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번역원에서 퍼왔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동쪽으로는 울산군계(蔚山郡界)까지 61리, 장기현계(長鬐縣界)까지 83리, 남쪽으로는 언양현계(彦陽縣界)까지 62리, 서쪽으로는 청도군계(淸道郡界)까지 76리, 영천군계(永川郡界)까지 53리이며, 북쪽으로는 영일현계(迎日縣界)까지 3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다. 한(漢) 나라 오봉(五鳳) 원년에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였으며 이 뒤로부터는 방언(方言)으로 왕경(王京)을 서야벌이라고 통칭하였다. 혹은 사라(斯羅)라고 하고, 혹은 사로(斯盧)라 하다가 뒤에 신라라 일컬었다.
탈해왕(脫解王) 때에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를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하였는데, 기림왕(基臨王)이 다시 신라로 하였다.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니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라 하였다. 뒤에 승격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가 되었으며, 성종(成宗)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쳤다가 또 유수사(留守使)라 일컬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때에 강등(降等)시켜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고, 또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다가 다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하였다. 그때 예방(銳方)이 올린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삼경(高麗三京)이라는 글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경유수를 둔 것이다. 신종(神宗) 때에 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주(州)ㆍ군(郡)을 겁략(劫掠)하므로 사자를 보내어 평정하였다. 뒤에 동경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성한다는 말을 만들어 상(尙)ㆍ청(淸)ㆍ충(忠)ㆍ원주도(原州道)에 격문(檄文)을 전하고, 반란을 음모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고, 관내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을 빼앗아 안동(安東)ㆍ상주(尙州)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고종(高宗) 때에 다시 유수로 고치고, 충렬왕 때에 계림부(鷄林付)로 고쳤다.
본조에서는 태종조(太宗朝)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쓰고,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안강현(安康縣)
부(付)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비화현(比火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가 고려 현종(顯宗) 때에 예속되었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에서는 태조조에 다시 경주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기계현(杞溪縣)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이며, 화계현(化鷄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 예속되었다.
자인현(慈仁縣)
부의 서쪽 63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이며, 기화현(其火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장산군(獐山郡)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고려 현종 때에 예속되었다.
신광현(神光縣)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동잉음현(東仍音縣)이며, 신을현(神乙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뒤에 일어진(昵於鎭)이라고 일컬었다. 고려 태조 13년에 친히 거둥하여 성(城)을 쌓고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 고쳤다. 현종 때에 예속되었다.
구사부곡(仇史部曲)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마진양현(麻珍良縣)인데, 진(珍) 자는 미(彌) 자로도 썼다. 경덕왕이 여량현(餘粮縣)으로 고치고 장산군의 속현으로 하였다. 뒤에 부곡으로 강등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죽장부곡(竹長部曲)
본래 신라의 장진현(長鎭縣)이다. 고려 때에 부곡으로 강등하였다. 부의 북쪽 60리 청송부(靑松府)와 경계에 있다. 북안곡부곡(北安谷部曲)은 부의 서쪽 50리에 있는데, 영천부(永川府)의 동남촌(東南村)으로 넘어 들어갔다.

【진관】 군(郡)이 4 울산(蔚山)ㆍ양산(梁山)ㆍ영천(永川)ㆍ흥해(興海). 현(縣)이 6 청하(淸河)ㆍ영일(迎日)ㆍ장기(長鬐)ㆍ기장(機張)ㆍ동래(東萊)ㆍ언양(彦陽).

