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 (2) - 김부식 vs 일 연


< '儒ㆍ佛의 눈'으로 역사를 쓰다 >

* 삼국사기 : 김유신에 집착 유교적 君臣觀표출 - '설씨녀' 얘기선 생략 통해 信·孝 부각
* 삼국유사 : 현실·합리 뛰어넘어 기존 史觀 전복 - 호녀' 통해 사랑대신 불교 영험 강조

(1)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는 시대적 사명

우리는 흔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함께 기억한다. 130여 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까닭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초에 편찬된 '구 삼국사'가 있었지만 김부식이 인종 23년(1145년)에 새로 쓴 역사서이고, 삼국유사는 국사(國史)인 '삼국사기'가 있었지만 일연이 충렬왕 8년(1281년) 무렵 새로 쓴 역사서이다.

그들의 나이 각각 70세와 75세 때였다. 죽음을 앞두고 혼불로 담금질하며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무엇이 만년의 그들을 흔들어 깨웠을까? 해답은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격변의 시대상황에 감추어져 있다.

김부식은 임금의 권위를 넘보던 외척 이자겸의 전횡과 서경천도를 내건 묘청의 난으로, 일연은 전국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무신의 난과 몽고의 침입으로 얼룩진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안팎에서 들이닥친 극심한 혼란과 혹독한 시련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들은 역사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김부식이 두 차례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문벌귀족의 시대를 열었다면, 일연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개경환도(開京還都) 세력의 후원에 힘입어 불교계의 정점에 올라섰다.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던, 저 격변의 한복판을 지나온 그때 그들에게 역사의 전범을 수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절실했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 개인의 사적인 역사가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이다. 아니 고려 중기와 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에 의해 재구성된 삼국의 역사이다. 삼국인의 주체적 역사가 아니라 고려인의 시각에 의해 타자화한 역사인 것이다. 모든 역사가 사실의 객관성을 표방하지만 언제나 '거대한 허구'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시대정신이라는 명분 아래 거듭거듭 씌어지는 법이다.

(2) 김부식의 유교적 합리주의 - 일연의 불교적 세계관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본기(本紀)'로 시작해 삼국의 무대를 활보하던 인물을 기록한 '열전(列傳)'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이 '열전'이야말로 편찬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데 더없이 훌륭한 텍스트이다. '열전'은 생동하는 역사인 동시에 문학적인 역사이며, 김부식은 이 '열전'에 가장 큰 공을 들였다.

여기에는 52명의 삼국인이 등장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김유신 한 사람에게 '열전' 전체의 3분의1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했다는 사실이다. 김부식이 김유신에게 그만큼 역사적 무게를 실었다는 방증이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거둔 인물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김부식이 덧붙인 사평(史評)은 참으로 뜻밖이다. 그는 이곳에서 김유신의 공업을 기리는 한 마디의 찬사도 바치지 않았다. 대신 김유신이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던 군주의 자세에 주목한다. 김부식은 임금과 신하의 행복한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사례로 김유신을 든 것이다. 문벌귀족의 권위를 확고하게 틀어쥔 김부식이 김유신의 행적을 빌어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유교적 군신관을 천명하려 했던 의도가 분명하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말하려던 바는 이와 사뭇 다르다. 절반 가까운 분량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기이편(紀異篇)' 서문은 그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연은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태어났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이것이 책머리에 기이편을 두게 된 까닭이며, 그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선언은 삼국사기에 대한 역사적 도전에 다름 아니다. 김부식은 유교적 합리주의에 배치되는 신이한 사건을 철저하게 배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연은 전란에 의해 황폐해진 자신의 시대가 유가적 합리주의로는 온당하게 설명되거나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현실세계 저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합리성이라는 잣대로는 논외가 되어버리는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삼국의 역사를 재구성한 뒤 불교의 신이사(神異事)를 조목조목 배치한다. 불교가 전래된 유래, 불탑과 불상의 영험, 고승의 비범한 행적과 능력, 인간과 부처의 놀라운 감응 등등이다. 김부식이 유교적 합리주의로 읽은 삼국의 역사를 일연은 불교적 세계관으로 완벽하게 전복했던 것이다.

