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망명시절의 이승만


우남 이승만(1875~1965)은 오늘의 한민족과 한반도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제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민족노선에 힘입어 영화와 부귀를 누린 사람도 있었으나 그의 분단노선으로 이 민족은 백범(白凡)이 우려한 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오늘날까지 분단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핵전쟁의 위협까지 받게 되어 남북 6천만 민족의 생존이 중대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간 국시(國是)인 민주주의는 수난 속에 신음하며 고난의 길을 걷고 있고 평화로운 통일 조국의 건설은 한낱 꿈처럼 민족의 비원(悲願)이 되고 만 것이 오늘 우리의 민족적 현실이다.

이승만에 대한 시비(是非)는 오늘날도 구구하다. 아직도 그의 정치노선은 현실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노선을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벌서 한 세대가 지났고 미군정하의 기밀문서도 공개되는 시기가 되었으므로 그의 노선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도 무관할 것이다.

이승만은 청년 시절부터 벼슬을 하고자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그때마다 낙방을 하고 그나마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과거제가 없어져 벼슬길이 사라지자 하는 수 없이 당시에 한창 밀어닥치던 개화바람을 타고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영학(英學)을 배우게 되었다. 고집이 세고 완강한 그는 독립협회운동 때 벌써 상당한 비중으로 개혁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 그는 한때 옥고를 겪었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태평양을 건너갔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독선과 고집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11년부터 8․15를 맞는 1945년까지 35년간의 긴 세월을 주로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물론 그가 긴 망명기간 동안 일부 인사의 경우처럼 도중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항일의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수도 있으나 35년간의 망명생활에서 그가 보여준 몇가지 특징은 이미 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앞으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운동 당시 이승만의 동지로서 그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후일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바 있는 박용만은 하와이 시절의 이승만에 대해, 이승만이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일삼아 자기의 조그마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력을 소비하는 문제의 인물임을 경고한 바 있다. 이승만은 자기가 한인 운동단체의 '장'(長)이 안되면 못 참는 인물이었으며 또 누구의 충고나 여론 같은 것에 상관없이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지나치게 독선적 인물로 알려졌으며 또한 그때부터 이미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로서 두드러졌다.

이승만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한국인 사회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불화․반목․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적대관계에 있는 한인을 용공분자(容共分者)로 몰아붙이는 사람으로 그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당시 미국무성의 일부에서 신임을 얻고 있던 한길수와 제휴할 것을 종용받자 이승만은 한길수와 합작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여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으로 하여금 루즈벨트에게 "한국인은 너무 분열도가 심해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보고를 하게 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임정을 연합국의 한나라로 인정받도록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무성에 교섭케 했으나 미국무성이 이승만을 전혀 상대조차 해주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준비가 연합국 사이에서 시작되자 이곳에 많은 한국인 지도자들이 독립문제를 협의코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는 벌써 장차 독립 한국정부를 공산주의자와 연립하여 세울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정부 요직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독립도 하기 전에 벌써 자리다툼을 하는 듯한 인상을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는 외국지도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참 정치적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8․15 직후 서울은 좌익의 장악 속에 있었고 미군 당국은 이들 좌익과 대항하기 위해서 반공으로 이름난 이승만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간 철저히 무시하고 상대조차 않던 이승만을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갑자기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대접하게 되어 이승만은 거의 힘 안 들이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민중 앞에 군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극동정책의 필요에 따라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환국하게 된 것이다. 36년간 식민통치하에 신음하는 국내 민중과 사실상 연락이나 유대가 없었고 따라서 일반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영웅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행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유리한 여건 속에서 이승만의 환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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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풍물

온고지신 2004. 12. 12.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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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photo.hankooki.com]


한국일보 특종사진 50년 - 격동의 현장


사진은 역사의 순간을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증언한다. 사진 한 장은 100줄의 기사보다, 100마디의 웅변보다 정확하다. 한국일보에 몸을 담은 사진기자들이 포착한 명장면들을 다시 본다. 국내외 사진보도전서 수상한 작품들이다. 사진기자들은 이 한 컷을 필름에 남기기 위해 최루탄이 자욱한 거리에서, 첩첩산중에서, 역사적인 현장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낮과 밤을 지샜다



기적의 소녀 1972.12.2, 제 6회 한국기자상, 1972년 세계보도사진전 은상, 박태홍 기자
서울 광화문의 시민회관 대화재 당시 4층 회전창틀에 다리가 낀채 매달려 있는 조수아양을 소방관이 구출하고 있다. 이 사진은 계엄 하에서 보도되지 못하다가 2개월 후에야 햇빛을 보았다. 박 기자와 소방관은 이후 이 소녀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조 양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아기 반달가슴곰1978.10.12, 16회 보도사진전 동상, 한융 기자
바위 틈에서 나뭇가지로 장난질을 치던 반달곰이 셔터 소리를 들었다. 순간적을 긴장하면서 30m 전방의 위장한 카메라쪽을 바라봤다. 살이 통통하게 쪄 귀여운 반달가슴곰의 생태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컬러 필름에 담긴 순간이다. 지리산 해발 900m의 무명 능선에서 찍었다.



의령 총기 난동 이기룡기자 -19회 보도사진전 금상, 1982년 4월 28일
의령 우순경의 총기난동으로 12명의 희생자를 낸 문두출 씨의 노제(路祭)에 어머니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문씨의 손자가 제주(祭主)가 되어 잔을 올리고 있다.




화염병에 불붙은 전경 고명진기자 - 1987년 23회 보도사진전 금상 , 1986년 4월 30일 중앙대
민민투결성식을 마친 중앙대 학생들이 후문으로 진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다.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경찰의 몸에 맞아 불이 붙어 뒹굴고 있다.



