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환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제2시기는 혁명의 시기이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가 우리를 침략해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고, 일본은 또다시 동북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이 시기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은 혁명적 동지관계를 구축했다. 이 단계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풍부하다.

큰 단계로 구분해 보면, 10월혁명 이전은 우리나라 구민주주의혁명의 시기였다. 조선 또한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이 때는 갑오전쟁에서 10월혁명까지 20여년의 시기였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은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10월혁명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두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탄생했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던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각 지역 어디나 있었지만 동북지방에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이후 중국혁명의 모든 역사단계에 조선동지가 참가하게 되었다.

최용건(崔庸健)위원장 말에 의하면, 당시 조선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와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고, 이 성공이 조선혁명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10월혁명 초기 조선동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동지들이 중국에 와 군사관련 업무를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방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운남강무당이 있었다. 이후 손중산 선생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조선동지들이 입교하였다. 그 때가 1924-1927년으로 최용건, 양림동지가 당시 교관이었고 많은 동지들이 학생으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대혁명 때 혁명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던 날 밤 광주(广州)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조선동지들이 희생되었다. 최용건 위원장은 그 때를 아직도 기억하는 데, 당시 160여명의 조선동지들이 광주 사하(沙河)와 한하(韓何)의 진지를 결사적으로 지켜내다 거의 대부분이 용감하게 희생되었다. 당시 최용건 동지가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차례 합의를 거쳐 광주의 그 진지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광주열사능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대혁명 실패 이후 즉 1928년 이후 조선동지들은 중국에서 비밀공작에 많이 투여되었는데, 상해, 동북 등지의 노동운동에 참가하거나 농민운동과 학생은동에 뛰어들었다.

확실히 10월혁명 초기에는 조선동지들이 이런 혁명사상을 품고 중국에 왔다. 공개투쟁, 비밀투쟁, 정치투쟁, 무장투쟁을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 중국혁명을 도왔다. 중국혁명투쟁이 승리한 이후, 다시 조선혁명 승리를 추동하였다. 1931년 "9.18"포성 이후 상황이 변했다. 조선은 일본식민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동북 역시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는 비록 동북에 괴뢰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일 뿐이고 실제로는 조선과 동북은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동지가 중국혁명투쟁에 참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공동투쟁이며 연합투쟁으로 이것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지식이다. 당시 김일성동지 영도하의 항일유격전쟁은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연합투쟁이고 공동투쟁이라 인정해야 한다. 동북항일연합군과 같은 경우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일연합군으로 해석해야 되고 사실 역시 이와 같다.

내가 이번에 최용건위원장과 이효순(李孝淳)부위원장 그리고 박외상(朴外相)과 함께 동북 하얼빈, 장춘, 심양 등을 가서 항일혁명의 노전우들과 얘기를 통해 이런 견해를 실증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세가지 노선이 있었는데, 왕명(王明)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의 지도아래 소위 당시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방침은 바로 도시폭동이었다. 그러나 도시에는 역량이 안됐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동시에 농촌무장투쟁도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동북농촌에서 일어난 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조선동지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당시 동북으로 망명한 조선동지들은 농촌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농민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거나 혹은 조선족 거주지역에 살았다. 그래서 농민을 봉기시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가 용이했다. 그리하여 "9.18"에서 항일전쟁 승리 때까지 10여년간 많은 항일부대가 창설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 많은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현재 이 역사단계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항일연합군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연합군이고 기념관은 모두 이 같은 해석에 따른 것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조선동지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이며, 더우기 조선동지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간주하면서 다수가 조선에서 망명해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왜곡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망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혁명대오 중에 나타난 대국쇼비니즘 잔재의 하나이다. 만약 항일전쟁 역사단계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면 동북에 참가했던 항일연합군에 대해 --- 북경에도 있지만--- 연구반을 조직하여 어떤 때는 조선에 가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제의한다. 반대로 조선동지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공동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만 역사적 진실성을 회복하고 전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역사단계 이외도 해방전쟁과 반장개석 투쟁과정에서도 많은 조선족동지를 흡수하여 조선사단을 구성하였는데, 항미원조(抗美援朝) 이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중국의 해방전쟁에 영웅적으로 참가했고, 이후에 또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혁명역사 단계에서 쌍방은 서로를 지지한다. 또한 조선동지가 중국동지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동지가 조선을 지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시간 역시 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의의에서 본다면, 혁명박물관과 군사박물관에 진열된 물건들은 아직도 더 보충되어야 하며 수정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지난번에 최용건위원장을 모시고 동북에 갔을 때, 나는 박물관을 관장하는 동지를 찾아 이미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제3시기는 현재를 말하는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심화단계에 있어 보다 서로를 배우고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상 뿐만 아니라 혁명투쟁중에서 쌍방은 이미 제국주의와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경험했고 양국은 정확히 인식의 일치와 행동의 일치를 경험했다. 더 적확하게는 피로써 맺어진 전우이자 동지적 우의를 맺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여기고 있는데, 중국의 전선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진영의 동방전초기지로 간주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을 당신들의 후방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특히 동북은 당신들의 근거리 후방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와서 참관하거나 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서 참관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다. 다만 지금 목전의 일을 보면, 여러분들이 역시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다. 방금 우리는 예를 들면서 그들(중국과학원 □□夫원장을 가리키며)을 비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들은 20여명이 42일 동안 방문했는데, 그들은 겨우 7명만이 조선에 가서 30여일만 머물렀다. 바로 이런면을 여러분에게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동북국, 동북3성 성위원회가 금년 겨울 참관단을 구성하여 여러분에게 찾아가서 도시공작활동과 농촌활동, 당내 활동, 총노선, 천리마운동, 청산리활동 방법과 대안활동체계를 배울 것을 결정했다.

