 같이 과거지사에 대한 집착과 집념에서 나온 좌경세력의 정략적인 산물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개인이나 나라의 미래문제에 충분한 대비를 못하게 함으로 나라의 중요문제를 그르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또 남의 나라의 원조나 보호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自主獨立國家 구실을 하겠다는 것인가? 현재 노무현 정권 아래서 진행되는 과거사 진상조사 위원회의 활동이나 친일행동 조사위원회가 바로 그의 두드러진 사례이다.

(2) 어질고 고상한 사람들이나 ‘잘난 국민’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과거지사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를 골몰하여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한국국민은 이미 오랜 시일이 흘러가버린 일제시대나 해방 후의 이념대립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더 우려먹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과거지사에 신경을 집중하노라고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며 한시 바삐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막가는 나라의 民草(민초)들 임을 보여준다.

DJ정권 때부터 민주화투쟁 피해자 보상법인가 하는 이름으로 대구폭동사건이나,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비롯하여 심지어 한국전쟁 중이나 그 이전 좌우대립 시기에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을 명예보상하고 보상해주는 법안을 준비하며 추진해 왔다. 그 당시는 막강한 야당이 동의해주지 않아서 입법화되지 못했지만 이제 노무현 정권하에 와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국회에 상정되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지사에 억매일수록 오늘의 문제가 소홀해지고 나라의 내일 전망이 흐려져 버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니 이래가지고는 나라가 어떻게 전진 발전을 계속할 수가 잇겠는가?

(3) ‘못난 국민성’이 과거사 왜곡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부추겨 왔다. 잘난 국민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두드러진 개방성과 포용력 그리고 세계성에 있다. 이 말은 한국국민이 타 국민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악의적이며 좁은 민족주의 감정에 사로잡힐수록 못난 국민, 저질 사악한 국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 중에 중국에서 온 조선족을 무시해 대하고 일본인들에게 적대적이며 미국인들에 대하여 오만 불손하게 대하는 경향도 빗나간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소산이다. 이렇게 외국인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보면서 어떻게 ‘위대한 조선민족’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김정일은 북한을 통치하면서 조선민족제일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주민들에게 단단하게 교육해 왔다. 그렇게 한 목적은 김일성 김정일이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며 세계제일의 지도자라는 뜻을 주민들의 마음 속 깊이 각인시키려고 만들어진 구호였던 것 같다. 그러한 캠페인에 영향을 받았음인지 한국의 젊은 세대 중에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일본이나 미국에게 실천하려는 행태를 보여 왔다.

밖으로는 미국과 일본을 적대시하는 것이 한민족의 위대함을 표시하는 유일 수단으로 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국민들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외부세계에서는 망해도 한국에서 추진하는 사회주의혁명이 미래세계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될 것이라는 自負心(자부심)마저 갖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착각과 무식한 패기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증상을 무지하고 ‘못난 국민’의 극치로 보면서 이런 문화가 북한의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생겨났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는다.
물론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세계 제일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김일성 김정일을 수령으로 떠받들고 있으므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는 논법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정신병 증세가 남북한에 통용된다면 이것은 正常(정상)이 아니라 非正常(비정상)이다.

이런 비이성적이며 배타적인 국민의 민족주의는 어리석은 정부 결정과 불필요한 재정낭비로 나타난다.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겠으나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서울올림픽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던 노태우 정권시절의 이야기이다. 높이 솟은 외국인 아파트가 남산의 경관에 이롭지 못하다고 폭파해 치우면서 국민의 박수갈채를 유도하려고 하였다. 江南 쪽에서 남산을 바라보는데 외국인 아파트 하나가 돌출하여 남산전체의 경관을 방해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남산의 경관을 그리 심하게 훼손한 것 같지는 않았다. 또 그 외국인 아파트는 60년대 후반에 지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놓은 아파트 건물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남산의 일부에 돌출해 보인다고 하여 그 외인 아파트가 마치 한국인의 자주성을 손상시키는 느낌을 주었던지 그런 건물을 철거하자는 제언을 받아들인 노태우 대통령의 심리구조이다. 필자는 기왕에 만들어진 것이니 그 건물이 낡아서 수리 보수해야 하는 시기, 약 10년 후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아도 좋을 성 싶었다. 그러니 移轉(이전)결정만 해놓고 있다가 차후에 해도 무방한 것이니 노태우 대통령 임기 내에 해치울 필요가 없었던 일이었다.

김영삼의 시대에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폭파제거가 또 사회적인 이슈였다. 그 건물은 일제에 의하여 건축되기는 하였으나 당대의 세계적인 걸작 건축물로 알려진 중요한 문화유산에 속하는 건축물이었다. 또 일본총독부 보다도 더 긴 세월을 한국의 중앙청 건물로 활용되었던 대한민국 건국초기의 역사적인 건물이었다. 더구나 중앙청 건물이 옆에 세워진 다음에는 박물관으로 잘 사용되고 있었던 터였다.

