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교수 한홍구 선생의 [역사이야기]를 퍼왔습니다.


한홍구, "만주국의 그림자," <한겨레21> 2001년03월27일 제352호
(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1/021075000200103270352039.html)


병영국가로서의 그 분위기는 박정희 치하 이남사회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나

만주는 우리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만주하면 흔히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펼쳐졌던 우리의 옛땅으로 생각한다. 만일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만주가 아직 우리 땅일 텐데 하는 아쉬움 넘치는 공상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있을 수 없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고대사에 관한 이런 공상은 정작 만주라는 지역이 우리 근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에 존재했던 만주국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을 가로막는다.

만주는 단지 고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이래 숱한 이민들이 둥지를 튼 땅으로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만주는 우리의 근현대사에 깊이 개입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빼놓고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만주 점령, 관동군 참모들의 계산
만주는 비단 우리의 근현대사에 영향을 끼친 중요사건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곳만도 아니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는 1932년에 간행한 만주에 관한 저서의 부제를 ‘갈등의 요람’(Cradle of Conflict)이라고 부쳤다. 라티모어에게 만주는 낡았지만 아직 생명력을 잃지 않은 중국문명, 좀더 새롭고 물질적으로 막강한 서양- 제국주의화된 일본을 포함- 문명, 그리고 동양을 향해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문명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일본인들은 만주일본제국의 생명선(生命線)이라 불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일본제국의 사활을 결정하는 특수지역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차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은 독일을 모델로 생각해온 일본군의 젊은 장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들은 총력전으로 수행되는 현대전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군사력뿐 아니라 총체적인 전쟁수행능력을 제고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들에게 만주는 일본제국주의의 사활을 결정짓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주가 일제에게 생명선이었다면, 1930년대의 만주는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중에게 일본제국주의와 첨예하게 대치하는 새로운 전선이었다. 새로운 대치선 만주는 동아시아 변혁의 핵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분단된 남과 북의 정치체제의 싹이 발아한 곳이기도 하다.

1931년 9월18일 일제는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만주를 불법강점했다. 이 침략행위는 요즈음 들어서 ‘만주사변’이라는 일제의 용어 대신 ‘만주전쟁’으로 불리며, 2차대전의 도화선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그런데 일제의 만주강점은 조선인들에게 싫든 좋든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왔다. 관동군이 만주에서 군사행동을 강행한 것은 정치인, 관료, 군부, 재벌, 귀족 등 일본제국주의 내의 주요 엘리트 그룹의 합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등 관동군 참모들은 군부가 만주를 점령하면 일본 정부도 이를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하에 과감한 행동을 단행했다. 일본 군부에서 불세출의 천재적 전략가라는 이시와라는 만주를 점령해야만 조선통치가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단 이시와라만이 아니었다. 같은 관동군 참모로 뒤에 육군대신을 지낸 이타가키(板垣征四郞)도 “만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참된 조선통치는 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 참모들은 더 적극적이었다. 가미다(神田正種)는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각종 파업과 폭동으로 극도로 불안해진 조선정세의 안정을 위해서는 일본군의 실력을 과시해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같은 조선군 참모인 도요시마(豊島豊太郞)는 만주에서의 반일운동이 고조되면서 이 영향이 조선 내의 반일운동을 고무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통치의 안정을 기하고 민중을 길들이기 위해 과감한 군사행동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불행히도 관동군과 조선군 참모들의 이런 기대는 일본의 만주강점 이후 현실화되었다.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행위이며 기존의 세계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던 일본의 군사행동에 대해 서구열강과 중국의 국민당 정권은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순식간에 일본이 자기 영토의 몇배가 되는 광활한 만주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무적 황군’의 신화를 강고히 했을 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바라던 조선인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일본의 힘을 보면서 조선 내 많은 지식인들은 민족독립의 희망을 잃어갔고, 희망을 잃은 지식인들은 민족운동 선상에서 점차 탈락하면서 친일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1930년대에 국내의 반일운동, 특히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이 쇠퇴한 것은 결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희망이 민족독립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그곳은 ‘동양의 서부’
정치적인 면에서 일제의 만주강점은 조선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이들은 만주라는 광활한 시장을 확보한 일제가 차린 잔치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일제의 만주강점‘만주 붐’ 또는 ‘만주열’(滿洲熱)이라 불린 호황을 가져왔다. 실제로 일본은 1929년의 세계대공황의 충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나라였고, 그 이유는 바로 만주의 점령으로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투자수요가 활짝 열렸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자본가 계급에게 이제 일제는 타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모반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이윤 추구의 기회를 제공한 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1930년대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였다.  미개척의 벌판, 당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땅, 만주. 1920년대까지 파산당한 우리 동포들이 마지 못해 짐을 싸 만주로 발걸음을 뗐다면, 1930년대 일본과 조선의 청년들 중에는 출세나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만주로 향한 사람들이 많았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긴 칼 차고 싶어’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한 박정희도 그런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동양의 서부 만주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인종적으로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듯이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일본인, 조선인 등이 뒤엉킨 만주는 세계 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일본 군인과 관료에서부터 그들의 망상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끝내는 죽음을 당하는 중국 농민들이 함께 살아야 했던 곳이었다. 200만 재만조선인들에게도 아편장수, 개장수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천황폐하에 충성을 바치는 황군 장교에서부터 일제를 타도하려는 공산유격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살길을 찾아 몸부림친 곳이 만주였다.

