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 박인희





60~70년대 서울풍경-홍순태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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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 말소' 원조는 몽양의 <조선중앙>"


▲ 강준식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 참가자들에게 몽양의 발자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호중


1947년 7월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몽양 여운형은 계동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경기도 양평의 생가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몽양의 차를 가로막더니 한 괴청년이 몽양에게 두세 발의 권총을 발사한 뒤 달아났다.

몽양의 옆에는 <독립신보> 주필이었던 고경흠이, 앞에는 운전수와 경호원인 박승복이 타고 있었다. 피격 직후 박승복은 달아나는 괴청년을 쫓아갔지만 웬일인지 경찰은 도리어 그를 범인으로 몰아세우고 추격을 막았다.

총격을 받은 몽양은 "조선…"이라는 한 마디만 남긴 채 곧장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근로인민당 당사(현 동화면세점 자리)로 옮겨졌다.


몽양, 혜화동 로타리에서 괴청년에 의해 암살되다

11월 27일 오후.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역사탐방 참가자들은 현 혜화동 로타리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57년 전 몽양의 죽음을 애도하는 묵념을 올렸다. 이날 역사탐방의 해설자를 맡은 강준식 사무총장(몽양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적과 동지>의 저자)은 57년 상황을 이렇게 들려줬다.

"당시 동석했던 고경흠 <독립신보> 주필이 '선생님 선생님' 외치며 몽양 선생의 몸을 흔들었다. 서울대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몽양 선생의 맥박은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왔을 땐 이미 운명한 상태였다.

그러자 시신은 근로인민당 당사로 옮겨졌다. 이후 당사 근처에서 노제를 지내고 서울운동장에서 합동장례식을 치른 뒤 수유리 묘소에 안장됐다. 몽양 선생의 상여가 이곳을 지나갈 때 소나기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도 몽양의 죽음을 슬퍼해 비를 내리는구나'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날 역사탐방 참가자들은 1945년 8월 16일 연설을 했던 옛 휘문중학 교정(현 현대그룹 계동 사옥 자리)에서 수유리 묘소까지 이동하며 몽양의 자취를 더듬었다.



▲ 1945년 8월의 몽양 여운형. ⓒ2004 몽양기념사업회


"방응모는 자가용, 송진우는 인력거, 몽양은 걸어서 출근했다

일행은 제일 먼저 현대그룹 계동사옥을 찾았다. 이곳은 몽양이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연설을 했던 휘문중학 교정이 있던 자리다. 몽양은 45년 8월 15일 저녁 안재홍·이만규·이여성·이상백·정백·최근우 등과 협의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결성하고 다음날 이곳에서 연설을 했다.

이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몽양이 암살되기 전까지 살았던 계동집이 있다. 이곳은 몽양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의 주주들이 마련해준 집이다. 현재 이곳은 칼국수집이 들어서 있었다. 다음은 강준식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당시 몽양 선생에게는 거처가 없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주주들이 마련해준 집이 바로 계동집이다. 1980년대까지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작은 마당이 있던 한옥이었다. 4개의 방과 응접실이 있었다."

해방 직후 친일파 육당 최남선이 몽양의 계동집을 찾아왔다. 몽양이 "이제 해방이 됐으니 건국하는 일에 힘을 합치자"고 제안하자 최남선은 "내가 어떻게 거기에 낄 수 있겠냐"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36년 8월 <조선중앙일보>가 문을 닫자 주주들은 계동집을 몽양에게 헌납했다. 계동집의 근처에는 <조선중앙일보> 영업이사를 했던 홍증식과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의 맏형 심우섭이 살고 있었다. 심우섭은 당시 경성방송국 '조선어' 과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조선>과 <동아>, <조선중앙>의 사세와 관련된 이런 얘기가 나돌아 다녔다고 한다.

"<조선>을 만든 광산왕 방응모는 출근할 때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의 송진우는 인력거를 타고 꺼떡꺼떡거리고, <조선중앙>의 몽양은 걸어서 터벅터벅 출근했다."

