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친일인사 106명' 첫 공개…'을사오적' 중 4인 포함
[노컷뉴스   2006-12-06 18:55:12]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위, 이완용·오제영·최진태 등 확정 발표…09년까지 매년 조사보고서 편찬 예정


정부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민간이 아닌 정부 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결과가 최초로 공개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6일 친일인사 106명의 명단을 최종 확정해 발표했다.
일제초기 일제의 한반도 강점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협력한 사람들이다.
우선 적극적 매국행위를 했던 이완용과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찬의를 지낸 오제영, 의병탄압에 적극 앞장섰던 경찰 최진태,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으로서 일제의 경제침탈에 적극 협력했던 백완혁이 포함돼 있다.
또 친일단체의 대명사인 일진회 회장을 지낸 이용구, 조선총독의 직속 유림기관인 경학원(經學院) 사성을 지낸 이인직,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발행인 선우일 등도 들어가 있다.
이 밖에 군수, 판사, 일본육군소장, 헌병, 남작, 자작 등 다양한 경력자들이 망라돼 있다.
5권으로 이뤄진 보고서에는 또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와 진행과정, 자료의 수집과 분석 방법 등도 담겨 있다.
위원회는 앞으로 법정 활동기간인 2009년까지 매년 비슷한 조사보고서를 펴낼 예정이다.
친일규명위원회는 2004년 3월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위원 11명으로 구성됐으며 지난해 5월31일 발족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최종 확정자 106인 명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6일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의 명단을 확정, 명단과 결정 이유 등을 담은 보고서를 청와대와 국회에 전달했다.
다음은 보고서에 실린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한자 병기).
 
▲이용구(李容九) ▲유학주(兪鶴柱) ▲양재익(梁在翼) ▲김택현(金澤鉉) ▲최운섭(崔雲燮) ▲윤정식(尹定植) ▲원세기(元世基) ▲이범철(李範喆) ▲홍윤조(洪允祖) ▲한경원(韓景源) ▲백남신(白南信) ▲이인직(李人稙) ▲김용곡(金龍谷) ▲이준용(李埈鎔) ▲고영희(高永喜) ▲이재면(李載冕) ▲민종묵(閔種默) ▲윤웅렬(尹雄烈) ▲이건하(李乾夏) ▲이봉의(李鳳儀) ▲이용원(李容元) ▲이범팔(李範八) ▲김낙헌(金洛憲) ▲유동작(柳東作) ▲홍종억(洪鍾檍) ▲이희두(李熙斗) ▲김성규(金聖奎) ▲강병일(姜炳一) ▲박요섭(朴堯燮) ▲최기남(崔基南) ▲강경희(姜敬熙) ▲권봉수(權鳳洙) ▲김명수(金明秀) ▲서회보(徐晦輔) ▲성하국(成夏國) ▲송헌빈(宋憲斌) ▲엄태영(嚴台永) ▲오제영(吳悌泳) ▲이재정(李在正) ▲최상돈(崔相敦) ▲최병혁(崔丙赫) ▲계응규(桂膺奎) ▲최진태(崔鎭泰) ▲백성수(白聖洙) ▲신상호(申相鎬) ▲박제순(朴齊純) ▲이근택(李根澤) ▲임선준(任善準) ▲조중응(趙重應) ▲김성근(金聲根) ▲김학진(金鶴鎭) ▲남정철(南廷哲) ▲민영소(閔泳韶) ▲이근명(李根命) ▲이주영(李胄榮) ▲정낙용(鄭洛鎔) ▲정한조(鄭漢朝) ▲최석민(崔錫敏) ▲박경양(朴慶陽) ▲이봉로(李鳳魯) ▲이준상(李濬相) ▲정인흥(鄭寅興) ▲조원성(趙源誠) ▲조재영(趙在榮) ▲홍승목(洪承穆) ▲홍재하(洪在夏) ▲변일(卞一) ▲신광희(申光熙) ▲선우일(鮮于日) ▲최영년(崔永年) ▲박치상(朴稚祥) ▲김재순(金在珣) ▲유일선(柳一宣) ▲신재영(申載永) ▲조진태(趙鎭泰) ▲백완혁(白完爀) ▲백인기(白寅基) ▲정치국(丁致國) ▲김시현(金時鉉) ▲홍긍섭(洪肯燮) ▲정운복(鄭雲復) ▲한국정(韓國正) ▲김진태(金振泰) ▲백낙원(白樂元) ▲박지양(朴之陽) ▲서창보(徐彰輔) ▲이범찬(李範贊) ▲이학재(李學宰) ▲김사영(金士永) ▲김정국(金鼎國) ▲김재룡(金在龍) ▲김준모(金浚模) ▲김규창(金奎昌) ▲한남규(韓南奎) ▲한창회(韓昌會) ▲한교연(韓敎淵) ▲안태준(安泰俊) ▲신태항(申泰恒) ▲장동환(張東煥) ▲조인성(趙寅星) ▲조덕하(趙悳夏) ▲이종춘(李鐘春)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 ▲이재곤(李載崑) ▲이병무(李秉武)
원본 : 친일인사 10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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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 이지용 (李址鎔)  