그 부글부글 끓던 만주에서 젊음을 보낸 식민지 출신의 두 청년은 20여년이 지난 뒤 남과 북의 최고통치자로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결하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과 박정희가 각각 너무나 다른 위치에서 보낸 만주에서의 젊은 시절 경험은 분단된 남과 북의 정치사회문화에 서로 다른 각도에서 엄청난 규정성을 발휘했다.

흔히 ‘유격대국가’라고 불리는 이북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항일무장투쟁에서부터 찾고 있으며, 혁명전통을 주체사상과 더불어 이북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두축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사회의 운영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북에 끼친 만주의 영향이 일제와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대한 저항 속에서 배태된 것이라면, 이남에 끼친 만주의 영향은 바로 만주국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인맥이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남에서 만주인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역시 군부였다. 1950년대에 이미 봉천군관학교나 만주군관학교 츨신의 만주인맥은 군의 요직을 점령하여 한때는 육군참모총장(정일권), 1군사령관(백선엽), 2군사령관(강문봉)이 동시에 만주인맥으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그림자가 이남사회에 짙게 드리운 것은 역시 5ㆍ16 군사쿠데타로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난 뒤의 일이다.

박정희… 정일권, 만주인맥의 경험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꾸밀 때 만주인맥, 특히 박정희의 동기생보다도 1년 선배인 만주군관학교 1기생들인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등은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또 박정희와 동갑이지만 군 경력은 훨씬 빨랐던 정일권은 박정희 아래에서 오랜 기간 국무총리를 지냈고, 만주국의 고위관료 연성기관인 대동학원 출신인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국무총리로서 박정희가 죽은 뒤 감당할 수 없는 자리인 대통령을 잠시 지내다가 전두환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주 출신들이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요직을 지냈다는 것만으로 이남사회에 드리운 만주국의 그림자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일이다.