이날 역사탐방에 동행한 이기형(민족작가회의 고문) 시인은 계동집에 선 감격을 "66년 젊어졌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1938년 여름 계동집에서 몽양을 처음 대면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조선청년을 지도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유물사관에 기초한 역사책을 쓴 문석준 선생이 몽양 선생을 찾아가 보라고 해서 계동집을 찾아간 것이다. 내가 21살 때였다. 그 때 계동 집을 찾기 위해 이 골목을 헤맨 기억이 난다."



▲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등의 창당대회가 열렸던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참가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호중


해방 직전 건국동맹 결성..."경성 콤그룹 해체후 유일한 국내 항일투쟁조직"

이어 참가자들은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45년 9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던 곳은 현재 창덕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방 당시 이곳엔 경기고녀가 있었다. 다시 강준식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해방이 되니까 한민당 중심의 우파와 몽양 중심의 진보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45년 9월 6일 오후 4시에는 한민당이 낙원동의 협성실업학교에서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7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200~300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같은 날 계동의 경기고녀 강당에서는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무려 1000명이 모였다. 당시에는 숫자가 매우 중요했다. 숫자가 곧 세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진보파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중앙인민위원 55명을 선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수립을 선포했다.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린 이후 이곳에는 인공과 건준 본부, 건준 산하의 치안대 등이 들어섰다. 당시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미 군정이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강준식 사무총장이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택상이 시골에서 자기를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안불러주었다. 그래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린 경기고녀에 갔는데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장택상이 화가 나서 원서동의 송진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결국 이승만 정권에서 수도경찰청장을 맡았다."

몽양은 해방 직전인 1944년 8월과 10월 조선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각각 결성했다. 건국동맹은 8개 도에 조직책을 둘 정도로 세력화 된 단체였다. 특히 전라도 조직책이 황태성이었는데 그는 이후 월북했다가 5.16 후 박정희를 포섭하기 위해 남하했다가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건국동맹은 과거 종로 낙원상가 근처에 있던 삼광한의원에서 비밀리에 결성되었다. 강준식 사무총장은 건국동맹의 의미를 "박헌영의 경성 콤그룹 해체 이후 유일한 국내 항일투쟁조직"이라고 평가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국내에서 독립운동한 사람은 몽양 이외에 거의 없다. 그런데 국내에서 독립운동한 사람은 별로 쳐주지를 않는다. 지금도 몽양은 복권이 안되고 있지 않나."

낙원동의 수운회관에서 안국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서울시에 설치한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1944. 8. 10. 조국의 광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자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중심인물은 여운형·조동호·현우현·황운·이서구·김진우 등이며 산하조직으로 조선농민동맹을 두었다.'

하지만 조동호의 아들인 조윤구 기념사업회 이사는 "내가 잘못 증언하는 바람에 건국동맹터를 알리는 표지석의 위치가 잘못됐다"며 "서울시에서 시정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건국동맹이 결성됐던 삼광한의원은 현재 표지석이 설치된 위치에서 낙원상가쪽으로 더 내려가 현재 건국다방이 있는 근방이라고 한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조선중앙>이 <동아>보다 먼저 일으켜"


▲ 미·소공동위의 브라운 소장이 자신의 관저(현재 한국의 집 자리)에 몽양 등을 초청해 가든파티를 열었다. ⓒ2004 몽양기념사업회


흔히 수운회관으로 불리우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이곳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1945년 10월)와 조선인민당(1945년 11월), 근로인민당(1947년 5월)이 결성된 장소다. 또한 몽양의 친동생인 여운홍이 4·19혁명 이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사회노동당을 결성한 곳이기도 하다.

일행은 이어 종로YMCA로 이동했다. 이곳은 건국동맹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1908년 빨간벽돌의 3층 건물로 지어진 YMCA는 종로거리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조선황성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가 '황성'이 빠지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되었다가 현재의 YMCA에 이르렀다.

참가자들은 조계사 근처의 농협 종로지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조선중앙일보>가 있었던 자리로, 몽양은 1933년 2월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곳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건물임을 알리는 안내석이 서 있었다.



▲ 농협 종로지점 안내석에는 <조선중앙일보>가 아닌 옛 <조선일보>의 사옥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호중


'이곳은 2002. 1. 29 서울시 고시 제2002-27호에 의해 건축물 전면 원형보호를 요하는 근대건축물로 지정되어(1926. 7. 5 신축한 조선일보 옛사옥) 2003. 8. 11 농협에서 증축한 곳입니다.'