【관원】 부윤(府尹) 종이품(從二品)인데, 병마절제사를 겸임한다. 제도(諸道)ㆍ제진(諸鎭)이 같다. 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진한(辰韓)ㆍ서야벌(徐耶伐)ㆍ사로(斯盧)ㆍ신라(新羅)ㆍ낙랑(樂浪)ㆍ계림(鷄林)ㆍ월성(月城)ㆍ동경(東京)ㆍ금오(金鰲)ㆍ문천(蚊川)

【성씨】
본부(本府)
박(朴)ㆍ석(昔)ㆍ김(金) 모두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이(李) 급량(及梁). 최(崔) 사량(沙梁). 정(鄭) 본피(本彼). 손(孫) 모량(牟梁). 배(裵) 한지(漢祗). 설(薛) 습비(習比). ○ 이상 6부(部)의 성(姓)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에 내려준 것이다.
강(康) 동주(洞州). 설(偰) 회골(回鶻). 자세한 것은 인물(人物) 조에 나온다. 양(楊) 속성(續姓)이다.
안강(安康)
안(安)ㆍ노(盧)ㆍ김(金)ㆍ황(黃)ㆍ염(廉), 소(邵)ㆍ변(邊) 모두 당성(唐姓)이다. 윤(尹) 송생(松生).
기계(杞溪)
 유(兪)ㆍ양(楊), 익(益) 맹(孟)이라 하기도 한다. 윤(尹), 김(金) 김해(金海).
자인(慈仁)
박(朴)ㆍ한(韓)ㆍ정(鄭)ㆍ주(周), 임(任) 진도(珍島). 변(邊) 가은(加恩).
신광(神光)
서(徐)ㆍ진(陳)ㆍ윤(尹)ㆍ신(申) 구사(仇史) 정(鄭)ㆍ석(石)ㆍ조(曹), 전(全) 장산(章山).
죽장(竹長)
갈(葛) 속성(續姓)이다. 이(李)ㆍ김(金)ㆍ송(宋) 모두 내성(來姓)이다.
성법이(省法伊)
 김(金)ㆍ최(崔) 모두 속성(續姓)이다.
비안곡(比安谷)
이(李)ㆍ송(宋)ㆍ갈(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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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는 무리한 도시 재개발 사업 추진과 용역 깡패들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의 반발을 대화와 협상을 도외시한채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과잉 진압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집권당, 검찰, 경찰의 태도는 사과와 반성의 목소리보다는 책임 전가에 급급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노라니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이 생각난다. 불행한 사건 광주대단지 사건에 대해 <브리태니커 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71년 8월 10일 하루 동안 경기도 광주군(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신개발지역주민 수만 명이 공권력을 해체시킨 채 도시를 점거했던 사건.
1960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그에 따른 농업의 해체와 실업문제 등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된 도시빈민문제의 본질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광주대단지란 서울시의 빈민가 정비 및 철거민 이주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위성도시로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이다.
이 계획에 따라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사건 당시까지 2만 1,372가구 10만 1,325명을 이주시켰다. 그런데 광주대단지 이주사업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토지투기의 만연이다. 그것은 서울시가 부족한 단지조성 재원을 개발차익을 통해 확보하고자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철거이주민의 분양권이 불법전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 당시 불법전매된 분양권으로 이주한 가구가 단지 내 2만 1,372가구의 약 30%에 달하는 6,343가구를 차지했다. 셋째,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로 이주지역 내에는 대부분이 도시빈민이던 주민의 생계수단이 전혀 없었다. 교통이 불편해 생계수단이 있는 서울시내를 왕래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대부분이 손수레와 행상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여서 차량으로 이동할 정도로 먼 거리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사전에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 철거민은 이주분양권을 불법전매하고 서울시내의 다른 지역에 다시 무허가로 정착했다. 행정당국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광주대단지 건설을 강행했다.

MBC 뉴스데스크의 뉴스매거진에서도 2007년 3월 광주대단지 사건을 다루었다. 
          