우리 동북의 동지들이 여러분들에게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동북에 사람을 파견해 연락을 직접 취할 수 있다. 평상시에 이렇게 밀접한 연결이 있어야만 일단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간주하고 여러분들도 우리를 여러분의 후방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야만 장벽이 생기지 않고 협조가 원활하지 못한 결함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당 공작활동이나 도시공작, 농촌활동, 공업교통공작 뿐 아니라 여러분의 분화활동 역시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번에 조선대사관 대사와 이야기를 마쳤는데, 영화공작단을 파견해서 적색선전활동가의 창작경험을 배우고, 농촌에 가서 진정으로 배우고, 이선자(李善子)의 진짜 이름인 이신자(李信子) 방문하고, 청산리에 가서 또한 배우고자 한다. 이런 사본과 영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선인민의 공작을 배우고, 힘들지만 소박한 농촌생활의 작풍과 설득경험 그리고 생산투쟁과 계급투쟁의 경험을 배우고자 한다. 그런후에 연극무대와 은막에 선보이려고 한다. 중국예술가의 소개를 통해 중국인민에게 조선인민의 실제생활과 전투생활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들의 노래와 춤 또한 배울 가치가 있다. 여러분들은 주체사상으로 음습한 기풍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의 춤과 노래는 민족화가 그렇게 강하지 못해 좀 잡다하고 뒤죽박죽인 편이다.

최용건위원장이 동북의 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세차례의 만찬을 준비했는데 장춘에서 가장 실패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는데 조선의 풍격같지가 않았다. 또한 "동방홍(東方紅)"을 들어도 서양풍이 너무 강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홍군 춤"이라는 무도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노인과 젊은이가 등장했다. 이를 민속무용으로 알았으나 사실은 발레였다. 젊은 홍군은 여성이었는데 발을 뾰쪽하게 세우는 춤이었으나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선동지들이 보고나서도 반응이 시원잖았고 우리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진이 원수가 문화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었다.

조선동지가 매우 솔직하게 우리의 어떤 것들은 주체사상이 없이 동쪽에서 하나 끌어들이고 서쪽에서 하나 가져온 것에 불과하며, 침구나 먹거리 또한 옛것, 새로운 것, 중국 것, 외국 것이 구분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도 대외문화위원회도 어떤 동지가 있는데, 가지고 나갈 작품에 주체사상이 없어 밖으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많은 동작이 있기는 하지만 주의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면서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조선양국 문화협정>의정서가 체결됨에 따라 우리는 가무극단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혁명사극으로서 태평천국시대에 상해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로 <소도회(小刀會)>이다. 여기는 당연히 시대풍격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화인데 유럽의 신이 아닌 중국의 신으로 역시 풍격이 있다. 우리의 신의 모습은 하느님과도 다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의 문화예술은 많은 부분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또하나의 문제는 문자에서 발생하는 간극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나는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황장엽(黃長燁)동지가 이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글에는 세 종류의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평양과 서울 그리고 연변이 그것이다.