처음 이 건물은 조선일보 사옥으로 세워졌으나 방응모 사장이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태평로에 새사옥을 지워서 나가자 당시 몽양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1934년부터 이를 다시 사옥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중앙>은 경영난을 겪고 있던 <중외일보>를 조동호 등이 인수한 신문이다. 이들은 당시 충청 지주 윤희중의 자금지원을 받아 30만엥에 신문사를 인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중앙>으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1933년 몽양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조선중앙>으로 다시 제호를 바꾸었다. 왜냐하면 중국에도 <중앙>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중앙>'이라는 의미에서 <조선중앙>으로 제호를 바꾼 것.

강준식 사무총장은 현장해설을 통해 "'일장기 말소사건'은 <동아>가 아니라 <조선중앙>이 제일 먼저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조선중앙>은 <아사히스포츠>에 실린 손기정 선수 사진을 공수해 일장기만 지우고 이를 8월 13일자에 내보냈다. 이로부터 12일 후인 8월 25일 <동아>가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 선수 사진을 실었다. <동아>는 이 사건으로 정간이 되었다가 복간되었지만 <조선중앙>은 완전히 문을 닫아야 했다."


중국인이 하던 '원태창'이란 양복점 즐겨 찾아..."옷에 관심 많아"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남산 밑에 위치한 '한국의 집'과 '남산골 한옥마을'로 이동했다. '한국의 집'은 몽양이 엔도 류사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은 곳이다. 이 때가 45년 8월 15일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였다. 이곳은 당시 정무총감의 관저였던 것이다.

이곳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릴 당시 미국측 수석대표인 브라운 소장의 관저로도 쓰였다. 브라운 소장은 몽양 등을 초청해 이곳에서 가든파티를 열기도 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육신인 박팽년이 살았던 집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몽양은 왜 총독 관저(현 청와대 자리)가 아니라 정무총감 관저에서 치안권을 넘겨받았을까. 당시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협심증 때문에 거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치안권을 넘겨받은 자리에는 몽양 외에 조선인 백윤화 판사가 통역을 위해 동석했으며, 조선총독부 쪽에서는 경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한국의 집' 바로 옆에 위치한 현 한옥마을은 과거 조선헌병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헌병사령부는 오늘날로 치면 보안사와 안기부를 합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몽양은 해방 직후 이곳에 와 독립지사들을 석방시켰다. 이임수 건국동맹 재정부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양은 정무묵 경성서비스 사장이 빌려준 외제차를 몰고 이곳에 도착했다. 몽양이 이곳에 도착하자 사령부의 한 대좌가 나와 "새 나라를 건국하게 됐으니 잘 이끌어가길 바란다"고 말한 뒤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해방 당시 서울에서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과 조선호텔이 있었다. 미 군정은 두 호텔을 접수한 후 반도호텔 7층에 하지 중장(미 군정 사령관)의 관저를 마련했다. 하지 중장은 1945년 10월 이곳에서 몽양과 첫 대면했다.

하지만 몽양은 하지 중장으로부터 "당신이 일본 왜놈의 돈을 많이 먹었다고 하던데"라는 말을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당시 하지 중장이 몽양에게 밀사로 보낸 사람은 '지미 킴'이라는 필리핀계 한국인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동화면세점 건물은 과거 근로인민당 당사가 있었던 곳이다. 몽양이 혜화동에서 암살당한 뒤 그의 시신은 이곳으로 옮겨져 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노제를 지냈다.

참가자들이 직접 가진 못했지만 정동의 세실극장 근처에 '원태창'이란 양복점이 있었다. 몽양은 중국인이 경영했던 이곳을 즐겨 찾았다. 이임수 건국동맹 재정부장이 그의 양복값을 댔다고 한다. 다음은 강준식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몽양 선생이 돈은 없었지만 옷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멋쟁이 옷을 입고 다녔다. 지금으로 치면 몸짱이고 얼짱이었다. 원태창은 상해에서 옷감을 공수해왔다. 당시 외교관들이 이곳에서 옷을 맞춰 입을 정도로 최고의 양복점이었다."