만주국은 흔히 괴뢰국가라고 불린다. 여기에 비해 대한민국은 분명히 독립국가이다. 그러나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갖는 자율성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내면지도’(內面指導)라는 이름 아래 국정의 구석구석에 깊이 개입하며 좌지우지한 관동군 지배하의 만주국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내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삼가고 있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해온 대한민국의 역사는 분명 명실상부한 독립국의 역사는 아니었다. 5ㆍ16 군사쿠데타 이래 이남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만주국에 주둔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이 소련이라는 가상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면, 이남의 군부는 ‘북괴’라는 주적없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도 실은 그 뿌리가 만주국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등 일본의 이른바 개혁관료들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자신들의 이상을 펼 수 없는 일본을 떠나 만주국 실업부에 자리를 잡고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국가개조를 꿈꾸는 고급장교들과 개혁관료들의 실험실이 되었고, 이 실험실에서 입증된 경제개발계획은 일본에 남은 동료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입되었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의 내용 면에서 볼 때, 군수산업에 역점을 둔 자급자족적 중화학공업화와 수출주도형 성장을 추구한 박정희 시대의 계획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조선에서 시행된 총독부의 경제개발정책이나 일본 본토에서의 경제개발계획보다는 만주국의 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방향을 따르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계획은 일본과의 국교 수교를 통해 일본자본의 유입으로 추진되었는데, 일본쪽에서 1965년의 국교정상화를 적극 추진한 인물이 기시 전 총리였고, 또 당시 외상으로서 이 조약에 서명한 인물이 바로 시이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에 포진한 만주인맥의 협력과 상호 신뢰에 기반해서 추진된 것이다. 1961년 11월 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가 주최한 공식만찬에 특별한 손님을 초청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南雲) 장군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돌아간 박정희는 나구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일본의 만주인맥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자, 이남에 만주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됨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의 영향과 일본의 훈육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훈육하는 병영국가
, 규제국가로서의 만주국의 분위기는 유신시대 박정희 치하의 이남사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월요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의 낭독으로 시작되어 재건체조로 마무리되는 애국조회, 목요일에는 사열과 분열행진으로 이어지는 교련조회, 국기에 대한 맹세, 점심시간의 혼식검사, 학교와 거리에서의 장발단속, 학생과 공무원들을 아침일찍 동원하는 조기청소, 열손가락의 지문을 꽉꽉 눌러 찍는 주민등록증(만주국에서는 국민수장(國民手帳)) 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충효이데올로기 등 우리에게 낯익은 70년대의 학교와 사회생활에서의 규제분위기는 40여년 전 만주국의 사회분위기를 빼다놓은 것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 땅의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박정희 시대의 제도교육과 병영 생활에 의해 훈육된 사람들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이 민주화되었지만,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을 반대해 싸워온 사람들 안에도 박정희 시대의 잔재는 의연히 남아 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지문날인 강요를 욕하면서도 대부분의 인권운동가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지지난해의 주민등록증 갱신에서 별로 거리낌없이 열손가락 지문을 꽉 눌러 찍었다. 중·고등학교와 병영의 분위기는 70년대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물론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친 요인이 만주국의 영향만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이 한국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 큰형님 미국의 의사가 관철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 부모의 나라 일본의 훈육을 받는 만주국의 그림자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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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의 기사글 스크랩입니다.

KBS 특집 (2003년 8월 16일)    일제하 민족언론을 해부한다  

"이번 회에 다루는 주제가 우리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KBS 1TV '한국사회를 말한다'(이하 '한국사회', 토요일 저녁 8시)를 제작하고 있는 황용호 책임프로듀서는 13일 전화 통화중에 이렇게 강조했다. 지난 2일 첫 방송을 내보낸 '한국사회'는 그동안 대법원과 정치자금을 조명했다.
특히 '심판받지 않는 권력, 대법원'은 법조계 내외에 큰 관심을 끌었다. "대법원의 폐쇄적인 인사제도가 보수 일변도의 판결로 이어졌다"는 주제의식을 담은 프로그램 내용은 대법관 인사를 둘러싼 판사들의 집단행동으로 현실화됐다. 8.15 광복절 다음날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부제는 '일제 하 민족 언론을 해부한다'. 스스로는 민족지를 자처하고 있으나 외부로부터 "일제시대 친일로 기생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다루게 된다.
KBS는 그동안 확인된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일제시대 <조선>, <동아>가 다룬 인물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일본 현지에 남아있는 제국의회 시대 자료를 찾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사회'는 나치독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가 친나치 언론인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는 과정과 친일잔재 청산에 실패한 우리의 모습을 비교한다. 주요 내용을 미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조선> <동아>는 일제와 '합의폐간' 했다
<조선> <동아>가 친일논란에 휩싸이자 방상훈 사장은 '조선일보 80년사' 발간사에서 "민족지들이 친일을 했다면 일제가 왜 폐간을 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1940년 폐간의 대가로 <조선>과 <동아> 사주에게 각각 100만원과 82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전투기 한 대 가격이 10만원이었으니 보상 액수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사회' 취재진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합의폐간'을 입증하는 문서를 발견했다. "양대 신문이 조선총독부와 '검은 거래'를 했다"는 학계의 속설을 실증적으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조선> 주필 "우리도 친일논조로 나가야 한다"
두 신문은 왜 언제부터 '친일'로 나가게 됐나? 1938년(소화 13년) 경성 지방 검사국의 한 문건에 따르면, 37년 11월까지 <조선> 주필을 맡았던 서춘이 "우리(조선일보)도 친일 논조로 나가야 한다'는 발언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은 좀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광고가 필요했고, 대부분의 광고주는 일본인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친일 보도에 열을 올렸다.

