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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6)
  2. 2009.01.23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3)


【명환】 고려
위영(魏英) 고려 태조 8년 12월에 신라 경순왕이 와서 항복하니, 그의 국도(國都)를 경주(慶州)로 만들고 그대로 식읍(食邑)으로 주고, 위영을 주장(州長)으로 삼았다.

정극영(鄭克永) 인종 때의 유수(留守)이다.

최호(崔顥) 정종(靖宗) 때에 부유수(副留守)로 있으면서 판관 나지열(羅旨說), 사록(司錄) 윤렴(尹廉), 장서기(掌書記) 정공한(鄭公翰) 등과 함께 《전후한서(前後漢書)》와 《당서(唐書)》를 판각(板刻)하여 바쳤더니, 각각 벼슬과 상을 하사하였다. 채정(蔡靖) 장서기(掌書記)로 있으면서 깨끗한 덕행이 있었다. 그 뒤에 동경(東京) 사람들이 영주(永州) 사람들과 난을 일으켰을 때에, 조정에서는 안무사(按撫使)를 보내기로 하였으나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동경 사람들이 채정을 사모하여 마지않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채정을 유수부사(留守副使)로 임명하였다. 단기(單騎)로 부임(赴任)하니, 동경 사람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배반한 자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엄수안(嚴守安) 판관으로 있을 때에, 원종이 원 나라로부터 군사를 청하여 와서 고도(古都)를 수복하려 하니, 임유무(林惟茂)가 항거하고자 야별초(夜別抄)로 하여금 백성들을 깨우쳐 해도(海島)와 산성(山城)에 들어가 보전하게 하였다. 별초(別抄) 9명이 금주(金州)에 이르니, 수안(守安)이 안렴(按廉) 최유(崔儒)에게 고하기를, “권신(權臣)의 말만을 듣고 경솔히 백성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별초들을 체포하여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최유가 그의 말대로 별초들을 가두었다. 얼마 안 안되어 유무가 죽임을 당하니, 온 지방이 잠잠해졌다. 삼별초(三別抄)의 군사들이 배반하여 진도(珍島)에 웅거하고서 주현(州縣)에 격문(檄文)을 전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진도로 들어오라 하고, 또 별초를 가둔 자는 죄를 주겠다고 성명을 내니, 금주수(金州守) 이주(李柱)가 두려워하여 도망갔다. 수안이 임시로 지주사(知州事)가 되어 민심을 위무하였다. 밀성(密城) 사람이 수령을 죽이고 반기를 들자, 안렴 이숙진(李淑眞)이 변란을 듣고 금주로 달아나니, 적들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수안이 금주수 김훤(金暄)과 함께 군사를 정비하여 숙진을 도와 적을 칠 계획을 하니, 적이 그 말을 듣고 그 괴수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권단(權㫜) 유수로 있었다. 예전에 한 창고가 있어서 백성에게 비단과 명주를 부과하여 저장해 놓고 이름을 갑방(甲坊)이라 하였다. 공헌(貢獻)에 충당하고도 나머지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유수가 차지하였다. 권단은 갑방을 철폐하고, 1년의 수입으로 3년의 진공(進貢)을 지출하였다. 백성의 세금을 도적질한 사호(司戶)가 있자 그의 머리를 관청 뜰에서 부숴 죽이니 보는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충렬왕 초기에 불러들여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임명하였다.

최성지(崔誠之) 경주의 관기(管記)로 왔었다.

안유(安裕) 유수로 있었다.

안보(安輔)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니, 스스로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 하여 아는 것을 다 말하니, 임금은 그가 사정(事情)에 어둡다고 하였다. 안석이 드디어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수령되기를 청하여 계림윤(鷄林尹)으로 나왔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윤선좌(尹宣佐) 처음 한양윤(漢陽尹)으로 있을 때에, 임금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한양윤 윤선좌는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목민관(牧民官)을 시킨 것이다.” 하였다. 뒤에 임금이 친히 수령들을 선임(選任)하는 명단을 기초하다가, 계림윤을 정하는 데에 이르러 붓을 멈추고 생각하기를,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 중에 윤선좌만한 사람이 없구나.’ 하고, 즉시 그를 계림윤으로 선정하였다.

전록생(田祿生) 경주 판관(判官)으로 있었다.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전랑(田郞)이 우리 계림의 판관이 되었더니,
                 부로(父老)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깨끗한 덕행을 그리워하네.” 하였다.

이무방(李茂芳)  공민왕 때에 부윤으로 있었다. 처음에는 큰 흉년이 들었는데 무방이 부임한 뒤부터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무방이 백성의 편의에 따라 어염(魚鹽)을 팔아서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진대(賑貸)에 대비하였다.

이성공(李成功) 유수로 있었다.
우인렬(禹仁烈) 부윤으로 있었다.
정세운(鄭世雲) 유수로 있었다.
유숙(柳淑) 유수로 있었다.
최영(崔瑩)ㆍ배천경(裵天慶)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나익희(羅益禧) 부윤으로 있었다. 청렴하고 부지런하고 자혜(慈惠)스러워 남방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안보(安輔)ㆍ조운흘(趙云仡)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본조
고거정(高居正)ㆍ함부림(咸傅霖)ㆍ권극화(權克和)ㆍ유관(柳觀)ㆍ이호성(李好誠)ㆍ김담(金淡)ㆍ최선복(崔善復)ㆍ유규(柳規)ㆍ이약동(李約東)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조달생(趙達生) 판관으로 있었다.
『신증』
양순석(梁順石)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세필(李世弼)ㆍ최응현(崔應賢) 힘써 학교를 일으켰다.
허계(許誡) 정사를 하는 데에 맑고 간단하였다.
황맹헌(黃孟獻)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인물】
신라
온군해(溫君解) 진덕왕 6년 무열왕이 이찬(伊飡)으로 있을 때에 당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나게 되었다. 무열왕을 수행하던 온군해가 높은 갓을 쓰고 큰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순라병들이 그를 무열왕으로 알고 살해하였다. 무열왕은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진덕왕은 군해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증직하고, 자손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눌최(訥催) 대내마(大奈麻) 도수(都水)의 아들이다. 백제군이 쳐들어 와서 봉잠(烽岑)ㆍ기현(旗懸)ㆍ혈책(穴柵) 등 세 성(城)을 공격하였다. 눌최는 성을 굳게 지키고 구원병을 기다렸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자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병이 없어 날로 더욱 위험하니, 지금이야말로 진실로 뜻 있는 무사가 충절을 다 바쳐야 하는 때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성이 함락되자 눌최가 죽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고, 급찬(級飡)의 관등(官等)을 추증하였다.

설계두(薛罽頭) 무덕(武德) 4년에 바다 배를 따라 당 나라로 들어갔는데, 마침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므로 계두가 스스로를 천거하여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가 되었다.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고구려인과 주필산(駐蹕山) 아래에서 전쟁하였는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당 나라 황제가 어의(御衣)를 벗어 그의 시신을 덮어 주고, 대장군(大將軍)의 관직을 주고 예로써 장사지냈다.

김흠운(金歆運) 내물왕[奈密王]의 8대손이다. 옥천군(沃川郡)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필부(匹夫) 아찬(阿飡) 존대(尊臺)의 아들이다. 적성현(積城縣)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검군(劍君)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었다. 그때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자기 자식을 팔아 끼니를 때우기까지 하였다.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만이 받지 않았다. 사인들은 훔친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음식에 독을 타서 죽였다.

거칠부(居柒夫) 내물왕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사소한 일에는 거리끼지 않고 원대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염탐하기 위해서 고구려 경내로 들어가 혜량(惠亮) 법사를 만나니, 혜량이 손을 잡고 은밀히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 턱과 호랑이 눈을 가졌으니, 장차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이 고구려는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대가 붙잡힐까 염려되니 빨리 돌아감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칠부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진흥왕(眞興王) 때에 임금이 칠부 등 여덟 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도록 하여 죽령(竹嶺) 밖의 열 개의 군(郡)을 빼앗았다. 혜량이 길에 나와서 칠부를 만나니, 수레에 함께 타고서 돌아왔다. 관직이 상대등(上大等)에 이르렀다.

이사부(異斯夫) 내물왕의 4대손이다. 강릉부(江陵府) 인물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양(金陽) 태종왕(太宗王)의 9대손이다.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었다. 왕의 4촌 동생 균정(均貞)과 4촌 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었다. 김양이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으로 들어가니, 제륭의 무리 김명(金明) 등이 그들을 포위하고 균정을 죽였다. 김양이 하늘에 대고 균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맹세하였다. 김명이 제륭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자, 김양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서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을 만났다. 우징이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도모하여 김명을 토벌하여 죽였다. 그리고서 우징을 맞아 즉위하게 하였으니, 이 사람이 신무왕(神武王)이다. 김양은 관직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서발한(舒發翰)의 관등을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장사(葬事)를 한결같이 김유신의 구례(舊例)에 따라 행하게 하고, 태종왕릉에 배장(陪葬)하였다.

사다함(斯多含) 내물왕의 7대손이다.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곧고 발랐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花郞)으로 추대하였는데, 그의 낭도(郞徒)가 몇 천 명이나 되었다.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가야국(伽倻國)을 정벌하도록 명할 때에, 사다함이 종군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이 그의 공을 책록(策錄)하고, 가야국 사람들을 노비로 하사하니 받고서 모두 풀어주었다. 또 전지를 하사하니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받기를 청하였다.

석우로(昔于老)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고, 흘해왕(訖解王)의 아버지이다. 조분왕(助賁王) 때에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고, 그 땅을 군(郡)ㆍ현(縣)으로 만들었다. 첨해왕(沾解王) 때에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반하고 백제에 투항하자, 우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뒤에 왜국(倭國) 사신과 마주 앉아 모욕을 주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만들겠다.”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군대를 보내와서 우로를 잡아 불태워 죽였다. 미추왕(味鄒王) 때에 왜국 사신이 빙문(聘問)을 오니, 우로의 아내가 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려 불태워 죽여 지난날 남편의 원한을 갚았다.