수유리 묘소에서 몽양의 복권을 꿈꾸다





몽양의 자취를 밟아온 역사탐방 참가자들은 몽양이 5년간 수감됐던 서대문 형무소와 암살장소인 혜화동 로타리를 거쳐 그가 잠든 수유리 묘소에 도착했다. 야트막한 산 위에 마련된 몽양의 묘소 주변을 적송이 감싸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묘소 앞에 하얀 국화를 헌화하고 묵념을 올렸다.

이기형 시인은 감격스런 목소리로 "몽양 선생이 독립유공 서훈을 받아 명예회복이 되어야 하고 우리 현대사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양의 친동생 여운홍의 손자인 여인성씨도 "내년은 몽양 선생 서거 58주년이 되는 해"라며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아 뜻깊은 행사를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날씨도 흐리고 낮시간도 짧아져서인지 오후 4시 30분이 조금 넘었는데도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참가자들은 7시간에 걸친 이날 역사탐방을 마치고 몽양의 묘소를 내려오면서 "몽양이 반드시 복권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과연 좌파계열 독립운동을 펼쳤던 몽양이 해방 60주년이 되는 내년에 58년의 한을 풀 수 있을까.


▲ 역사탐방 '몽양의 흔적을 찾아서'의 참가자들이 몽양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호중


출처 : 구영식 기자 오마이뉴스 2004.11.29- one2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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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바로보기] 18. 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기사입력 2004-09-15 18:03 |최종수정2004-09-15 18:03


