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공주묘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5.09.09 발해 정효공주 묘지
출처 : 자연과 역사와 문화와....
 


정효공주묘비
발해는 698년 고왕(高王) 대조영에 의해 건립된 때로부터 제15대 왕 대인선이 거란의 침략자들에게 투항할 때까지 229년이란 오랜시간을 경과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자기 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대조영으로부터 대인선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의 왕들에게는 대부분 공주가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고고 학자들의 발굴보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정혜공주와 정효공주뿐이다.
1949년 이후 발해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가 발굴되었다. 이 중대한 발견은 국내외 사학계의 깊은 관심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1949년 돈화 육정산 발해 옛무덤떼의 제1무덤구역 제2호무덤 정혜공주(발해 제3대 왕 대흠무의 둘째 딸)무덤에서 아주 진귀한 묘비를 발굴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묘비는 무덤안길에서 나왔다. 묘비는 '규형(圭形)'으로서 높이가 9Ocm, 너비가 49cm, 두께가 2Ocm이며,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음각되어 있고 비문의 윗부분에는 구름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앞면에는 비문을 음각으로 새겼는데 글씨체는 해서체의 한자이다. 비문은 모두 21행으로 서(序)가 13행, 명(銘)이 6행이고 마지막 행은 비석을 세운 연, 월, 일, 시간이 새겨져 있다. 글자는 모두 725자인데 그 가운데 234자는 파멸되어 알아볼 수 없고, 나머지 491자는 깨끗하여 판별할 수 있다.
1980년 10월, 화룡현 용수향 용해촌 용두산에서 발해 제3대왕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이 무덤에서는 아주 진귀한 정효공주묘비가 발굴되었다. 이 묘비는 무덤안길에서 나왔다. 비석은 '규형'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윗부분은 뾰족하고 밑면이 네모난 것으로 쇤체 높이는 105cm, 너비는 58cm, 두께는 26cm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앞면에는 비문을 음각의 해서체로 새겼다. 모두 18행으로 서가 12행, 명이 5행인데 비석을 세운 연, 월, 일이 새겨져 있지 않다. 글자는 모두 728자이다. 매행의 글자수는 같지 않으며 개별적으로 심한 파괴를 받은 몇 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글자는 깨끗하여 알아볼 수 있다. 비문의 주변에는 선 둘을 음각하였고 비석 몸체의 윗부분에는 선을 음각하였다. 비석의 옆면과 뒷면은 갈아서 반반하게 만들었다.
정효공주 묘지 원문
貞孝公主墓誌幷序]
夫緬覽唐書,  汭降帝女之濱,  詳丘傳, 魯 開王姬之筵. 豈非婦德昭昭, 譽名期於有後, 母儀穆穆, 餘慶集於無疆.] 襲祉之稱, 其斯之謂也.
公主者我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之第四女也. 惟祖惟父, 王化所興, 盛烈戎功, 可得而]論焉. 若乃乘時御辨, 明齊日月之照臨, 立극握機, 仁均乾坤之覆載. 配重華而肖夏禹, 陶殷湯而韜周文. 自天祐之,] 威如之吉.
公主稟靈氣於巫岳, 感神仙於洛川. 生於深宮, 幼聞婉 .  姿稀遇, 曄似瓊樹之叢花, 瑞質絶倫, 溫如崑]峯之片玉. 早受女師之敎, 克比思齊, 每慕曹家之風, 敦詩悅禮. 辨慧獨步, 雅性自然. □□好仇, 嫁于君子.  同車之]密義,  家人之永貞. 柔恭且都, 履愼謙謙. 簫樓之上, 韻調雙鳳之聲, 鏡臺之中, 舞狀兩鸞之影. 動響環 , 留情組 .  ]藻至言, 琢磨潔節. 繼敬武於勝里, 擬魯元於豪門. 琴瑟之和, 蓀蕙之馥. 誰謂夫聳先化, 無終助政之謨, 稚女又夭, 未延弄]瓦之日. 公主出織室而灑淚, 望空閨而結愁. 六行孔備, 三從是亮. 學恭姜之信矢, 銜杞婦之哀悽. 惠于聖人, 聿懷 德.] 而長途未半, 隙駒疾馳, 逝水成川, 藏舟易動.  以大興五十六年夏六月九日壬辰終於外第, 春秋三十六. 諡曰]貞孝公主. 其年冬十一月卄八日己卯陪葬於染谷之西原, 禮也.
皇上罷朝興慟, 避寢弛懸. 喪事之儀, 命]官備矣. 挽郞嗚咽, 遵阡陌而盤桓, 轅馬悲鳴, 顧郊野而低昻. 喩以鄂長, 榮越崇陵, 方之平陽, 恩加立 .] 荒山之曲, 松 森以成行, 古河之 , 泉堂邃而永 . 惜千金於一別, 留尺石於萬齡. 乃勒銘曰,]
不顯烈祖, 功等一匡, 明賞愼罰, 奄有四方. 爰及君父, 壽考無疆, 對越三五, 囊括成康. 其一.
惟主之生, 幼而洵]美, 聰慧非常,  聞高視. 北禁羽儀, 東宮之姉, 如玉之顔, 蕣華可比. 其二.
漢上之靈, 高唐之精, 婉 之態,  訓玆成.] 嬪于君子, 柔順顯名, 鴛鴦成對, 鳳凰和鳴. 其三.
所天早化, 幽明殊途, 雙鸞忽背, 兩劍永孤, 篤於潔信, 載]史應圖, 惟德之行, 居貞且都. 其四.
愧桑中詠, 愛柏舟詩, 玄仁匪悅, 白駒疾辭. 奠殯已畢, 卽還靈 , 魂歸人]逝, 角咽 悲. 其五.
河水之畔, 斷山之邊, 夜臺何曉, 荒 幾年. 森森古樹, 蒼蒼野煙, 泉 俄 , 空積悽然. 其六.]
-------------------------------------------------------------------------------
묘지문 번역