그 건물의 폭파제거를 반대했던 사람들 중의 대부분도 조선총독부 건물의 폭파 제거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박물관을 지은 다음에 폭파제거 하자는 이유로 반대하였던 터였다. 그러나 實利(실리)보다는 잘 난체 하고 싶어 하는 허영심과 다수인의 박수를 받고 싶어 하는 정치적인 욕심에 가려져서 그런 實利(실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인들의 저질 행위

수준 이하의 좌파적인 心性(심성) 중에는 일본사대의 종군위안부의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性(성)도 혁명의 무기로 활용하라는 말이 있다. 태평양전쟁 중에 한국인 여성이 挺身隊(정신대)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性的(성적)인 위안물로 이용되었다 하여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계속 요구하는 모습은 일본을 나락에 밀어 떨어뜨리려다가 자신들이 먼저 떨어지는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전쟁 중에 군인들이 여성들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 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일본이 한국여성을 전쟁 중에 그렇게 이용했다는 것도 전쟁 중의 일시적이면서도 예외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그런 정책의 희생자가 수천, 수만명이 된다면 六何原則에 따르는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어서 정식으로 거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 많았던 수도 아니었는데 그런 봉변을 당했다고 진술하는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노파를 끌고 다니면서 과장된 사실을 믿게 해줄 만한 명백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듭 배상금을 요구하며, 그나마 이미 받은 것 이외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몇십 년 동안 물고 늘어져 왔다는 것은 고상한 민족의 행동거지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

그런데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어쩌자고 이런 노파들의 행동이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를 만들고 열심이 보도해 대는 것인지. 애초에 性의 문제는 돈으로 환산될 수가 없는 것인데 왜 돈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자기 망신을 계속하는 것인지? 이런 치사하고 못난 짓은 하면서 어떻게 위대한 민족임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인도인들의 개방성과 실용주의적인 생활태도

아시아의 국가들이 대부분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가 독립하였지만 과거의 종주국가가 세워놓은 관청이나 군 시설 또는 교육시설을 폭파 파괴했다는 예를 나는 듣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들을 가두었던 형무소나 고문시설까지도 잘 보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도의 경우만 보아도 영국인의 식민통치 시대에 지은 도시인 봄베이나 델리 등은 건물뿐만 아니라 거리 이름도 그대로 놓아두고 활용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에 옆에다 새로 도시나 관청을 세워서 뉴 델리시가 만들어지고 新舊(신구)도시가 모두 잘 활용되고 있다.

인도인들은 심지어 천년 이전에 이슬람 군대가 침범하여 파괴한 절터나 중요시설의 파괴현장이나 또 식민통치의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왕궁 등은 물론 당시의 적대국의 귀족들이 놀던 정원조차도 하나도 파괴 훼손함이 없이 역사유적이나 문화재로서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는 근래에 와서는 그런 역사 유물로 인하여 막대한 관광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사람들이 한국인들보다도 민족적인 자존심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인도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크고 넓은데 비하여 한국인들의 소견머리가 너무 짧고 좁아서 그런 것은 아닌지?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인 것 같다.

맺음 말

이런 글에도 맺음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관례에 따라서 몇 마디나마 짤막하게 첨언해야겠다. 한일관계는 그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발생하고 지속되어 오던 관계였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양국관계 속에는 시혜적 상생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해악적인 상극관계도 혼재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 중 어느 측면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느냐에 따라서 쌍방간의 관계는 더 좋아지기고 하고 또 더 나빠지기도 한다. 공산주의자들이나 좌파측은 일제청산과 친일파 제거 숙청 등 나쁜 쪽만 주목하면서 그 해악을 과장하려고 드는 성향을 지속해 왔다. 그들의 영향력이 다수 국민 간에 퍼지게 될수록 한일관계는 긴장의 도수가 높아 간다. 현재 추진되는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법안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반대로 보수성향의 반공세력 중에는 한일 양국간의 해악적 相剋的인 측면보다도 受惠(수혜) 내지 施惠的(시혜적) 相生的인 측면을 주목하며 그 쪽을 확대 발전하려고 의도한다. 그러다보니 日政시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친일 협력적인 행동을 취했던 결과로 8?15해방 후 친일 반민족분자 내지 민족반역자란 비난과 비판을 들어 온 것이다. 終戰후 60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친일문제가 다시 붉어져 나온 것은 좌파세력이 그들의 정치권력을 영속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親日行爲는 산업화 단계 내지 민족주의 시대에는 罪惡視(죄악시)되며 반민족행위로 지목되어 비판 규탄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탈 산업사회(post industrial society)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에 와서는 친일행위가 도리어 애국애족 행위로 인식되고 환영받는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사회를 맞이하게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젊은 세대를 좌경화의 추세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또 반일교육을 받아온 세대도 점진적으로나마 인식의 전환 및 태도변화로 유도하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노력해야만 할 분야가 아니겠는가? (끝)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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