▲ 최초의 조선인 지원병 전사자 미화보도 한 <동아>
1939년 7월 조선인 지원병중 처음으로 전사자가 발생하자 <동아>는 다음날 유가족을 만나는 등 신속하게 이를 보도했다. 당시 전사한 이인석(옥천 출신)씨의 미망인과 가족들을 만나 증언을 청취했다. 1932년 일본천황 암살을 시도한 이봉창의 의거를 '대불경'으로 표현한 <조선>의 보도도 살펴본다.

▲ 기자만 희생되고 신문사는 살아남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진실
많은 사람들에게 1936년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을 보도한 <동아>에 사진 속의 일장기가 지워진 것이 <동아>의 의거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동아>는 관련기자들을 파면시키고 '대일본제국의 언론 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을 게재한 후 복간됐다.
기자들의 희생에 힘입어 복간된 <동아>의 이면에는 <동아>보다 먼저 일장기 사진을 지웠다가 끝내 폐간된 <조선중앙일보>의 비극이 있었다. (현재의 중앙일보와는 하등 상관없음.)
한때 여운형이 사장을 맡기도 했던 <조선중앙>은 친일파를 사장에 앉히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정간 동안의 재정 악화로 끝내 폐간되고 말았다.

▲ 독립기념관에서 쫓겨나는 <조선> 윤전기, 어떤 내용 담았나
광복절을 앞두고 16년간 독립기념관에 전시돼온 <조선> 윤전기가 철거됐다. 1939년부터 1940년 폐간 때까지 사용했된 <조선> 윤전기는 일제시대에 어떤 내용의 기사를 찍어냈는 지 알아본다.

2003/08/14 오후 3:12
ⓒ 2003 OhmyNews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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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온고지신 2004. 12. 12. 20:45
1. 약력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생.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용화와 결혼하고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고, 21년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鎬)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23년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고, 28년 세계 20여 개국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학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최초의 구연동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사랑의 선물(1922)》을 비롯한 개작번안, 창작동화를 남겼으며 《어린이》지를 통해서 신인아동문학가를 발굴하였다. 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고 78년 금관문화훈장, 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저서에 《소파전집(1940)》 《소파동화독본(1947)》 《소파방정환아동문학전집(1974)》 등이 있다.

2. 어린이날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어린이에 대한 애호정신을 앙양함으로써 이들을 바르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하여 지정한 기념일. 매년 5월 5일이다. 1923년 방정환(方定煥), 마해송(馬海松), 윤극영(尹克榮) 등이 주축이 된 <색동회>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1927년부터는 5월 5일로 날짜를 바꾸어 행사를 열었다. 당시의 <색동회> 활동은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의 하나로서 진행되었으며, 어린이를 위한 동요․동화의 창작 등을 병행하여 내실을 기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1961년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 의해 국정기념일로 되었다가 75년부터 공휴일이 되었다. 이날은 모범어린이를 선발 표창하고 아동복지에 힘쓴 유공자를 발굴․표창하는 한편, 체육대회,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사생대회, 가장행렬, 연극공연 등 어린이들의 정서함양과 체력향상을 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된다.