<서문>

이전에 읽은 당서을 돌이켜 본다면,제의 딸들이 귀여물가에 강림하여 병전에

자세히,노관이 왕희을 위해 자리을 열었다. (대의:이전에 읽은 <상서.요전>을돌이켜보면 제왕 요의 두 딸 아황과 여영이 귀여강가에 강림하여 우순에게

시집갔다는 것이 적혀있고 <좌전>을 상 세히 읽어보면 노장공이 집을 짓고

주천자의 딸 왕희의 혼례식을 주최 했다는 것이 적혀 있다.)

이 어찌 부덕이 밝고 밝으니 후세에도 그 이름 영원할 것이며,모의가 아름답고 온화하니 선조들이 쌓은 은혜을 한 없이 전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조상의 복을 물려받은 것이란,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1단락-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의 네째딸이다.

조상과 부왕께서는 왕도을 일으켰으며,그들이 쌓아놓은 위대한 업적과 무공은 그 누구도 비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시기을 장악하고 정사를 처리하면,그 광명은 해와 달처럼 천하을 비추었으며,기강을 세워 나라의 정권을 장악하니 그 어진 정치는 천하을 포용 하였다.

그들이야말로 중화의 짝이 될만하고 우 임금과 비슷하며 상조 상탕왕의 지묘로양성되고 주 문왕의 계략을 갖춘 이들이다.

그들은 하늘의 신에게 보살핌과 도움을 받았으며,그 위업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공주는 무악에서 영묘한 기운을 받고,낙천에서 신선에 감응하였다.

궁중에서 태어난 후,자라면서 어릴때부터 온화하고 공손함이 알려졌다.

자태와 용모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으며 마치 옥나무에 핀 꽃송이처럼 광채을 뿌렸으며 품성이 뛰어나게 고결하여 곤륜산 높은 봉우리의 옥과 같이 온화하고 유순하였다.

그는 일찍 여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능히 사제와 비할수 있었으며,늘 조가가문의반소을 경모하고 시서을 열독하기에 노력하며 예의범절을 지키기를 즐기었다.

그는 촘명과 재질이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며,고결한 품성은 아주 완미하였다.

공주는 좋은 배우자을 만나,그에게 시집을 갔다.

한 수레에 탄 몸가짐을 나타내며,한 집의 사람으로서 영정을 이루었다.

공주는 온화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행실 또한 겸손하고 단정하였다.

소루에서 퉁소을 불면 그 곡조는 마치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하는 듯 했으며, 경대에 마주서서 춤을 출 때면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처럼 한 쌍의 난조새와

같았다.

몸에 단 패옥은 찰랑찰랑 소리을 내며,의복 단장을 소중히 여겼다.

공주는 아름답고도 이치에 맞는 말을 하기에 노력하며,고상하고 순결한 덕행을 다듬기를 잊지 않았다.

그는 경무공주처럼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 살았으며,노원 공주처럼 부유하며권세가 있는 가정에서 생활하였다.

금슬은 이와 같이 잘 어울리며,손.혜는 이와 같이 향기로웠다.