실혜(實兮) 대사(大舍) 순덕(純德)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정도를 지키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하사인(下舍人) 진제(珍提)가 여러 번 왕에게 참소하자, 그를 영림(泠林)의 관리로 좌천시켰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할아버지 때부터 충성으로 세상에 소문이 났는데, 지금 아첨하는 신하의 훼방으로 죽령 밖 먼 곳으로 좌천되는데도 어찌 직언(直言)으로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는가?” 하니, 실혜가 대답하기를, “옛날에 굴원(屈原)은 외롭고 곧았으나 배척되었으니 예로부터 이러한 것이다. 슬퍼할 것이 무엇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당 나라로 들어가서 학문을 하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아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이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이 되어 그를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서계(書啓)ㆍ징병(徵兵)ㆍ고격(告檄) 등의 문장이 모두 그에게서 제작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 내사령 문창후(內史令文昌侯)를 추증하고, 공자의 묘정에 종사하였다.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실려 있고, 또 《최씨문집(崔氏文集)》 30권이 실려 있다. 치원이 나이 28세에 귀국할 뜻을 가지자, 당 나라 희종(僖宗)이 이것을 알고 조서를 주어 사신으로 왔는데, 신라의 왕이 그를 붙들어 두려고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치원이 중국으로 가서 당 나라에 벼슬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난세를 만나 불운하여 걸핏하면 재앙을 만나니,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스스로 상심하여 다시는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방랑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산림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으며, 서적을 베개로 삼고 자연을 읊는 시를 지었으니, 이를테면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氷産),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 및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의 별장 등이 모두 그가 유람하던 곳이다. 뒤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숨어 살면서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과 정현(定玄) 법사와 함께 도우(道友)를 맺고 한가로이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해론(奚論) 모량부(牟梁部)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찬덕(讚德)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가 있어서 당시에 명망이 높았다. 진평대왕이 그를 가잠성령(椵岑城令)으로 선발하였다. 이듬해에 백제에서 대군을 출동시켜 가잠성을 공격하자, 찬덕이 한편으로는 용감히 싸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키기도 하였는데, 양식과 물이 다 떨어지자 적에게 패하여 죽었다. 이리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해론은 나이 20여 세 때에 아버지의 공으로 대내마가 되었다. 건복(建福) 35년에 왕이 해론에게 금산당주(金山幢主)로 임명하여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 변품(邊品)과 함께 군대를 출동하여 가잠성을 습격해서 빼앗게 하였다. 백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곳으로 출동시켰다. 해론 등이 그들을 맞아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해론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셨는데, 내가 지금 또한 이곳에서 백제인과 전쟁을 하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하고, 드디어 짧은 칼을 가지고 적진에 뛰어들어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고, 당시 사람들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장가(長歌)를 지어 애도하였다.

김대문(金大問) 일찍이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으로 있었다. 일찍이 《고승전(高僧傳)》ㆍ《화랑세기(花郞世記)》ㆍ《악본(樂本)》ㆍ《한산기(漢山記)》 등 약간 권을 저술하였다.

설총(薛聰) 자는 총지(聰智)로 원효(元曉)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하더니, 장성해서는 박학(博學)하고 글을 잘 지으며 글씨도 잘 썼다.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의 뜻를 풀이하여 후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또 민간에서 쓰는 말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의 문서에 사용하게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일찍이 한가로이 있을 때에 설총을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오늘 오랜 비가 처음 개이고 훈풍(薰風)이 약간 서늘하니, 고상한 이야기와 좋은 해학(諧謔)으로 답답한 회포를 풀 만하다. 그대는 필시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터이니 나에게 들려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설총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화왕(花王 모란(牧丹))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 향원(香園)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더니, 삼춘(三春)이 되어 곱게 피었습니다. 온갖 꽃을 능가해서 홀로 빼어나니, 이에 온갖 곱고 아름다운 꽃들이 분주히 와서 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홀연히 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니, 이름이 장미(薔薇)였습니다. 붉으레한 얼굴과 새하얀 이빨에 고운 단장과 고운 옷으로 사뿐사뿐 걸어와서 애교 있게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첩이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들었아오니, 향기로운 장막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합니다.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때 또 한 장부(丈夫)가 있었으니, 이름이 백두옹(白頭翁)이었습니다. 베옷과 가죽띠로 흰머리를 흩날리며 지팡이를 짚고서 늙고 병든 걸음걸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와서 아뢰기를, ‘저는 서울 밖 큰 길가에 살고 있아온데, 그윽히 생각하기를, 왕의 좌우(左右)에서 공급하는 고량진미(膏梁珍味)가 비록 풍족하더라도 상자 속에 저장하는 것에는 모름지기 좋은 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과 삼이 있더라도 왕골과 기름사초도 버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모르겠지만, 왕께서도 뜻이 있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장부의 말에도 일리(一理)가 있다. 그러나 가인(佳人)은 얻기 어려우니, 어찌하면 좋을꼬?’ 하였습니다. 장부가 아뢰기를, ‘모든 임금된 자가 노성(老成)한 사람을 친근히 하여 흥하고, 곱고 어여쁜 여색(女色)을 가까이하다가 망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쁘고 고운 이는 합치기가 쉽고, 노성한 이는 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희(夏姬)는 진(陳) 나라를 망쳤고,서시(西施)는 오(吳)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맹가(孟軻 맹자)는 훌륭한 임금을 만나지 못한 채로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馮唐)은 낭관(郎官)인 채로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예전부터 이러하니 제가 어찌하리까?’ 하였습니다. 왕이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소.’ 하였다.” 하니, 이에 왕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며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풍자(諷刺)함이 깊고 간절하니, 이것을 써서 나의 경계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고려 현종 때에 홍유후(弘儒侯)에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김인문(金仁問) 자는 인수(仁壽)로,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유학(儒學)의 글을 많이 읽었으며, 《노자(老子)》ㆍ《장자(莊子)》와 불교의 경전까지도 섭렵하였다. 또 예서(隸書)도 잘 쓰고 말타기ㆍ활 쏘기도 잘하였다. 나이 23세에 당 나라로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에 이르렀다. 측천왕후(則天皇后) 때에 당 나라에서 죽으니 대의서령(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 등에게 영구(靈柩)를 호송하도록 하였다. 효소대왕(孝昭大王)은 그에게 대각간(大角干)을 추증(追贈)하였다.

김후직(金侯稷) 진평왕 때 사람이다. 진평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후직이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후직이 죽을 때에,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모름지기 임금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으라.” 하였다. 그의 아들이 그대로 하였다. 훗날 임금이 사냥을 나가는데, 길 한가운데에 마치 “임금님, 가지 마소서.”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임금이 돌아다보며 물으니, 시종(侍從)들이 아뢰기를, “김후직의 무덤입니다.” 하고, 드디어 후직이 죽으면서 한 말을 자세히 아뢰니, 임금이 줄줄 눈물을 흘렸다.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을 묘간(墓諫)이라 하였다.

백결선생(百結先生)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이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해어진 옷을 기워 많은 매듭이 있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항상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기쁜 일이나 성나는 일, 슬픈 일이나 즐거운 일을 반드시 거문고로 표현하였다. 세말(歲末)이 되어 이웃집들이 곡식을 찧으니, 그의 아내가 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남들은 다 곡식을 찧는데 우리만은 찧을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해를 넘긴다 말인가?” 하였다. 선생이 듣고 탄식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린 것이고, 부와 귀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당신은 어찌 상심하는가?” 하고는 곧 거문고를 타서 방아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다. 세상에서 전하여 대악(碓樂 방아 음악)이라 하였다.

물계자(勿稽子) 내해왕(奈解王) 때 사람이다. 골포(骨浦)ㆍ칠포(漆浦)ㆍ고포(古浦) 세 나라가 신라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해 오자,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때 물계자가 수십여 급(級)의 적의 머리를 베었는데, 논공(論功)할 때에는 물계자의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드디어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남의 신하된 도리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자기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 전일 포상(浦上)ㆍ갈화(竭火)의 전쟁은 위태롭고도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능히 목숨을 바치고 몸을 잊어서 남에게 알려질 만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미 충성스럽지 못한 몸으로 임금에게 벼슬하는 것은 누(累)가 선조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니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충효의 도리를 상실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조정에 서겠는가?” 하고, 드디어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박제상(朴堤上) 파사왕(婆娑王)의 5대손이다. 벼슬하여 삽량주간(歃良州干)이 되었다. 처음에 눌지왕(訥祗王)이 아우 미사흔(味斯欣)이 왜국(倭國)의 볼모가 되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임금이 제상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 제상이 배반한 자처럼 꾸미고서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들어가서 몰래 미사흔을 빼내어 환국(還國)시켰다. 왜왕이 성내어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왜왕이 온갖 참혹하고 혹독한 형벌로 협박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으니, 드디어 목도(木島) 안에서 불태워 죽였다. 눌지왕이 슬퍼하여 대아찬(大阿飡)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제상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관창(官昌)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로 어려서 화랑(花郞)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태종왕(太宗王) 때에 군사를 출동시켜 당 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 관창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황산(黃山) 들녘에 이르자 품일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비록 어리나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야말로 공명(功名)을 세울 때이다.” 하였다. 관창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곧장 적진에 돌격하여 몇 명을 죽이다가, 백제 사람에게 포로가 되어 산 채로 백제의 원수 계백(階伯)에 보내지니,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다. 그의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무사가 많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놓아주었다. 관창이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기(旗)를 꺾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 하고, 우물물을 움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돌격하니 계백이 사로잡아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머리를 말안장에 달아서 보내니, 품일이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우리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능히 국사를 위해서 죽었도다.” 하였다. 삼군(三軍)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면서 나아가 백제 군사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임금이 급찬(級飡)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다.
○ 이첨(李詹)이 고증(考證)하기를, “을축년 겨울에 내가 계림(鷄林)에 손이 되었더니,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鄕樂)을 연주하여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쓰고 뜰에서 칼춤을 추는 동자가 있었다.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신라 때에 황창(黃昌)이라는 자가 있어서 나이 15ㆍ6세 때쯤 되어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임금을 위하여 백제 왕을 쳐서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자 곧 백제로 가서 시가(市街)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이 담처럼 빙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황창이 임금을 그 자리에서 찔러 죽이고,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눈이 다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 말하기를, ‘황창이 와서 춤춘다. 황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이다.’ 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즉시 눈이 다시 밝아졌다 한다. 황창이 어려서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鄕樂)에 실어서 전해 내려온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三國史)》를 보니, 모든 관직을 임명하거나 이웃 나라를 침벌(侵伐)한 것은 거의 모두 씌어져 있으며, 해와 별과 우레와 비의 이변(異變)과 초목ㆍ금수의 요괴(妖怪)까지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나라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모두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스럽다. 다만 열전(列傳)에 관창의 일의 전말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의 충의(忠毅)가 장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하게 한다. 이 아이는 필시 관창일 것이다. 전해지는 것이 잘못된 것일 것이다. 모든 적국에 대하여 변란을 음모하는 자는 혹은 행상(行商)으로 가장하거나, 혹은 본국에 죄를 지은 것처럼 꾸미고서 감언이설(甘言利說)과 아첨하는 말로 속여도 더러는 정상이 드러나고 일이 탄로되어 성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백제가 이미 신라와는 적국이 되었으니, 황창이 응당 공공연하게 무기를 가지고 백제의 번화한 시가의 큰길 가운데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과연 그렇게 하였다면 백제 사람들이 황창을 잡아다가 형구를 갖추어 고문하였을 것이다. 어찌 내버려 두어 임금의 뜰에서 사투한 짓을 하게 하였겠는가? 이것은 인정(人情)으로나 사리(事理)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옛 사람으로 관창과 견주어 나란히 논할 만한 자를 찾아보니, 《춘추(春秋)》에, 애공(哀公) 11년에 노 나라의 소년 왕기(汪錡)가 공을 위하여 수레에 같이 탔다가 함께 국서(國書)의 난에 죽으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능히 창과 방패를 잡고서 사직(社稷)을 수호하였으니, 상(殤)으로 대우하지 않음이 옳다.’ 하였다. 의(義)에 죽고 인(仁)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동자로서 용감히 이런 일을 한 자를 유독 왕기와 관창에게서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잘못되어 있기에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황창의 춤을 보는 자를 위하여 고증하고, 또 따로 역사를 읽는 사람을 위하여 이상함을 고증한다.” 하였다.