● 이지용 (李址鎔) 1870∼1928
자 경천(). 호 향운().
1904년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 협정·조인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1907년(융희1년) 중추원 고문, 중추원의장 
1910년 백작 
 
도박으로 소일한 친일 백작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요 일제의 훈장을 3개나 받았으며 '합병'시 백작을 수여받은 이지용. 그는 한일'합병' 이후에는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날을 보냈다.

고종의 종질이기도 한 이지용이 소유하고 있던 한강변 언덕 위의 우람하게 솟은 양옥집은 도박으로 날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중부 사동(寺洞)의 자택은 완전히 도박장이 되었다.

굳게 닫힌 문 안에는 소위 귀현신사(貴顯紳士) 한무리가 항상 모여서 무뢰한들처럼 도박에 혈안이 되어 있곤 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을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요즈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억대 도박판이 매일 벌어진 셈이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은 굶주리는데 그는 도박귀족으로서 도박판에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귀공자의 청아한 풍모도 없고 위용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풍격도 없었다. 다만 도박배들과 무리지어 무뢰한의 대열에 끼어가고 있는 이지용일 따름이었다. 그가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도박장에서는 믿기 어려웠다.

고종의 종친으로서 입신

이지용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북 완산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은용(垠鎔)이며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즉 사도세자의 5대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의 손자이며 이희하(李熙夏)의 아들인데 완영군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으니 고종의 종질이 된다.

1887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쳤다. 1895년에는 칙명으로 신사 수십 명과 함께 일본을 유람,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89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궁내부 협판이 되고 다시 이듬해 주일전권공사를 거쳐 의정부 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로 부임하였다.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는 등 결코 깨끗치 못한 인물로 통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최응은 매관매직으로 재물을 모아 9개나 되는 곳간에 온갖 보화를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했는데, 이지용도 그런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한편 주일공사를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주한일본공사관과 밀통하였고 결국 1만 엔의 로비 자금에 넘어가서 한일의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만다.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 침략에 문을 열어주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로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일의정서를 협정·조인하였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에게 군사용 부지를 허용하고 일본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내준 조약으로서, 일본에게는 5월의 '대한시설강령', 8월의 '제1차 한일협약'과 함께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으로 가는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예상외로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자 조선 정계의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일본이 러시아의 만주 철병을 요구하며 전쟁을 도발하고 뤼순(旅順)·인천 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기 시작하자, 조선 조정도 일본에 대하여 호의를 표명해 오던 박제순, 윤웅렬(尹雄烈), 이도재(李道宰), 권재형(權在衡) 등으로 내각의 주요 인물을 바꾸었다. 이 때 이지용도 외부대신 서리라는 중책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주한일본공사관은 그간 막대한 자금으로 매수해놓은 이지용이 외부대신이 되자 아주 손쉽게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한일공수동맹'이라 불리는 한일의정서 제4조의 내용을 보자. "대일본제국 정부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함이 가하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제국은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 또 제5조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 없이 차후 본 협정의 취의를 위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라고 못박고 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꼼짝없이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이후 2월 25일경부터 일본 군마와 병사들은 경성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입경한 군대가 줄잡아 5만여 명, 군마가 1만여 필이었는데, 대궐 주변과 각 성문, 창덕궁, 문희묘, 원구단, 저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모두 18개처를 군영으로 삼고, 서문 밖 민가 수백 채를 헐어서 마굿간을 만들었다. 또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진) 연안에 천막을 치고 침처(寢處)를 만들었으니 밥짓는 연기가 수백리까지 퍼졌다.