3. 어린이날을 만드신 방정환 선생님
방정환은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때 야주개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 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일곱 살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소성 소학교에 다녔으나 너무도 가난하여 소학교를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왕고모 집으로 옮겨 미동 보통 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선린 산업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2년만에 중퇴하고 조선 총독부 토지 조사국에 취업했습니다. 그곳은 우리의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하는 일과 농민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는 곳이기도 해서 그는 이를 박차고 나와 천도교 예배당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 전문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1운동의 기세가 꺽일 무렵, 그는 짐을 싸들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동양 대학 아동 미술과에 입학했습니다.
방정환은 2년 뒤 고국에 돌아와 천도교 안에 정식으로 소년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는 문예, 체육 등의 활동을 통해 어린이에게 정서와 건강과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조직한 것입니다. 또 이 때 그는'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고 어린이 동화집도 냈습니다. 더욱이 1923년 3월 1일에는 월간「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이어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색동회'도 조직하였으며, 이 해 5월1일 어린이 날로 지정하여 기념 식도 가졌습니다. 이 색동회에는 윤극영, 마해송, 윤석중 등이 가입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 어린이날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였습니다. 그는 뚱뚱한 몸집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어찌나 이야기를 잘했던지 어른들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가 첫 번째 어린이날 뿌린 전단의 첫 구절에서 어른에게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 보아 주시오."라고 했으며, 어린이에게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고 했다. 얼마나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표현입니까!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고 강연할 때, 일제의 경찰은 그 내용을 꼬투리 잡아서 서대문 경찰서에 가두는 따위의 탄압을 했으나 그는 결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눈물을 흘리며 쏘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동요를 남겼습니다.


겨울 밤에 오는 눈은 어머니 소식
혼자 누운 들창에 바아삭 바아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납니다.

방정환은 구연 동화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눈물을 옷깃에 적셨다 합니다. 그를 감시하던 순사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눈물을 흘려 그에게 "순사를 울린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고, 감옥에 가서는 죄수들에게 병원에 들러서는 간호사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를 보아도 그는 타고난 어린이 운동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정환은 서른 셋,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입원했는데 돌아가시던 날 밤 "가야겠어. 문간에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바로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그는 곧장 동화의 나라로 갔을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어린이 사랑'이란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출처 :  http://user.chollian.net/~tn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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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당한후의 미소짓는 듯한 표정은 마치 " 나는 할일을 다하고 가 편안하다" 는 것 같습니다... ㅜ.ㅜ^.
이하는 매헌 어록 입니다.......................................


......"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 한층 더 강인한 사랑.

사람은 왜 사는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

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1930년 10월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



...꼭 실현되고야 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1932.12.19 유언)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23세, 날이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 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棺)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艾妻愛子)와 따뜻한 고향산천(故鄕山川)을 버리고,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상기 어록은 상해 홍구공원 거사 2일전 "죽고 사는 것은 천운에 달렸으니

살아남아 후사를 도모할 우리들을 위해 남기고 싶은 글이 있거든 전해 주시오"

라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신변정리를 하시던 윤봉길의사께서

즉석에서 네편의 유촉시와 함께 써 놓으신 자서 약력서의 한 부분임)



상해의거의 이유

"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페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 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각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조락의 시기가 반드시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을 삼는다.

물론 한 두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리는 없다.

따라서, 금회의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의 효과가 없음은 잘 알고 잇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확히 알게하는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 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후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결코 도이(倒爾: 헛된 일)가 반듯이 아님을 믿는다. "

(상기 진술 내용은 1932년 4월29일 의거 현장에서 상해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된 후 수사관의 신문에 대하여 윤의사 자신이 직접 답변한 것으로써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동년 7월에 작성한 문서 <상해에서의 윤봉길 폭탄사건 전말>에 명기되어 있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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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만행 현장 사진

일제 만행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 1000여점이 발굴됐다. 이 사진들은 홍사광 한국사회문화연구원 이사장과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지난 7년간 17개국을 돌아다니며 모은 것으로, 한말과 일제 때의 희귀 사진들이다. 국내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들도 많다.