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오늘날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나 발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별로   논의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발해사는, 그동안 고구려사를 삼국사에 포함한 것과는 달리 ‘우리 역사’라는 의식이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뒤 당은 안동도호부를 두었으나 점령지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곳곳에서 벌어진 유민들의 세찬 저항운동 때문에 안동도호부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런 과정에서 당은 중국 관내에 속하는 영주(營州)에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 말갈족 등 북방민족을 옮겨와 살게 했다.
걸걸중상(乞乞仲象)·걸사비우와 대조영(大祚榮) 부자도 이곳에 와서 살았다. 대부분의 기록은 ‘고구려의 별종’이라 했다. 이들은 현지 도독의 부당한 압제에 맞서 저항했다. 그 지도자인 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 등은 영주를 빠져 나와 영토를 확장했다.
그 도중에 걸걸중상·걸사비우 등은 죽고 대조영이 말갈군과 고구려 부흥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면서 나라를 세웠다. 처음에는 698년 동모산(지린성 둔화시 성자자산)에 도읍하고 진국(震國·동방 나라의 뜻)이라 했다. 고구려가 멸망 당한 지 30년 만이었다.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그 대씨(大氏)는 누구였던가? 그는 고구려 사람이었다. 그들이 차지했던 땅은 우리의 고구려였다’고 썼다.
대조영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신라 등 주변 국가에 알렸다. 당에서는 관례대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대조영은 나라를 세운 지 21년 만에 죽었는데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고구려 왕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그의 아들 무왕은 발해의 독자 연호를 쓰면서 당에 대해 독립국임을 강조했다.
3대왕인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자신을 고려국왕이라 일컬었으며 일본에서는 발해에서 전해진 음악을 고려악이라 불렀다. 그러나 중국의 사가들은 ‘참칭’(僭稱·거짓 호칭을 쓰는 것)이라 비난을 퍼부었다.
발해는 정복전쟁을 활발하게 벌여 남쪽으로는 압록강 상류 언저리까지(뒤에 대동강 상류까지 내려왔다) 내려와서 당의 지경과 맞댔다. 서쪽으로는 요동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여 당·거란·돌궐과 경계를 삼고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함경도 아래 지역까지 내려와서 신라와 맞닿았다. 북쪽으로 송화강 상류에서 흑수부와 경계를 삼았다. 고구려 영토 3분의 2를 확보한 것이다.
예전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 후신임을 자처한 발해를 두고 발해라 부르기도 하고, 발해말갈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냥 말갈이라 부르기도 했다. 말갈이라는 용어는 중국 동북방의 이민족을 통칭하는 낮춤말이다. 일본 학자들은 발해의 상층부는 고구려 유민이었으나 하층부는 말갈 사람이라고 하여 그 한계를 그었다. 얼핏 들으면 발해는 다민족국가로 한국사에서 제외되어도 되는 왕조가 된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부흥을 목적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중국 역사가들도 결코 이의를 달지 않는다. 다만 일부의 기록에 대조영이 속말말갈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말갈족은 끊임없이 이동하여 서쪽으로 진출했다. 그들의 중심세력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고구려에 복속했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외부의 침입을 받을 때 고구려에 속해 힘을 합해 싸웠다. 이들은 영주 등지에서 고구려 유민과 함께 살고 있었다. 걸사비우와 대조영이 거사할 때 공동운명체로 함께 참여했고 이어 동쪽으로 진출할 때에도 합류했다. 걸사비우가 죽고 나서도 별도의 행동을 보이지 않고 새 나라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니 말갈족은 바로 고구려 주민이요, 유민이었던 것이다.
다음 발해의 지배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을 알아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일본에 사신으로 간 사람은 고제덕(高齊德)이었다. 일본 학자가 이 점에 착안하여 일본에 갔던 32명의 성을 조사했는데 22명이 고씨였다. 또 성이 밝혀진 발해 사람 317명을 조사해보면 대씨가 90명, 고씨가 56명이었다. 대씨는 발해 왕족의, 고씨는 고구려 왕족의 성이며 나머지 밝혀진 성씨들도 거의 고구려 귀족들이었다.
이를 보면 발해왕조는 고구려 유민 또는 귀족이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다.
말갈 출신들은 전혀 지배층에 낄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민족이 중국에 세운 나라들도 말할 나위도 없이 중국 사람들을 지배층에 끼어 넣었다. 발해도 중국의 경우처럼 새로운 성을 주어 지배층에 동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에 동화한 말갈이 이룬 왕조로 200년 넘게 유지했다. 만약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말갈 혈통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차별하여 하부세력으로만 만들어 놓았다면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정복전쟁을 거쳐 여러 민족을 지배하면서 유지했다.
그런데도 중국과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모두가 말갈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고구려 색깔을 지우려 하고 있다. 발해의 영역을 확인해보자. 발해는 756년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는 대역사를 단행했다. 수도를 옮기는 일은 여러 세력의 이해가 얽히고 재정부담이 커서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천도를 과감하게 단행했던 것은 그만한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상경용천부는 목단강 유역, 즉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이다. 도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한 가운데에 자리잡았다.
근래 이곳의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규모가 당시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성으로 꼽힌다고 한다. 문왕은 56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죽었다. 고구려 장수왕과 비견되는 인물이다. 문왕은 해동성국의 기초를 만들었다.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可毒夫)라 불렀다.
