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 (1) - 월명사 vs 최치원


< 퇴색하는 화랑… 앞선 지식인… >

(1) 비감한 내면을 노래한 음유시인 월명사

신라 경덕왕 19년(760년) 서라벌에 느닷없이 해가 두 개 떠서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는 변괴가 일어났다. 당시 경덕왕은 산화공덕(散花功德)의 불교 의식으로 이 재앙을 물리치고자 했다. 그때 부름을 받고 ‘도솔가’를 지어 변괴를 사라지게 한 승려가 월명사(月明師)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신라인은 향가를 숭상했는데 그것이 천지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월명사는 그 신라 전통 시가인 향가에 뛰어난 시인이었다.

‘생사의 길은/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너는 간다는 말도/못다 이르고 갔느냐./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한 가지에 나고서도/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죽은 누이동생이 서방정토로 가기를 기원하며 부른 ‘제망매가(祭亡妹歌)’는 월명사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친근한 비유와 절실한 시상의 전개로 현전하는 향가 가운데 절창으로 꼽힌다. 오죽했으면 이 노래를 부르자마자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아갔겠는가.

현세를 중시하는 미륵불을 섬긴 화랑집단에 속했으면서 아미타불을 외우며 내세를 희구했다는 이유에서 월명사의 승려로서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월명사의 내면세계이다. 그는 인간의 번뇌를 초탈해야 하는 불제자이기 전에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낀 인간이었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해야 하는 낭도승(郞徒僧)이기 전에 내면의 비감을 진솔하게 노래한 음유시인이었다.

(2)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경계인 최치원

이보다 조금 뒤에 활동한 최치원 역시 혼백을 감동시킬 정도의 천부적 재능을 지닌 신라의 문인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걸었던 길은 월명사와 달랐다. 그는 당나라에서 관리를 지낸 유학파 지식인이었고, 주로 한시에 능했다. 당나라 지방관리 시절 임지 부근에 원한을 품고 죽은 자매의 무덤인 쌍녀분에서 시로써 혼령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중국의 ‘육조사적편류’, 박인량의 ‘수이전’에 나와있다.

‘글로 밭을 일군다’는 뜻으로 제목을 삼은 ‘계원필경(桂苑筆耕)’에서 보듯 최치원은 창작 활동에 목숨을 건 작가였다. 그래서 월명사보다 남아 있는 작품이 많다. 육두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에 유학 가 그곳에서 문명(文名)을 떨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방인이라는 한계로 소외감에 시달렸고, 고국 신라로 되돌아 와서도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그가 남긴 작품에는 시대와 불화한 천재의 비애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장안(長安)에서 고생하던 일 생각하면(每憶長安舊苦辛)/어찌 고향의 봄을 헛되이 보내랴(那堪虛擲故園春)/오늘 아침 또 산놀이 약속 저버리니(今朝又負遊山約)/뉘우치노라, 속세의 명리인 알게 된 것을(悔識塵中名利人).’ 봄나들이 가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약속을 저버리자 서운함을 자조적으로 읊은 시다.

‘가을바람에 홀로 쓰라린 시 읊조리니/세상엔 내 노래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로 시작하는 ‘가을 밤 비 내리는데(秋夜雨中)’, ‘늘 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봐/흐르는 물로 온 산을 감싸게 했네’로 마감하는 ‘가야산 독서당에서(題伽倻山讀書堂)’도 비슷한 고독감이 담겨있다.

중국에서 겪은 떠돌이 생활의 비참함, 고국 신라에서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들뜬 기대감, 그러나 자신을 돌보기는커녕 모두 외면해버리는 냉혹한 현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신을 되돌아보지만 그의 젊은 꿈은 그렇게 스러져 갔다.