누가 알았을까! 남편이 먼저 죽어,끝까지 나라의 정사을 돕는 계획을 다 하지못 할 줄을.... 어린 딸이 일찍 죽어 방추을 가지고 노는 나이에까지 이르지못하였다.

공주는 방을 나와 슬피 눈물을 흘리며,텅 빈 집을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기었다.

육행을 심히 갖추었으며,삼종을 지킴에 밝았다.

그는 공강의 맹세을 따라가며,기부의 슬픔을 한 가슴에 품었다.

부왕에게서 은혜을 받았으며,부녀자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규범을 잊지 않았다.

인생의 길 걸어온지 아직 반도 안 되는데,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니 계곡 깊이 갖추어진 배도 쉽게 움직인다.

아아! 대흥 56년 여름 6월 9일에 임진시에 외제에서 사망하였는데,당시 나이는36세였다.이에 시호를 정효공주라고 하였다.이 해에 겨울 11월 28일 기묘시에 염곡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다.이것은 예의에 부합된다.

황상은 조회마저 금하며 몹시 비통해 하시며,침식을 잃고 노래와 춤 추는 것도 중지하였다.상사와 장사에 관한 의식은 관부에 명령하여 빈틈없이 준비하였다.

상여꾼들이 목 메는 소리 발길 따라 머뭇거리며,영구차을 끄는 말이 뒤를

돌아보며 우는 소리,들판 따라 오르내리네!

악장공주처럼 사망한 후,영예는 숭릉보다 높았으며 평양공주의 장례식을 본

받아 영구을 잠시 멈춰 놓았다가, 일후 정식으로 안장하기을 기다렸다.

황산의 굽을 곳에 묘지을 정하였으며 묘지 주위에는 소나무,가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강물이 굽이친 곳에 지어 놓은 분묘는 깊고도

어두었다.

애석하도다! 공주와 이별하자니,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비명을 새겨두노라!

<명문>

명문은 4언 운문으로 되었는데,모두 6개 단락으로 구성하였다.

1단락은 출신,제2 단락은 지혜로움과 아름다움,제3단락은 출가,제4단락은

수절,제 5단락은 장례,제6단락은 애도로 되어있다.

-명문-

위대하고도 밝은 선조들은 어지러운 천하을 통일하고 인정과 상벌을 분명히

하여 실시하니 그 덕이 온 천지에 미치게 하였으며 부왕 때에 와서는 국세가

강성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장구하게 되었다.그들이야말로 3황5제와 짝으로

될 만하고 성왕과 강왕의 치국 정책을 실시한 이들이다.

공주는 세상에 태어난 후,어려서부터 참으로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영민하였

으며 지식이 넓고 멀리 내다보는,궁중에서 본보기로 되었으며 태자의 누님

이었다. 그 얼굴이 옥처럼 아름다워 무궁화 꽃만이 비할 수 있었다.이것이

둘째이다.

한강여신의 영기와 고당여신의 정기을 받았으며,그 자태는 아름다우며 훌륭한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군자에게 시집을 가서 님을 공대하고 님에게 유순하였으므로 그 명성이 높았다.그들은 원앙새처럼 짝을 이루었으며,봉황새처럼사이좋게 속삭였다.이것이 세째이다.

님은 일찍 세상을 하직하고,음과 양의 길이 각각 달라 마치 한 쌍의 난조가

갑자기 등을 지고 날아가 듯,짝을 이룬 자웅 검이 따로 떨어져 있듯이 외롭게지내었다. 그는 고결한 지조을 굳게 지켰으니,마땅히 이를 역사책에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그는 부덕에 의해서 행동하고,정절을 지키는데 훌륭하였다.이것이 네째이다.

공주는 <상중>에 나오는 음란한 시을 싫어하였으며,<백주>에 씌여 있는 시을

즐기었다.그는 아주 어진 사람이었으나 근심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았는데,

세월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장례도 끝나고 영구차도 돌아갔다.사람들이 그의영혼을 천당으로 모실 때,주악 소리에 슬퍼하는 목메어 슬피 울기도 하였다.이것이 다섯째이다.

강변과 뭇산으로 에워싸인 작은 산에 자리 잡은 관의 자리는 어느 때에 가서야 광명을 다시 볼 수 있으며 무덤 언덕은 얼마나 세월이 지나야 하는가? 묘우에는 고목이 무성하고 안개가 자욱하리라.묘의 입구을 갑자기 봉하자니 처량한 기분이 든다. 이것이 여섯째이다.

번역 : 방학봉


Posted by 상운(祥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