녹진(祿眞) 길찬(吉飡) 수봉(秀奉)의 아들이다. 소성왕(昭聖王) 12년에 상대등(上大等) 충공(忠恭)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 관직(官職)을 주의(注擬)하는데, 청탁(請托)이 모여들어 충공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서 병을 얻어 물러가자 의원을 불러 진찰하니, 의원이 말하기를, “병이 심장에 있으니 마땅히 용치탕(龍齒湯)을 복용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충공이 드디어 문을 닫고 손을 만나지 않았다. 집사시랑(執事侍郞) 녹진이 뵙기를 청하니, 문지기가 거절하였다. 녹진이 말하기를, “하관(下官)인 내가 상공(相公)께서 손을 사절하고 계시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마디 말을 올려서 상공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드리고자 하는 것이니, 뵙지 않고는 물러가지 않겠다.” 하였다. 문지기가 세 번 왔다 갔다 한 뒤에야 비로소 뵙게 되었다. 녹진이 말하기를, “듣자오니, 기체(氣體)가 편치 않으시다 하는데,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하고 저녁 늦게 파하여 안개와 이슬을 무릎써서 혈기의 조화를 깨뜨려 사지(四肢)의 평안함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녹진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공의 병은 침이나 약을 쓸 필요도 없이 한마디 말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니, 충공이, “들려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녹진이, “저 목공이 집을 지을 때에, 재목의 큰 것은 들보와 기둥을 삼고, 작은 것은 서까래를 삼으며 굽은 것과 곧은 것을 각각 그 쓰일 곳에 배치한 뒤에야 큰 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재상이 정사를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재능이 큰 자는 높은 지위에 두고, 작은 자는 낮은 벼슬을 주어서, 중앙에는 육관(六官)ㆍ백집사(百執事)와 지방에는 방백(方伯)ㆍ군수(郡守)가 있어서 조정에 결원(缺員)이 없이 모두 그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얻은 뒤에야 임금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사(私)를 따라 공(公)을 해치며,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재주가 없더라도 반드시 등용하고, 미워하는 자는 비록 유능한 인재일지라도 반드시 배척합니다. 그 취하고 버리는 것이 마음을 괴롭히고 옳고 그른 것이 뜻을 현란하게 하니, 나랏일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정사를 하는 자도 병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여 일을 맡아 삼가고 공손하여 뇌물의 문호를 닫고 청탁의 길을 끊어버린다면 올리고 내치는 것은 반드시 밝은 자와 어두운 자에 따라서 하고, 주고 뺏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하지 않아 저울과 같아서 가볍고 무거움을 굽힐 수 없으며, 먹줄과 같아서 굽고 바른 것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형벌과 정치가 정당하여 국가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비록 날마다 공손홍(公孫弘)처럼 손을 맞아들이고,조참처럼 술을 내어 벗들과 담소(談笑)하며 스스로 즐기더라도 가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복약(服藥)과 식이(食餌)에 구구하게 마음을 쓰면서 한갓 시일을 허비하고 사무를 폐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충공이 기뻐하여 의원을 사절하고 임금께 알현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날짜를 정하여 복약(服藥)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갑자기 조정에 나왔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을 먹는 효과뿐이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왕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이, “과인(寡人)이 임금이고 경이 정승이면서 이런 훌륭한 인재를 태자에게 모르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태자가 들어와 축하하기를, “신은 들으니,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곧다 하였으니, 이 또한 국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고려
배현경(裵玄慶) 처음의 이름은 백옥(白玉)이다. 담력(膽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고려 태조가 사방을 정벌할 때에 현경의 공이 많았다.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병이 위독할 때에 태조가 그의 집에 거둥하여 손을 잡고 문병하고 문 밖에 나오자, 그가 죽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최언위(崔彦撝) 신라 말기 사람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글을 잘 지었다. 18세에 당 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42세에 본국으로 돌아오니,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그를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임명하여 문장에 관계되는 일을 맡겼다. 당시의 귀인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벼슬이 대상(大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동경노인(東京老人) 역사에 그의 이름이 빠졌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숨어 살면서 고려로 따라가지 않더니, 성종이 동경에 거둥하여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초야에 숨어 사는 어진 이를 찾게 하고, 또 충신ㆍ효자의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니, 노인이 시 두 편을 지어 내상(內相) 왕융(王融)에게 바쳤다. “구천(九天)에 빛이 움직여 별들이 구르는데, 일패(日旆)ㆍ용기(龍旗)가 모두 바다를 따라 순행(巡行)하네. 계림(鷄林)의 누런 잎은 일찍부터 쓸쓸하기도 하더니, 흐릿한 꽃은 이제 다시 상원(上園)의 봄이로다.” 하고, 또, “충신ㆍ효자의 정문(旌門)으로 거리는 광채가 나고, 언덕과 구렁에는 숨은 선비 찾는다고 떠들썩하네. 내 비록 전날 주 나라 늙은이를 따라가지는 못했으나, 지금 다행이 중국의 위의(威儀)가 새로움을 친히 보노라.” 하였다.

최승로(崔承老)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나이 열두 살 때에 태조가 불러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겨 원봉성(元鳳省) 학생(學生)에 소속시키고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였으며, 정례(定例)로 녹봉 20석을 주었다. 이로부터 문병(文柄)을 맡겼다. 성종 때에 정광(正匡)이 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 되었으며,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량(崔亮)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글을 잘 지었다. 성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불러 사우(師友)로 삼았더니, 왕위에 오르자 드디어 발탁하여 썼더니, 매우 사람들의 여망(輿望)에 맞았다. 벼슬이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빈(匡彬)이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항(崔沆) 언위의 손자이다. 장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목종이 그를 중히 여겨 정사의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반드시 그와 의논하였다. 김치양(金致陽)이 반역을 꾀하자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현종(顯宗)을 맞이하여 세웠다. 정당문학 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를 거쳐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를 내리고, 청하현개국자(淸河縣開國子)로서 식읍(食邑) 5백 호를 봉하였으며, 또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를 더 주었다. 시호는 절의(節義)이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주좌(李周佐) 목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상서 판어사대사(刑曹尙書判御史臺事)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40여 년 동안 벼슬하였는데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최제안(崔齊顔) 승로의 손자이다. 현종ㆍ덕종ㆍ정종ㆍ문종 등 4대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에 이르렀다. 시호는 순공(順恭)이다. 문종의 묘에 배향하였다.

김부일(金富佾) 그의 조상은 신라의 종성(宗姓)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때에 벼슬이 검교 태보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사 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部事上柱國)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문장이 화려하고 풍부하였다. 모든 외교 문서에는 반드시 그에게 윤색(潤色)하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아우 부의(富儀)ㆍ부식(富軾)과 함께 모두 문한시종(文翰侍從)이 되었으므로 그의 어머니를 태부인(太夫人)에 봉하고, 해마다 관에서 곡식을 내려주었다.

김부의(金富儀) 숙종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체직되어 직한림원이 되었고, 인종 때에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판상서예부사 감수국사 주국(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監修國史柱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김부식(金富軾) 숙종 때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되었으며 우사간(右司諫)을 지냈다.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은 국구(國舅 인종의 외조부)이므로 그에 대한 예수(禮數)는 다른 신하들과는 같게 할 수 없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거기에 따랐으나, 부식만이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예를 바르게 해야 하며, 사사로이 대할 때에는 아비와 자식의 친함을 온전히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묘청(妙淸)이 조광(趙匡)ㆍ유참(柳旵) 등과 함께 서경(西京)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부식이 원수(元帥)가 되어 서도(西都)를 평정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검교 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에 임명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여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侯)를 봉하고 식읍 1천 호를 주었다. 7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사람됨이 체격이 아주 장대하며 낯은 검고 눈은 불거졌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송 나라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부식이 그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그 부사(副使) 서긍(徐兢)이 부식이 글 잘 짓고 고금의 일에 통달함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으면서 부식의 가계(家系)를 실었으며, 또 그의 초상화를 그려 가지고 가서 황제에게 아뢰니, 마침내 사국(司局)에 명하여 판(板)에 새겨서 그것을 널리 전파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뒤에 사신으로 송 나라에 갔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예로 대우하였다. 세 번 예부(禮部)의 일을 맡았는데, 선비를 잘 뽑았다고 칭찬하였다. 문집 20권이 있다.