한일조약체결
한일조약을 맺고 찍은 기념사진(1904)


덕수궁 화재
1904년 4월 14일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 중화전(中和殿) 등의 건물이 불에 탔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화재현장을 조사하고 있는 일본인들. 사진 뒷편에 어렴풋이 인왕산이 보인다.(1904)



러시아 함대 침몰
러시아 운송선 승갈리호가 공격을 받아 불에 탄, 침몰 직전의 모습 1904 년


울릉도 강제 점거
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을 앞두고 군사적 목적으로 울릉도를 강탈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도동항 앞에 일본 상선이 대기하고 있다.1905 년


용산 일본군 기지 공사
일제는 용산에 일본거류지를 조성하고 2개사령부를 주둔시켰다.
1916년에 제 19, 20사단을 두고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사용하게 된다.


잔혹행위 강요
여성을 협박해 치욕스러운 행위를 자행하게 하고 있다. 이 여인은 동남아 여성으로 보인다.


융희학교 1회 졸업생
1909년 유길준과 오세창이 설립한 융희 학교의 1회 졸업 기념사진.
유길준은 우수한 교사를 통해 우수한 교육을 보급함으로써 문맹을 퇴치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군산역 개통식
군산역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아치형 기념탑(왼쪽)이 보인다.
역 뒤편 야산에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토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1911년 3월


거문도 제철소
조선 최초의 근대식 제철소인 거문도 제철소의 모습.
쇠붙이를 녹여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만들었고 칼·창 등의 병장기도 제작했다.1885 년


인천 월미도 - 20세기 초반의 인천항 모습. 뒤편에 있는 섬이 월미도다. 1907 년


731부대 생체실험
일본 의사가 생체실험을 하기위해 손을 묶은 채 배를 갈라 내장을 만지고 있다. 마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실험 대상자의 눈알이 튀어나와 있다.(1936)


731부대 해부실
일본군들이 철수하면서 폭파시킨 해부실 내부의 잔해. 일본군은 증거 인멸을 위해 실험 대상자들을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


731부대 전경
불에 탄 731부대의 모습. 세균 전쟁을 위해 생체실험에 희생된 사람 수는 3000여명으로, 한국·중국·러시아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948)


살해된 부녀자
갈라진 배에서 내장이 튀어나와 있다. 눈을 뜬 채 숨져 있는 시신 밑바닥에는 피가 낭자하다.


강간 당하는 아녀자.
겁탈을 당하고 있는 부녀자의 모습.
수건을 쓴 채 곁눈질로 사진기 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무기력한 얼굴이 보인다.


일본도로 목을 치는 잔혹한 모습(순간 포착)
일본 군인이 처형 대상자의 목을 일본도로 자르고 있다. 처형된 사람은 중국인의 복장을 하고 있다. 독립군들은 신분위장을위해 중국인 복장을 입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복장으로만 보면 중국인의 구별이 쉽지 않다. 국민대 국사학과의 장석흥(한·일 근대사) 교수는 “사진의 각도가 다른것으로 봐, 3명 이상이 동시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고문을 했다면 모자가 벗겨졌어야 했을 것”이라며 “피해자가 독립군이라고 무조건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백두산 천지에서 제를 지내는 일본인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쇠말뚝을 박고, 그 앞에 마련한 제단에서 무속인을 포함한 일본인들이 천황(텐노)의 시조신이자 일본인의 조상신으로 알려진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1943)


일장기 들고 만세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 앞에서 일장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일본군인(1943)


백두산 정상에서 합장하는 일본인들
일장기를 든 일본인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전쟁승리를 기원하며 합장을 하고 있다.
(1943)


혜산진에서 출발해 신사참배를 마치고 백두산 정상을 향하고 있는 대원들. 곧추세운 일장기의 모습이 보인다.