이동수군의 분신 1986. 5.20. 제 18회 한국기자상, 권주훈 기자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거행된 5월제 개막식 도중, 농대 원예과 이동수군이 학생회관 4층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채 "미제는 물러가라""경찰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투신하고 있다. 분신자살은 이후 대학가에 열병처럼 퍼졌다. 이 사진은 계엄령 하에서 보도되지 못하다가 외신으로 먼저 보도돼 세상에 알려졌다.



아! 나의 조국 1987. 6.10 AP 선정 20세기 100대 사진 선정 고명진기자
6·26 평화대행진이 벌어진 부한 문현로터리에서 웃옷을 벗은 한 시민이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다탄두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에게 달려가고 있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이 사진은 1999년 AP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됐다. 사진의 주인공은 찾아지지 않았다.



학우의 분노 고명진 기자 - 1987년 세계보도사진전 3위, 1987년 6월 15일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입원중이 15일 하오 3시 연세대에서 최루탄 추방 궐기 대회가 열려 민주광장에 4천여명의 학생.시민들이 모인가운데 진행되었다. 집회가 끝난 후 많은 학생들은 교문밖진출을 위해 미리 대치돼 있던 진압경찰과 밀고 밀리는 과정을 번복하였다. 교문주변의 담벽철책을 뜯어내어 방석망을 쳐놓은 전경들에게 교련복을 입은 학생 1명이 쇠막대기를 휘두루며 학우를 살려내라고 울부짖고 있다.



시민에게 뺨맞는 전경환 권주훈 기자 -25회 보도사진전 금상, 1988년 3월 30일
검찰이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를 해외 재산도피 및 공금횡령등의 죄목으로 소환하자 국내외 보도진 150여명이 청사 마당에서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 한 시민이 전경환씨의 뺨을 때리고 있다. 당시 34세의 젊은 회사원인 김인철씨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경환씨의 소환소식을 듣고 분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며 검찰조사에서 밝혔다.


[출처 : http://photo.hankooki.com]


위안부 할머니의 첫 증언 1992. 1.13. 제 29회 보도사진전 특별상, 신상순 기자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벌어진 "정신대 피해보상 요구 시위"에서 군대위안부 출신 김학순 할머니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사진은 역사의 뒷전에 숨겨져 있던 군대위안부 문제를 우리 사회에 알린 첫 보도사진으로 평가받았다. 고 김학순 할머니는 첫 증언자였다.



석등도 쓰러지고 이종철기자 - 39회 보도사진전 가작, 1994년 4월 11일
11일 하오 "개혁의회"승려 7백여명이 총무원 건물로 다시 진입하려다 저지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여 대웅전 옆 석등이 넘어졌다.



뒤늦은 귀대신고 왕태석기자 -31회 보도사진전 특별상, 1994년 10월 25일
국립묘지 전사잔 명단에 올라와 있던 조창호 소위가 포로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25일 통합병원에서 문병온 후배인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43년만의 귀대신고를 하고 있다.



김영삼 前 대통령 페인트 달걀 봉변 1996. 6. 3, 제 31회 한국기자상, 고영권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과 악수를 하던 중 붉은 페인트가 들어 있는 달걀 세례를 얼굴에 맞고 있다. 순간적인 포착이어서 김 전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은 아직 사태를 느끼지 못한 상태다.



이 아픔 누가 아랴 최종욱기자 - 28회 보도사진전 동상, 1997년 8월 9일
대한항공 801편 추락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나미츠힐에 처참하게 부서진 기체를 내려다보며 오열하고 있다.



캄보디아 훈할머니 김민규기자 - 1998년 8월 4일
캄보디아에 버려져 조국을 잊고 살았던 종군위안부 출신 훈할머니가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이남이" 라고 써진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훈할머니는 본지의 보도로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조국을 되찾게 되었다.



낙천 분풀이 폭력 2000.2.18, 제 32회 한국기자상, 제 32회 한국기자상, 손용석 기자
공천에 탈락한 한나라당 김호일(왼쪽.마산 합포)의원이 18일 오후 당무회의 직후 서둘러 집무실로 향하는 하순봉총장(오른족)을 ?아가 주먹과 발길길로 난타하고 있다. 김의원이 청년당원의 제지를 뚫고 하총장을 후려치고 왼손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뒤(사진 가운데) 오른발로 사타구니를 걷어타고 있다.(사진 아래)



린다 김 독점 인터뷰 김희원기자 2000년 5월 8일
린다 김이 8일 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 응접실에서 본보 기자를 만나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의 관계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린다 김은 비교적 건강하고 분명한 태도로 질문에 응했다. 최초로 그와의 면담 인터뷰했었다.



불꺼진 회담 박서강기자 2001.11.8
제 6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위해 8일 오후 금강산 호텔에 도착한 홍순영(왼쪽)남측 수석대표와 북측 김령성 단장이 북한의 어려운 전력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정전이 되자 촛불을 켜놓고 환담하고 있다. 제6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위해 금강산호텔에 도착한 홍순영(왼쪽) 남측수석대표와 김령성 북측 수석대표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촛불을 켜놓고 환담하고 있다.



다대포항의 이별 2002.10.15, 제 39회 보도사진전 금상, 최흥수 기자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돌아가는 북한 여성응원단이 다대포항에서 만경봉호에 오르며 눈물을 머금은 채 손을 흔들고 있다. 이들을 뒤따라 온 노인이 철조망에 올라가 한반도기를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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