김한충(金漢忠) 신라 대보(大輔) 알지(閼智)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뛰어나며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종 때 윤관(尹瓘)에게 여진(女眞)을 치도록 명했을 때에, 한충이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힘껏 싸워서 전공(戰功)이 있었다.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김인위(金因渭) 김부(金溥)의 후손이다.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경용(金景庸) 용모가 걸출하면서도 잘생겨 고귀하고 깨끗한 풍채가 있었다. 각문지후(閣門祗侯)로 광주 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정사하는 것이 까다롭지 않았다. 숙종ㆍ예종 두 대에 벼슬하여 병부ㆍ호부ㆍ공부의 상서(尙書)와 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문하시중 상주국에 승진하였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 판상서이형부사 낙랑군 개국백(協謀衛社致理功臣判尙書吏刑部事樂浪郡開國伯)에 가자(加資)되고, 식읍 수백 호를 받았다.

김인규(金仁揆) 과거에 급제하여 좌승선(左承宣)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고, 예종조에 지주사(知奏事)로 승진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수태위 평장사(守太尉平章事)에 이르렀다.
노영순(盧永淳)
기계(杞溪) 사람으로, 의종조에 춘주도(春州道)에 왜구가 횡행하니, 임금이 영순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의정(懿貞)이다.

김군수(金君綏) 부식의 손자이다. 명종조에 장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고, 좌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조충(趙冲) 대신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역적 한순(韓恂)과 다지(多智)를 베어 그들의 머리를 함에 넣어서 서울로 보냈다. 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자기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드디어 군수(君綏)를 한남(漢南)으로 귀양보내니, 당시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김인경(金仁鏡) 처음 이름은 양경(良鏡)이었다. 재주와 식견이 정밀하고 명민하여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충을 따라 글안(契丹) 군사를 강동성(江東城)에서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인경은 문(文)ㆍ무(武) 재주가 모두 넉넉하였으며, 천품이 맑고 아름다워서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낭서(郞署)에서부터 상부(相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요한 문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왕공이나 부녀로부터 소 치는 아이와 말 모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최여해(崔汝諧) 천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울주 통판(蔚州通判)에 보임되었다. 처음 명종이 익양공(翼陽公)으로 있을 때에, 여해가 그 부(府)의 전첨(典籤)으로 있었다. 하루는 꿈에 태조가 명종에게 홀(笏)을 주니 명종이 그것을 받고 어좌(御座)에 앉으니, 여해가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하례하였다. 잠이 깬 뒤에 기이하게 여겨 명종에게 고하였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여해가 축하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서울에 이르러 환관(宦官)을 통하여 아뢰니, 임금이 비로소 놀라며, “최전첨이 왔구나.” 하고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곧 좌정언(左正言)에 임명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하여 추밀원사 산기상시(樞密院使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사직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추밀원에 자리가 찼으니 진실로 오늘의 은혜와 영광을 알겠으며, 북궐(北闕)에서 임금께 알현하였으니 비로소 당년(當年)의 꿈의 맞음을 믿습니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고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은 그에게 특별히 정당문학을 제수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연성(金鍊成) 인경의 아들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김승무(金承茂) 연성의 아들이다. 재주와 식견이 있었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한림(翰林)을 거쳐 여러 번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김경손(金慶孫) 고종 때 사람이다. 성품이 장중(莊重)하고 온화하며 너그럽고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며 담략(膽略)이 있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민간이나 조정에서 그를 의지하였는데, 갑자기 최항(崔沆)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김혼(金琿) 경손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대장군 중찬(大將軍中贊)이 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간 뒤에는 임시로 행성사(行省事)를 서리(署理)하였다. 뒤에 낙랑군(樂浪郡)으로 봉하고,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이전(李瑱) 널리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며, 시를 잘 짓는다고 명성이 났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와 정승(政丞)을 지냈으며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이제현(李齊賢) 진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선왕이 연저(燕邸)에 있을 때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말하기를, “중국 서울에 있는 문학하는 선비들은 모두 천하의 일류(一流)들이다. 나의 부중(府中)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 하고, 제현을 불러들여 북경으로 오게 하였다. 그때는,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충선왕과 교류하였는데, 요수 등이 제현을 칭찬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읊은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충선왕이 강남에 강향사(降香使)로 갔을 때에 제현도 따라갔다. 왕이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흥(興)을 붙이고 회포를 풀 때마다, “이런 곳에 이생(李生)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연경(燕京)과 강남에 시종(侍從)한 공으로 왕이 황제께 아뢰어 고려 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뒤에 다시 원 나라에 갔을 때에, 원 나라가 우리나라를 한 성(省)으로 만들려 하였다. 제현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자, 그 논의가 드디어 중지되었다. 충선왕이 토번(吐藩)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에 제현이 원 나라 낭중(郞中)과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렸더니, 얼마 뒤에 황제가 타사마(朶思麻) 지방으로 양이(量移)하게 하였으니, 이는 배주의 주청(奏請)에 따른 것이다.
제현이 환국(還國)한 뒤에 뭇소인들이 더욱 어지럽게 선동하고 있으므로 제현이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지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현을 섭정승(攝政丞)으로 명하여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권단(權斷)하게 하였다. 그때 임금이 아직 원 나라에 있어서 나라가 비었는데도 제현의 일처리가 타당하여 사람들이 안정될 수 있었다. 벼슬이 문하시중 계림부원군(門下侍中鷄林府院君)에 이르렀다. 국사(國史)를 자기 집에서 찬수(撰修)하였는데, 사관(史官)과 삼관(三館)이 모두 모였다. 젊을 때부터 동료들이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益齋)라는 그의 호로 불렀다. 뒤에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윤신걸(尹莘傑) 기계(杞溪) 사람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평리 기성군(僉議評理杞城君)에 이르렀다.

이인기(李仁琪)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풍채가 아름답고, 예법(禮法)에 익숙했으며, 무용(武勇)으로 이름이 났다. 호군(護軍)이 되어서 중방(重房)의 여러 장군들이 권세를 믿고 기를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그들에게 대항하고 질책하여 충선왕에게 호소하였다. 충선왕은 비록 인기가 곧다고 생각하였으나 여러 장군들은 모두 중국의 부인(婦人)과 환관(宦官)의 당(黨)이므로 마지못하여 인기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순서를 뛰어 넘어 지언부사(知讞部事)를 제수하였으며, 곧 판문하사(判門下事)로 승진시켰다.

최해(崔瀣) 치원(致遠)의 후손이다.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충숙왕 8년에 원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 예문관(藝文館)ㆍ성균관(成均館)ㆍ전교시(典校寺)의 삼관(三館)이 영빈관(迎賓館)에 나가서 그를 영접하였다. 벼슬이 검교(檢校)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최해는 재주가 기이하고 뜻이 고상하여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고 습속에 빠지지 않고 옛 사람과 합치되기를 힘썼다. 원 나라 연우(延祐) 연간에 처음 과거가 시행되자 조서를 듣고 말하기를, “배운 것을 시험해볼 만하다.” 하더니, 이윽고 과연 제과에 합격하였다. 같은 해에 장원 급제한 송본(宋本)이 그의 재주를 칭찬하여 여러 번 시(詩)에 썼다. 최해가 일찍이 동래현(東萊縣)을 지나다가 해운대(海雲臺)에 올라서 합포 만호(合浦萬戶) 장선(張瑄)이 소나무에 시를 써 놓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 이 나무가 무슨 액운이 있어서 이런 졸렬한 시를 만났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그 부분을 파내어 버리고 흙을 발랐다. 안동(安東)에 이르렀을 때에, 장선이 듣고 성내어 맹장(猛將) 3ㆍ4명에게 뒤쫓아가서 잡으라고 하였다. 하인 한 사람을 잡아 가지고 돌아가서 문 밖에 큰 칼을 씌워 세워 놓았다. 최해는 몰래 죽령(竹嶺)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래서 크게 유림(儒林)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뒤에 성남(城南)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더니, 늦게 사자갑사(獅子岬寺) 중에게서 밭을 빌려 경작하여 농장을 열어서 자급자족하고, 스스로 호(號)를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하였다. 《좌우명(座右銘)》과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의 저술이 있다.