(3) 여성 이야기에 스며든 역사가의 작위

역사를 살아 숨쉬는 인간들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충신열사(忠臣烈士)라든가 고승대덕(高僧大德)과 같은 인물에 주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하찮았던 존재, 예컨대 여성들이 간혹 얼굴을 내밀고 있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설씨녀(薛氏女)'와 삼국유사 '감통편(感通篇)'에 실려 있는 '호녀(虎女)'가 그들이다.

설씨녀가 약혼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난을 이겨낸 여성이라면 호녀는 사랑하는 낭군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흔쾌히 바친 여성이다. 사랑하는 남성을 위해 참으로 힘든 행실을 실천한 인물이기에 여성인데도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설씨녀는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수자리를 살겠다는 가실(嘉實)과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돌아오겠다는 3년 기한을 훨씬 넘기고도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도록 강요한다. 가실과의 굳은 약속과 부친의 지엄한 명령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때 가실이 돌아와 결혼을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찬찬히 읽다 보면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 가실은 자신이 기르던 말을 설씨녀에게 맡기면서 "이는 천하에서 드문 좋은 말이니 후일에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고 떠났다. 혼약을 방해하는 곤경에 빠지면 이를 타고 도망하라는 복선(伏線)이다. 하지만 설씨녀는 탈주하려다 포기하고 가실이 맡겨둔 말을 어루만지며 슬퍼할 따름이다. 이것이 '후일에 반드시 쓸 데가 있으리라'던 복선의 전부였을까?

그렇지 않다. 김부식이 사료로 채택한 '설씨녀'의 원 텍스트는 약혼자와의 신의(信義)와 부친에 대한 효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설씨녀가 신의와 효행을 함께 실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친의 강압으로부터 탈주하는 중요한 대목을 생략하는 '이념적 은폐'를 도모했던 것이다.

반면 호랑이의 변신인 호녀는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만난 김현(金現)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호녀가 세 오라비의 악행을 대신해 죽음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김현과의 극진한 사랑과 인간으로의 환생하려는 염원 사이에서 갈등하던 호녀는 축생(畜生)의 삶을 마감하기 위해 죽음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호녀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고 싶어 했다. 포악한 호랑이를 죽인 공으로 낭군의 벼슬길이 열리리라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일연은 호녀의 헌신적 자기희생에 주목한다. 오라비의 악행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의로움(義),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낭군의 벼슬길을 열어준 어짊(仁)에서 관음보살의 자비심을 읽은 것이다. 김현의 정성스런 흥륜사 탑돌이로 관음보살이 감동했고, 관음보살은 보답으로 잠시 호녀의 몸을 빌려 나타나 벼슬이란 복록을 내렸다고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독특한 독법은 원 텍스트가 담고 있던 이류(異類) 간의 눈물겨운 사랑을 외면한, 아니 불교적 영험을 강조하기 위해 승려 일연이 감행한 '종교적 왜곡'에 다름 아니다.

김부식과 일연은 문학적 성격이 짙은 텍스트까지 동원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던 '역사적 진실'을 관철시키려고 무척 노력했다. 여성의 도리를 완벽하게 실천한 설씨녀의 절의와 효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택한 호녀의 자기희생은 그런 의도의 산물이다.

유교적 덕행이라든가 불교적 영험으로 포장되거나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권장되더라도 그것이 본래 이야기가 담고 있던 진정성과 거리가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읽을 때 은폐되거나 지워진 인간의 가녀린 숨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일연 : 고려 희종 2년(1206년)에 경산에서 태어나 충렬왕 15년(1289년)에 84세로 죽었다.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무신집권기를 지내는 동안 이름을 크게 날리지는 못했다. 원종ㆍ충렬왕대에 이르러 두각을 나타내 자신이 속한 가지산문파(迦智山門派)의 위세를 크게 떨치며 국존(國尊ㆍ고려말 조선초 덕행이 높은 중에게 준 최고의 승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만년에 편찬한 삼국유사는 불교적, 자주적, 민중적 입장에서 씌어졌다고 평가된다. 100여 권에 달하는 저작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 김부식 : 고려 문종 29년(1075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의종 5년(1151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라 왕족의 후예로 유교적 이념을 지킨 정치가, 역사가, 문장가였다. 외척 이자겸을 숙청하고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종 때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고자 했고,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해 자신이 추구한 정치이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삼국사기에는 유교적, 사대적, 신라 중심적 정치이념과 역사인식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문집 20권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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