상담하는 정신대
일본 정부는 전쟁이 확산되고 피해가 속출하자 여성정신대까지 동원령을 공포했다. 일제는 “중학교를 보내주겠다”며 11~14세의 어린 여성을 미혹했다. 일부 학교 교장들은 “정신대에 가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않겠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정신대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나뉘었는데,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간의 구별이 모호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정신대 여성들에게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경우도 많았다. 일제는 공개적으로 정신대를 모집했으며 신문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정혜경 연구원(강제연행전공)은 “정신대를 지원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신대 위안소
정신대 위안소는 일본군이 운영했다. 임시 건물은 이동식으로 조립돼, 좌우10칸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방은 두 사람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일제는 한 사람의 여성에게 콘돔을 두 개 이상 지급하지 않았다. 위안부여성들은 사용한 콘돔을 세척해 다시 써야만 했다.(1935)


창씨개명 독려
한국인의 성명에 관한 특명을 발표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라고 강요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했다. 사진은 서울 남대문역에서 창씨개명을 한 노인들에게 무료로 열차여행을 시켜주는 모습. 천막을 치고 창씨개명을 확인하는 일본관리들과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각종 불이익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편지발송, 소송, 학교입학, 식량배급 등 생활전반에 걸쳐 이름을 바꾸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불이익을 가했다.


일본식 한국문화 교육
일본어로 한국 부채춤을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한국문화의 원류가 일본이라며 교육을 통해 일종의 ‘의식화’를 꾀했다. 일제는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우리 고유의 가락을 SP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1937)


상복 입은 고종황제
흥선대원군 별세 때 상복을 입은 고종의 모습.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운현궁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79세로 별세했다. 대원군은 임종 때 장남 재면을 통해 주상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고종은 아버지와의 상면을 거절했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를 묵인했다고 여긴 고종은 대원군 빈소에 참배하지 않았다.(1898)


부산 순시에 나선 순종황제
순종황제는 이등박문을 대동하고 경성을 출발, 대구·부산·마산 등을 순시했다. 도로 주변에 서있는 시민들과 일장기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의 이명화 박사는 “순종의 서도 순시를 촬영한 사진은 공개된 바 있지만 남도 순시는 이 사진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1909. 1. 7)


제물포 일본인 거류지
일본인들은 이곳에 머물며 신발, 양복 등을 거래했다. 서양문물인 카페, 주점 등은 한국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방공 훈련
일제는 화생방·화재 등 긴급상황에 대비해 한 달에 2번 이상 방공 훈련을 실시했다.
(1940)


숨진 북간도 지도자
사망한 북간도 지도자의 모습. 만신창이가 된 얼굴이 보인다. 일제는 주민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뚜껑을 열어둔 채 시신을 방치했다.(1943)


관동 한국인 학살
1923년 9월 일본 관동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 10만명 이상이 숨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군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유포·조작해 공식통계로만 6661명의 한국인 교민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몽둥이와 죽창으로 한국인을 학살하고 있는 모습


총기지급
체코제 총기를 지급받고 있는 모습. 사진을 제공한 정성길씨는 이 사진에 대해 “자경단의 모습을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소의 이명화 박사는 “독립운동가 체포에 열을 올렸던 자경단 모습은 일부밖에 공개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현 상태에서는 이들을 자경단이라고 단정할만한 명백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출전하는 학도병
일본은 전쟁 장기화로 물자와 군인들이 부족해지자 학병제를 실시했다. 이 사진은 ‘10월 27일 입단 장도중’이라고 학도병 이름이 기록된 기념사진. 장도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글이 담긴 일장기를 들고 있는 모습에는 아직 학생티가 남아 있다.(1944)


출처 | 조선닷컴

[사진특종] 일제, 조선의 꽃을 짓밟다 1부/2부/ '생체실험'등 일제만행
을 편집하였음
인용 : 진보누리
Posted by 상운(祥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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