또 3남 각 지방에도 일본군이 속속 도착하여 각처에 전선을 가설하고 병참을 설치했다. 남로(南路)는 동래에서 대구로, 남해에서 남원으로, 군산에서 전주로 향하여 세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서로(西路)는 평양·삼화, 북로(北路)는 원산·성진에서 상호간의 거리를 110리로 하여 점차 랴오둥(遼東)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곳마다 민가에 주둔하거나 군수에게 군수품을 청하니 민심이 소요했다. 백성들은 난을 피하여 성이 텅텅 비고 군수는 관직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4월에는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에는 2개 사단 가량 되는 조선주차군을 확대·재편함으로써 조선 방위를 담당한다 하였고, 9월에는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가 '천황' 직속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경성에 부임하였다. 또한 7월에는 군용 전선 및 철도선 보호라는 명목으로 치안유지를 주차군이 담당한다고 조선 정부에 통고하더니, 1905년 1월에는 경성과 그 주변의 치안경찰권을 조선 경찰 대신 일본군이 장악한다는 군령을 발포하였다. 군사방위권, 치안권이 모두 일본 군대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순간들이었다.

일본 공사는 일찍이 이용익(李容翊)이 주도하여 건설하려 했던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 회사에게 양여하도록 조선 조정에 강요하였으니, 이는 하루빨리 경의철도를 건설하여 군수 운반을 민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곳에 멋대로 구역을 점령하고서는 '군용지'라 이름 붙이고 푯말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조선땅 어디든지 빼앗고자 하는 땅이 있으면 군용지라 하면서 강탈해간 것이었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은 당연히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이지용과 그의 참서관 구완희(具完喜)에게 쏟아졌다. 그들을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일본 순사 10여 명을 항상 이지용에게 붙여서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토를 보낸 데 대한 답사로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이지용을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그런데 이지용은 일본에 가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는다. 의정서 체결의 공로를 일본이 모르는 체하지 않은 것이리라. 귀국한 뒤에도 그는 법부대신, 규장각 학사, 판돈녕 부사, 교육부 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 대신, 내부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고 1905년 11월에는 특명대사로 다시 일본에 가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으니, 이 두번째 훈장은 바로 '을사보호조약'에 도장 찍은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

의정서 체결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이지용이 당시 내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도 '가'(可)를 하고서 돌아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나는 오늘 병자호란시의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大韓季年史}, 171면). 최명길은 병자호란시 주화론자로서 종사를 지키고자 했지만 이지용이 을사조약에 서명하여 지키고자 한 것은 일신의 영달과 재물이 아니었을까. 그 얘기를 듣는 사람마다 침뱉고 욕하면서 가소롭다 하였음은 물론이고 격앙된 군중은 그의 집을 방화하였다.

그런데도 이지용은 11월 29일 이토의 귀국에 맞추어 열렸던 송별연에 각부 대신과 함께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고종황제에게 말하기를, "이토의 말이 통감이 오는 것은 단지 외교를 감독할 뿐이며 기타 정무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 하고, 만약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정무를 잘 처리하면 1년이 되지 않아 당연히 국권을 돌려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면서 거짓으로 고종을 안심시켰다. 그런 그가 1906년 10월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에 간 것은 이토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물러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을사조약 당시 내부 참서관으로 있던 조남익이라는 사람은 이지용과 도저히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직에 나가지 않았고 또 교체를 원하면서도 이지용에게 청원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자신의 집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한다.