이달충(李達衷) 충숙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공민왕 원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전임하였으며,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승진되었다. 15년에 명유(名儒)로 뽑히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굽히지 않았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었다. 일찍이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있다가, 돌아올 때에 우리 환조(桓祖)가 들에서 그를 전별하였는데, 우리 태조가 환조 뒤에 서 있었다. 환조가 술을 권하니 달충이 서서 마시고, 태조가 권하니 꿇어앉아서 마셨다. 환조가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분은 진실로 범인(凡人)과 다른 사람이니, 공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공의 가업(家業)을 이분이 필시 크게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자기 자손을 부탁하였다. 그의 저서(著書)로 《제정집(霽亭集)》이 세상에 전한다. 그의 시문(詩文)은 이제현이 크게 칭찬하였다. 신돈(辛旽)이 한창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달충이 일찍이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상공(相公)이 주색(酒色)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니, 신돈이 좋아하지 않았다. 신돈이 처형되자 달충이 시를 지었는데, “범의 위엄을 빌리니 곰들도 두려워하고, 사내로서 미혹하니 계집들 따랐네. 누런 개와 푸른 매 더욱 미우니, 새들과 백마(白馬) 무슨 죄런고?” 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보림(李寶林) 제현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엄하고 굳세며 방정(方正)하고 정사의 재주가 있었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이성서(李成瑞) 충정왕(忠定王) 때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공민왕이 즉위해서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승진시켰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파천(播遷)하면서 성서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에 임명하였더니, 군사를 징집하는 데에 공이 있었다. 덕흥군(德興君)의 변란 때에는 최영(崔瑩)을 따라서 역적을 치는 데에 또한 공이 있어서 모두 공 1등에 책정되었다. 원 나라에 가서 새 해를 축하하고, 태위감대경(太尉監大卿)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하여 뜻과 절조가 있었다.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서기(水原書記)에 임명되고, 선발되어 사한(史翰)에 보직(補職)되었다.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 등과 서로 잘 지냈으며, 강론(講論)을 쉬는 날이 없었다.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고, 15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신돈이 정권을 잡아 참람하고 불법(不法)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존오가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극언(極言)하였다. 그때 신돈이 임금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존오가 신돈을 지목하여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한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상에서 내려 앉았다. 임금이 더욱 성내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시켰다. 국인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이존오는 참 정언(正言)이다.” 하였다. 뒤에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살면서 근심과 분함으로 병에 걸렸다. 위독해졌을 때에,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도 기세가 성한가?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겠다.” 하더니, 자리에 다시 눕기도 전에 죽으니, 나이 31세였다. 죽은 지 석 달만에 신돈이 처형되었다. 임금이 그의 충성을 사모하여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증직하였다.

김진양(金震陽)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10년이 못 되어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고,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조준(趙浚) 등의 죄를 논핵(論覈)하였더니 대간(臺諫)들이 번갈아 소를 올려, “진양의 무리가 일을 만들어 내어 화란(禍亂)에 이르게 합니다.” 하여, 곤장 맞고 먼 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호(號)를 초옥자(草屋子)라 하였으며, 이숭인(李崇仁)이 전(傳)을 지었다.

김자수(金子粹) 자는 순중(純仲)이다. 공민왕 말년에 장원 급제하였다. 신우(辛禑) 초년에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일을 논하다가, 전라도 돌산수(突山戍)로 좌천되었다. 공양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뒤에 본조에 벼슬하였다.

본조
설장수(偰長壽) 원 나라 숭문감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설손이 원 나라 말기 공민왕 때에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로 왔다. 장수는 벼슬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뒤에 본조에 벼슬하였다. 관향(貫鄕)을 정해 주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계림으로 관향을 삼도록 하였다.

 김균(金稛) 인위(因渭)의 후손이다. 태조조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이래(李來) 존오(存吾)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였고, 좌명 공신(佐命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설순(楔循) 손의 손자이다.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두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김맹성(金孟誠) 균의 아들이다.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희경(僖敬)이다.

김신민(金新民)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아들 승경(升卿)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문형(李文炯)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풍채가 옥같이 아름다우며 문아(文雅)하기로 유명하였다.

이윤인(李尹仁)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안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정효상(鄭孝常) 갑술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익대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손소(孫昭) 과거에 급제하였다. 적개 공신(敵愾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여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졌다.
김영유(金永濡)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신증』
김천령(金千齡)병진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났다.
최숙생(崔淑生) 과거에 급제하였다. 시문(詩文)을 잘 하였는데, 더욱 사륙체(四六體)에 능하였다. 호는 충재(盅齋)이다.
손중돈(孫仲暾) 소(昭)의 아들이다. 천성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우거】 고려
오세재(吳世才) 고창군(高敞郡)의 인물조에 자세히 나온다.
안치민(安置民) 자는 순지(淳之)이고, 호는 기암(棄菴)이다.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정동성(征東省) 막료(幕僚)로 있을 때에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시의 격조가 높음은 황정견(黃庭堅)의 체(體)보다 낫고, 문장이 풍부하기는 오히려 유자후(柳子厚)의 풍(風)이 있도다. 다만 나라를 빛내는 솜씨가 되지 못하고, 풀 사이 가을 벌레 우는 것을 배움이 한스럽다.” 하였고, 또, “눈썹은 실처럼 드리워졌고, 눈동자는 물같이 맑구나. 내가 방덕공(龐德公)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대를 보니 그인가 하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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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
낭산(狼山) 부(府)의 동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토함산(吐含山)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동악(東嶽)이라고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금강산(金剛山)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
비월동산(非月洞山) 부의 서쪽 67리에 있다.
명활산(明活山)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선도산(仙桃山)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악(西嶽)이라 불렀다. 혹은 서술(西述)ㆍ서형(西兄)ㆍ서연(西鳶)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함월산(含月山)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남악(南嶽)이라 불렀다.
금오산(金鼇山)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 당 나라의 고운(顧雲)이 최치원에게 지어준 시에,
               “들으니 바닷가에 세 마리의 금오(金鼇)가 있어,
                머리 위에 높디 높은 산을 이었다[戴]네.
                산 위에는 구슬궁[珠宮]ㆍ진주대궐[貝闕]ㆍ황금전(黃金殿)이요,
                산 밑에는 천리 만리 끝없이 넓은 물결,
                그 곁에 한 조각 계림(鷄林)이 푸른데,
                금오산이 정기(精氣)를 모아 기특(奇特)한 인재 낳았네.” 하였다.

형산(兄山) 안강현(安康縣) 동쪽 21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고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울개산(蔚介山)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복안산(伏安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묵장산(墨匠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지화곡산(只火谷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단석산(斷石山)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구해가지고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修鍊)하였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 하였다.” 한다.
자옥산(紫玉山) 안강현(安康縣)의 서쪽 13리에 있다.

달성산(達城山) 안강현 남쪽 13리에 있다.
비학산(飛鶴山) 신광현(神光縣) 서쪽 5리에 있다.
인박산(咽薄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김유신이 보검(寶劍)을 지니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고유(告由)하여 병법(兵法)을 기도하던 곳이다.” 한다.
박가리산(朴加利山) 자인현(慈仁縣) 동쪽 20리에 있다.
점산(簟山) 자인현 북쪽 16리에 있다.
사라현(舍羅峴)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건대령(件代嶺) 부의 동쪽 36리에 있다.
여근곡(女根谷) 부의 서쪽 41리에 있다. 세간에 전하기를, “백제의 장군 우소(亏召)가 여기에 복병(伏兵)을 숨겨둔 것을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각간(角干) 알천(閼川)에게 습격하게 하여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다 죽였다.” 한다. 이것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중의 한 가지이다.
성현(成峴) 부의 북쪽 58리에 있다.
팔조령(八助嶺) 부의 동쪽 53리에 있다.
마북산(馬北山) 신광현(神光縣) 북쪽 26리에 있다.
시령(柹嶺) 부의 동쪽 54리 장기현(長鬐縣)의 경계에 있다.
추령(楸嶺)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성령(筬嶺)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치술령(鵄述嶺) 부의 남쪽 36리에 있다.  『신증』 신라 때에 박제상(朴堤上)이 왜국(倭國)에서 피살되자, 그의 아내가 이 재에 올라 바라보며 울다가 죽었다.

바다 부의 동쪽 54리에 있다.
팔조포(八助浦) 부의 동쪽 53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형산포(兄山浦) 안강현(安康縣)의 동쪽 24리에 있다. 어량(魚粱)이 있으며 굴연(堀淵)의 하류이다.
동천(東川) 북천(北川)이라고도 하고, 알천(閼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추령에서 발원(發源)하여 굴연으로 흘러들어간다. 서천(西川)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발원지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인박산(咽薄山)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묵장산(墨匠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지화곡산(只火谷山)에서 발원한다. 합류(合流)되어 형산포로 흘러들어간다.
온지연(溫之淵) 안강현의 동쪽 24리에 있다. 용당(龍堂)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굴연천(堀淵川)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어량이 있으며 서천(西川)의 하류(下流)이다.
사등이천(史等伊川) 황천(荒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24리에 있다. 토함산(吐含山)에서 발원하여 서천으로 흘러들어간다.
문천(蚊川)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사등이천의 하류이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동황(東皇)이 한 손으로 내려주신 은택, 만물이 골고루 받았구나.
            꽃 마음은 화한 바람에 놀래고, 새들의 성질도 화사한 기운을 느끼는구나.
            붉고 붉은 빛은 홍도화에 오르고, 희디 흰 빛은 오얏꽃을 찾았구나.
            꾀꼬리 혀는 가동(歌童)과 다투고, 제비의 허리는 춤추는 기녀(妓女)를 깔보네. 
           고운 봄날을 맞이하여, 경치 좋은 곳 찾아가네. 
           토령(兎嶺)의 정상에 올라보고, 문천의 물가를 따라가네.
           공중을 우러러 아득히 바라보고, 언덕에 올라서서 고요히 귀 기울이네.
           첩첩한 산은 병풍처럼 둘러있고, 출렁이는 물은 거울처럼 반짝이네.
           구름 끝엔 황곡(黃鵠)이 붙어 날고, 수면에는 붉은 잉어 뛰노네.
           혜초(蕙草) 난초의 그윽한 향기 움키고, 연(蓮)과 마름꽃은 먹음직하다.
           아름다운 경치는 만나기 어렵거니, 부생(浮生)을 어찌 오래 믿을쏘냐.
           세상 밖의 놀음을 하려 한다면, 인간의 얽매임을 버려야 하네. 
           붓을 놀려 미친 듯 시를 써보고, 술잔을 들어 취함을 자랑하네.
           시비(是非)는 모두 통발[筌]을 잊은 듯하고, 영췌(榮悴)도 함께 헌신짝 벗듯 하네.
           푸른 술 아직도 다하지 않았는데, 붉은 해는 어느덧 서산을 넘어가네.
           이 저녁은 어느 때며, 이 몸은 누구집 아들인가.
           만약에 봉래산(蓬萊山)의 신선(神仙)이 아니라면, 참으로 칠원리(漆園吏)이리.
          뜨고(浮) 쉼(休)[삶과 죽음을 말하며 장자에 나온다]에도 오히려 마음을 잊었으니,
           가는 것과 머무름을 내 어찌 생각에 두랴.
          머리 들어 산수(山水)를 하직하고, 부축받으며 발길을 돌리노니,
          오직 두려운 건 수레 몰고 말 타는 마당에서, 아침 일찍부터 명리(名利)를 따르는 것.” 하였다.
○ 또 불계시(祓禊詩)에는,
        “금년 봄 날씨 궂어 시원하게 갠 적 없고,
         열흘이나 장마비는 강물을 뒤엎은 듯 즐거워라,
         홀연히 씻은 듯 구름 걷히니,
         남산(南山) 1만 송이 푸른빛 소라[靑螺] 드러나네.
         산의 세찬 형제 5백 리를 치닫다가,
         중도에 구부러져 비스듬히 솟았네.
         그 아래 한 줄기 문천이 있으니,
         만 번 꺾고 천 번 서려 구불구불 흐르네.
         월정교(月精橋) 어귀 향해 달려 나아가니,
         놀란 물결 부서져 옥을 울리는 소리로다.
         엄장루(嚴莊樓) 아래 와선 흐름 차츰 질펀하여,
         물결은 잔잔하고 모래는 평편하여 비단을 펼쳐 놓은듯.
         낙읍(洛邑)의 모든 선비 10만 명이 물에서 불계(祓禊)하니,
         어깨 서로 닿았구나.
         양신(良辰)과 미경(美景)은 예부터 함께 갖기 어려운데,
         영화(永和)의 난정(蘭亭) 같은 성한 모임을 뉘라서 사양하리.
         더구나 나는 젊어서부터 방광(放狂)하니,
         붉은 놀잇배 끌고 흰 물결 저어 가려네.
         어째서 총총히 학사(學舍)로 향할쏘냐.
         자리를 맞대고 우리 함께 금잔을 기울이세.
         포도주 넘친 듯한 푸른 물빛 움킴직하구나.
         실컷 술 마셔 붉은 낯빛 된 줄을 몰랐네.
         맑게 즐겨 반쯤이나 취했을까. 손은 아직 가지 않았는데,
         대숲 저 편에서 붉은 해가 먼저 지네.
         취한 김에 의기(意氣)가 갑자기 솟아
         청천(靑天)에 올라가서 노양(魯陽)의 창 휘두르고자하였다.