                     가난에 울고, 시당국의 속임에 두 번 운 빈민들

위의 링크를 누르시면 기사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부분 인용하면

……중앙로 일대는 광주대단지 사건의 중심이 됐던 첫 주민들이 이주된 곳이다. 여러 문서에서 주민들이 강제철거 돼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서울시 당국에 의해 청소차량에 실려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표현이 옳다. 1969년 5월 2일 밤중에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려온 이들은 답십리를 거쳐 상계동까지 갔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주대단지로 떠밀려오게 된 것이다.
한 천막에 8가구나 따닥따닥 모여 살았고, 30가구에 하나 꼴로 공동변소가 있었다하니 전염병이 퍼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주된 주민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처음에는 포장마차로 연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민들이 너나나나 할 것 없이 포장마차를 하니 매상은 제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건설일용노동직 등 일품을 팔려고 해도 서울로 갈 버스비 35원이 없어 실업상태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삶은 비참했지만 알아주는 이 만무했고 도리어 제도권 언론에 의해 난동으로 보도됐을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난동으로 믿었다.……
시당국은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구속된 22명의 평범한 주민을 반공법으로 묶어 간첩으로 몰아가려 했다. 반공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누구든지 간첩이 되고, 간첩의 사주를 받은 범죄자로 낙인 찍혔던 시대였다.
구속된 주민 22명은 광주경찰서에서 볼펜 끼기 등 온갖 고통스런 고문을 당했다. 하동근 소장은 “당시 구속됐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간첩이 사주해서 저지른 일이라고 하면 살려준다며 협박했었다”며 “이는 간첩으로 몰아가 도시계획의 무모함 등 시당국의 책임을 가리려는 수작 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경찰은 구속한 주민 22명에 대해 원래 파괴적이고 불만이 많아 이런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 정신이상자로 규정해 버린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수사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단지 살기 위해 소리 높였던 주민들에게 이 나라가 해 준 것은 배고픔 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그들을 정신이상자로 낙인 시켜버리는 잔혹함이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30여 년 전의 묻혀버린 과거가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오늘의 자화상이다. 당시의 무모한 도시계획은 오늘날 성남의 구시가지 재개발 계획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당시 주민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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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을 발견하였다. 지난 1월 14일 1층 심주(心柱) 상면(上面)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은제관식(銀製冠飾) 등 유물 500여점을 수습하였는데 이를 1월 19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공개하였다.

아래 사진과 사리봉안기 번역 내용은 모두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도자료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힘니다.

해체 공사전의 미륵사지 석탑 모습


  미륵사지 서탑의 심주(중심기둥) 해체 장면,  가운데 보이는 심주의 사리공에서 금제사리기 등 5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미륵사 서탑에서 나온 금제 사리봉안기(記)에는 석탑 자체는 물론 미륵사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가로 15.5㎝, 세로 10.5㎝의 금판에 글자를 오목새김하고 주칠(朱漆)을 입혔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서 모두 확인됐는데, 앞면에는 1행에 9글짜씩 모두 11행에 99자를 새겼고, 뒷면에는 11행에 94글자를 적어넣었다.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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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26일 서울시(시장 오세훈)가 서울시청 건물의 사적 지정을 피하기 위해 서울시청 본관 일부를 허물어 버리는 문화재 파괴 행위를 하였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문화재 위원회에서 급히 서울시청을 사적으로 가지정하고 공사를 중단시켰었지요. 뒤늦게 그 때의 사진을 발견하여 올립니다.
사진 출처는 2008년 8월 27일자 문화재청 보도자료('서울시청 청사' 사적 가지정 관련 문화재청의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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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960년대 후반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의 사진입니다.

 68년돌담뒤로물러나며고립된대한문.JPG
사진 출처는 한겨레신문 구본준 기자의 블로그http://blog.hani.co.kr/bonbon/입니다.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정문인 대한문이 혼자 길 가운데에 따로 떨어져 있다. 담장은 그 뒤에 있다. 
 그러면 여기서 퀴즈. 저 홀로 떨어져 있던 대한문은 어떻게 지금 자리로 옮겼을까요?

 

정답이 궁금하신 분은   http://blog.hani.co.kr/bonbon/13546 을 보세요.
덕수궁에서 일어난 역사의 비화 및 미스테리를 다룬 재미있으면서도 아픈 이야기 속에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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