평양의 표준은 당연히 전형적인 표준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선동지 조선인민이 모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이 이 표준에 따라 말하고 문장을 써야 한다. 평양에도 주음(注音)이 있지만 이미 한자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인용했던 여러 중국성어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인용하는 조선성어는 민족화되었다.
서울의 표준은 여전히 한자이다. 남조선은 여전히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중국성어 인용을 좋아해서 북조선인민이 알아듣지 못한다.

연변의 표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부 말하는 방법조차 바꿨다는 데 있다. 듣기로는 조선말과 일본말이 말하는 방법에서 상당히 가깝다고 한다. 예를 들면 "我吃□"을 "나는 밥을 가지고 먹는다"고 한다. 연변말은 중국말을 받아들여 변화되어 왔다. 어떤 말은 이렇게 중국말처럼 바뀌었다. 두번째는 일본통치시기에 소위 협화어라는 일본인이 썼던 한자가 복잡하게 섞였기 때문에 연변의 말이 깨끗하지 못하다. 세번째는 보다 많은 것은 많은 중국한자성어를 끌어다 쓰다보니 소리음마저도 중국음으로 발음한다. 이렇게 되어 조선동지들조차도 그들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홍기>라는 잡지를 조선말로 출판해서 평양에 가지고 가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특히 경제용어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문자 이 문제를 해결해 말하는 것을 알아듣게 해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늘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을 제대로 통역했는지 하는 것이다. 역시 여러 동지를 평양에 파견에 심도있게 배우도록 해야겠다. (대외문화위원회 증영(曾瑛)동지를 가리키며)당신들이 연출하는 가무극의 자막은 반드시 평양의 표준적인 사람을 찾아 번역토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제3시기의 관건은 말하고 쓰는데 있다. 배워서 통하지 않으면 손해다. 그래서 먼저 번역대오를 정비해야 한다. 조선동지와 내왕하려면 반드시 평양표준을 따라야 한다.

여러분은 이번에 자연과학을 참관했는데 대략 적잖은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자연과학 자체는 계급성이 없다. 다만 우리들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와, 여러분을 접대하는 일 그리고 유람과정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대국쇼비니즘 잔재가 남아있는지 여부를 살피도록 해 주었다. 생활, 문화오락에 주체가 조금 없이 표현된 점이나 말이 평양표준에 맞지 않는 것 등은 아마도 다음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대국쇼비니즘이 없기를 바라지만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는 이를 면하기 어려움도 있다. 여러분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상운(祥雲)
,


KBS-TV 2004년 9월 10일 자 방송, [인물현대사]

 인물현대사 (KBS) : 큰 하나를 위하여-문익환

동영상 -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328116_968.html
방송일시: 2004년 9월 10일(금) 밤10시
연출: 양승동 PD

기획의도 : 문익환(1918년-1994년)은 목사로서 재야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였다. 그는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은 동전의 양면으로써 동시에 추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해 이중적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의 재야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지만, 지난 89년 그의 방북 사건에 대해서는 의혹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의 방북과 김일성을 포옹한 행위는 돌출적인 행동이었나? 그의 민주화 및 인권 운동과 말년의 파격적인 통일운동은 어떤 함수 관계를 갖고 있었나이번 주 인물현대사에서는 문익환 목사를 통해, 우리 사회 일각의 그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의 실체와 함께 그의 진면목을 들여다 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역사 인식을 되돌아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본다.

Posted by 상운(祥雲)
,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1967년 9월16일)



초만원을 이룬 귀성열차. (1968년 10월5일)



콩나물 시루 같은 객차에나마 미처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거의 필사적이다. 기적이 울리는 가운데 기관차에 매달린 두아낙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1969년 9월24일)



정원87명의 3등객차 안에 2백30여명씩이나 들어 찬 객차 안은 이젠 더 앉지도 서지도 못해 짐 얹는 선반이 인기있는 침대(?)로 변하기도.(1969년 9월24일)



추석을 이틀 앞둔 24일 서울역은 추석 귀성객들로 붐벼 8만1천여명이 서울역을 거쳐 나갔다.(1969년 9월24일)



8만 귀성객이 몰린 서울역엔 철도 직원외에도 사고를 막기위해 4백80여명의 기동경찰관까지 동원, 귀성객들을 정리하느라 대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데모 진압 장면을 방불케했다.(1969년 9월24일)




추석 보름달 (1969년 9월26일)



귀성객이 버스 창문으로 오르는등 고속버스정류장 대혼잡 (광주고속버스정류장. 1970년 9월14일)



삼륜차까지 동원되어 1인당 1백원에 성묘객을 나르고 있다. 홍제동. (1970년 9월15일)



60~70년대에 선보였던 대표적인 추석 인기 선물 - 설탕세트.