     *노양의 창-노(魯)나라 양공(陽公)이 한(韓)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해가 지자,
      양공이 해를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창을 휘두르니, 해가 뒤로 3사(舍 1사는 30리)를 물러갔다 한다.
토상지(吐上池)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신증』 고위산(高位山)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토산】
백반(白礬) 사라현(舍羅峴)에서 난다.
사철(沙鐵) 부의 동쪽 팔조포(八助浦)에서 난다.
석유황(石硫黃) 비월동산(非月洞山)에서 난다.
전복[鰒]ㆍ연어(鰱魚)ㆍ넙치[廣魚]ㆍ은어[銀口魚]ㆍ대구(大口)ㆍ홍합(紅蛤)ㆍ청어(靑魚)ㆍ방어(魴魚)ㆍ황어(黃魚)ㆍ홍어(洪魚)ㆍ김[海衣], 미역[藿] 바다 속에 나물이 있으니 속명(俗名)으로 미역[藿]이라고 한다. 그 종류는 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와 같은 것으로서 통틀어 미역이라 한다.
송이[松蕈]ㆍ잣[海松子]ㆍ꿀[蜂蜜]ㆍ옻[漆]ㆍ산무애뱀[白花蛇]ㆍ천문동(天門冬)ㆍ하수오(何首烏)ㆍ오수유(吳茱萸)ㆍ산수유(山茱萸) 『신증』 왜저(倭楮)ㆍ농어[鱸魚]ㆍ문어(文魚)ㆍ송어(松魚)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4천 75척, 높이가 12척이며, 성안에 우물 80개가 있다.
부산성(富山城) 부의 서쪽 32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6백 척, 높이가 7척이었는데, 지금은 반이나 무너졌다. 성안에 내[川]가 넷, 못이 하나, 샘이 아홉 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감포영(甘浦營) 부의 동쪽 72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을 둔다. 『신증』 정덕(正德) 임신년에 돌로 성을 쌓았다. 둘레가 7백36척,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형산 봉수(兄山烽燧) 동쪽으로 영일현(迎日縣) 사화랑산(沙火郞山)의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永川郡) 소산(所山)의 봉수에 호응한다.
하서지 봉수(下西知烽燧) 부의 동쪽 63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蔚山郡) 유포(柳浦)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독산(禿山)에 호응한다.
독산 봉수(禿山烽燧) 부의 동쪽 54리에 있다. 남쪽으로 하서지(下西知)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장기현(長鬐縣) 복길(卜吉)에 호응한다.
대점 봉수(大岾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 가리산(加里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동악(東岳)에 호응한다.
동악 봉수(東岳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대점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고위산 봉수(高位山烽燧)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동쪽으로 동악에 호응하고, 남쪽으로 소산(所山)에 호응하며, 서쪽으로 내포점(乃布岾)에 호응한다.
내포점 봉수(乃布岾烽燧) 부의 서쪽 26리에 있다. 동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주사산(朱砂山)에 호응한다.
주사산 봉수(朱砂山烽燧) 부의 서쪽 42리에 있다. 동쪽으로 내포점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永川郡) 방산(方山)에 호응한다.
소산 봉수(所山烽燧) 부의 동쪽 68리에 있다. 남쪽으로 언양현(彦陽縣) 부로산(夫老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궁실】
집경전(集慶殿)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아태조(我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화상[睟容]을 봉안하였다. ○ 참봉(參奉) 2인.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신전(神殿)은 엄숙하고 깊은데, 새벽 햇빛 밝게 오르네.
         요지(瑤池)에 채장(綵仗)이 벌여 있고, 비단 문턱에 향연(香煙)이 둘렀구나.
         궁관(宮官)이 창합(閶闔 궁궐의 정문) 여니, 푸른 무늬 놓은 문이 깊고도 그윽하네.
         소신(小臣)이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리며, 목목(穆穆)하신 천표(天表 제왕의 의(儀))를 우러르니,
         용안(龍顔) 일각(日角) 준상(俊爽)함이 천하에 드물도다.
         어찌 뜻하였으랴, 중동(重瞳)의 빛, 신묘한 화필(畫筆) 끝에서 나왔을 줄이야.
         삼가고 두려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옵고, 흥건히 땀만 흘러 도포 함빡 적시었네.
         아, 나의 출생(出生) 너무나 늦었으니, 정호(鼎湖)의 궁검(弓劍)이 아득하여라. 
     *정호의 궁검(황제(黃帝) 늙어 정호(鼎湖)에서 용(龍)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자  그 신하들이 그가 평일에 쓰던 활[弓]과 검(劒)을 붙들고 울었다 한다.
         크도다, 제세안민(濟世安民)하신 공적 하늘과 같이 넓으셨고,
         고려 이미 운(運) 다하여 병란(兵亂)이 연이었네. 
         비 바람에 시달리며 노고함이 몇 해런고, 남으로 출정하고 북에서 토벌하셨네.
         밝은 전략 하늘과 꾀하시니, 신병(神兵)은 이로 인해 적을 빨리 소탕(掃蕩)했네.
         드디어 삼한(三韓)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음에서 벗어나서 태평세계 맞게 했네.
         육룡(六龍)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 올라가니[왕위에 오르시니], 태양의 수레 황도(黃道)에 올랐도다.
         화산(華山)의 남쪽에 수도(首都)를 정하시니, 이 서울 주(周) 나라의 풍(豐)ㆍ호(鎬)와 비등하구나.
         태평(太平) 제도를 넓혀 베푸니, 문물(文物)은 지극히 아름답고 빛나도다.
         전조(前朝)의 규모를 누(陋)하게 보니, 자손에게 규모를 끼침이 어찌 초초(草草)할까 보냐.
         크게 나타내는 신성(神聖)한 자손 있어,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다함이 없을지고.
         남기신 화상(畫像)은 옛 도읍을 진압(鎭壓)하고, 황령(皇靈)은 저 하늘 높이 계시리.” 하였다.