일본인들과 놀아난 부인 이옥경의 친일 행각

이지용에게는 뛰어난 미모의 아내 이옥경(李玉卿:원성은 홍씨)이 있었다. 그녀는 1906년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일본 공사관원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및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의 처와 궁내부대신 민영철(閔泳喆),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재극(李載克), 한성판윤 박의병(朴義秉) 등 상류층 고관들의 부인 다수가 참여한 친일 부인단체로서 이옥경이 부회장을 맡았다. 이옥경은 특히 영리하고 예뻐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하기와라와 정을 통했다가 또 구니와케와 통하고 뒤에는 하세가와와 정을 통하니 하기와라는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옥경이 전송을 나와 입을 마추자 그녀의 혀끝을 깨물어 상처를 입혔다. 이옥경은 아픈 것을 참고 돌아왔으나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그녀를 조소했다. 또한 그녀가 여러 일본인을 바꿔가며 서로 좋아하고 일본인 또한 그것을 질투하는 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장안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그녀는 또 일본어와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양장을 하고 이지용과 함께 팔짱을 끼고 돌아다녔다. 또한 인력거를 타면 얼굴을 내놓고 궐련을 피우며 양양하게 돌아다녀서 행인들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지용이 허랑방탕하다고 누차 고종의 견책을 받았으나, 그녀가 고종의 계비인 엄비(嚴妃)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고종의 뜻을 회복시켜 이지용이 드디어 요직에 등용되었으니, 그녀의 방자한 행동을 이지용은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세상사람들은 "종척대가가 의(儀)를 좀먹어 먼저 망하니 외국인에 대하여 우리를 예의지국이라 칭하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한편 미모와 기개가 모두 뛰어나기로 소문난 산홍이라는 진주 기생이 있었는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가서는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산홍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권력과 재물로도 한 미인의 기개를 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또 이지용의 아들 이해충(李海忠)이 일본에 가서 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더니 유학생들이 "우리들이 비록 타국에 있지만 역적의 아들과 함께 배울 수는 없다" 하고 내쫒아 입학을 할 수 없었다. 이지용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수백 원을 기부하며, 유학생들의 여비를 보조하려 하였지만 유학생들은 "우리들은 비록 역적의 재물을 쓰지 않아도 이제까지 죽지 않았다"라고 준엄히 거부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 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지용을 죽이러 갔을 때 이지용은 용산 강정에 있었다. 이지용 암살을 맡은 사람이 가서 엿보니 사동(寺洞)에서의 권중현 암살 미수사건이 이미 전화로 보고되어서 병정 60여 명이 급히 달려와 호위하고 있었으므로 역시 죽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도박에 탕진한 백작 수당 3000원

1907년 봄 대구의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 등이 단연회(斷煙會)를 설치하고 국채보상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국채 총액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인구 2000만이 모두 담배를 끊으면 1인당 1개월에 담배값으로 새 화폐 20전씩을 거둘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석 달 안에 국채 원금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취지였고 전국적으로 큰 호응이 있었다. 고종과 황태자도 이에 호응하여 권련을 멀리하자 각급 학교 생도들과 군인들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 주상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이랴" 하고 담배를 끊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이지용을 협박하여 이를 금지시키게 하려 하였으나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오적의 괴수로 지목하고 있어 몸둘 곳이 없소. 다른 일은 금할 수 있으나 오직 이것만은 가히 금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정미조약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부의 이토가 조인할 때도 이지용은 나서기를 사양하며 "우리는 을사조약을 맺은 이래 위로는 황제를 우러러 뵈올 수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대할 수 없어 제대로 허리를 펴서 얼굴을 쳐들 수도 없는 형편인데 오늘에 이르러 또 이 안을 담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하고서 조인에서 빠졌다. 한일의정서 체결, 을사조약 서명 등으로 인하여 역적 괴수로 지목된 후 방화, 암살 위협, 갖은 모욕 등에 겁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친일의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일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7년 5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박람회 시찰을 위해 세번째 도일하여, 다음해 2월에 대훈(大勳)에 특서되어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연 수당 3000원을 받아 도박에 탕진하다가 1928년 사망했다.

                                                              ■ 서영희(서울대 강사·한국사) 

원본 :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 이지용 (李址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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