최치원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계림(鷄林)은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은 푸른 솔이로다”라는 글을 보내 고려의 창업을 은밀하게 도왔다는 얘기도 있다. 무너져 내리는 고국 신라를 배반할 수도 없고, 새롭게 떠오르는 신왕조 고려를 선택할 수도 없던 ‘경계인’ 최치원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3)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의 뒷모습

월명사와 최치원은 신라시대 향가와 한시의 최고 작가였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달밤에 혼자 피리를 불며 거리를 배회한 월명사와 전국을 떠돌다가 가야산에 은둔한 최치원의 뒷모습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의 행적은 왜 그리 쓸쓸했을까? 몸담았던 시대와 불화했기 때문이다.

산화공덕 의식을 치르려던 경덕왕에게 불려온 월명사는 이렇게 말했다. “승은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향가나 알 뿐 범패(梵唄)는 잘 모릅니다.” 그러자 왕은 “이미 인연이 있는 승려로 지목되었으니 향가를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들 대화에서 국가적 의식은 불교식 범패를 부를 줄 아는 승려가 주관해야지 화랑에 속한 낭도승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화랑 세력은 통일 이후 급속히 하강곡선을 그렸다. 경덕왕 대에 이르면 이미 지난날의 영화는 거의 스러져버리고 만다. 화랑의 풍류도를 대신해 불교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아가던 그때 월명사는 점차 왜소해지는 자신의 모습에서 인간사의 부침을 곱씹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낡은 인물’ 월명사는 그래서 쓸쓸히 피리를 불며 달밤을 배회했던 것이 아닐까.

최치원도 사정은 비슷하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중국에서 쌓은 경륜과 새로운 지식을 맘껏 펼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혼란한 국정을 수습하기 위해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은 그런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운수가 막히고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다.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는 벼슬할 뜻을 가지지 않았다”고 김부식이 썼듯 그는 결국 제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최치원 같은 선구적 지식인을 용납하기에 말기의 신라는 너무 썩어 있었다. 어쩌면 그를 알아볼 만큼 사회가 성숙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낡은 시대’를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인물’ 최치원은 그래서 쓸쓸히 산림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이벌로서 월명사와 최치원의 면모는 그들이 특장으로 삼았던 향가와 한시의 부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라 후기는 전통으로 이어져오던 향가와 새롭게 전래된 한시가 문학사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팽팽하게 맞선, 그러나 무게 중심이 점차 한시로 옮겨가던 시대였다. 향가의 고수 월명사와 한시의 대가 최치원은 이런 추세를 보여주는 대표 문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시대와 불화한 작가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월명사가 너무 늦게 태어났고, 최치원은 너무 일찍 태어났다. 월명사가 삼국통일 즈음에 활동하고 최치원이 고려 건국 시기에 났더라면 그들은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때는 화랑집단과 문인 지식층이 우대 받던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그들은 탁월한 작가로 고전문학사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문학은 언제나 궁핍한 시대에 그 시대와 불화한 작가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월명사 :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자료는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에 실린 몇몇 일화가 전부이다. 경덕왕(재위 742~764) 때 해가 두 개 나타난 변괴를 '도솔가'를 불러 물리쳤으며, 죽은 누이동생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망매가'를 불렀다, 피리를 잘 불어 달조차 운행을 멈추게 했다 등등이다. 하지만 자신을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한 승려라고 밝힌다든가 신라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세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통해 화랑집단에 소속된 낭도승(郎徒僧)으로 국가의 안녕과 관련된 일을 맡았으리라 짐작된다.

♣ 최치원 : 헌안왕 1년(857년)에 태어나 죽은 해는 알지 못한다. 12세에 육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 갔다.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해 율수현위(율水縣尉)를 지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해 턱없이 낮은 직위로 여기고 그만두었다. 중국에서 문명을 떨쳤지만 이방인의 한계를 절감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주변사람의 배척과 시기로 제대로 쓰이지 못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으며 가야산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율자가 삼수변에 밤 율(栗)자입니다)
- 집필 : 정출헌·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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