객관(客館)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신라가 계림(鷄林)에 도읍하였더니,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자, 나라가 없어지고 경주(慶州)로 되었다. 얼마 뒤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였으며, 성종(成宗)은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유수를 폐지하고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강등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 유수를 다시 두었으며, 중간에 변고(變故)를 겪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였다. 고종(高宗)은 다시 유수로 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은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일컬었다. 아조(我朝)의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15년에 다시 경주부로 하고,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 때에 태조강헌대왕의 화상을 집경전에 모시었다.
경주부는 경상(慶尙) 전도에서 제일 크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고, 백성은 부유하며 많다. 인심은 순박하여 옛날 신라 때에 유풍(遺風)이 있다. 여기저기에 경승지(景勝地)와 옛 현인(賢人)들의 유적(遺跡)이 있어 전대 인물들의 풍류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거정(居正)이 젊었을 때에 영남(嶺南)을 유람하여 여러 이름난 곳을 거쳐 경주에 이르니, 번화함과 아름다움이 실로 동남(東南)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었다. 다만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의풍루(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조망(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시원히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경주로 된 것이 고려 때부터 이미 5백 년이 된다. 이 고을에 원으로 온 이가 어진 이는 몇 사람이며, 유능한 이는 몇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 한 사람도 퇴락(頹落)한 객관을 수리한 사람이 없어 이 지경이 되게 했단 말인가.’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내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자헌대부(資憲大夫) 김담(金淡)이 부윤(府尹)이었으며, 승의랑(承議郞) 신중린(辛仲磷)이 통판(通判)이었다. 감사(監司) 복천(福川) 권개(權愷)공이 의풍루 위에서 나를 위하여 주연을 열었다.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였더니 부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있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重修)하기로 하고, 재목을 축적하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세.’ 하였다. 감사가 듣고 또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경주 객관이 새로 되는 것에 운수가 있는 게로군. 어진 부윤이 있고 어진 통판이 있고 또 어진 감사가 있어 뜻이 같고 의논이 합치하였으니 일은 기일을 지정하여 할 수 있게 되었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부윤은 이조판서가 되어 소환되고, 계미년 여름에 봉원(蓬原) 정흥손(鄭興孫)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다. 신통판(辛通判)이 일의 유래를 자세히 사뢰고, 객관의 옛터에다 규모를 더 크게 경영하여 지으려고 하니, 고을의 대족(大族)인 지금 영의정 고령부원군(領議政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공과 대사성(大司成) 김영유(金永濡)공이 그 일을 가상히 여겨 대목[梓人] 서휴(徐休)를 보내어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대청(大廳) 5칸을 세우니 앞 뒤에 툇마루가 있고, 크고 시원하고 널찍하다. 동편과 서편에 헌(軒)이 있으니, 각각 상방(上房)과 곁방[挾室]이 있어 서늘하고 따뜻함이 알맞게 되어 있다. 단청을 하니 무늬와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보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갑신년 겨울에 신통판이 감찰(監察)이 되어 돌아가니, 양석견(楊石堅)공이 와서 수선하여 낭무(廊廡)를 날개처럼 붙이고 담을 둘러쌓아 공사가 완성되었다. 병술년 봄 정월에 정부윤이 임기가 차서 소환되고, 화성(和城) 최선복(崔善復)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으며, 2월에는 양통판(楊通判)이 체직되고 정란손(鄭蘭孫)이 이어 통판이 되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사는 두 후(侯)가 조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루는 신공(辛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주의 동헌(東軒)이 새롭게 되었는데, 의풍루가 또 불타 버려서 선유(先儒) 가정(稼亭) 이선생(李先生)의 기(記)도 따라 없어졌으니, 경주의 지나간 문적[牒]을 증거할 것이 없네. 일의 시말(始末)을 알기로는 그대 만한 이가 없으니, 부디 기(記)를 써주게.’ 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경주의 부족한 점이라고 여기던 것을 몇 분의 힘으로 한 번에 크게 새로 중수하였으니 어찌 기뻐하며 쓰지 않겠는가. 더구나 《춘추(春秋)》에도 공사를 일으킨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그것은 민사(民事)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이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요즘 수령(守令)이 된 자는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며, 시기는 적당치 못한데 공사를 지나치게 벌려서, 누각(樓閣) 하나를 세우고 청사(廳舍) 하나를 영조(營造)하는 데에도 정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침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김부윤과 신통판이 앞에서 일을 처음 시작하여서는 목재 하나와 돌 한 개도 비용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 정부윤과 양통판은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면서 부리기를 때맞추어 하였으니, 이 몇 분의 경우에는 춘추(春秋)의 예(例)를 보더라도 포장(褒獎)하고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거정은 직책이 예원(藝苑)에 참여하여 있으니 글을 잘 못한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기에, 우선 일의 대개를 써서 돌려 보낸다. 최(崔)ㆍ정(鄭) 두 후(侯)의 명성에 관한 것은 계속하여 쓸 사람이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영청(營廳) 경주부가 예전에는 관찰사(觀察使)의 본영(本營)이었으므로 감영(監營)의 청사가 있다.