잔뜩 찌푸렸던 추석날씨가 오후부터 차차 개자 고궁에는 알록달록한 명절옷을 차려입은 아가씨들의 해맑은 웃음이 가득찼다. (경복궁. 1976년 9월11일)



꿈속에 달려간 고향. 지하도에서 새벽을 기다리며 새우잠을 자는 귀성객들. (서울역앞에서. 1978년 9월16일 새벽2시)



추석 전날 시골 풍경 (1980년 9월)



한복정장차림으로 추석제례를 올리고 있는 4대째의 일가족. 올해 1백살난 姜敬燮할머니가 시부모의 묘에 절을 할때 80세된 며느리 呂判敎할머니와 손자 손부 증손자 증손부와 문중일가 20여명이 지켜보고 있다. (慶北 金陵군. 1980년 9월24일)



추석 귀성객 (1980년)



추석 귀성객은 돌아오기도 고달프다. 통금이 넘어 14일 새벽 0시20분에 도착한 연무대발 서울행 고속버스 승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받고 있다. (1981년 9월14일)



광주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한 여의도광장에는 3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삽시간에 표가 동나버렸다. (1982년 9월19일 정오)



짐인지 사람인지...
귀성버스도 북새통. 연휴 마지막날인 3일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짐짝처럼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관광버스 짐싣는 곳에 승객이 앉아 있다.(1982년 10월3일)



고향으로 달리는 마음
추석귀성을 위한 고속버스 승차권 예매행렬이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끝이없이 늘어서 있다. (여의도광장. 1983년 9월10일)



빗속의 귀성예매 대열
추석 귀성객을 위한 고속버스승차권 예매가 15일 서울여의도에서 시작되자 3분의1일인 1만5천6백여장이 팔렸다. (1985년 9월15일)



추석 고향길은 멀고도 불편한 고생길. 서울역 광장은 요즘 귀성객들이 하루 10여만명이나 몰려들어 민족대이동의 인파로 붐비고 있다. (1985년 9월29일)



이번 추석 귀성길에는 고속도로 국도마다 차량홍수를 이루면서 중앙선 침범, 끼어 들기등 무질서한 운행으로 극심한 교통체증과 혼란을 빚었다. (벽제국도.1987년 10월7일)



24일 서울역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귀성객이 몰려 큰 혼잡을 빚었다. (1988년 9월24일)



추석 귀성열차표를 사기위해 서울 용산역광장에 몰려든 예매객들. (1989년 8월27일)



가다가 쉬다가...
추석인 14일오전도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에는 귀성객과 성묘객들의 차량이 몰려 평소보다 2~3배나 시간이 더 걸리는 심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1989년 9월14일)



멀고 먼 귀성길
5일부터 추석귀성 열차표 예매가 시작되자 6일 발매되는 호남선 열차표를 사려는 시민들이 앞자리를 뺏기지 않기위해 텐트와 돗자리까지 동원, 새우잠을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역. 1992년8월6일)



한가위 가족나들이 (동작대교. 1992년)



출처 : 솔로문 - 차돌이
Posted by 상운(祥雲)
,
MBC-TV 2004년 8월 31일 자 방송, [PD수첩]

2004년 8월 31일 (화) / 제 603 회

▣ 고구려사 왜곡, 중국의 노림수

고구려사 왜곡 문제는 중국에 있는 고구려 고분과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부터 예정된 시한폭탄이었다. 고구려는 중국에서 발생한 지방정권이며 고려, 조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중국의 주장에 한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 PD수첩에서는 뜨거운 감자,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집중 보도한다.

