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뉴스데스크의 뉴스매거진에서도 2007년 3월 광주대단지 사건을 다루었다.
가난에 울고, 시당국의 속임에 두 번 운 빈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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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인용하면
……중앙로 일대는 광주대단지 사건의 중심이 됐던 첫 주민들이 이주된 곳이다. 여러 문서에서 주민들이 강제철거 돼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서울시 당국에 의해 청소차량에 실려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표현이 옳다. 1969년 5월 2일 밤중에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려온 이들은 답십리를 거쳐 상계동까지 갔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주대단지로 떠밀려오게 된 것이다.
한 천막에 8가구나 따닥따닥 모여 살았고, 30가구에 하나 꼴로 공동변소가 있었다하니 전염병이 퍼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주된 주민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처음에는 포장마차로 연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민들이 너나나나 할 것 없이 포장마차를 하니 매상은 제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건설일용노동직 등 일품을 팔려고 해도 서울로 갈 버스비 35원이 없어 실업상태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삶은 비참했지만 알아주는 이 만무했고 도리어 제도권 언론에 의해 난동으로 보도됐을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난동으로 믿었다.……
시당국은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구속된 22명의 평범한 주민을 반공법으로 묶어 간첩으로 몰아가려 했다. 반공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누구든지 간첩이 되고, 간첩의 사주를 받은 범죄자로 낙인 찍혔던 시대였다.
구속된 주민 22명은 광주경찰서에서 볼펜 끼기 등 온갖 고통스런 고문을 당했다. 하동근 소장은 “당시 구속됐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간첩이 사주해서 저지른 일이라고 하면 살려준다며 협박했었다”며 “이는 간첩으로 몰아가 도시계획의 무모함 등 시당국의 책임을 가리려는 수작 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경찰은 구속한 주민 22명에 대해 원래 파괴적이고 불만이 많아 이런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 정신이상자로 규정해 버린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수사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단지 살기 위해 소리 높였던 주민들에게 이 나라가 해 준 것은 배고픔 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그들을 정신이상자로 낙인 시켜버리는 잔혹함이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30여 년 전의 묻혀버린 과거가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오늘의 자화상이다. 당시의 무모한 도시계획은 오늘날 성남의 구시가지 재개발 계획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당시 주민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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