【누정】
빈현루(賓賢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에,
“금상(金上) 23년에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익생(金益生)공이 경주(慶州)에 부윤으로 갔다.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옛 도읍터이다.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남방의 으뜸이다. 김공이 정사를 본 지 두어 달 만에 해이하였던 정사가 경장(更張)되고, 적체되었던 소송(訴訟)이 처리되니 덕화(德化)는 펴지고 명성은 드러났다. 이듬해 관계(官階)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니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하루는 공이 통판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은 경내(境內)의 수읍(首邑)으로서 매년 봄가을에는 감사(監司)와 원수(元帥)가 반드시 여기서 무예를 시험하는데, 성밖에 장막을 쳐서 시험장을 삼는다. 그러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위의(威儀)와 형식이 제대로 맞지 않게 된다.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아전들에게 의논하니 아전들이 그 계획에 찬동하였다. 이에 성안 객관의 동편에 터를 잡으니 그곳의 부지가 널찍하고 위치도 매우 적당하였다. 그 전면을 개척하니 화살이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를 시험장으로 만드니 말이 힘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흙을 쌓아서 대(臺)를 만드니 높이가 두어 길[仞]이나 되었다. 그 위에 누(樓)를 세우니 다섯 칸이었다. 바라보면 날아갈 듯하다. 아래로는 수많은 인가를 굽어보고, 여러 산들을 사면에 둘렀으니, 마치 이들을 자리 아래에 둔 듯하다. 한달쯤 되는 동안에 웅장하게 한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짐작할 수 있다. 김공이 임기가 차서 떠나가고, 영가(永嘉) 권극화(權克和)공이 대신하여 부윤이 되어 와서 기둥에 단청을 하여 김공의 뜻을 이어 완성하였다. 권공(權公)은 그 위에 다시 더 빛나게 하려고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를 청하여, 빈현루(賓賢樓)라는 큰 글씨 석 자[三字]를 얻어 편액(扁額)으로 달았다. 이 얼마나 경주의 다행인가.
공은 또 나에게 그 빈현루라는 명명(命名)의 뜻을 자세히 풀이하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성치는 성주(成周)[주나라 문물을 갖춘 성왕과 주공]보다 더 융성함이 없었다. 대사도(大司徒)가 향삼물(鄕三物)로써 어진 이와 능(能)한 이를 천거할 때에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으로 재예(才藝)를 고시(考試)하는 과목을 삼았으며, 《시경(詩經)》 행위편(行葦篇)에, ‘활 쏘기를 이미 고루하였으며 어진 이를 차례대로 손[賓]으로 한다.’ 하였으니 연회로 술 마실 때에도 반드시 활 쏘는 예[射禮]를 먼저 행하였다.
대체로 활을 쏜다는 것은 그 도(道)는 덕(德)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 효용(效用)은 천하에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간성(干城)의 장수와 조아(爪牙)의 무사(武士)도 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임금이 이것을 서두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군사는 천일(千日)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하루라도 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경계하기를, ‘병기(兵器)를 잘 정비하여 문왕(文王)의 빛남을 우러러보게 하며, 무왕(武王)의 큰 공(功)을 선양(宣揚)하소서.’ 하였고, 소공(召公)이 강왕(康王)에게 고(告)하기를, ‘육사(六師)를 크게 베풀어 우리의 덕높은 조상의 명령을 무너뜨리지 마소서.’ 하였다. 성왕과 강왕은 예(禮)를 제작하고 풍악(風樂)을 일으켜서 잘 수성(守成)한 임금이다. 그런데도 주공과 소공이 고하고 경계함이 이러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뜻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중엽(中葉) 이후로 문관(文官)은 안일(安逸)에 빠지고 무관은 놀기를 즐겨하여 누대(樓臺)는 풍악과 노래와 춤의 처소가 되고, 꽃과 달은 놀고 구경하고 음영(吟詠)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아래 윗사람들은 서로 취한 꿈속에서 잊어버려 깨어 있는 이가 없었으니, 점차로 쇠미하고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바다의 도적이 한껏 기세를 펴, 백성들을 무찌르고 살해하여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어, 개와 닭까지도 모두 절멸(絶滅)되고, 사직(社稷)은 이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어찌 오늘날 거울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부터 국세(國勢)의 강한 것과 약한 것,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이 군비(軍備)의 잘 되고 못 된 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대대로 성군(聖君)이 서로 이어 받들어서 안팎이 태평하다. 그러나 또 편안하면서 위태한 것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진 때에 있으면서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않았다. 무사(武士)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3년마다 한 번 시험을 통해 그 준수하고 걸출한 무사를 얻고, 훈련하는 법을 설정하고 봄가을로 훈련하여 그 정예(精銳)를 뽑는다. 이것이 어찌 위무(威武)를 떨치고 선양하여 길이 다스리고 오래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경주의 부윤을 지낸 사람은 몇 사람을 거듭하였으나, 누(樓)를 세운 것은 공이 처음이니, 공은 국가의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다. 뒤를 잊는 군자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의풍루(倚風樓) 객관의 서쪽에 있다. 이곡(李穀)의 시의 서문에,
“내가 동경(東京)의 객사에 이르러 동루(東樓)에 오르니 도무지 아름다운 경치가 없었는데, 서루(西樓)에 오르니 자못 웅장하고 아름답고 시원히 트여서 성곽과 산천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썼다고 하는 의풍루(倚風樓) 석자가 있을 뿐, 제영(題詠)한 것이 없다. 생각하건대,
이 부(府)는 천년구도(千年舊都)로서 옛날 어진 이들의 유적(遺跡)이 곳곳에 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 동경(東京)으로 삼은 지도 또한 곧 5백 년이 되려 한다.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동남에서 으뜸이며, 봉명사신(奉命史臣)의 절월(節鉞)을 잡고 와서 풍속을 살핀 이(감사), 병부(兵符)를 쪼개어 받아 교화(敎化)를 펼친 이(부윤)들 중에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많았다. 내 생각으로는 반드시 홍벽사롱(紅甓紗籠)[붉게 단청칠한 벽에 푸른 사(紗)로 덮은 것. 추앙을 받는 시는 실로 덮었다.]과 은구옥근(銀鉤玉筋)[은(銀) 같고 옥(玉) 같은 좋은 시]이 그 사이에 서로 빛날 것이라 하였는데,
이제 본 바로는 다만 빈헌(賓軒)에 써 놓은 절구(絶句) 한 수(首)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선유(先儒) 김군유(金君綏)가 처음 지은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옛날에 객관에 화재가 나서 시를 쓴 현판들이 따라 다 없어졌다.’ 한다. 그러나 김씨의 시는 어찌 홀로 불타지 않았으며, 화재 뒤에 지은 글은 또한 어찌 보이지 않는가. 어떤 이가 하는 말은 징빙(徵憑)하기에 부족하다.
향교(鄕校)의 유생(儒生) 한 사람이 말하기를. ‘김씨의 시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백년 전의 풍류와 인물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개 그때에는 백성들은 순박하고 정사는 간략하여서 사건이 있으면 곧 처리하고, 흥이 나면 바로 즐겼습니다. 문부(文簿)가 앞에 펼쳐 있고, 풍악이 뒤에 벌여 있어도 남들이 비난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백년이 지난 뒤에는 조급하고 스스로 닦고 조심하기를 힘써서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일도 혹시나 때가 아닐까 두려워하니, 어찌 감히 경치를 찾아 시를 읊어서 썩은 선비라는 비난을 자취(自取)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선생께서는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펼치는 수고로움도 없이, 심신의 경계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일로 삼아 오셨습니다. 풍악(楓岳)과 설악(雪嶽)의 높은 산들을 마음껏 보고, 또 철관(鐵關)을 넘어 동해(東海)에 들어가서는 섬들의 기이하고도 신비스러움을 남김 없이 다 구경하였으며, 드디어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석과 삼일포(三日浦)의 돌에 새긴 붉은 글씨 여섯 자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영랑호(永郞湖)와 경포(鏡浦)에 배를 띄워 사선(四仙)이 놀았다는 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성류굴(聖留窟)에 촛불을 비춰 그 그윽함과 기이함의 극치를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으니, 놀고 구경하는 일에는 마음껏 하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라 고도의 웅장한 형세와 멀리 트인 조망이 이 누(樓)에 다 모였는데 여기에 한마디의 말씀도 없이 간다면 선생을 위하여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내가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다만 시인묵객의 유(流)와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여러 교생(校生)들의 말에 깊이 느낀 바 있고, 또 시대의 변함을 살필 수 있다.’ 하고 인하여 장구 사운(長句四韻)을 지어 이 누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보인다.
        동도(東都)의 문물(文物)이 아직도 번화한데,
        다시 높은 누를 세워 붉은 노을 스치네.
        성곽에는 천년 된 신라 때의 나무요, 여염에는 반가량 절이었네.
        구슬발[珠簾] 걷고 보니 산빛은 그림 같고,
        옥피리 불고 나니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네.
        기둥에 비껴서서 시를 읊고 스스로 웃노니,
        다음에 다시 올때에 홍벽사롱(紅壁紗籠) 필요없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조령(鳥嶺)의 남쪽은 본래부터 이름난 곳과 경치 좋은 땅이 많다고 일컫는다. 거정은 젊을 때에 사마자장(司馬子長)의 뜻이 있어 영(嶺)을 넘어 상주(尙州)에 들르고, 상주를 거쳐 선산(善山)에 갔으며, 화산(花山)을 경유하여 성주(星州)에 이르고, 김해(金海)ㆍ진주(晉州)를 지나서 함안(咸安)과 밀양(密陽)을 찾은 뒤에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는 곧 예전의 계림(鷄林)으로서 신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산수는 빼어나고 풍경은 기절(奇絶)한데, 옛 어진 이들의 유적이 많아서 멀리 노니는 사람의 질탕(跌宕)한 기운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객관이 누추하고 좁은 것이다. 비록 의풍루가 있으나 사면의 처마가 낮게 처져 시루[甑] 속에 앉은 것 같아서 사람을 숨막히게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봉명사신이 되어 다시 오니 부윤 김담(金淡)공이 나를 맞아 누에 올라 조용히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 내가 말하기를, ‘등왕각(滕王閣)은 천하에 이름난 명승으로서 사해(四海)의 호걸(豪傑), 문인(聞人), 재사(才士)들이 등림(登臨)하여 조망하는 자가 매우 많았지만, 왕중승(王中丞)을 만나 비로소 중수되고 한퇴지(韓退之)를 만나 기(記)가 지어졌던 것이다. 이 누를 중수하고 기를 쓰는 일은 과연 누가 하게 될 것일까.’ 하니, 김부윤이 빙그레 웃었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객관의 집이 중수되고 통판(通判) 신중린(辛仲磷)이 나에게 기를 지으라고 하므로 대략 전말을 써서 돌려 보냈었다.
얼마 안 되어 들으니 의풍루가 또 불에 탔다 한다. 불탄 뒤에 새로 짓지 못한 지가 2년이 되었다. 정해년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부윤으로 와서 정사는 잘 닦아지고 폐해는 제거되었다. 이에 누를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고 곧 누의 옛터에다가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해서 경영하여 세우니, 우뚝 솟아 한 도(道)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이를 이어 부윤 전동생(田秱生)과 통판 유자빈(柳子濱)이 더욱 아름답게 꾸며서 공사가 비로소 완성되자, 거정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사물이 흥하고 폐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다. 그러나 한번 성하고 한번 쇠하게 되는 것은 또한 시운(時運)에 관계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신라의 시초에는 하늘이 이인(異人)을 내려 보내어, 원시(原始)의 생활을 개화시키고 나라를 세워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와 어질고 후하게 정치하고, 삼성(三姓)이 서로 전하여 거의 천년 만에 마침내 능히 고구려를 평정하고 백제를 병합하여 동방의 땅을 넓게 차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당사(唐史)》에서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와 시서(詩書)의 나라라고 칭찬한 바로서, 인물의 번화함이 성하였음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경순왕(敬順王)이 국토를 바치고 고려에 항복하기를 오월(吳越)의 전왕(錢王)과 같이 하였으니, 이때부터 이후로는 혹은 주(州)로 되고, 혹은 부(府)로 되며, 혹은 현(縣)으로 되어 연혁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고려가 쇠하자 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누관(樓觀)들은 불타버리고, 풍경이 시들고 손상되었던 것이니, 가정(稼亭) 이 선생의 기를 읽어보면 당시에 변고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조(聖朝 조선(朝鮮)을 가리킴)에서 천지의 만물이 생육되고 변방이 안정한지 이제 백년이 되었다. 경주는 땅은 넓고 민가는 조밀하여, 물산은 풍부하고 재화(財貨)는 넉넉하여 동남(東南) 부고(府庫)의 제일이 되고, 관원도 또한 인재를 얻어서 일이 폐하거나 실추된 것이 없어서 관각(館閣)과 누대(樓臺) 같은 것조차도 다 일신(一新)하게 되었다. 하늘이 전일(前日)에 아끼던 것은 바로 오늘을 기다린 것이 아닐까. 이제 이 누에는 첨유계극(幨帷棨戟)이 순림(巡臨)하고[관찰사가 순찰함을 말함], 시인묵객이 유람할 때, 난간에 기대서서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며 고도(古都)의 흥폐(興廢)를 느끼고, 시대와 사물의 변천을 살펴서 편안하고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정(性情)을 쏟아내어 누에 올라 글짓던 옛 사람의 기상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시대의 성한 일이며, 물리(物理)의 흥하고 폐하는 기틀이 아니겠는가. 아, 평양(平壤)은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서 산하와 인물의 훌륭함이 경주와 더불어 서로 비슷한데, 목은(牧隱) 선생이 일찍이 평양의 풍월루(風月樓)의 기를 썼더니, 거정이 그 중수기(重修記)를 썼고, 가정(稼亭) 선생이 의풍루의 기를 썼는데, 거정이 또 그 중수기를 쓰게 되었다. 거정처럼 재주 없는 몸으로서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의 두 곳에서 이름을 가정ㆍ목은 부자(父子)의 이름을 잇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글이 졸렬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힘껏 기를 쓴다.” 하였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당시에는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일렀더니,
           반월성(半月城)은 비었는데 저녁 노을 잠겼구나.
           마을에는 금불찰(金佛刹)의 청태(靑苔) 낀 비석이 있고,
           지경은 봉래섬[蓬萊鳥] 신선의 집에 잇닿았네.
           북천에 물이 줄어 여울 소리 목메이고,
           서악(西岳)에 구름 달리니 빗발은 비껴오네.
           흥망의 일순간이여, 헌함(軒檻)에 기대서서
           시 읊으며 오사모(烏沙帽) 젖혀 쓰네.” 하였다.

남정(南亭) 주(州)의 남쪽 5리 오릉(五陵)의 북쪽에 있다. 부윤 김담(金淡)이 세운 것이다.
동정(東亭)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 전록생(田綠生)의 시에,
            “반월성은 비었는데 강 달은 희고,
             최고운(崔孤雲) 신선되어 간 뒤 들구름 한가롭다.
             다시 왕찬(王粲)의 등루부(登樓賦)를 지으려 하나, [왕찬은 악양루에 올라 등루부를 지었다.]
             마음속 시정(詩情)이 쉽사리 풀리지 않네.” 하였다.

이견대(利見臺) 부의 동쪽 50리 해안(海岸)에 있다.
○ 세간에 전하기를, “왜국(倭國)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니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근심하여, 죽으면 용(龍)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 ‘나를 동해의 물 속에 장사하라.’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그 유언대로 하고 장사 지낸 뒤에 추모하여 대(臺)를 쌓고 바라보았더니 큰 용이 바다 가운데 나타나 보였다. 그로 인하여 이견대(利見臺)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대 아래의 10보(步) 바다 가운데 네 뿔이 우뚝 솟은 돌이 네 문과 같은 곳이 있는데, 이것이 그 장사한 곳이다. 지금까지 대왕암(大王巖)이라고 일컫는다.
○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신라 때 군왕(君王)의 효자대(孝子臺)에,
             지금 올라보니 이끼 이미 짙었네.
             예정우개(霓旌羽蓋)[왕이 쓰는 물건으로 신문왕을 가리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하고,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은[峻宇雕墻] 터마저 폐하였구나.
             은하수 분명한데 북두(北斗) 보이고, [용이 된 문무왕의 가호로 천지가 청명함]
             연기물결 저편에는 동래(東萊)가 보이는 듯
             가련하다, 물결 위의 흰 갈매기는,
             조수(潮水) 가고 조수 올 때 의구(依舊)히 돌아오네.” 하였다.

금장대(金藏臺) 서천(西天)의 언덕 위에 있다.
『신증』 함벽정(涵碧亭) 의풍루의 남쪽에 있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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