* 칭기즈칸이 중화 영웅? -  울란바토르 현지 취재
PD수첩에서는 한국과 몽골, 둘 다 본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는 두 나라의 역사왜곡 현장을 비교하기 위해 몽골 현지를 취재했다. 현재 중국인들이 칭기즈칸을 중국의 영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리 인터뷰에서 인터뷰에 응했던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몽골의 영웅이다, 중국의 태도에 화가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몽고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역사학자인 달라이 교수는 몽고 현지 인터뷰에서 ‘칭기즈칸을 세계가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모양’이라며 ‘민감하게 반응할 가치
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분명 한국 영토이고 한국사’라고 말하고 ‘중국인들이 자기 역사라고 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 중국의 역사 왜곡, 그 현장을 가다
제작진은 현재 유물 발굴 중에 있는 길림성의 발해 유적지를 찾아 삼엄한 공안의 감시 속에서 어렵게 카메라에 담았다. 발해 유적지 주변은 개를 풀어놓는 등 시종 삼엄한 경비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왜곡된 고구려사의 교육 현장이 되어버린 지안시의 고구려 유적지를 취재했다. 지안은 그동안 유물 발굴 공사를 이유로 외국인, 특히 한국 사람은 출입조차 못하게 했다. 그러나 현재 집안은 수많은 관광객이 오고가며,  심지어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릴 정도로 변모한 모습이었다. 가는 곳마다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문구와 안내원의 설명이 따라다니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잘못된 역사교육을 받고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조선족과 중국인들에게 거리 인터뷰를 통해 고구려사가 어느 나라 역사인지 물어보고 조선족과 한족의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 중화패권주의 vs 한국의 애국적 쇼비니즘?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둘러싸고, 중화패권주의와 한국의 애국적 쇼비니즘(?)이 맞붙었다. 고구려사를 위시한 동북 역사 연구, ‘동북공정’은 중화패권주의를 드러낸다는 주장이 우리 학계에 제기되자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강력히 부인했다.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 상무 부소장인 부핑은 ‘순수 학술문제일 뿐’이라며 오히려 ’한국학자들이 인위적으로 강조‘해 편협한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반박했다. 중국 정부는 오직 학술적인 목적으로만 동북공정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PD수첩에서는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 상무 부소장인 부핑 외에 선양동아연구중심의 쑨진이(손진기) 주임 등 동북공정의 핵심 멤버이자 고구려사 왜곡을 주도했던 중국학자들의 증언을 담았다.

 

 





Posted by 상운(祥雲)
,

그 옛날의 피서철 풍경






여치집 파는 행상 / 1963. 06. 01






한강 뚝섬 피서 인파 / 1966. 07. 01









입안이 얼얼한 팥빙수 / 1966







시골의 여름 / 1966. 08. 18













폭염으로 얼음이 귀했던 1967년 여름






해운대 피서 인파 / 1970. 08. 10







인천 송도해수욕장 / 1971. 08. 08






난간에 매달려 가는 승객들로 인해 위험스런 만원인 교외선. / 1972. 06. 11






피서인파 150만 - 구식증기기관차까지 동원된 임시열차도 초만원. 위험을 무릅쓰고 열차위까지 몰려 타고 있는 피서인파. / 1972. 07. 23






한강 뚝섬 물놀이 인파 / 1964. 08. 01






만원 교외선의 행락객들 / 1972. 08. 01
>






여름 어린이 물놀이 / 1973. 07. 01







무더위로 급수차 호수로 땀을 씻고 있는 어린이. / 1973. 07. 20







대천해수욕장 피서인파 / 1973. 07. 25






어린이들의 물장난(전남 장성군 황룡강) / 1974. 08. 08






얼음 배달꾼 / 1974. 08. 01







한강 광나루유원지 피서인파 / 1974. 08. 12






완행열차, 흥겨운 행락객들 / 1975. 06. 01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아가씨들.(대천해수욕장) / 1975. 08. 08







한강 뚝섬 물놀이 인파 / 1964. 08. 01






해운대해수욕장 행상 - "달고나 사이소" / 1977. 08. 01







船遊도 불볕피해 - 서울뚝섬유원지의 선유객들. 강위에 배를 띄우고도 불볕을 피해 성수대교 아래 그늘에 머물고 있다. / 1978. 07. 29







원두막의 어린이 / 1980. 07. 24
>






탈도시 꿈꾸는 대합실 인파 풍경 / 1981. 07. 29






여름을 이기는 골목 아이들 / 1982. 08. 01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행락 인파 / 1982. 08. 01






모기장까지 등장한 숲속의 피서 / 1983. 08. 12



최희준 - 길
Posted by 상운(祥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