또 다음 아들이 될 맏아들을 부왕(副王)으로 삼아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겼다. 중앙직제는 3성6부 체제였다. 최고 책임자는 대내상(大內相)이었으며 6부는 충부·인부·의부·지부·예부·신부로 각기 분담해 행정을 맡았다. 이는 발해가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본받지 않고 발해의 실정에 맡게 행정체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방의 행정제도는 중앙과 동서남북에 5경(京)을 두었으며 그 아래 15부(府)를 두었다. 부여의 옛 땅에는 부여부를 두어 거란에 대비한 군사를 주둔시켰고, 고구려도 확보하지 못한 연해주 땅에는 솔빈부를 두고 말을 기르게 했다.
신라는 대동강 남쪽과 원산만 아래 쪽까지 경계로 삼았다. 일본은 동해를 거쳐 동경용원부(지금의 훈춘) 또는 상경용천부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으며 신라는 압록강을 건널 수 없어 황해 바닷길을 거쳐 발해만의 등주·내주로 들어갔다. 발해는 해동성국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228년을 유지한 뒤 거란족이 세운 요(遼)에 926년 멸망당했다. 고려는 발해를 계승했다고 표방했다. 그 정통성을 고려가 이었던 것이다.
-唐 과거 응시자격 등 사고 마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이들 속에는 신라의 유학승과 유학생이 많았다. 발해도 안정기에 당나라와 화해를 유지하면서 유학생들을 보냈다. 유학생은 일단 10년을 기한으로 했다. 그리고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에 응시했다. 빈공과는 주변국 출신의 인사들에게 보이는 당나라의 특별 과거시험이다. 시험에서 신라 사람들이 거의 1등을 차지했다. 일단 합격해 벼슬을 받으면 10년쯤 더 머물 수 있었다. 최치원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합격은 외국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하찮은 벼슬이라도 얻을 수 있었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고관이 될 수 있는 큰 경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빈공과 합격자는 신라 학생들이 휩쓸었다. 당이 멸망하여 폐지될 때까지 총 70여명의 합격자 중에서 신라 학생이 모두 58명이었다. 일본이나 티베트 학생들은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으로 허덕거렸다.
그런데 9세기 중엽부터 발해 유학생들이 응시하면서 신라의 독점이 깨지기 시작했다. 신라는 발해의 참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구악을 저버리고 이속(異俗)붙이를 참여시킨다”고 항의했다. 신라가 발해 유학생의 빈공과 응시를 막으려 했던 것이다.
872년 빈공과 시험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발해 유학생 오소탁이 신라 유학생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최치원도 분통이 터져서 “이미 사방의 기롱을 불러왔으니 한 나라의 수치로 길이 남을 것이다”라고 내뱉었다. 최치원은 훗날 발해 유학생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뒤 “실로 공정하여 예전의 수치를 씻었다”고 자랑했다. 발해 유학생은 통틀어 10여명의 합격자를 낸 것으로 보인다.
897년 발해는 발해의 국력이 신라에 앞서니 외교사절이 앉는 차례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신라의 사절이 앞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이것이 석차쟁장사건(席次爭長事件)이다. 물론 당 조정이 거절했으나 신라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발해의 국력이 신장되자 신라의 라이벌 의식이 더욱 세어진 것이다.
예부터 발해사를 연구한 학자들이 적었다. 신라가 오래 나라를 유지하면서 발해를 깔아뭉갰고, 발해의 영역이 저 멀리 북쪽지대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또는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고 연구한 학자들은 실학시대의 유득공·정약용이 있었고, 해방 뒤에는 이우성·송기호 등이 있다.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이들 속에는 신라의 유학승과 유학생이 많았다. 발해도 안정기에 당나라와 화해를 유지하면서 유학생들을 보냈다. 유학생은 일단 10년을 기한으로 했다. 그리고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에 응시했다. 빈공과는 주변국 출신의 인사들에게 보이는 당나라의 특별 과거시험이다. 시험에서 신라 사람들이 거의 1등을 차지했다. 일단 합격해 벼슬을 받으면 10년쯤 더 머물 수 있었다. 최치원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합격은 외국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하찮은 벼슬이라도 얻을 수 있었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고관이 될 수 있는 큰 경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빈공과 합격자는 신라 학생들이 휩쓸었다. 당이 멸망하여 폐지될 때까지 총 70여명의 합격자 중에서 신라 학생이 모두 58명이었다. 일본이나 티베트 학생들은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으로 허덕거렸다.
그런데 9세기 중엽부터 발해 유학생들이 응시하면서 신라의 독점이 깨지기 시작했다. 신라는 발해의 참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구악을 저버리고 이속(異俗)붙이를 참여시킨다”고 항의했다. 신라가 발해 유학생의 빈공과 응시를 막으려 했던 것이다.
872년 빈공과 시험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발해 유학생 오소탁이 신라 유학생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최치원도 분통이 터져서 “이미 사방의 기롱을 불러왔으니 한 나라의 수치로 길이 남을 것이다”라고 내뱉었다. 최치원은 훗날 발해 유학생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뒤 “실로 공정하여 예전의 수치를 씻었다”고 자랑했다. 발해 유학생은 통틀어 10여명의 합격자를 낸 것으로 보인다.
897년 발해는 발해의 국력이 신라에 앞서니 외교사절이 앉는 차례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신라의 사절이 앞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이것이 석차쟁장사건(席次爭長事件)이다. 물론 당 조정이 거절했으나 신라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발해의 국력이 신장되자 신라의 라이벌 의식이 더욱 세어진 것이다.
예부터 발해사를 연구한 학자들이 적었다. 신라가 오래 나라를 유지하면서 발해를 깔아뭉갰고, 발해의 영역이 저 멀리 북쪽지대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또는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고 연구한 학자들은 실학시대의 유득공·정약용이 있었고, 해방 뒤에는 이우성·송기호 등이 있다.
〈이이화/ 역사학자〉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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